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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미궁-172화 (172/354)

제172화

“많이 아파 보이는군. 괜찮나?”

러셀이 물었다. 그제야 성윤은 다시 통증을 느꼈다. 회복하는 도중 무리하게 움직인 터라 상처가 다시 도진 것 같았다.

성윤은 다시 한번 치유 마법을 시전했다.

“성윤 씨!”

그레이스가 성윤의 곁으로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

성윤은 러셀을 쳐다봤다.

“러셀 경이 맞으시죠?”

상대는 얼굴을 가리는 투구를 쓰고 있었다. 단, 그 갑옷의 형태는 예전에 본 러셀의 그것이었다. 목소리도 같았다.

“알면서 뭘 그러나. 그런데 자네 정말 괜찮나?”

“치유 마법이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자네는 젬 발동이 굉장히 빨랐었지.”

세계 최고 수준의 연결자인 러셀이었지만 성윤의 젬 발동 속도만은 미치도록 부러웠다. 하지만 계속 부러워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러셀이 순간 뒤쪽으로 검을 휘둘렀다.

콰아앙!

러셀의 검이 날카로운 칼날과 맞부딪치며 굉음을 울렸다.

“흐앗!”

러셀이 팔에 힘을 줬다. 근육이 불거지며 상대방을 밀어냈다.

슈퍼 골렘이 멀찍이 뒤로 뛰었다.

러셀은 슈퍼 골렘을 관찰했다. 슈퍼 골렘의 여섯 개의 팔 중 하나가 팔뚝부터 날카로운 칼날을 형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칼날이 마치 녹아내린 수은처럼 일그러지더니 곧 다른 팔들과 똑같은 팔로 변형됐다.

“재미있는 재주를 가진 놈이군. 뭐하는 녀석이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놈인데.”

어떤 연결자에게도 꿀리지 않을 경험을 갖고 있는 러셀조차도 처음 보는 놈이었다.

“생긴 건 다르지만 이루고 있는 물질은 골렘과 비슷하게 보입니다. 골렘보다 덩치가 커서 일시적으로 슈퍼 골렘이라고 불렀는데, 전투력도 골렘보다 엄청나게 높은 모양입니다.”

“골렘이라. 들은 적은 있지. 자네 발치에 쓰러져 있는 놈 말이지?”

러셀은 성윤 옆에 무너져 있는 골렘을 흘끗 바라봤다.

“네.”

“골렘을 발견한 것도 자네와 자네 파티라고 하지 않았나?”

“그렇습니다.”

“자네 정말로 사건사고를 몰고 다니는구먼.”

투구에 가려 그의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목소리만으로도 러셀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훤했다.

하지만 그 이상 수다를 떨 시간은 없었다.

콰아앙!

다시 한번 슈퍼 골렘의 공격을 튕겨내는 러셀이었다.

“물러나. 자네들 수준으로는 감당 안 되는 놈이니까.”

거절할 이유가 없다. 성윤과 그레이스는 냉큼 거리를 벌렸다. 골렘에게 쫓겨 온 부상자를 부축하고 계속 뒤로 향했다.

“성윤 씨, 괜찮나요!”

팀을 치료한 에밀리가 합류하며 물었다. 그녀는 성윤의 꺾였던 팔을 잡고 더듬더듬 매만졌다.

다행히 뼈가 산산조각 난 것 같은 모습은 더 이상 없었다. 다리도 마찬가지였다.

“치료는 웬만큼 됐습니다. 에밀리 씨는 이 사람을 치료해주세요.”

고통 때문인지 피로 때문인지 의식을 놔버린 부상자에게 에밀리가 치료 마법을 걸었다. 무의식중에도 고통 때문에 계속 내뱉던 신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일행은 잠깐 안도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쾅! 쾅! 쾅! 콰콰콰쾅!

눈앞의 수준 높은 싸움에 입을 벌렸다.

만화에 보면 보통 눈에 보이지도 않는 싸움이 표현되기도 한다. 물론 그건 독자에게 전투의 강렬함을 심어주려는 만화적 장치다.

하지만 러셀과 슈퍼 골렘의 싸움은 그런 표현을 써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무지막지했다.

콰르르르르!

둘의 싸움에 휘말린 건물이 또 하나 무너졌다.

“조금 더 떨어지죠.”

성윤의 제안에 사람들은 두 말할 것 없이 찬성했다.

전투 능력이 가장 떨어지는 에밀리가 기절한 사람을 들쳐 매고 성윤과 팀이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며 천천히 뒷걸음질쳤다.

쿠웅!

슈퍼 골렘이 땅에 거칠게 착지하는 모습이 보인다. 러셀도 슈퍼 골렘과 조금 떨어진 곳에 착지했다.

“다행히 러셀 경이 우세한 것 같군요.”

별로 달라진 것 없어 보이는 러셀과는 다르게 슈퍼 골렘은 몸 여기저기가 너덜거리고 있었다.

“당연하죠. 영국의 최고 연결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분이니까요.”

그레이스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슈퍼 골렘의 여섯 개의 팔은 여러 가지 무기로 변형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단 하나도 러셀의 몸에 닿지 않았다.

하지만 슈퍼 골렘도 그대로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끼릭! 끼릭! 끼릭!

녀석의 몸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 가슴 한가운데가 벌어지며 푸른 보석이 나타났다.

타앗!

낌새가 이상한 걸 느낀 러셀이 바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슈퍼 골렘이 한 발 빨랐다. 푸른 보석이 반짝이며 거대한 섬광이 일었다.

콰아아아!

빛의 노도가 전면을 휩쓴다. 러셀은 방패를 들었다.

콰아앙!

푸른빛이 그대로 방패를 덮쳤다. 하지만 러셀의 단단한 방패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러셀도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빛을 정면으로 맞받으며 한 발 한 발 나아가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압도적인 전력 차. 성윤과 일행도 곧 러셀이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슈퍼 골렘의 눈길이 힐끔 이쪽으로 향하는 걸 본 성윤은 자기도 모르게 검을 들었다.

뚝!

그건 순간이었다. 슈퍼 골렘의 가슴에서 쏟아진 빛이 사라졌다. 슈퍼 골렘이 몸을 돌려 성윤 일행이 있는 쪽으로 돌진했다.

“어딜!”

물론 가만히 두고 볼 러셀이 아니었다. 그대로 슈퍼 골렘의 등을 베어버리기 위해 쫓을 찰나.

콰앙!

그의 옆에서 건물을 뚫고 골렘 한 기가 튀어 나왔다. 물론 슈퍼 골렘마저 어쩌지 못한 러셀을 일반 골렘이, 그것도 약해진 골렘이 어찌 할 순 없다.

하지만 조금의 시간을 버는 건 가능했다.

“이 자식!”

러셀의 검이 골렘을 양단했다. 하지만 그 사이 슈퍼 골렘은 성윤 일행의 근처까지 접근해 있었다.

녀석의 가공할 속도에 일행은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방해꾼을 치우려는 것처럼 녀석이 성윤에게 손을 뻗는다.

평소라면 반응하지 못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성윤은 골렘의 움직임이 전부 보였다.

‘또 이 느낌!’

아까 골렘의 공격을 피한 것도 이 느낌 때문이었다.

두근! 두근!

오랜만에 느끼는 심장 소리가 새로웠다. 성윤은 팔을 움직였다. 마치 자기 몸이 아닌, 3자의 시선으로 보는 비현실감이 느껴졌다.

서걱!

그가 들고 있는 검이 너무나도 쉽게 쭉 뻗은 슈퍼 골렘의 팔을 날렸다. 그리고 물 흐르듯 검을 앞으로 겨누고 찔러 넣었다.

푸슉!

이번에도 너무 쉽게 찔렸다. 진흙에 검을 꽂아 넣듯 검은 부드럽게 슈퍼 골렘의 미간을 관통했다.

덜컥!

슈퍼 골렘의 움직임이 멎었다. 마치 건전지를 뺀 장난감 같다.

관성 때문에 계속 움직이긴 했지만 그뿐. 관성이 모두 사라지면 녀석은 그저 특이한 형태의 조각상이 될 것이었다.

잔해 속에 파묻혀 여기저기가 박살나고 유실된, 버려진 조각상이.

성윤은 날아오는 슈퍼 골렘을 피했다.

쿠웅!

녀석이 땅바닥으로 처박힌다. 그 모습을 성윤은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게 쳐다봤다.

스윽!

감각이 현실로 돌아왔다. 성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펴서 찬찬히 뜯어 봤다. 자신의 몸이 아닌 듯한 감각은 사라져 있었다.

그가 동료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들은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성윤을 보고 있었다. 자신들에게 달려 오는 슈퍼 골렘을 피하려다 성윤이 놀라운 속도와 몸놀림으로 녀석을 처단한 것을 본 것이다.

쿵!

“자네….”

뒤이어 도착한 러셀이 성윤을 불렀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목소리에 한가득 담긴 의문이 그의 심정을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성윤은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줄 수가 없었다.

두근!

다시 한번 들리는 심장소리. 그리고 곧 가슴 어림에서 커다란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큭!”

성윤은 가슴을 감싸 안고 주저앉았다. 사람들이 성윤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달려왔다. 하지만 성윤은 그들의 걱정 어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건….’

연결자로 각성하기 전에 느꼈던 고통이 생각났다. 지금과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고 느낀다면 착각일까.

털썩!

결국 성윤은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

성윤은 눈을 떴다.

막 잠에서 깬 것 같지 않게 머리가 상쾌했다. 천근보다 무거운 눈꺼풀도, 머릿속을 뿌옇게 만드는 안개 같은 졸음도 없었다.

몸을 일으켰다. 누워 있던 곳은 꽤나 호사스러운 침대였다. 방도 상당히 돈을 쓴 티가 났다. 그 방 한 구석에 누군가 꾸물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아, 일어나셨어요!”

긴 갈색 머리가 휘날린다. 에밀리가 성윤이 깨어난 것을 보고는 반색했다.

“여기는 어딥니까?”

“호텔이에요. 성윤 씨가 쓰러진 뒤 옮겨왔어요. 성윤 씨가 쓰러진 지는 하루 정도 지났고요.”

에밀리가 침대 옆으로 다가와 의자에 앉아 성윤의 손을 잡았다. 소극적인 그녀로서는 놀라운 행동이었지만, 슬슬 그녀도 성윤의 앞에서는 특유의 낯을 가리는 행동이 사라지고 있었다. 물론 성윤 한정이었다.

“의사 말로는 다행히 별 이상은 없대요.”

성윤은 자신의 가슴 어림에 손을 대봤다. 기절하기 직전의 감각이 아직 또렷하게 기억났다.

‘그건 도대체 뭐였지?’

심장 소리는 역시 들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때 들은 심장 소리는 환청이었을까.

“성윤 씨?”

에밀리의 목소리에 성윤은 다시 감각을 현실로 되돌렸다.

“다른 분들은 어디 있습니까?”

“각자 방에 있을 거예요. 모두 성윤 씨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어요.”

“전부 불러주시겠습니까? 사태를 파악하고 앞으로의 일을 상의할 필요가 있을 것 같군요.”

“알겠어요.”

에밀리가 방을 나갔다. 성윤은 다시 자신의 가슴에 손을 댔다.

‘아무래도 찝찝해.’

의사가 이상 없다고 했다지만, 그래도 한 번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되새겨보면 그때의 감각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때만큼 상쾌하고 또렷한 정신을 가져 본 적은 없었다.

‘나중에 현우 씨나 러셀 경에게 한 번 물어봐야겠어.’

경험이 많은 그들이라면 혹시 알지도 몰랐다.

***

성윤의 파티가 전부 성윤의 방에 모였다. 모두 멀쩡한 성윤의 모습을 보며 안도했다.

괜찮다며 그들을 안심시킨 성윤은 본격적으로 현재 암스트롱의 상태를 물었다.

“엉망이에요.”

그레이스의 말은 단적으로 현 상황을 나타내고 있었다.

“직접 보시는 게 제일 나을 거예요.”

그녀는 앉아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굳게 닫혀 있던 창문을 열었다.

새장 같은 커다란 돔이 인간을 가두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음울한 욕망과 환락의 도시.

그게 평소 성윤이 암스트롱에 갖고 있는 이미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성윤은 창가로 가 창틀을 짚고 아래의 풍경을 내려다봤다. 그레이스는 조용히 옆으로 물러섰다.

곳곳에 무너진 건물들이 보이고 핏자국이 점점이 늘어서 있다. 둥근 천장의 형태는 어디로 가고 여러 군데에 격리 셔터가 내려와 있었다.

지금의 암스트롱에서 얼마 전까지 보였던 욕망과 환락은 찾아볼 수 없었다.

“우주 공항만은 붐비는군요.”

저 멀리 보이는 올드린 우주 공항 근처에 인파가 북적거리는 게 보였다.

예전, 그레이스의 미궁에서 마력 유출 사건이 벌어졌을 때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았다.

그때는 그나마 암스트롱에서 떨어진 미궁에서 벌어진 일이었지만 이번 사건은 암스트롱을 직격한 것이다.

“많은 사람이 떠나고 있어요. 연결자들마저 동요하고 있는 판국이니 일반인들은 오죽할까요. 대부분의 일반인들이 떠나고 있다고 생각하면 돼요.”

그레이스가 말했다.

“암스트롱의 기능이 마비되겠군요.”

“벌써 여파가 나오고 있어요. 이 호텔의 종업원들도 우주선을 못 구해서 떠나지 못하고 있을 뿐, 오로지 지구로 돌아갈 순간만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우리가 이 호텔에 머물고 있는 것에 대해서 관심도 없을 걸요? 우리가 묵겠다고 했을 때도 듣는 둥 마는 둥이었으니까요.”

“저희 회사의 숙소는 무너졌습니까?”

“아뇨. 하지만 러셀 경과 슈퍼 골렘의 전투 지점 근처에 있어서 알게 모르게 대미지를 받았을 테니 호텔을 잡았어요.”

성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십니까?”

팀이 문을 열었다.

“우는 깨어났나?”

방문자는 러셀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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