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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미궁-173화 (173/354)

제173화

“다행히 멀쩡한 것 같군.”

열린 문 틈새로 성윤을 확인한 러셀이 말했다.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들어 온 그는 주변을 둘러봤다.

“앞으로의 얘기를 하고 있었나보군. 나도 끼어도 되나?”

“물론입니다.”

안 그래도 물어볼 것도 있었다. 성윤은 흔쾌히 러셀에게 자리를 내줬다.

“러셀 경도 이 호텔에 머무르고 계십니까?”

“아니. 나는 암스트롱 빌딩에 머물고 있네.”

암스트롱 중앙에 위치한 최고의 빌딩. 성윤도 현우가 초대했을 때 가본 적이 전부인 호텔이다. 과연 최고 수준의 연결자다웠다.

“거기는 아직 호텔이 돌아갑니까?”

“역시 비싼 값을 하는 곳이라서 말야. 불안한 분위기가 넘실대긴 하지만 아직 서비스가 사라지진 않았다네.”

성윤이 건네준 차를 마시며 러셀은 홍차가 아니라고 작게 투덜거렸다.

“이번 사건에 대해서 뭔가 좀 아시는 게 있습니까?”

“뭐, 방금 전까지 암스트롱 윗대가리들 회의에 껴 있다가 왔으니 대충은.”

최고위의 연결자인 만큼 암스트롱의 수뇌부들도 그의 경험과 의견을 필요로 했던 모양이었다.

“일단 왜 이 사달이 났는지는 알았네.”

성윤 일행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범인은 장 파라도라는 프랑스 놈과 그 일당들이야.”

“장 파라도?”

성윤이 중얼거렸다.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었다.

“대미궁에 출입하는 고위 연결자 중 하나지. 나나 성현우, 대니 브루스 급의 최상급 연결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꾸준히 대미궁에 출입하는 만큼 실력은 있어. 그 파티도 그렇고. 문제는 이놈이 명예욕의 화신 같은 놈이라서 말이야.”

러셀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실력은 인정해도 인격은 인정할 수 없다는 감정이 그대로 느껴졌다.

“내가 가진 기사 칭호조차도 부러워하며 빈정거리던 놈이지. 승냥이 같은 놈이라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이딴 사고를 칠 줄 알았으면 진즉에 사지 중 몇 개는 부러뜨려 놓을 것을.”

그는 혀를 찼다.

“자네들도 얼굴은 알고 있을 걸세. 골렘에 쫓기던 그 녀석을 자네들이 구해줬잖은가.”

“그 사람이었습니까?”

성윤은 자신들이 구했던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래. 나머지 파티원은 전멸을 했지만, 그놈만은 용케 살아남았지. 그래서 전말을 들을 수 있었어.”

러셀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만큼 그가 들은 얘기는 어처구니없었다.

“자네들이 국제 연구소의 연구원들과 함께 시작의 미궁에서 새로운 광석을 발견했다며?”

“네.”

“그놈이 그걸 알고 자네들과 동행한 연구원 중 한 명을 돈으로 꼬신 모양이야.”

“잠깐만요. 혹시 그 꼬셨다는 사람이 연구소의 소장님이나 여성분입니까?”

혹시 자신이 아는 사람이 연루 됐을까 성윤은 얼른 물었다.

“아니. 일단 남자인데다가 소장은 아니야.”

성윤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그와 친분이 있는 둘은 이번 사건과 관련이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워낙에 광범위한 피해를 입은 이번 사건이었기에 둘이 무사하단 보장도 없었다.

‘한번 찾아가보긴 해야겠군.’

성윤은 러셀에게 말을 계속해 달라 눈짓했다.

“그놈들이 연구원을 꼬신 이유가, 자네들이 발견한 그 광석이 있는 곳을 가르쳐달라는 거였어.”

시작의 미궁의 광석과 갑자가 튀어나온 골렘.

그 두 가지의 요소를 알게 된 순간, 성윤에게 한 가지 설득력 높은 가설이 떠올랐다.

지독하게도 재미없는 가설이.

성윤은 제발 부정해달라는 투로 물었다.

“설마 광석을 가져가려고 한 건 아니겠죠?”

“왜 아니겠나.”

성윤은 허탈해했다. 자기가 그렇게 미궁의 벽을 훼손하면 안 된다고 일렀는데 기어코 누군가 사고를 친 것이다.

“제 조언은 못 들었답니까? 아니, 무엇보다 그 광석은 아직 정체조차 밝혀지지 않았는데 왜 굳이 캐려고 든단 말입니까?”

“말했잖나. 그놈은 명예욕에 불타는 놈이라고. 최초로 희귀한 광석을 채취한 자라는 칭호를 얻고 싶었던 모양이야. 게다가 그놈은 자네 조언도 알고 있었네. 하지만 고작해야 이제 대미궁에 발을 들여 놓은 수준 낮은 연결자의 엄살이라고 생각한 모양일세. 자기라면 충분히 골렘을 대적할 수 있다고 봤다더군.”

들으면 들을수록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뭐, 실력은 확실한 놈이니 첫 번 째로 나타난 골렘은 어떻게 처리를 했어. 하지만 골렘 하나를 처리하자 바로 두 번째 골렘이 소환된 모양이야.”

그리고 그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단체로.”

“얼마나 소환됐습니까?”

“일반 골렘이 여덟 기. 그리고….”

러셀은 잠시 뜸을 들이고는 말했다.

“슈퍼 골렘이 두 기.”

그 괴물 같은 놈이 하나만 있는 것으로도 악몽인데 두 기나 나오다니.

“살아 도망친 게 용하군요.”

“그렇지.”

“그러면 나머지 골렘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다른 연결자들이 일반 골렘을 두 기 더 쓰러트렸고, 나머지는 미궁으로 돌아갔네.”

“돌아갔습니까?”

“그래. 깔끔하게. 의외로 놈들은 도망치는 사람들에겐 흥미가 없었다 하더군. 전투에 휘말린 사람들은 있어도 놈들이 적대하지 않은 사람에게 먼저 공격을 가한 적은 없어. 녀석들이 공격한 건 자신들을 퇴치하려 공격한 연결자와 장 파라도, 그리고 그 일행뿐이야.”

성윤은 골렘의 행동원리를 조금은 이해한 것 같았다.

“그러니까 미궁을 훼손한 놈들과 자신들을 적대한 자들. 녀석들의 공격 대상이 이 두 부류뿐이었다는 말씀이시죠?”

“그렇지.”

“저희는 괜히 저 장 파라도라는 사람을 공격하려던 골렘에게 휘말린 거고요.”

“아마도 그럴걸?”

“…그냥 골렘에게 던져줄 걸 그랬군요.”

러셀이 끌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그 덕에 왜 사건이 발생했는지는 알았잖나. 그리고 일단 쓰레기라도 생명을 구했고.”

러셀이 성윤을 위로했다.

“그리고 미안하네만 골렘들은 바로 연구소로 넘겼네. 원래는 자네들 허락을 맡아야 했는데 말이야.”

일반 골렘 하나는 성윤의 파티가 잡았고 슈퍼 골렘의 끝장을 낸 건 성윤이다. 당연히 그들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그래도 자네들 소유권이 없어진 건 아냐. 나중에 연구소로 가보게. 그쪽에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런데 말이야.”

지금껏 성윤과 평탄하게 얘기를 주고받던 러셀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자네가 슈퍼 골렘을 죽였을 때의 움직임은 뭔가?”

그때 성윤의 움직임은 분명히 원래 성윤의 움직임을 초월해 있었다. 마침 성윤도 러셀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터라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며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이런 현상을 러셀 경은 알고 계십니까?”

“흐음.”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그가 고민에 잠겼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나도 들어본 적이 없군. 자네 검이 분명 쥬얼 7등급인 골드 랭크의 검이었지?”

“그렇습니다.”

러셀 자신이 슈퍼 골렘을 상대해 본 바, 녀석은 골드 랭크의 무기로 그렇게 무 잘리듯 썰리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성윤의 뭔가가 공격을 강화했다는 뜻이다.

“병원에서는 뭐라고 했지?”

이건 성윤에게 묻는 게 아니었다. 당시 성윤의 곁을 지키고 있었던 그레이스가 대답했다.

“별 다른 이상은 없다고 했어요. 하지만 자세한 건 나중에 정밀검사를 해봐야 알 수 있대요.”

달의 병원에는 이번 사건 때문에 부상당한 사람들이 엄청 몰려 있었다.

겉보기에 아무런 이상도 없는 성윤에게 인력과 기기를 내줄 여유는 없었다. 당연히 성윤의 검사 순서는 뒤로 밀려 있었다.

“음, 그렇군. 나도 한번 알아보도록 하지.”

소중한 그레이스가 소속된 파티의 리더고 영국과 런던을 구해준 은인이다.

절대 성윤의 수준에서 보여줄 수 없는 움직임 때문에 한순간 그가 뭘 숨기고 있지 않나 의심을 했지만, 그는 성윤을 믿기로 했다.

“지금 심장은 괜찮나?”

“이제는 괜찮습니다. 그 고통이 마치 환각이 아니었을까 하는 느낌까지 들 정도입니다.”

성윤은 심장에 손을 가져다 댔다. 여전히 심장은 뛰지 않았다. 당시의 두근거림이 환상처럼 느껴질 정도로. 아니, 환상일 가능성이 높다고 성윤은 생각하고 있었다.

“좋아. 그럼 난 일어나보지.”

러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부턴 어쩔 텐가? 바로 지구에 내려갈 수는 없을 텐데. 아니면 내가 손을 써줄까?”

그라면 우주선 티켓을 구해다줄 수도 있을 것이다. 부, 명예, 권력을 대부분 손에 넣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성윤은 고개를 저었다.

“일단 달에서 조금은 쉴 생각입니다. 그리고 정밀검사를 한 후 이상이 없다면 다시 대미궁에 도전해야죠.”

“자네는 변하지 않는군.”

하지만 그 변함없는 점이 좋다. 러셀은 시원하게 웃어주고는 방을 나왔다.

***

성윤이 할버드를 횡으로 세게 휘둘렀다.

서걱!

그에게 달려들던 슬래쉬캣이 휘두르려던 발톱과 함께 두 동강이 났다. 튀는 피를 살짝 피한 성윤은 할버드를 몇 번 휘둘러봤다.

“괜찮은가요?”

뒤에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던 에밀리가 물었다.

“이상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예전보다 힘이 더 넘치는 느낌도 듭니다.”

며칠을 기다려 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고 이상이 없다는 판정을 받은 성윤과 그 일행은 다시 미궁에 들어섰다.

웬만한 고위 연결자도 혼란에 빠져 미궁에 들어가길 주저하는 작금의 형편을 생각해보면, 그들의 대미궁에 대한 도전정신은 정말 혀를 내두를 정도로 대단했다.

하지만 일단 성윤이 정말 이상이 없는지 확인을 해야 했기에 그들은 대미궁에 들어가기 앞서 시작의 미궁에 와 성윤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물론 미궁을 훼손시키지 않기 위해 평소보다 더욱 더 노력하고 있는 건 당연했다.

‘베는 맛이 좋아졌어.’

폭주시킨 젬의 색이 돌아왔을 때, 성윤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진화의 젬과 같은 디바이스에 끼워 놓은 모든 젬이 진화를 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본래 쥬얼 6등급 플래티넘 랭크였던 갑옷은 5등급 비취 랭크로 올랐고, 7등급 골드 랭크였던 강화, 방패, 검은 플래티넘 랭크로 올랐다.

레인보우 1등급 레드 랭크였던 할버드는 8등급 실버 랭크로 올라 쥬얼 랭크가 되었고, 레인보우 2등급 오렌지 랭크였던 망토와 근력 배가는 레드 랭크로 올라섰다.

뜻밖의 수확. 그것도 대박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역시 슈퍼 골렘을 잡은 덕이겠지.’

한 놈을 잡았을 뿐인데 젬이 이렇게 급성장을 하다니. 녀석이 얼마나 괴물 같은 녀석인지를 단적으로 증명하는 증거였다.

“이제는 다시 대미궁으로 옮겨도 되겠습니다.”

벌써 삼일이나 여기서 확인을 했다. 더 이상 머무는 건 시간낭비였다.

다른 일행도 동의해 그들은 시작의 미궁을 나왔다.

“…정말, 고작 일주일 새에 이렇게 변할 줄은 몰랐습니다만.”

미궁의 입구에서 보인 경치에 팀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성윤은 주변을 둘러 봤다. 언제나 시작의 미궁에 득시글거리던 사람들이 확연히 줄어 있었다.

그들은 대미궁으로 가기 위해 도심 쪽으로 접어들었다.

을씨년스러웠다. 대부분의 가게가 문이 닫혀 있었고 돌아다니는 사람도 없었다.

복구되지 않은 건물들과 굳건하게 내려 앉아 있는 격벽이 도시에 황폐함을 더하고 있었다.

얼마 전 있었던 골렘 습격 사건의 여파였다.

“이대로 망하는 건 아니겠죠?”

에밀리가 걱정 어린 어조로 말했다.

그녀의 걱정은 지당했다. 지금 암스트롱의 꼴을 본다면 절대 정상적인 도시로 보이지 않았으니까.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도시는 이럴 수밖에 없다. 그것도 외벽이 사라지면 바로 우주가 펼쳐지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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