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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미궁-151화 (151/354)

제151화

방금 막 나온 자신 몫의 홍차를 마시려던 그레이스의 몸이 딱 굳었다.

달그락!

거의 내팽개치다시피 찻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그레이스가 딱딱한 얼굴을 숨길 생각도 못 하고 총리를 바라봤다.

“확실한가요?”

“지구에 머무르고 있는 연결자 한 명을 고용해서 바로 확인했습니다. 사실이라면 절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문제니까요.”

“지구에 나타난 미궁일 가능성은요?”

“아직 모르겠습니다.”

“대처는 어떻게 하셨죠?”

“바로 주변을 봉쇄했습니다. 까딱하다간 마력 중독 때문에 사람이 죽을 테니까요. 하지만 임시방편일 뿐이죠.”

“잘 하셨어요. 마력은 얼마나 퍼졌죠?”

“동굴을 중심으로 10m 내외 정도입니다. 다행히 그 이상 마력이 퍼지진 않더군요. 하지만 그래도 안심은 안 됩니다. 특히 위치가 문제입니다. 만약 그 동굴에서 마력이 더 새어 나와 런던을 덮치기라도 한다면….”

총리는 말꼬리를 흐렸다. 하지만 그가 하고 싶은 말은 명확했다.

런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마력 중독을 일으킬 수 있다. 말 그대로 대재앙이 터지는 것이다.

“일단 저도 총리 나부랭이인 만큼 이 건을 그냥 두고 볼 순 없습니다.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아야 하죠. 일단 다른 동물로 실험을 해보긴 했습니다만, 다행히도 동물들이 마력 중독을 일으키진 않았습니다. 예전에 달에서 실험했을 때 미궁의 마력은 동물들도 마력중독을 일으키게 했으니, 저희는 이 마력이 예전 저희 직원이 노출된, 이른바 무해한 마력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레이스가 실종됐을 때 그녀의 미궁으로 파견 나갔다가 마력을 쐰 직원들은 다행히 지금까지 별다른 이상증세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바로 사람을 대상으로 실험을 할 수는 없죠. 한다고 해도 적어도 조금 더 조사를 한 다음에 해야 할 겁니다. 그래서 일단 동굴 안을 탐색해 보려고 하는데….”

총리는 슬쩍 그레이스와 여왕의 눈치를 봤다. 여왕이 기분 나쁜 듯 콧방귀를 끼었다. 하지만 총리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 조사를 테일러 씨에게 맡기고 싶습니다.”

“저에게요?”

“정확하게는 테일러 씨와 테일러 씨의 파티입니다.”

그레이스는 지금 다른 나라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동료들을 떠올렸다.

“얼마 전에 죽을 뻔한 아이에게 꼭 그런 걸 맡겨야겠습니까, 총리? 그것도 지구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아이에게요.”

‘할머니의 심기가 불편한 이유가 이거였구나.’

귀여운 손녀를 위험할 수도 있는 일에 집어넣는 것이 여왕은 무척 불쾌한 게 분명했다. 게다가 그 손녀가 얼마 전에 목숨을 잃을 위험에 처했음에야.

하지만 여왕의 따가운 눈초리에도 총리는 물러서지 않았다.

“솔직히 다른 분들을 부를까도 생각했습니다. 러셀 경이라든가요. 하지만 우리나라의 능력 있는 고위 연결자 분들은 지금 전부 달에 있습니다. 거기에 미궁에 들어가 계시면 연락하기도 힘들지 않습니까. 그래서 테일러 씨에게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지금 지구에 있는 우리나라의 연결자 중 가장 고위의 연결자는 테일러 씨니까요.”

“그리고 고위 연결자를 부른다면 그들이 가져올 월석의 양이 줄어들기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여왕의 빈정거림을 총리는 인정했다.

“안 그래도 달의 이상 사태 때문에 앞으로도 월석을 채취할 수 있을지 불안한 판국입니다. 경제도 좋지 않은 마당에 고위 연결자, 특히 대미궁에 출입하는 연결자를 불러들이기에는 너무 손해가 큽니다.”

총리는 그레이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테일러 씨의 파티도 충분히 강력한 파티가 아닙니까. 전부 대미궁에 들어갈 자격을 얻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고, 우성윤 씨라는 분은 이미 자격이 되신다면서요?”

이번에 새로 얻은 플래티넘 젬으로 성윤은 대미궁에 들어갈 조건인, 쥬얼 젬 세 개라는 조건을 만족했다.

하지만 다른 파티원들은 아직 자격을 얻지 못한 데다 성윤 자신도 세 개의 쥬얼 젬 중 하나는 전투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다른 젬을 성장시키는 젬이었기 때문에 대미궁에 들어가는 걸 늦추고 있었다.

“테일러 씨의 파티 정도면 충분히 상위 연결자 수준의 파티입니다. 그 정도면 이번 조사에 충분할 거라는 게 제 판단입니다.”

“무해한 마력이라면 기계 같은 걸로 조사하면 되는 것 아닌가요? 무해한 마력 안에서는 기계도 작동한다면서요.”

아직 포기를 하지 못했는지 여왕이 다시 반문했다.

“물론 기계로도 조사를 할 겁니다. 하지만 기계가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의 눈으로 확인해야 하는 것도 분명 있습니다. 지구에 발견된 첫 마력 방출지인 만큼 여러모로 조사에 공을 들여야 합니다.”

“…알겠어요.”

“그레이스!”

여왕이 그레이스를 만류했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잔잔한 미소만 지은 채 그녀의 손을 잡았다.

“걱정 마세요, 할머니. 제 동료들,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무척 듬직한 분들이에요. 그리고 이걸로 나라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저도 기뻐요.”

그리고 그녀는 총리를 쳐다봤다.

“일단 연락은 해보겠어요. 하지만 그분들이 싫다고 하시면 저도 어쩔 수 없어요. 그리고 그분들에게 드릴 보상도 있어야 하고요.”

“걱정 마십시오. 보상은 확실히 준비하겠습니다.”

총리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웠다. 아무리 많은 보수를 준비한다고 해도 고위 연결자가 대미궁에서 벌어오는 월석보다는 적다. 나라엔 분명한 이익이었다.

그 모습을 여왕은 밉살스러운 인간을 본다는 표정으로 흘겨봤다.

하지만 손녀인 그레이스도 찬성한 일이다. 게다가 총리의 말에도 분명 일리가 있다. 결국 그녀도 한숨을 쉬면서도 찬성할 수밖에 없었다.

***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갑자기 걸려온 그레이스의 전화. 전화를 받은 성윤은 그레이스가 한 말에 상당히 놀랐다.

- 네. 그래서 성윤 씨와 팀 씨, 에밀리 씨를 고용하고 싶어요.

성윤은 생각에 잠겼다.

‘별로 가고 싶진 않지만.’

성윤은 흘끔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얼마 전에 산 게임기의 패드를 잡고 신혜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창 신혜와 놀다가 전화를 받은 것이라 웬만한 용건이라면 대충 얼버무리고 다시 신혜와 놀고 싶었다.

지구에 있을 때 다른 의뢰를 받는 것도 웬만하면 거절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사안이 너무 중대했다.

‘만약 그런 일이 한국에서 일어난다면.’

평범한 인간인 신혜가 마력 중독에 걸려 죽을 수도 있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다. 그의 모든 것인 신혜가 사라진다면 그도 더 이상 삶에 미련 따위는 없다.

‘만약을 위해서라도 조사하는 게 좋겠지.’

“전 괜찮습니다. 사장님과 팀 씨, 에밀리 씨에게도 제가 말을 해 놓죠.”

- 감사해요.

그레이스가 고마움을 표한다.

“아닙니다. 애초에 이건 영국만의 문제가 아닐 것 같으니까요.”

그렇게 몇 마디를 더 나누고 성윤은 전화를 끊었다.

‘그래도 요 근래는 그나마 조용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또 이상 사태가 일어나나.’

그것도 이번엔 달이 아닌 인류의 생활권인 지구에서 일어났다. 그의 표정이 절로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빠! 빨리 와!”

전화를 끊고도 성윤이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자 신혜가 손을 붕붕 흔들었다.

“알았어. 지금 갈게.”

일단 상념을 뒤로 미뤄 두고 성윤은 신혜에게 다가갔다. 놓아두었던 패드를 들고 바닥에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았다.

“호잇!”

신혜가 성윤의 무릎에 앉아 성윤의 품에 쏙 들어왔다. 그 상태로 흥미진진하게 게임기가 연결된 TV를 쳐다봤다. 곧 신혜는 게임에 빠져 들었다.

성윤은 자기 품 안에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게임에 열중하는 사랑스러운 딸을 쳐다봤다.

‘그래. 이 아이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그런 일들은 해결을 봐놔야겠지.’

웬만하면 자신들의 동료를 설득해보겠다고 성윤은 내심 결심했다.

그리고 며칠 뒤, 성윤과 지민을 실은 비행기가 영국 런던을 향해 날아올랐다.

***

그곳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주변이 철저하게 통제되어 인적 하나 없는 곳. 기분 나쁘게 벌레조차 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곳은 영국 런던 근교에 위치한 마력이 흘러나오는 동굴이었다.

동굴 안에 마력이 고여 있었지만 그것만 빼면 여느 동굴과 다를 바 없는 모습. 마력도 잠에 빠진 듯 표표히 흘러다니는 달의 미궁과는 달리 무겁게 고여만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마력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쥐죽은 듯 정체되어 있던 마력이 점점 더 활발해지기 시작한다.

움직임은 산들바람 정도였다가 곧 강한 바람이 되었고 이내 광풍이 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스으윽!

작은 불빛이 동굴 안에 출현했다.

그 빛의 크기는 무척 작았다. 사람의 손톱 정도의 크기. 하지만 그 빛은 착실히 그리고 확실하게 그 덩치를 키우고 있었다.

장소도 다르고 빛의 생성 시간도 다르지만 그 빛은 분명 마나 스트림 때 일어나는, 몬스터를 뱉어내는 빛과 닮아 있었다.

***

성윤과 지민은 런던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다. 여느 국제공항이 그렇듯 이곳도 인파가 북적였다.

‘런던은 두 번째로군.’

그리고 그 첫 번째는 신혼여행 때다. 지금은 무척이나 불쾌한 기억.

성윤은 얼른 생각을 털어버렸다. 생각만으로도 재수가 없었다.

“일단 약속 장소로 가죠.”

아무래도 영국 정부와 협상 같은 것도 필요할 것 같기에 이번엔 지민도 동행했다.

신혜는 잠시 선아에게 부탁한 상황이었다. 신혜도 데려오고 싶었지만 이상 사태가 일어나 언제 런던에 마력이 쏟아져 내릴지 모를 일이기에 부득이하게 아이는 데려오지 못했다.

눈물 고인 눈으로 자신을 보는 신혜와 헤어지는 건 언제라도 곤욕이었다.

다행히 지민이 런던에 몇번 와 본적이 있던 터라 성윤은 어미새를 따라가는 아기새처럼 지민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팀 씨와 에밀리 씨는 이틀 정도 뒤에 온다고 했던가요?”

“그래요.”

로스 남매는 그들과 같이 오지 못 했다. 캐나다에 볼 일이 있다고 잠시 고국에 귀국했기 때문이다.

전화로 사정을 말하자 그들도 그레이스의 제안을 쾌히 받아들였지만 아무래도 바로 런던에 올 수는 없던 모양이었다.

“저기 있네요.”

지민이 가리킨 곳에는 말쑥한 양복을 빼입고 한국어로 쓰인 팻말을 든 남성 한 명이 서 있었다.

아무래도 그레이스라는 유명 인사가 공항에 나와 있으면 여러 모로 복잡해지니 대신 성윤 일행을 맞아줄 사람을 보낸 것이다.

그들은 안내인의 안내에 따라 준비된 차를 타고 공항을 빠져 나왔다.

낯선 이국의 풍경이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간다. 성윤은 낯선 런던의 풍경을 감상했다.

그렇게 런던의 모습을 구경한 지 얼마나 됐을까.

목적지에 거의 도착한 듯 차가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이러지 않을까 예상은 했지만.’

성윤은 감탄 섞인 눈으로 창밖을 쳐다봤다. 더 이상 런던의 시내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눈에 보이는 건 커다란 건물. 바로 영국의 여왕이 사는 버킹엄 궁전이었다.

그레이스의 신분이 신분이기에 왕실에 초청을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그게 현실이 되자 무척 신기한 느낌이었다.

역사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는 버킹엄 궁은 무척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느낌이었다.

안내인의 안내를 따라 복도를 걷는 와중에 성윤은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호사인 것이다. 그 침착한 지민조차도 고개를 한 곳에 고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응접실인 듯한 곳에 안내됐다. 그 방도 무척이나 크고 화려했다.

안내인은 거기까지만 그들을 안내하고 방을 나갔다.

곧 그들의 취향에 따라 부탁한 음료와 디저트가 나오고 성윤 일행은 의자에 앉아 음료와 디저트를 즐기며 자신들을 초대한 사람이 나오길 기다렸다.

“설마 제 생애에 여기에 들어와 보리라곤 꿈도 꾸지 못했는데 말입니다.”

“마찬가지예요.”

성윤의 감상에 지민이 동의했다.

그 어떤 사람이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의 궁전에 들어갈 기회가 생기리라 상상이나 하겠는가. 연결자로 각성하면서 정말로 여러모로 놀라운 경험을 겪는다고 성윤은 생각했다.

둘이 대화를 나누며 누군가 오기를 기다린 지 얼마나 됐을까.

응접실의 문이 열렸다.

“성윤 씨.”

들어온 건 그레이스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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