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의 미궁-160화 (160/354)

제160화

사인을 해주고도 성윤은 잠시 얼떨떨해했다.

결혼 전 젊었을 때 잘생긴 얼굴 때문에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을 때도 이런 상황은 겪어보지 못했다.

결혼 후 아저씨가 됐을 때나 배신당한 후 밑바닥을 전전했을 때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지민과 영국 정부에서 파견 나온 사람은 그 장면을 보고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별 반응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시작이었다.

런던의 피해가 피해인 만큼 이 병원에도 많은 부상자가 몰려 있었다. 병원 로비에는 환자의 가족과 부상자들이 북적거렸다.

그 모습을 성윤을 조금 안타까운 눈으로 훑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자신은 최선을 다했고, 더 이상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처음에는 문제없었다. 인파 때문에 지나가기가 조금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무슨 러시아워 시간대의 주요 도로 마냥 꼼짝달싹

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응?”

의자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던 노인 한 명이 성윤을 발견했다. 바로 신문 1면으로 눈을 돌렸다.

이미 며칠이나 신문 1면에 박혀 있는 성윤의 사진을 봤다. 그리고 다시 성윤을 쳐다봤다.

동양인의 얼굴은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지만 그 노인은 가까스로 성윤과 사진을 매칭시킬 수 있었다.

“오오, 나이트다!”

노인이 벌떡 일어나 큰 소리를 쳤다. 시장바닥처럼 웅성거리는 소리가 가득 찬 로비였지만 노인의 음색은 그 모든 걸 무시할 정도로 컸다.

로비의 시선 대다수가 노인에게 쏠렸다. 하지만 노인은 상관도 없이 인파를 헤치고 지나갔다. 자연스레 사람들의 시선도 노인의 움직임을 따라갔다.

그가 멈춘 곳은 막 병원을 빠져나가려던 성윤의 곁이었다.

“나이트! 나이트 우가 아니오!”

성윤의 손을 덥석 잡고 노인이 말했다.

“네?”

자기도 모르게 한국어가 튀어나올 정도로 성윤이 당황했다. 하지만 그 당황은 너무 일렀다.

“나이트?”

“그러고 보니 이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했었지?”

“진짜 나이트야?”

노인을 쳐다보고 있던 시선이 일제히 성윤에게 쏠렸다.

나이트. 기사를 칭하는 그 단어는 은빛 갑옷을 입고 붉은 망토를 휘두르며 멋지게 런던을 구한 성윤의 별명이었다.

GBE를 받긴 하지만 영연방 시민이 아니기에 성윤은 경의 칭호는 받지 못한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성윤의 모습과 활약은 사람들의 상상 속 기사 그 자체였다.

시작은 성윤의 전투 장면을 실시간으로 생중계한 BBC였다. 그곳에서 성윤에 대한 정보를 내보낼 때 나이트라는 별명을 쓰기 시작했고 그 별명은 순식간에 퍼졌다.

다행히 유명인사를 본 사람들처럼 성윤에게 아우성치며 다가가진 않았다.

하지만 이곳이 병원 로비였던 데다가 여기 있는 사람들이 부상자 아니면 사망자나 부상자의 가족이었기 때문에 알아서 조절을 하는 것일 뿐, 다른 곳이었다면 국제적인 스타가 등장한 양 사람이 모였을 것이다.

“고맙소! 정말로 고맙소! 당신 덕에 우리가 살았다오!”

노인이 성윤의 손을 쓸며 눈물을 글썽였다.

“아, 저. 괜찮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성윤은 지민과 정부쪽 사람을 쳐다봤다. 냉정, 침착, 무뚝뚝의 대명사인 성윤도 이런 상황에서 평소처럼 매정하게 그냥 갈 순 없었던 것이다.

정부쪽 사람이 한 발자국 나섰다. 지금은 잠잠하지만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까지 이 노인처럼 몰려든다면 시간이 지체되고 커다란 사고가 터질 수도 있다.

게다가 가만 보니 병원이라고 쫓아냈던 언론까지 바깥에서 이쪽을 살피고 있는 형편이다.

“여러분들의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만, 지금 우 씨는 그레이스 공주님, 그리고 다른 동료분들과 함께 그 괴물이 나온 동굴을 조사하러 가셔야 합니다. 감사 인사는 나중에 해주시길 바랍니다.”

“퇴원하자마자 다시 조사를 나서신다는 말이오?”

성윤에게 붙어 있던 노인이 놀라 물었다.

“그렇습니다.”

“이런. 그러면 내가 주책맞게 이러고 있어선 안 되지.”

노인은 다시 한번 성윤의 손을 강하게 잡고 물러섰다.

“그럼 힘내주시구려.”

“아, 네.”

성윤은 얼떨떨하게 대답하고는 다시 병원 출입구로 향했다.

“힘내요!”

“이번에도 멋지게 해결해주세요!”

뒤에서 환호성과 박수가 터져 나온다. 성윤은 어색하게 손을 한 번 들어보이고는 병원 밖으로 나왔다.

펑! 펑! 퍼펑!

바로 플래시가 터진다. 강렬한 빛 때문에 성윤을 눈을 감고 손을 들어 빛을 막았다.

언론이 쓰는 플래시가 정말로 저런 대포 터지는 소리가 난다는 걸 성윤은 처음 느꼈다.

“나이트 우! 지금 퇴원하시는 겁니까?”

“이번에 멋지게 런던을 구하셨는데요! 당시의 심정을 좀 말씀해 주십시오!”

“우성윤 씨!”

그의 앞으로 앞다투어 마이크가 들이밀어진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실례합니다. 인터뷰 시도는 나중에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일이 익숙한 듯 정부쪽 사람이 앞장서 일행은 간신히 기자들의 무리를 통과했다. 그리고 미리 대기시켜둔 사람들이 기자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인의 장벽에 막힌 기자들이 뒤에서 애타게 성윤의 이름을 불러댔다. 하지만 성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후우~!”

그가 숨을 크게 들이쉰 다음 내쉰다. 정신이 없었다.

“당황스럽나요?”

“무척이요.”

성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민 씨는 알고 계셨습니까?”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서라면, 어째서 성윤 씨가 예측하지 못했는지가 더 이상한 걸요? 성윤 씨를 대상으로 영화를 찍겠다는 사람까지 있었잖아요?”

“…그런 사람도 있었습니까?”

“몰랐나요? 계속 뉴스 보셨잖아요.”

요 며칠 성윤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거의 뉴스를 끼고 살다시피 했다. 지민은 당연히 성윤도 자신의 인기를 알고 있다고 여겼다.

“…제 이야기만 나오면 일단 채널을 돌려버려서.”

성윤이 무안한 얼굴로 시선을 피한다. 지민은 기가 찼다.

“지금 성윤 씨의 인기는 정말로, 웬만한 전쟁영웅 정도는 뺨을 후려칠 수 있을 정도예요. 아니, 성윤 씨가 런던을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화면을 통해 직접 봤으니 그보다 더하죠. 웬만한 인기 연예인도 성윤 씨만 못할걸요?”

“그 정도입니까?”

자신이 대단한 일을 했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인기가 이 정도까지 될 줄은 몰랐다.

“영국만이 아니에요. 이미 전 세계에 성윤 씨의 얼굴은 전부 알려졌다고 보는 편이 좋아요. 한국에서도 이미 대대적으로 방영되고 있고요. 앞으로 성윤 씨도 외출하거나 할 땐 선글라스나 마스크 같은 걸 준비해두는 편이 좋을 거예요.”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말입니다.”

“마찬가지예요.”

다행히 그 이후에 사람들이 접근하는 일은 없었다. 아무래도 동양인을 잘 구별하지 못하는 서양인의 특성 때문인 것 같았다.

성윤을 긴가민가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일행은 영국 정부에서 준비해준 차를 타고 이동을 시작했다.

성윤이 옆에 앉은 지민을 쳐다봤다. 그녀는 뭔가 할 일이 있는지 노트북을 펴고는 키보드를 열심히 두드리고 있었다.

그때 이후로 지민이 다시 대미궁 공략을 다시 생각하자는 말을 하는 일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뭔가 털어버린 듯 안색이나 행동이 조금 밝아진 것 같기도 했다.

“왜 그래요?”

성윤의 시선을 눈치 챈 그녀가 화면에서 눈을 떼고 성윤을 바라봤다.

“아닙니다.”

괜히 그때의 일을 떠올리게 만들어 지민의 기분을 또 다운시킬 필요는 없다. 밝아졌다면 좋은 거라며 성윤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차가 달린 지 얼마나 됐을까. 성윤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성윤이 입원했던 병원은 런던 동쪽에 있는 곳이라 피해 상황이 직접적으로 보이진 않았었다. 하지만 동굴이 있는 북서쪽으로 접근할수록 전투의 상흔이 곳곳에 보였다.

무너진 건물, 날아온 돌덩이, 뿌옇게 가라앉은 흙먼지 등. 직접 전투가 일어나지 않은 곳까지 전투의 흔적이 흩어져 있었다.

“역시 피해가 심각하군요.”

“보통 격렬한 전투가 아니었잖아요.”

지민이 노트북 화면에 눈을 떼지 않을 채 대꾸했다. 성윤은 잔뜩 부서진 런던 시가지를 묵묵히 쳐다봤다. 그러다 무언가를 발견했다.

“…잠깐 차를 세워주세요.”

아직 목적지인 동굴까지 한참 남았다. 갑작스러운 성윤의 요구에 지민은 고개를 돌렸다. 성윤은 창밖 너머로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근처에 있었죠.”

쓰러져 있음에도 그 거체가 주변에 모두 보일 정도다. 시체만으로도 주변에 아직까지 위압감을 뿌리는 그것은 성윤이 쓰러뜨린 베히모스였다.

***

베히모스의 시체는 완전히 박살난 시가지를 배경 삼아 잔해들 위로 쓰러져 있었다. 그 주변에는 줄이 둘러 처져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다.

접근금지 표시도 줄 이곳저곳에 달려 있었다. 그리고 줄 바깥으로는 경찰들이 뒷짐을 지고 둘러싸고 있었다.

차에서 내린 성윤 일행은 그 근처로 접근했다.

경찰 한 명이 성윤 일행을 발견했다.

“여긴 출입금지…!”

경고를 하려던 그가 눈을 크게 떴다.

“나, 나이트 우!”

또다시 그 닭살 돋는 별명이 들려온다. 성윤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옆을 돌아보니 지민이 뭐가 그리 재밌는지 소리 죽여 웃고 있었다.

“아, 이 분은 허가를 받았습니다.”

정부쪽 사람이 자신의 신분증을 건네며 말했다. 성윤이 베히모스의 시체를 보고 싶다고 하자 그가 영국 정부에 연락을 했고, 바로 OK가 떨어진 상태였다.

“네, 연락은 받았습니다.”

그 사이에 바로 영국 정부에서 연락이 간 것 같았다. 그는 성윤 일행에게 길을 열어줬다.

성윤 일행이 들어오자 주변에서 연구를 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일행에게 아니, 성윤에게 쏠렸다.

“…제가 이것과 싸웠다는 거군요.”

새삼 보니 엄청난 덩치다. 성윤은 베히모스를 쳐다보기 위해 목을 한껏 꺾었다.

“네. 성윤 씨의 전과죠.”

“두 번 다시 하기는 싫지만요.”

성윤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때려잡긴 했지만 대체 어떻게 이겼는지 성윤 자신도 신기할 정도였다.

몬스터의 시체를 신기하게 쳐다보던 것도 잠시. 성윤은 가장 중요한 걸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 녀석은 사라지지 않는 겁니까?”

원래 몬스터란 것들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월석을 남기고 시체가 사라진다. 하지만 런던에서 온갖 난장판을 핀 이 녀석은 어찌된 일인지 사라지지 않았다.

“모르죠. 안 그래도 미궁이나 몬스터에 대해 알려진 게 많지 않은데 어떻게 원인을 바로 밝혀낼 수 있겠어요. 몬스터가 왜 지구에 나타났는지, 어떻게 마력이 없는 지상에서도 움직일 수 있었는지도 모르는데요.”

“연구자들이 또 스트레스를 받겠군요.”

성윤은 달의 연구소에서 죽을 둥 살 둥 연구를 하고 있을 첼시를 떠올렸다.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안 그래도 연구자들은 몬스터의 사체를 연구하고 싶어 했으니까요. 지금까지는 샘플이 없어서 못 했지만, 이렇게 샘플이 떡 나타났으니 온 세계의 연구자들이 군침을 흘리는 판국이에요.”

“그렇습니까.”

성윤은 베히모스의 시체를 한 번 더 올려다 본 후, 등을 돌렸다.

딱히 베히모스의 시체에 뭔가를 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아직 사라지지 않은, 자신이 잡은 몬스터의 시체를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럼 이제 목적지로 가죠.”

베히모스의 시체 구경은 할 만큼 했다. 이제 그가 영국에 온 이유를 끝마칠 차례였다.

***

동굴이 위치한 산은 베히모스 시체 주변과 같이 철통같은 보안으로 지켜지고 있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배치된 기갑부대까지 언뜻언뜻 보였다.

물론 몬스터가 나타난다면 그것들이 전력이 될 순 없다. 철저하게 몬스터의 시선을 끌어 발을 묶는 용도로 배치된 부대였다.

이곳도 상당히 파괴되어 있었다. 동굴 안쪽부터 이어져 있는 커다란 발자국과 파괴의 흔적이 베히모스가 이곳에서 나왔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동굴 근처에 도착하자 완전무장을 하고 동굴 안을 경계하고 있는 파티원들이 보였다.

“성윤 씨!”

성윤을 가장 먼저 발견한 그레이스가 성윤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 왔다.

“몸은 어떠세요?”

“괜찮습니다.”

“정말 다행이에요.”

그녀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녀의 뒤를 이어 팀과 에밀리가 다가왔다.

“굉장히 고생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성윤 씨.”

“팀 씨가 그렇게 그리웠던 건 처음이었습니다.”

성윤의 진심 섞인 너스레에 팀이 파안대소를 했다.

“걱정 마십시오! 제가 있는 한은 성윤 씨가 그렇게 몬스터를 피해다니게 만들지는 않을 테니까요!”

자신감 넘치게 자기 가슴을 쾅쾅 치는 팀이었다.

그런 팀의 옆으로 에밀리가 조용히 섰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성윤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쓱 훑었다. 하지만 딱히 부상당한 모습은 보이지 않자 안도했다.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네, 정말로 다행이죠.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에밀리 씨.”

에밀리가 수줍게 웃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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