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8화
눈앞에 드리워지는 여러 개의 마이크가 귀찮았다. 기자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여러 질문을 날렸지만 성윤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고된 미궁 공략을 끝내고 신혜를 만나 마음을 치유하려던 생각만 가득하던 성윤에게 그들은 귀찮은 방해물일 뿐이었다.
대충대충 대꾸하면서 인파를 헤쳐나간다. 다행히 기자들도 심하게 들이대지는 않았다.
그래도 어미 따라가는 병아리처럼 따라오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자, 자. 여기서부터는 따라오시면 안 됩니다.”
“지금까지 정도면 충분할 겁니다.”
성윤 앞에 차가 세워지고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기자들을 막아선다. 기자들도 무리하게 양복 입은 사람들을 넘어가려 하지 않았다.
세워진 차는 눈에 익숙했다. 성윤은 차에 올라 탔다.
탁!
“아빠!”
문이 닫히자마자 작은 무언가가 성윤의 품에 뛰어든다. 성윤의 얼굴이 풀어졌다.
“어이구, 내 딸!”
신혜였다. 성윤은 신혜를 꼭 껴안았다. 그리고 얼굴을 찬찬히 뜯어봤다.
“우리 딸, 더 예뻐졌네!”
성윤의 말에 신혜가 꺄르르 웃었다. 오랜만에 만난 성윤의 품에 얼굴을 대고 냄새를 스윽 맡았다.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신혜에겐 무척 안정감을 주는 냄새였다.
차가 출발했다. 하지만 성윤은 주변 상황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신혜와 대화를 나눴다.
몇 시간 후, 신혜는 보고 싶던 아빠 품에서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나로 우주 센터로 오기 위해서는 항상 일찍 일어나야 하니 피로가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차의 기분 좋은 흔들거림을 참지 못하는 것이다.
신혜가 잠들자 차 안은 조용해졌다. 그제야 성윤은 운전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잘 지내셨습니까?”
“물론이에요.”
지민이 룸미러로 성윤을 힐끗 보고 말했다.
“오히려 암스트롱에서 난리였다면서요? 지구에서도 굉장히 이슈가 됐어요. 여러 방송국에서 그 비싼 암스트롱의 물가를 무릅쓰고 기자를 보낼 정도로 말이에요.”
“고위 연결자분들이 아니었으면 거의 초토화될 뻔했습니다.”
적어도 성윤 자신은 슈퍼 골렘에 대적할 자신이 없었다. 최후의 일격을 날린 건 자신이었지만 그게 어떻게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지구에서도 사건이 일어났다고 하던데요.”
“네. 몬스터가 두 번 나타났죠. 하지만 이번엔 각국에서도 미리 대비를 하고 있었고, 나타난 몬스터도 베히모스 같은 무지막지한 몬스터는 아니었어요. 피해는 별로 없었어요.”
연결자를 상주시키는 전략이 잘 통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마력이 차있는 곳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어서 굉장히 어수선한 상태이긴 해요.”
“그건 우려스럽군요.”
몬스터가 나타날 수 있는 곳이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는 소식이 반가울 순 없었다.
“그나저나 아까 기자들을 막은 사람들은 사장님께서 고용한 사람들입니까?”
“그래요. 성윤 씨의 유명세는 그 정도는 준비해 둬야 할 정도니까요.”
유명세라는 말에 성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달갑지 않군요.”
“런던에서의 성윤 씨가 너무 임팩트 있어서 어쩔 수 없어요. 앞으로는 모자와 선글라스를 항상 착용하고 다니세요.”
“무슨 연예인도 아니고….”
성윤은 툴툴댔다.
하지만 그렇다고 현재의 상황이 타파되는 건 아니다. 성윤은 지민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둘은 달리는 차 안에서 오랜만의 얘기를 계속 나누었다.
***
T.V에 한창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커다란 우주선이 뜨고 내리는 우주 센터에 한 남성이 걸어 나온다. 일제히 카메라 셔터가 터졌다.
남성은 꽤 당황한 듯 주변을 둘러 봤다. 이어 묵묵히 걸음을 옮겨 인파를 헤치고 우주 센터를 나섰다.
성윤이 온 그날 바로 뉴스에 뜬 영상이었다. 그 영상을 재호는 일그러진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성윤의 성공에 가장 당황한 사람은 역시 그일 것이다. 저 정도의 명성을 얻은 성윤이 그 자신의 과거를 말한다면 재호는 무척 곤란해진다.
물론 증거는 이미 싹 없앤 터라 재호는 자신이 불리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은 대기업 경영자들의 삽질 때문에 상당한 반재벌 정서가 형성되어 있다.
그에 반해 성윤은 희생정신을 발휘하여 멋지게 런던을 구한 세계적인 영웅.
자국민이 세계에서 활약하는 걸 좋아하는 한국인들은 한국 출신의 불세출의 영웅에게 열광적으로 호의를 보내는 중이다.
지금 성윤과 재호가 싸운다면 대중이 누구를 더 믿을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설령 그가 재판에서 이긴다고 해도 기업 이미지는 상당히 깎일 터. 그러면 그룹을 이어 받으려는 그의 야망이 좌초될 가능성조차 있었다.
‘저 새끼가 어떻게 저렇게까지 된 거야.’
쓰레기고 패배자였다. 자신을 친구라고 착각하며 주제모르고 나대다가 자신에게 조금의 도움을 준 뒤 땅의 비료가 되었어야 할, 그런 세상에 어디에나 있는 송충이.
하지만 얼마 보지 않은 그는 세계에서 최고로 돈을 잘 버는 사람 중 한 명이 되어 있었고 아무나 할 수 없는 위업을 달성하며 한국 최고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재호로서는 복장이 터지는 일이었다.
그는 전화를 들었다. 허둥지둥 누군가에게 연락을 했다.
연락 상대는 미연, 그의 공범자였다. 이미 서로에게 질려 연락을 끊고 산 지 꽤 됐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 뭐야?
전화 너머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 왔다.
“우성윤에 대해서 할 말이 있다.”
핸드폰 너머에서 잠시 말이 없어졌다. 하지만 곧 의자 끄는 소리와 상대에게 양해를 구하는 소리가 났다.
- 할 말 있으면 빨리 말해. 나 지금 네일케어 받는 중이란 말야.
‘네일케어? 이 상황에 지금 손톱 관리나 받고 있었단 말이야?’
설마 상황파악을 아예 못 하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공범자를 잘못 고른 건 아닐까 뒤늦은 후회가 밀려들었다.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가나 보지? 만약 네 전남편이 언론을 통해 우리가 한 일을 떠들면 우리는 그게 사실로 밝혀지건 말건 간에 엄청난 비난을 받는다고!”
다급하게 말하는 그. 하지만 미연의 반응은 여전히 심드렁했다.
- 그건 당신 사정이고 난 별로 상관없는걸. 인간들이 욕을 해봤자 내 재산에 뭔가 영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너무 시끄러우면 잠시 다른 나라에 가 있으면 되지.
이것도 강철 멘탈이라고 해야 할까. 그녀의 정신 상태가 살짝 부럽기까지 했다.
“사실이 밝혀지면 네 재산이고 나발이고 일단 너부터가 감방에 갈 거다!”
- 아무리 그가 유명하고 당신의 소문이 안 좋다고 해도 증거가 없으면 꽝이잖아. 그리고 그 증거는 당신과 내가 철저하게 말소시켰고.
미연의 변함없는 태도에 재호는 이를 갈았다.
- 뭐, 그래도 당신과 나 사이의 정이 있는데 계속 무심하게 대할 생각은 없어. 말해봐. 원하는 게 있는 거지?
“우성윤이 허튼 소리를 언론에 떠벌이지 않았으면 해.”
- 당신에게는 그게 제일이겠지. 물론 대가는 있는 거 알지?
“얼마면 돼?”
- 이래서 당신이 좋아.
핸드폰 너머로 짤랑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 선금 10억. 그리고 성공하면 30억.
“좋아.”
깊게 생각하지 않고 재호는 승낙했다. 40억은 분명 큰돈이지만 성윤의 입을 다물게 할 수만 있다면 오히려 싼 편이었다.
- 흐응. 굉장히 흔쾌히 승낙하네? 이 정도는 싼 편이구나. 그럼 두 배씩 올릴게. 선금 20억에 성공하면 60억.
“너 이…!”
당장 찾아가 저 혓바닥을 뽑아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당장 아쉬운 건 그였다.
“…좋아.”
으르렁거리며 승낙했다. 하지만 또 다시 장난을 친다면 어떤 식으로든 보복을 하겠다고 속으로 별렀다.
그러나 미연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 돈을 더 이상 올리지는 않았다.
- 당신한테만 돈이 들어올 게 아니니까 그 정도로 만족할게. 계약 체결이야. 돈은 언제나의 계좌로 넣어 줘.
“그러지.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을 쓸 거냐?”
두 눈 뜨고 코 베인 사람처럼 허탈한 감정을 추스르며 재호는 물었다. 핸드폰 너머에서 기분 좋아 보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 재호 씨. 엄마란 존재는 정말로 대단한 것 같아. 그렇지?
“미친….”
결국 재호는 한소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역시 미연은 미연이었다.
- 돈 없는 착한 인간이 되느니, 돈 많은 미친년이 나아.
저 정도면 신념이라고 해도 될 듯했다.
“알겠다. 20억은 오늘 안에 넣어주지.”
- 잘 부탁해!
그 말을 끝으로 미연은 전화를 끊었다.
일단 성윤에 대한 대비를 끝낸 재호는 다른 안건에 눈을 돌렸다. 그의 골치를 썩게 만드는 건 성윤에 대한 것뿐만이 아니었다.
‘일단 인터뷰 요청은 전부 거절하고.’
유명해진 성윤의 과거를 캐기 시작한 언론이 슬슬 냄새를 맡고 있었다.
재호가 성윤의 일에 대해 안절부절 못하게 된 것은 언론이 이곳저곳을 파고드는 이유도 있었다. 어떻게든 이 일을 잠재워야 했다.
인터뷰를 거절할 변명거리는 있었다. 다행이라며 다행인 일이었지만 그는 전혀 다행이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변명거리가 또 다른 골칫거리였던 것이다.
‘월석을 어디서 끌어와야 하지?’
재호의 회사는 월석 가공 회사. 그리고 성윤에게 빼앗은 기술도 그에 관련된 기술이다.
하지만 가공기술이 뛰어나다고 해도 가공할 월석이 없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한데, 이번에 암스트롱에서 일어난 사건 때문에 그 월석 공급 자체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일식적인 현상이면 좋으련만.’
제발 암스트롱이 정상화되길 그는 기원했다.
‘그리고 이번에 새로 생길 도시에도 뭔가 수를 써야 해.’
만약 두 번째 월면 도시에 투자를 할 수 있다면 월석 수급이 훨씬 더 쉬워질 것이다.
여러 모로 복잡해진 상황에 그는 머리를 감싸 안으며 대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
성윤이 지구에 돌아와서 가장 공을 들이는 건 역시 신혜와 노는 것이었다. 오늘도 성윤은 신혜와 함께 커다란 동물원에 와 있었다.
“아빠! 사자다!”
멋들어진 갈기를 휘날리며 걷는 숫사자를 보며 신혜가 외쳤다.
“나, 사자 알아! 밀림의 왕이야!”
“오오, 신혜는 그런 것도 알아?”
역시나 성윤은 호들갑스럽게 신혜의 말에 반응해줬다.
신혜가 자랑스럽게 가슴을 쭉 폈다. 하지만 성윤의 질문에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럼 밀림은 뭐야?”
“밀림? 응…, 어….”
어디서 사자가 밀림의 왕이란 건 들었어도 아직 밀림이라는 단어는 모르는 모양이다.
모른다고 하면 되지만 지금껏 잘 아는 것처럼 행동한 아이의 자존심이 모른다는 말을 하지 못하게 하는 모양이다.
과연 신혜가 무슨 말을 할까. 성윤은 재미 반 기대 반으로 신혜의 대답을 기다렸다.
신혜가 손을 탁 치더니 사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쟤들이 왕 하는 곳!”
빵 터졌다. 성윤은 배를 잡고 낄낄거리며 웃었다. 하지만 신혜는 자신의 대답이 자못 만족스러운 듯 다시 허리에 손을 올리고 가슴을 폈다.
“그래, 사자들이 왕 하는 곳이 밀림이구나.”
“응!”
“아빠가 신혜한테 좋은 거 배웠네. 사자는 굉장히 강하겠네? 왕이니까.”
“응! 사자, 엄청 세! 왕이니까!”
“그런데 신혜야. 아빠가 굉장한 거 알려줄까?”
“응?”
성윤은 두 팔을 쭉 피며 말했다.
“아빠가 사자보다 세.”
신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짜?”
“그럼! 아빠는 사자 열 마리도 이길 수 있어!”
“우와아아아아!”
신혜가 초롱초롱 눈을 빛낸다. 이게 무슨 유치한 짓이냐고 할지는 모르지만 성윤은 굉장히 만족했다.
사랑하는 딸의 존경스러운 눈빛은 언제나 아빠들의 자신감을 샘솟게 하는 법이다.
한동안 신혜에게 알통을 만들어 보이는 등 포즈를 잡던 성윤이 신혜의 손을 잡았다.
“이제 슬슬 밥 먹으러 갈까?”
“스테이크!”
그새 선호하는 음식이 돈가스에서 스테이크로 변한 모양이다.
‘여기 스테이크를 파려나?’
스테이크가 있길 바라며 성윤은 신혜를 데리고 동물원 안에 있는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아쉽게도 스테이크는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