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0화
성윤은 침대에 누워 무료하게 리모컨의 버튼을 꾹꾹 눌렀다.
예상보다 좋은 대기 장소의 시설에 의외로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품은 것도 잠시, 아무리 몸이 편해도 인간은 역시 자유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성윤은 절실히 느꼈다.
‘얼마나 남았지?’
째깍거리는 소리를 내며 1초마다 열심히 운동을 하고 있는 벽시계를 쳐다본다.
주간 대기조의 대기 시간은 오전 아홉시부터 오후 아홉시. 지금 시간은 오후 여덟시 반이었다.
‘30분 남았군.’
억지로 시계에서 눈을 떼고 성윤은 다시 리모컨 버튼을 꾹꾹 누른다는 무의미한 일을 시작했다.
간신히 30분이란 시간을 성공적으로 죽인 후, 성윤은 작별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차를 몰고 나갔다.
‘오늘은 아직 회사에 있다고 했나?’
요새 회사 일이 한창 바쁜 터라 지민이 신혜를 데리고 회사에서 늦게까지 있는 때가 많았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아직까지 지민과 신혜는 회사에 있다고 했다. 성윤은 회사를 목표로 차를 몰았다.
그가 회사에 도착한 건 아홉 시 반쯤이었다. 사무실 창을 통해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성윤은 사무실로 올라갔다.
“아, 오셨나요.”
이제 퇴근하려던 참이었는지 문을 잠그고 있는 지민과 그 곁에 있는 선아가 보였다. 신혜는 선아의 등에 업혀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신혜는 자고 있군요.”
“네.”
성윤은 신혜를 넘겨받았다. 흔들림에 신혜가 작은 신음을 흘리며 살짝 눈을 떴다.
성윤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졸린 표정으로 살짝 웃으며 자연스레 성윤에게 달라붙었다. 그리고 성윤의 품에서 다시 잠이 들었다.
‘얼마 전 같았으면 지구에서는 계속 신혜와 있을 수 있었는데….’
지구에 나타나기 시작한 몬스터들이 정말로 불쾌해지는 순간이었다.
회사 문을 잠그고 확인 차 몇 번 문을 열어 확인까지 한 지민이 몸을 돌렸다.
“차는 가져오셨나요?”
“네.”
“그럼 신혜를 먼저 데리고 가세요. 저는 선아 씨를 데려다줘야 해요.”
“저는 괜찮아요.”
선아가 사양했지만 지민은 고개를 저었다.
“회사 사정으로 야근까지 하게 했는데 집까지는 데려다줘야죠.”
거절하지 못하게 딱 잘라 말하고 지민이 먼저 앞서나갔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일행은 기다렸다. 층수 표시가 계속해서 바뀌며 엘리베이터가 올라왔다.
띵!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 안에 사람이 있었다. 이 층에 볼 일이 있는 건지 안에 있는 사람이 걸어 나오려 하기에 일행은 한 걸음 뒤로 물러 나 비켜줬다. 하지만 선아는 아니었다.
“아빠.”
그녀는 남자를 아빠라 부르며 오히려 한 걸음 다가섰다. 목소리에 여실하게 당황한 감정이 묻어났다.
“선아야. 이제 끝났니?”
사내는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며 반갑게 선아를 불렀다. 그러다 성윤과 지민을 눈치챘다.
그의 시선이 성윤에게 붙박였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에요, 아빠.”
“네가 늦기에 데리러 왔지.”
그가 지민을 쳐다봤다.
“정범의 사장인 한지민 씨죠? 정인후라고 합니다. 선아의 아버지 되는 사람이죠.”
“만나서 반가워요. 한지민이라고 해요. 선아에게는 정말로 신세를 지고 있어요.”
서로 고개를 숙인다. 인후의 시선이 이번에는 성윤에게 멎었다.
“오랜만…이라고 할까요? 절 기억하시려나요?”
“물론입니다.”
성윤은 조심히 신혜를 고쳐 안고 한쪽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입니다. 정인후 씨.”
영문을 모르는 지민과 선아는 눈만 깜박였다.
***
치이이익!
고기 익는 소리가 들린다. 빨간 숯불 사이에서 넘실대는 불꽃이 고기를 노릇노릇하게 익혀간다.
선아는 집게를 들어 고기가 타기 전에 뒤집어가며 구웠다. 그러면서도 눈동자를 굴려 옆을 힐끔힐끔 바라봤다.
그녀의 맞은편에는 성윤이 자리 잡고 있었고 바로 옆에는 그녀의 아버지인 인후가 앉아 있었다.
놀랍게도 둘은 아는 사이였던 모양이다. 인후가 오랜만에 술 한잔하자는 말에, 성윤은 별 망설임 없이 신혜를 지민에게 맡기고 따라왔다.
하지만 둘의 정확한 관계는 모르기에 그녀는 둘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짠!
투명한 소주잔이 맞부딪친다. 성윤과 인후는 한 입에 소주를 털어 넣었다.
“크!”
인상을 찌푸리고 인후가 얼른 고기를 입에 가져다 넣었다. 성윤도 앞에 있던 고기 한 점을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사업은 잘 되고 있습니까?”
놀랍게도 먼저 입을 연 것은 성윤이었다. 웬만하면 신혜와 대화를 할 때 빼고는 먼저 말을 거는 편이 적은 그였던 터라 선아는 제법 놀랐다.
“뭐, 그럭저럭 꾸려 나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과는 다르게 인후의 어조에는 뚜렷한 피로감이 가득했다.
“그다지 잘 되지는 못하는 모양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인후가 한숨 쉬며 내뱉었다.
“성윤 씨가 이 바닥에서 나간 이후에 대성 에너지가 이 시장을 무서울 정도로 잠식해왔습니다. 이미 대부분의 업체들은 고사했고, 저희 기업도 간당간당하죠.”
선아가 슬쩍슬쩍 인후를 쳐다봤다. 그녀도 아버지의 이런 말은 처음 듣는 것이라 상당히 놀란 눈초리였다.
성윤과 인후는 예전 같은 업종의 사업체를 거느리던 사이였다. 때문에 종종 얼굴을 마주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썩 친한 것도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경쟁관계였던 것이다. 하지만 성윤이 그 바닥을 떠난 지금은 예전과는 다른 관계가 됐다.
“그만한 대기업이 신기술까지 확보한 상태로는 당연한 일이죠.”
그렇게 맞장구를 친 후 성윤은 다시 한번 소주를 털어 넣었다.
그 신기술이 바로 성윤이 강탈당한 기술이다.
대성 에너지. 대성 그룹의 계열사 중 하나로 성윤에겐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존재인 재호가 사장으로 있는 회사다.
애초에 전 세계 에너지 산업의 주류 중 하나인 월석 가공 사업은 엄청난 자본으로 무장한 대기업들의 각축장이었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도 살아남은 중견 기업 몇이 있었는데 하나는 대기업에도 밀리지 않는 기술력을 가졌던 성윤의 회사와 기술은 조금 밀렸지만 나름 알고 있는 연결자의 인맥으로 얼마 정도의 월석을 그나마 저렴한 값에 매입할 수 있었던 인후의 회사 정도였다.
“저는 간신히 버틸 수 있을 것 같긴 합니다. 하지만 시장 확장은 무리죠. 이미 다른 대기업들도 대성 에너지의 약진에 힘입어 매출이 영 말이 아닙니다.”
의식적으로 피하고 있던 월석 가공 사업의 현황을 들은 성윤은 입맛이 썼다.
두 인간의 배신만 아니었다면 저 황홀한 약진은 자신의 것일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성윤은 그 생각을 털어 냈다. 연결자가 된 지금도 신혜와 즐겁게 지내는 생활은 가능했다.
“힘내시길 바랍니다.”
더 해줄 말도 없고 더 해줄 생각도 없다. 성윤에게 월석 가공 사업은 예전 일일 뿐이었다.
“감사합니다.”
둘은 다시 잔을 부딪쳤다.
술이 몇 순배 돌았다. 연결자의 신체를 가진 성윤은 아직 멀쩡했지만 인후는 적잖이 취한 것 같았다.
술기운을 빌려 인후는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런데 조금 실례일 것 같긴 하지만, 성윤 씨는 어떻게 되신 겁니까?”
“뭘 말입니까?”
“사업이요.”
성윤이 연결자가 되어 영웅이 됐다는 얘기를 듣고 예전의 성윤을 알던 사람들이 일제히 품었던 의문이었다.
“이 바닥에서 성윤 씨에 대한 소문은 두 부류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대성 에너지 사장과의 친분을 과시해서 이득을 얻으려 한 사기꾼과 오히려 대성 에너지 사장에게 뒤통수를 맞게 된 피해자라는 소문이요.”
“성윤 씨는 남에게 사기를 칠 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인후는 깜짝 놀랐다. 질문을 던진 상대인 성윤이 아닌 선아에게서 답이 돌아온 것이다. 그것도 명백하게 분노한 목소리로.
선아도 자신의 행동을 뒤늦게야 눈치 챘다. 고개를 푹 숙이고 묵묵히 고기만 굽기 시작했다.
‘이 녀석 설마….’
인후는 선아의 행동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때 성윤의 대답이 들려왔다.
“사기를 친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증거도 없습니다.”
후자의 소문이 맞지만, 증명할 방법은 없다는 소리다.
성윤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인후도 묻지 않았다. 그에게는 지금 성윤의 소문보다 중요한 일이 생겨버렸다.
셋은 얼마 더 술잔을 같이 하고 자리를 파했다. 대리를 불러 멀어지는 성윤의 차를 보던 인후가 옆에 있던 선아를 쳐다봤다.
“선아야. 아빠가 잠깐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됐어요. 빨리 집에나 가요.”
선아는 명백히 말을 돌렸다. 마침 인후가 부른 대리 운전사도 와서 그 얘기는 그렇게 끊겼다. 하지만 인후의 머리는 계속 돌아갔다.
‘애 딸린 유부남. 그것도 나이 차이가 꽤 많이 나는데도 빠진 건가.’
하지만 연결자가 된 성윤을 보면 나이는 별 장애가 안 될지도 모른다.
TV를 보고 연결자가 된 성윤이 젊어졌다는 걸 알았지만 실제로 보니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거기에 요새 성윤의 활약과 몬스터의 출현 때문에 반전된 연결자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아니, 너무 앞서갔나?’
고작해야 선아의 나이는 스물 하나다. 호감을 갖고 있는 건 명백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결혼까지 생각하는 건 무리가 있었다.
‘나도 별 수 없는 아버지란 거겠지.’
일단 선아의 일은 선아에게 맡겨 두자고 그는 결론을 내렸다.
***
성윤은 눈을 떴다. 부드러운 이불의 감촉과 함께 품 안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성윤은 이불을 치우고 일어났다. 성윤의 잠옷을 꼭 쥔 채 잠든 신혜가 뒤척였다.
‘7시군.’
어제부터 성윤의 대기 임무는 야간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비상 사이렌이 울리기 전까지 잠을 잘 수 있어서 지루하게 대기가 끝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주간보다는 훨씬 더 좋았다.
침대 크기도 넉넉하기에 성윤은 아예 신혜까지 이곳에 데리고 와 같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일어나 대충 채비를 한 성윤은 신혜를 깨웠다. 일어나기 싫다고 투정을 부리는 신혜를 어르고 달래 유치원을 보낼 준비를 했다.
씻기고 밥을 먹이고 양치를 시키고 깔끔하게 옷까지 입힌 후 건물을 나섰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깔끔한 세미 정장을 차려 입은 남성 한 명이 대답했다.
그는 국가에서 연결자를 위해 배치시켜 둔 운전사 중 한 명이었다. 운전사가 필요한 연결자를 지원하기 위해 배정된 그들은 종종 지금처럼 연결자의 자식들을 학교나 유치원에 바래다주는 역할도 했다.
성윤은 신혜를 차에 태웠다.
“우리 신혜, 잘 갔다와!”
“응! 갔다 올게!”
차창 너머로 신혜가 크게 외쳤다. 성윤은 차가 도로 저편으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그는 로비로 돌아 왔다. 아직 대기 시간이 끝날 때까지는 30분 정도가 남았다.
다시 시간을 죽이기 위해 TV리모컨이나 돌리려 방으로 향할 때 누군가가 로비로 들어 왔다.
“안녕하세요, 성윤 씨!”
최근 안면을 익힌 진수였다. 주간에서 야간으로 바뀐 성윤과는 반대로 그는 이번에 야간에서 주간으로 대기 시간이 바뀌었다.
“진수 씨군요. 빨리 오셨네요.”
“일을 시작하기 전 30분은 넉넉잡고 와야죠. 혹시 모를 일이 터졌을 때 우리가 늦으면 안 되니까요.”
훌륭한 마인드다. 동인도 그렇고 현우도 그렇고 파비온에는 마인드가 좋은 인간만 있다고 성윤은 감탄했다.
그런 회사에 어떻게 수빈 같은 인간이 있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성윤 씨는 아직 대기 시간이 남았죠? 괜찮으면 얘기라도….”
그 순간.
애애애애애앵!
사무실에 시끄러운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성윤과 수빈 둘의 얼굴이 단숨에 굳었다.
몬스터가 나타난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