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3화
잠시 정적이 휩쓸었다.
“…설마 신혜가 제 딸이 아닐 수도 있어서 그렇습니까?”
“그래요.”
지민은 즉답했다.
“솔직히 성윤 씨의 전 부인을 생각하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잖아요?”
콰득!
선아가 화들짝 놀랐다.
소파의 나무 손잡이가 성윤의 악력에 산산이 부서졌다. 하지만 지민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일촉즉발의 상황. 성윤이 지민을 노려보고 지민은 그 시선을 받아친다. 그리고 중간에 낀 선아는 안절부절 못했다.
“…사장님이 저와 신혜에게 잘해주신 점은 무척 감사합니다만, 이건 도가 지나친 것 같군요.”
“알아요. 하지만 이것도 성윤 씨와 신혜를 위해서예요.”
다시 한번 침묵이 감돈다. 하지만 우려했던 우발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후, 일단 사장님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들어는 보겠습니다.”
손에 힘을 풀고 성윤이 말했다. 언제나 성윤에게 도움을 줬던 지민을 한 번 더 믿어보려는 것이었다.
“감사드려요. 일단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하는데, 전 절대로 성윤 씨에게서 신혜를 떼어 놓거나 하려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반대죠. 성윤 씨와 신혜는 둘이 계속해서 행복하게 살아주셨으면 해요.”
지민은 커피로 입 안을 조금 적셨다.
“그리고 솔직히 성윤 씨는 신혜가 친딸인지 아닌지도 중요하지도 않잖아요. 그렇죠?”
“그렇습니다.”
신혜가 자신의 친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성윤도 했었다. 전 부인에게 그렇게 뒤통수를 맞았는데 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신혜가 자신의 친딸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떤 쪽이건 신혜가 자신의 보물인 건 같았다.
“지금까지는 그저 신혜를 귀여운 딸이라는 생각만 가지고 행복하게 살아도 됐을 거예요. 네, 지금까지는요.”
“…과연. 그렇군요.”
성윤도 지민이 말 한 바를 알아 들었다.
자신은 유명해졌고 돈을 많이 번다는 사실도 퍼졌다.
성윤의 뇌리에 천박한 얼굴이 하나 지나갔다.
“이미연….”
“네. 성윤 씨의 전 부인이 다시 접근할지도 몰라요.”
심부에서 격렬한 분노와 증오가 끓어오른다. 하지만 성윤은 그것들을 다시 저 아래 깊숙한 곳으로 돌려보냈다.
신혜를 지키기 위해서는 뜨거운 감정보다는 차가운 이성이 필요했다.
“만약 그렇다면 목적은 돈일 겁니다.”
“십중팔구 그럴 테죠. 문제는 그 여자가 신혜가 성윤 씨의 최대 약점이란 걸 아주 잘 알고 또 가장 잘 이용할 수 있는 자란 거예요. 예전 성윤 씨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신혜를 볼모로 성윤 씨를 협박할 수도 있죠.”
“…확실히 위험하군요.”
물론 성윤이 신혜의 곁에 있다면 성윤은 절대 미연을 다가오지 못하게 할 것이다. 하지만 성윤은 달에 가야한다.
미연의 쓰레기 짓으로 이혼한 사실과는 달리 외부적으로 둘은 서로간의 이해를 통해 완만하게 이혼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성윤이 달에 가 있을 때 그녀가 신혜에게 접촉하는 걸 막을 명분이 없었다.
“…뭔가 방법이 있습니까?”
“그 때문에 친자 검사를 하자는 거예요. 신혜가 성윤 씨의 친딸인지 아닌지에 따라서 대응 방법이 달라질 테니까요.”
“생각한 방도가 있으신가 보군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최악의 수까지 생각하고 있던 성윤은 지민에게 방도가 있는 것 같자 일단 자신의 생각을 미뤘다.
“좋습니다. 저와 신혜의 머리카락을 드리면 되겠죠?”
“네. 그리고 성윤 씨의 이름도 필요하고요.”
“알겠습니다. 하려면 바로 하는 게 좋겠죠. 내일 바로 가져다드리죠.”
“그럼 내일까지 준비를 끝내 놓을게요.”
그걸로 용건은 끝났다.
“그럼 저는 돌아가보겠습니다.”
너무 심각한 얘기가 오갔다. 성윤은 지금 신혜가 무척 보고 싶었다.
“성윤 씨.”
등을 돌리려는 데 지민이 부른다. 아직 더 할 얘기가 남은 것일까.
자신의 가장 소중한 보물에게 혹시 다른 위험한 일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성윤은 다시 한번 긴장을 하고 지민을 뒤돌아봤다.
“마지막으로 확인할 게 있는데, 신혜를 지키는 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실 건가요?”
무슨 말인가 했더니. 성윤은 차가운 얼굴로 툭 내뱉었다.
“전혀요.”
“그 말이 필요했어요.”
지민이 화사하게 웃었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선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평소 좋은 상사인 지민과 좋은 사람인 성윤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무척이나 무섭게 보였다.
“아, 그리고 또 하나.”
지민이 손을 들었다. 혹시 또 무슨 중요한 일이 있는 것일까. 성윤은 지민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지민은 성윤이 앉아 있던 소파를 가리켰다.
“성윤 씨가 부숴 먹은 소파는 성윤씨 봉급에서 깔게요.”
“…그렇게 해주세요.”
성윤은 머쓱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
선아마저 나간 후 지민은 다시 책상에 앉았다.
‘이걸로 대략적인 준비는 끝났어.’
성윤에게 허락을 맡았고 선아에게도 제반사정을 이야기해줬다. 지민의 뜻대로, 선아는 눈물을 흘리며 신혜를 돕는 데 한 팔 보탤 것을 맹세했다.
‘괜히 선아 씨를 이용하는 것 같아 찝찝하지만….’
아까 성윤이 한 말처럼 지금 지민은 수단과 방법을 가릴 생각이 없었다.
그저 나중에 어떻게 해서든 성윤과의 데이트 자리를 마련해주기로 하며 서랍에서 서류 하나를 꺼내 앞에 내려놓았다. 그건 한 사람을 뒷조사한 보고서였다.
지민은 서류를 펼쳤다. 한 면에 붙어 있는 사진. 그 주인공은 미연이었다.
성윤에게 이야기를 꺼낸 건 오늘이었지만, 지민은 이미 행동에 들어 가 있었다. 그녀는 미연의 사진을 차갑게 내려다 봤다.
‘이미연….’
성윤에게 배신을 때리고 신혜에게 상처를 준 여자. 지금까지 지민에게 이미연이란 존재는 굉장히 기분 나쁜 여자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자기 분수를 알고 지금처럼 성윤 씨나 신혜에게 접근하지 않고 산다면 내버려두겠어. 하지만 만약 또 다시 쓰레기짓을 하려 성윤 씨나 신혜에게 접근하려 한다면…!’
지민의 눈이 차가워졌다. 한참을 미연의 사진을 노려 보던 지민은 서류를 덮었다. 그리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 천장을 쳐다봤다.
[그러나 역시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말하건대, 그와 함께 자랑스러움을 느낄 겁니다. 그만큼 딸아이가 나를 사랑했다고. 나는 그 정도로 딸에게 좋은, 훌륭한, 사랑받는 아버지로서 인정받고 있었다고 말이죠.]
성윤이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작게 한숨을 쉬며 그녀는 가슴에 손을 올렸다.
신혜도 그리고 성윤도 절대로 그 여자에게 넘겨줄 수 없었다.
‘절대 그 여자 마음대로 하게 둘 순 없어.’
그녀의 눈이 깊이 가라앉았다.
***
영국에서 베히모스를 물리쳐 런던과 시민을 구하고 영웅이 된 성윤이었지만, 그 생활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신혜와 즐겁게 지내다가 자신의 미궁의 마나스트림이 끝날 즈음이면 다시 달로 올라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성윤의 계획은 산산이 부서졌다.
“그쪽은 어떻습니까?”
핸드폰을 귀에 대고 성윤이 묻는다. 핸드폰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 왔다.
- 아직 모르겠습니다. 서로간의 의견 차가 너무 커서요.
굵직한 목소리. 전화를 하는 상대는 팀이었다. 뚜렷하게 낭패 섞인 목소리가 그의 심정을 알렸다.
- 성윤 씨는 어떤가요?
“저와 그레이스 씨는 이미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아무래도 런던 전투로 얻은 명성 덕에 한국도 제 편의를 많이 봐 준 모양입니다.
- 부럽군요. 저도 일단 성윤 씨, 그레이스 씨와 같은 파티원이라는 걸 말했고 정부 쪽에서도 꽤 편의를 봐줄 것 같긴 합니다만, 그래도 두 분과 완벽하게 시간을 맞추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둘이 대화를 나누는 주제는 고위 연결자들의 지구 대기 시간에 관한 얘기였다.
런던에서 베히모스가 난리를 친 이후, 모든 국가는 그에 대한 대비에 들어갔다.
자기 나라에 혹시 마력이 고인 곳이 있는지를 이 잡듯 뒤지기 시작했고 혹시 나타날지 모를 몬스터를 물리칠 준비를 했다.
바로 그 몬스터를 물리치기 위한 준비 중 하나가 고위 연결자들을 국가에 항상 대기시켜 두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월석을 포기할 수는 없었기에 지구에 대기하는 임무는 교대로 하기로 했다.
문제는 교대 순서였다. 각 연결자마다 파티 사정도 있고 마나 스트림 때문에 미궁에 들어가는 타이밍도 생각해야 하니 교대 순서와 기간을 정하는 것이 복잡했던 것이다.
그레이스야 여왕의 손녀이자 런던을 구한 영웅 중 한 명이었으니 당연히 영국에서는 그녀의 의견을 최대한 들어줬다.
성윤도 영국을 구해 얻은 명성과 그에 따른 국위선양을 생각해 나라에서 편의를 봐줬다. 하지만 로스 남매는 아니었다.
“어쩔 수 없겠군요. 결과가 나오면 연락 주세요. 그때 더 확실하게 상의해보죠.”
- 알겠습니다.
성윤은 전화를 끊었다.
‘한동안은 미궁에 들어가지 못하겠군.’
성윤은 핸드폰을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눈가를 문질렀다.
만약 로스 남매가 늦는다면 개인 미궁의 깊지 않은 곳에서 혼자, 혹은 그레이스와 둘이서 사냥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레이스의 미궁 사건을 경험한 만큼 혼자 또는 둘은 조금 불안했다.
그때 다시 성윤의 핸드폰이 울렸다.
‘팀 씨인가?’
뭔가 말하지 못한 것이 있는 걸까. 성윤은 전화기를 들었다. 하지만 전화한 사람은 뜻밖의 사람이었다.
- 여, 영웅 씨. 잘 지내고 있는가.
활기차고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가 들린다. 성윤은 놀란 감정을 숨기지 않은 채 대답했다.
“무슨 일로 전화를 하셨습니까? 현우 씨.”
그는 정범의 친구이자 최강 연결자 중 한 명인 성현우였다.
- 자네의 활약상이 대서특필되지 않았나. 안부도 물을 겸 권유도 할 겸 해서 전화를 했지.
“권유요?”
전화기 너머로 반쯤 장난스러운 제안이 들려 왔다.
- 자네, 대미궁에 흥미 없나?
***
오랜만에 올라 온 달은 여전했다. 공기는 눅눅하고 물자는 풍족하지 않으며 물가는 비싸다.
게다가 그레이스의 미궁에서 일어난 마력 유출의 영향 때문인지 약간 사람들이 준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성윤은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의 앞에 떡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하나의 동굴 때문이었다.
“왜 그렇게 긴장해?”
누군가 성윤의 등을 세게 쳤다. 살짝 기침이 나왔다. 그 모습을 보고 성윤의 등을 친 사람, 현우가 껄껄 웃었다.
“생판 초보자도 아니고 런던의 영웅께서 그런 모습을 보이면 쓰나.”
현우가 저런 말을 할 때마다 성윤은 낯부끄럽기 그지없었다. 그의 그런 반응 때문에 오히려 현우가 더 저런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성윤의 인기는 확실히 널리 퍼진 것 같았다. 주변에 있는 연결자들이 성윤을 흘끔흘끔 쳐다보고 있었다.
“자, 가 보자고. 그것 때문에 동료들보다 더 일찍 올라온 것 아닌가?”
현우가 가볍게 성윤의 등을 밀었다. 성윤은 한숨을 쉬고 젬을 발동시켰다.
“오오!”
주변에서 감탄성이 들린다. 아무래도 직접 본 성윤의 젬 발동 속도에 놀란 것 같았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성윤과 현우는 천천히 대미궁 안으로 진입했다.
대미궁 입구의 모습은 다른 미궁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성윤은 느낄 수 있었다.
후우우우웅!
도도히 흐르는 일반 미궁의 마력과는 전혀 다르다. 미친 듯이 불어제치는 광풍처럼 날뛰는 마력의 흐름이 그대로 느껴졌다.
항상 마나 스트림이 불어대는 대미궁의 특성이 그를 맞이한 것이다.
“그런데 자네, 용케도 달에 왔군.”
잔뜩 긴장한 채로 주변을 살피던 성윤에게 앞장서 걷던 현우가 말을 걸어왔다.
“국가에서 자네를 보내지 않으려고 했을 텐데 말이야.”
“확실히 그러더군요.”
성윤은 불쾌하게 중얼거렸다.
자신의 행동을 무척 영웅적이라며, 국위선양했다며 칭찬했지만 국가는 더 이상 성윤이 위험을 감수하는 걸 원치 않았다.
그들이 원하는 건 하나. 많은 자식을 낳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딴 권유는 걷어찼습니다만.”
“1세대에게는 평범한 일이야. 편안하게 살면 좋잖아? ‘종마’에게는 나름 혜택도 많이 줘.”
종마. 아무리 좋은 구실을 갖다 붙인다고 해도 결국 국가는 성윤에게 그런 역할을 원하고 있었다.
“알 바 아닙니다. 1세대든 아니든 상관없어요. 제 목표는 대미궁을 공략하는 거니까요. 그들의 소망에 어울리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 때문에 동료들도 내버려 두고 먼저 올라온 거니까요.”
아직 교대 순서가 정해지지 않은 로스 남매나, 런던을 빨리 복구시키기 위한 영웅 역할을 도맡은 그레이스는 아직 지구에 있었다.
오로지 성윤 혼자 올라온 것이다. 현우가 대미궁을 견학시켜준다는 기회를 잡기 위해서.
그의 말이 마음에 드는지 현우가 크게 웃었다.
“그래, 그렇지! 아무리 1세대라고 해도 자기 운명을 결정한 권리는 자기에게 있는 법이지! 역시 자넨 마음에 들어!”
현우는 빙글 몸을 돌렸다.
“자, 그런 자네가 대미궁에 첫 진입을 하는 역사적인 순간이네.”
첫 진입. 그건 조금 이상한 소리였다. 이미 성윤은 입구를 지나 대미궁 안을 걷고 있지 않은가.
주변에서 미친 듯이 날뛰는 마력이 그 증거였다.
하지만 돌아선 현우의 등 뒤, 동굴 저편에서 빛이 보이고 있었다. 처음엔 몬스터가 소환되는 빛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건 몬스터가 소환될 때 나타나는 빛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밝았다.
성윤은 빛이 환하게 비추는 곳으로 들어섰다.
“…이건!”
성윤은 놀랐다. 아니, 경악했다. 이미 정보로서 알고 있었지만 역시 직접 눈으로 보는 건 차원이 달랐다.
성윤의 눈에 보인 건 거대한 초원이었다. 녹색의 풀잎이 종아리 근처까지 솟아나 있고 한쪽에는 옅은 개울까지 흐른다.
군데군데 나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작은 숲을 형성하고 있기도 했다.
파란 하늘에는 뚜렷한 광원이 없는데도 따스함을 품은 빛이 쏟아지고 있었고 그 아래로 부는 산들바람이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도저히 달의 지면 아래에 펼쳐져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풍경이 거기 있었다.
“대미궁에 온 걸 환영하네.”
현우가 성윤을 보며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