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5화
‘공포라.’
현우가 간 뒤에 성윤은 그의 말을 곱씹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때의 생각을 다시 해봐도 그는 뚜렷하게 공포심 같은 걸 느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가슴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하지만 그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또다시 손님이 찾아온 것이다.
“누구시죠?”
손님을 맞으러 간 에밀리가 상대에게 물었다. 그는 젊었을 적 운동을 많이 했었는지 나이에 맞지 않게 다부진 체격을 하고 있는 중년의 사람이었다.
“여기가 정범의 숙소가 맞습니까?”
“네, 맞아요.”
“그럼 당신이 에밀리 로스 씨겠군요.”
에밀리의 눈에 경계심이 서렸다. 사내가 명함을 꺼내들었다.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명함을 확인한 에밀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찾아 온 이는 러시아의 총영사였다.
“들어가도 괜찮습니까?”
“자, 잠시만요.”
에밀리는 허둥지둥 안으로 들어갔다. 아마도 동료들과 상의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영사는 느긋하게 기다렸다.
잠시 후, 다시 문이 열렸다. 나타난 건 덩치 큰 팀이었다.
“들어오시죠.”
“실례하겠습니다.”
영사는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가볍게 집 내부를 훑었다. 썩 좋은 집은 아니었다.
중견급의 회사가 소속 연결자들을 입히고 재우기 위해 빌릴 수준의 그저 그런 건물. 그 런던의 나이트가 머무를 거라고 생각되는 집은 아니었다.
성윤과 일행은 영사와 인사를 나눴다. 영사의 시선이 성윤에게 잠시 머물다 떨어졌다.
오늘만 두 번째의 손님을 위해 차가 준비됐다. 영사와 테이블에 마주 않은 성윤은 그의 의도를 꿰뚫어 보려는 듯 쳐다봤다.
“무슨 용건이십니까?”
외교적 수사도 긴장을 풀기 위한 위트도 없는 단도직입적인 말. 하지만 영사도 순순히 본론으로 들어갔다.
“우 씨를 스카우트 하고 싶어 왔습니다.”
성윤의 옆에 앉아 있던 그레이스가 숨을 들이켰다.
성윤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귀국에 귀화하기를 요청하시는 겁니까?”
“그렇게 해주신다면 바랄 게 없죠. 하지만 이미 영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의 귀화 요청도 뿌리치신 당신이 그러리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럼 어떤 뜻입니까?”
“이번에 저희가 새로운 월면도시를 만드는 건 알고 계시는지요.”
성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활동 도시를 암스트롱이 아닌, 이번에 만들어지는 월면도시로 바꿔주셨으면 합니다.”
“홍보효과를 노리고 있으시군요.”
그레이스가 말했다.
암스트롱에서 터진 이번 사건 때문에 중국, 러시아의 새 월면도시는 순조로운 출발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신생도시이니만큼 조금 더 암스트롱과의 비교 우위를 가져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성윤이란 카드는 매력적이었다. 그도 그럴게 성윤은 지금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연결자인 것이다.
그가 새로운 월면도시로 활동 도시를 옮긴다면 도시의 홍보 효과는 한층 강해질 것이다.
숨길 생각도 없었는지 영사는 긍정했다.
“그렇습니다. 물론 대가는 당연히 있죠.”
영사는 과장스럽게 두리번거렸다. 마치 이 집을 평가하려는 듯이.
“명성답지 않게 조촐한 집에 머무시는군요. 물론 이걸 빌리는 데만도 막대한 비용을 암스트롱에 납부하고 있겠죠.”
그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일단 저희는 성윤 씨께 도시 안의 집을 선물해 드리겠습니다. 당신 집입니다. 도시에 집세를 낼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이 남에게 임대를 해 줘도 되겠죠. 당연히 여기보다는 몇 십 배나 더 좋은 곳입니다.”
놀라운 제안이었다. 암스트롱은 애초에 부동산 매매를 하지 않는다. 오로지 임대뿐. 하지만 그의 제안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성윤 씨의 투자도 받겠습니다. 솔직히 지금 상당한 자본이 저희가 지을 도시를 기웃거리고 있습니다. 돈 냄새를 맡은 거죠. 국가, 기업, 개인을 가리지 않고 투자 문의가 끊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투자를 함부로 받을 수는 없죠. 투자를 받으면 권리를 줘야 하고, 그 말은 저희의 권리가 줄어든다는 거니까요. 하지만 성윤 씨의 투자는 받겠습니다.”
즉, 도시의 지분을 살 권리를 준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은 곧, 지금 암스트롱을 다스리는 상층부가 있는 것처럼, 성윤도 도시의 상층부로 들어간다는 말이었다.
‘대단한 영향력을 끼칠 정도로 팔진 않겠지만.’
하지만 도시의 여러 이권을 가질 정도는 될 것이다. 달에 단 두 개밖에 없는 도시의 이권을 가진다. 굉장히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솔직히 여러 연결자분들은 암스트롱이라는 도시에 착취를 당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능력과 희생을 암스트롱은 제대로 알아주지 않았죠. 이유는 간단합니다. 경쟁자가 없어서죠. 연결자 전체의 지위 향상을 위해서라도 새 도시의 성공은 필요합니다.”
‘이론 무장까지 마쳤군.’
연결자치고 암스트롱의 대우에 불만을 가지지 않은 자는 드물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번에 새로 지어지는 도시는 새로운 기회의 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한국의 투자도 넉넉히 받겠습니다. 한국도 미궁 공략은 후발 주자로, 암스트롱의 이권이 별로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애국심까지 건드리나.’
꽤나 준비를 많이 한 것 같았다.
하지만 성윤은 고개를 저었다.
“제안은 고맙지만 거절하겠습니다.”
“이유를 알아도 될까요.”
과연 경험 많은 외교관답게 그는 침착하게 이유를 물어 왔다.
“저는 암스트롱의 대미궁을 공략해야 합니다.”
“대미궁은 저희가 지을 도시 근처에도 발견됐습니다.”
“대미궁이 아닙니다. 암스트롱의 대미궁입니다.”
단호한 성윤의 대답에 영사는 별 표정 변화는 없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꽤 낭패라는 생각을 했다.
성윤의 말과 표정에서 웬만해서는 흔들리지 않을 결의를 느낀 것이다. 돈도, 명예도, 애국심도 아닌, 정말로 암스트롱의 대미궁에서만 있는 무언가를 원하는 것이다.
성윤의 스카우트에 꽤 공을 들이고 있는 상층부에 이번 실패를 설명할 생각을 하니 한숨이 먼저 나왔다.
“정말로 아쉽군요. 만약 생각이 바뀌신다면 연락 바랍니다.”
영사는 성윤에게 명함을 건넸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봤다.
“우 씨에게만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스카우트는 여러분에게도 유효합니다. 혹시 오실 분 계십니까?”
가장 먼저 고개를 저은 건 팀이었다.
“저희는 성윤 씨의 파티입니다.”
거의 성윤의 추종자가 됐다시피 한 그가 성윤의 곁을 떠날 리 없었다.
그건 에밀리도 마찬가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여 자신도 팀과 의사가 같다는 표현을 했다.
남은 건 한 사람. 영사의 시선이 자신에게 돌아오자 그레이스가 미소 지었다.
“제가 동의하리라 생각하세요?”
“전혀요.”
영사는 몸을 일으켰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아직 우리의 제안은 열려 있으니 관심 있다면 언제든 말씀 주시지요. 단, 시간이 늦으면 늦을수록 여러분이 받아갈 이익은 줄어든다는 걸 명심하시고요.”
마지막은 조금 협박조로 말하고, 그는 돌아갔다.
***
두 명의 손님이라는 이벤트를 끝낸 후, 성윤 일행은 시작의 미궁으로 향했다.
새로 수준 높은 젬을 얻었으니 대미궁에 들어가기 전 능력을 확인하고 익숙해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들은 시작의 미궁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미궁 앞에 커다란 철망이 쳐져 있고 인원 몇이 그 곳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그 앞으로 미궁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사람들이 항의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긴. 그런 일이 있었는데 봉쇄를 안 할리가 있나.”
성윤이 중얼거렸다.
혹시 어떤 멍청한 작자가 미궁을 건드린다면 다시 암스트롱이 쑥대밭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제 안전을 슬로건으로 내건 경쟁 도시가 생겨나려 하는 걸 생각하면, 오히려 늦은 감이 있었다.
미궁 입구를 지키는 사람들에게서 암스트롱 바깥에 새로 시작의 미궁을 만들고 있으니 기다리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어떡하죠? 대미궁으로 바로 갈까요? 아니면 개인 미궁으로 갈까요?”
그레이스가 성윤의 의견을 물었다.
“바로 대미궁으로 가는 게 좋겠습니다. 초원에서 조금씩 실험을 하죠.”
“대미궁도 폐쇄된 건 아니겠죠?”
“그건 아닐 겁니다.”
성윤은 에밀리의 걱정을 부정했다.
“다른 대체 미궁을 구할 수 있는 시작의 미궁과는 달리 대미궁은 대체할 존재가 없으니까요. 오히려 미궁의 비밀을 밝힐 수 있을 확률이 높은 곳이니 더더욱 대미궁에 매달릴 확률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어서 갑시다!”
팀이 콧김을 뿜었다. 새로운 장난감을 얻은 아이처럼, 어서 새롭게 얻은 젬의 위력을 시험해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러죠.”
일행은 대미궁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
푸르른 초원과 파란 하늘이 인상적인 대미궁 1층. 하지만 그 아름다운 풍경 속에 숨어 있는 몬스터들은 치명적인 위협이다.
그러나 지금, 그 몬스터들이 철저하게 유린당하고 있었다.
카악!
브루탈문웜이 징그러운 입을 벌리고 몸을 날렸다. 녀석의 공격 목표는 팀이었다.
“하아앗!”
그에 맞서 팀이 자신의 방패를 거칠게 휘둘렀다.
콰아앙!
크에에엑!
브루탈문웜의 몸이 그대로 날아갔다. 지금까진 볼 수 없었던 거력이었다.
“그레이스 씨!”
성윤이 그레이스를 불렀다. 그레이스가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서 매드독 다섯 마리가 열심히 뛰어 오는 것이 보였다.
그레이스는 지팡이를 들었다.
콰아앙!
매드독 사이에서 거대한 폭발이 터졌다. 화끈한 열기가 초원을 태우며 퍼진다. 매드독은 새까맣게 탄 파편이 되어 여기저기 흩어졌다.
그레이스가 자주 사용하는 화염마법이었지만 그 발동 속도와 위력 모두 지금까지보다 월등했다.
덥석!
그 사이 브루탈문웜이 팀의 정강이를 물었다. 하지만 새롭게 마련된 그의 갑옷을 브루탈문웜의 이빨은 뚫지 못했다.
콰득!
오히려 팀이 브루탈문웜의 머리를 강하게 짓밟았다. 녀석이 비명을 지르며 떨어져 나갔다. 바로 팀의 도끼가 추격해 녀석의 얼굴을 짓이겼다.
“하! 이거 정말 좋은데요?”
팀이 방금 브루탈문웜에게 물린 정강이 부위를 다른 발로 툭툭 쳤다.
대미궁에 서식하는 몬스터의 이빨에 정통으로 물리고도 끄떡도 않는 갑옷의 강도는, 평소 파티의 방패 역할을 하는 팀을 무척 흡족하게 했다.
하지만 불만을 가지는 사람도 있었다.
“죽고 싶어 환장했어!”
에밀리가 지팡이로 팀을 때렸다. 하지만 단단한 팀의 갑옷에 에밀리가 휘두른 지팡이가 통할 리 없었다.
팀은 씨익 웃고는 대답했다.
“갑옷의 강도는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어야지. 그리고 사지 하나 떨어져 나가봤자 네가 다시 붙여주면 되는 거 아냐.”
이번에 에밀리가 새로 얻은 젬 중 하나는 강력한 치유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말 그대로 사지 중 하나가 뜯겨 나가더라도 재생이 가능할 정도였다.
“함부로 쓰게 하지 말라고! 이건 횟수도 얼마 없고 쿨타임도 느리단 말이야!”
강력한 회복계인 만큼 당연히 조건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남매가 투닥거리는 폼을 보던 성윤은 그레이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레이스 씨는 어떠십니까?”
“마법 위력이 월등히 오르고 발동 속도도 빨라졌어요. 정말로 좋네요.”
장 파라도는 근접 전투를 위주로 하고 보조로 치유 마법을 사용하는 연결자였다.
일행은 그에게 얻은 젬을 근접 전투에 관한 젬은 팀에게, 치유 마법에 관한 젬은 에밀리에게, 그리고 치유 마법의 위력을 증폭시키던 마법 보조의 젬은 그레이스에게 각각 나눴다.
누구나 썩 만족할 수 있던 배분이었다.
대충 젬의 특성과 위력도 알았으니 더 이상 초원에는 볼 일이 없다.
“자, 그럼 여러분.”
성윤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다.
“이번에 고원을 돌파해봅시다.”
일행이 자신감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