제189화
시원한 냉장고에서 바로 꺼낸 캔맥주가 시원하다.
손끝을 자극하는 냉기. 일을 하고 마시는 맥주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감흥을 준다.
성윤은 맥주를 목구멍 너머로 계속해서 넘겼다. 탁 쏘는 탄산이 목구멍을 자극하며 내려갔다.
“크으!”
성윤의 앞에서 호쾌하게 맥주를 들이마시던 팀이 탄성을 냈다. 단번에 500ml 맥주 캔 반이 비었다.
“역시 달에서 먹는 맥주는 뭔가 맛이 다르다니까.”
지구에서 먹는 맥주보다 맛있다는 그런 말이 아니다. 분위기라고 해야 할까. 미각 외의 감성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두 분은 지구에서 잘 지내셨습니까?”
드디어 지구에서의 대기 임무를 끝내고 암스트롱에 올라 온 로스 남매에게 성윤이 물었다.
“못 지내진 않았습니다만, 그래도 잘 지내지도 않았습니다. 대기 임무가 워낙에 지루해서 말이죠. 먹고 자고 놀고 먹고 자고 놀고.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정말로 질리더군요. 몬스터가 한 번 나온 적이 있는데, 그 못생긴 얼굴이 반갑기까지 했습니다.”
팀의 말에 에밀리가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그레이스 씨는 어땠습니까?”
“저도 비슷했어요. 그저 저는 런던 복구를 도와주기도 했던 터라 두 분보다는 더 바쁘게 보낸 정도일까요.”
오래만의 파티 재회를 위해 성윤네 회사 건물에 와 있던 그레이스가 대답했다.
로스 남매와 그레이스 모두 지구에서는 비슷한 시간을 보낸 모양이었다.
‘하긴, 나도 그랬으니까.’
그나마 성윤이야 신혜와 같이 보내는 시간으로 활용해 지루함을 많이 죽였지만 셋은 그런 것도 없던 모양이다.
“그러는 성윤 씨는 꽤 대단한 업적을 쌓으셨다죠?”
그레이스의 업적이란 말에 로스 남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업적…이라고까지 할 건 아닙니다. 러셀 경께 들으셨습니까?”
“네.”
러셀도 성윤이 귀환한 지 얼마 안 되어 암스트롱으로 돌아온 듯했다.
“업적? 성윤 씨가 또 뭐 하셨습니까?”
이제는 놀랍지도 않은 걸까. 팀과 에밀리가 덤덤하게 맥주를 기울이며 그레이스에게 물었다.
“이런 건 본인이 직접 가르쳐주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그게 좋을 것 같군요.”
제3자의 시선으로 과장되게 표현되어 또 ‘영웅이네, 대단하네’라는 식이 될까 성윤은 최대한 담담하게 자신이 겪은 일을 말했다.
하지만 과장하지 않아도 성윤이 행한 일은 충분히 대단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담담히 듣던 로스 남매의 입이 벌어지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 슈퍼 골렘을 그렇게 쉽게 잡으셨다고요? 그것도 우리가 경험한 놈보다 더 강한 놈들을?”
슈퍼 골렘의 펀치 한 방에 말 그대로 구겨졌던 팀인지라 그 말이 더더욱 어처구니없이 들릴 수밖에 없었다.
“대단해요! 역시 성윤 씨네요!”
에밀리의 눈에 씌워진 콩깍지가 더더욱 심해진 것 같았다.
그러나 성윤이 대단한 건 대단한 것이고 걱정이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심장은 정말로 괜찮으신 건가요?”
“괜찮습니다. 그 감각이 깨어나지 않는 이상 별 이상은 없습니다. 이젠 감각이 깨어났을 때 느끼는 통증도 줄었고요.”
“그래도 앞으로 꾸준히 병원에 다니는 게 어떨까요?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요.”
에밀리의 기세가 여간 강한 게 아니라 성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 자기주장을 잘 하지 않는 만큼 에밀리가 한번 주장을 밀어붙이기 시작하면 거절하는 게 쉽지 않았다.
이미 러셀에게 얘기를 들은 터라 로스 남매와는 다르게 별 표정 변화가 없던 그레이스가 입을 열었다.
“러셀 경의 말에 따르자면 암스트롱은 대대적인 홍보를 할 셈인 것 같더군요. 경쟁 도시를 견제하기 위해서요. 추락한 암스트롱의 위상을 이렇게 대대적으로 띄울 수 있는 이벤트도 없으니까요.”
아무래도 정치적 판단을 위해서는 그게 필연적일 것이다. 그 때문에 자신의 명성이 더 퍼지게 될 게 뻔한지라 성윤은 한숨 쉬었다.
하지만 그레이스와는 다르게 정치에는 별 관심이 없는 팀과 에밀리는 다른 것에 더 관심을 보였다.
“그럼 이 건물은 이제 성윤 씨 것입니까?”
팀이 건물을 둘러봤다.
아직까지는 달의 유일한 도시의, 돈으로는 절대 살 수 없는 암스트롱의 부동산이다. 그 가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높다.
“네. 일단 이 건물은 바로 받았고 나머지 대가는 정산 후 준다고 하더군요.”
“하하하! 이거 성윤 씨에게 잘 보여야겠습니다!”
팀이 기분 좋게 웃었다. 그러다 그는 시선을 성윤의 옆에 뒀다.
“그보다 당신은 왜 그렇게 얼어 있습니까?”
“네, 네?”
성윤의 옆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들린다. 어리바리한 이등병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는 석환이었다. 시작의 미궁에서 돌아와 회사 건물에서 쉬고 있던 그를 팀이 억지로 데려온 것이다.
동료가 됐으니 친분을 쌓자고 한 일이었지만 석환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제 막 알에서 깨어난 병아리나 다를 바 없는 그에게 대미궁 공략조인 성윤 파티는 하늘 위의 존재나 마찬가지다.
특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연결자인 성윤만 해도 몸이 긴장으로 뻣뻣해지는 판국에 영국민에게 사랑받는 그레이스라는 유명인까지 더해져 그는 술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긴장 상태였다.
게다가 한창 암스트롱의 물가에 기겁을 하며 적응을 하고 있는 그에게 눈앞의 음식의 가격은 생각조차 하기 싫을 정도로 고가였다. 그게 그의 패닉 상태를 가속하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상태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도 석환에게 관심을 주기 시작했다.
“지금 시작의 미궁 몇 층을 탐험하고 있나요?”
“2, 2층입니다.”
석환은 목소리가 뒤집어지지 않게 필사적으로 노력하며 그레이스의 질문에 대답했다.
“2층이라…. 지금 시작의 미궁은 우리 때 시작의 미궁이랑은 다른가?”
“비슷하지 않을까? 아무래도 시작의 미궁은 인공적으로 만드는 느낌이 강하니까.”
로스 남매가 얘기를 나눴다. 후배 정도야 저번 회사에서도 받은 적이 있지만 이미 예전에 그들이 걸어 왔던 길을 이 후배가 똑같이 걸어가고 있는 것은 언제나 묘한 감흥을 불러 일으켰다.
로스 남매는 석환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다. 석환은 더듬거리면서도 대답을 했다.
“석환 씨도 대미궁을 노립니까?”
팀이 물었다.
“네. 아무래도 미궁 중 최고의 연결자들만이 들어가는 곳이니까요.”
석환은 지민과 반드시 대미궁에 들어가겠다는 계약을 맺지는 않았다.
지민은 예전에 결심한 대로 억지로 연결자를 대미궁에 들여보내는 것은 성윤을 끝으로 그만뒀다. 대미궁 공략은 석환의 순수한 자기 의지였다.
팀은 껄껄 웃었다.
“그렇죠! 연결자라면 대미궁을 목표로 해야죠! 뭔가 잘 아시는 분이 들어 왔네!”
전 회사에서 대미궁을 노린다는 이유로 비웃음을 당한 팀에게 석환은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후배였다.
팀과 같은 감정을 안고 있는 에밀리와 연결자로서 세계를 위해 대미궁 공략을 행해야 한다고 내심 생각하는 그레이스도 석환을 상당히 좋게 봤다.
그렇게 석환은 성공적으로 성윤 외의 회사 사람들과 그레이스에게 호감 섞인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재회의 술자리는 그렇게 깊어갔다.
***
성윤 파티는 다시 대미궁 앞에 서 있었다.
아무리 암스트롱의 의뢰를 수행하고 지구에서 사람들을 지키는 일을 하더라도 그들의 제1목적은 어디까지나 대미궁의 공략이다.
“성윤 씨, 이거요.”
그레이스가 성윤에게 무언가를 넘겼다.
“정말로 빌려주셨군요.”
“아무래도 전력 확충에 필요한 거니까 그런 것 아니겠어요. 러셀 경이 성윤 씨를 굉장히 좋게 보고 있기도 하고요.”
그레이스가 내민 건 디바이스였다. 형태는 평범한 팔찌 형태. 하지만 홈의 색과 숫자가 심상치 않았다.
“루비 랭크의 만능 홈이 15개 있는 팔찌에요.”
“예상보다 더 좋은 디바이스로군요.”
“확실히 쉽게 주실 만한 건 아닌 것 같아요. 빌려주시는 거라고 확실히 못을 박으셨으니까요. 하지만 러셀 경 입장에서는 그렇게까지 귀한 것도 아닐 거예요.”
“그렇겠죠.”
찰리 러셀이 귀한 것이라고 인정할 정도면 본인이 직접 사용하고 있을 텐데, 그렇다면 빌려줄 수도 없을 것이다.
“그중 아홉 개의 홈이 성윤 씨가 사용할 수 있는 홈이에요.”
성윤은 자신의 브로치에 부착하고 있던 여덟 개의 주요 젬들을 모두 지금 받은 팔찌로 옮겼다. 그리고 레인보우 6등급 인디고 랭크의 근력 배가를 더 끼워 넣었다.
그렇게 해서 남은 홈은 여섯 개.
하지만 방금 그레이스가 말한 것처럼 그 여섯 개는 성윤이 사용하는 홈이 아니었다.
“나머지 홈에는 저희 셋의 젬을 두 개씩 끼워주시면 돼요. 그럼 부탁드릴게요.”
그레이스가 자신의 젬에서 두 개의 젬을 빼 성윤에게 건넸다. 팀과 에밀리도 자신들의 젬 두 개씩을 성윤에게 맡겼다.
전부 다 레인보우 랭크에서도 하급의 젬이다. 성윤은 그것들을 디바이스에 끼웠다.
그건 성윤이 생각해낸 고육직책이었다.
이번 슈퍼골렘 사건 때 성윤의 젬은 말 그대로 엄청난 성장을 이뤘다. 골드 랭크의 젬 하나를 의지해 전전긍긍하던 옛날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다.
당연히 동료들과의 차이는 커졌다. 그래서 성윤은 동료들의 젬도 진화시킬 수 있게 러셀에게 혹시 수준 높은 디바이스를 빌릴 수 있는지 물어봤다.
그 대답이 바로 성윤의 손에 있는 디바이스였다.
아무래도 그레이스가 성윤에게 신세지고 있는 데다 그레이스의 전력도 상승할 이야기라 러셀은 자신이 예비로 갖고 있던 고위 디바이스를 빌려준 것이다.
조건은 방금 들은 대로 동료의 젬을 두 개씩 장착해 진화시킬 것.
나머지 아홉 개의 홈은 성윤의 마음대로였다.
성윤에게 젬을 두 개씩이나 건넸지만 워낙 수준이 낮은 젬들이었기에 세 명의 전력이 많이 떨어지진 않았다. 마찬가지로 성윤의 전력이 오른 정도도 미미했다.
“그럼 들어갈까요?”
모든 할 일은 끝마쳤다.
일행은 다시 대미궁으로 발을 내딛었다.
***
성윤 일행은 초원과 고원을 돌파하고 설원에 도달했다. 하얀 눈발이 그들을 맞았다.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길을 걷길 얼마. 그들을 향해 뛰어오는 몬스터들이 보였다.
프로스트 울프였다.
새파란 냉기를 휘감은 그것들이 날카로운 송곳니를 들이민다.
일행은 몬스터를 맞을 준비를 했다. 성윤도 검을 내밀었다.
파지지지직!
검면에 흐르는 번개가 새파랗게 튀었다. 예전에는 보지 못한 현상이다.
새파랗게 튀는 번개가 퍽 위험하게 보였다.
캬아악!
녀석들의 공격이 시작됐다. 일행은 하던 대로 포메이션을 짰다. 자신에게 달려드는 프로스트 울프에게 성윤은 검을 휘둘렀다.
콰아앙!
귀청을 찢는 소리가 들린다. 검에 베인 프로스트 울프의 털이 빳빳하게 서며 탄내가 진동했다.
프로스트 울프가 땅에 처박히며 눈이 확 튀었다. 프로스트 울프는 바로 절명했다.
파지직!
마치 ‘어떠냐!’라고 자랑하듯 검의 표면에서 다시 한번 번개가 흘렀다.
‘랭크가 상승하고 굉장해졌어.’
쥬얼 젬들은 랭크와 랭크 사이의 격차가 굉장히 크다고 하지만, 그 격차는 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더더욱 커지는 모양이다.
과거의 검은 지금과 비교하면 다소곳하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예전 전격이 그냥 안으로 들어가 내부를 헤집어 놓는다면, 지금의 전격은 좀 더 과격했다.
살, 근육, 신경, 내장 등 온갖 것들을 닥치는 대로 태우고 부수며 짓이기는 느낌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