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7화
“파티… 말입니까?”
“네!”
회사 면접을 보는 지원자처럼 잔뜩 긴장을 한 채 그레이스가 대답했다. 그레이스가 하는 부탁이 뭔지 이것저것 생각해 봤지만 설마 파티 얘기일 줄은 몰랐다.
‘파티라….’
성윤은 이내 진지하게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나쁘지 않지?’
에밀리랑 같이 몬스터에게 지켜내야 할 사람이 한 명 더 느는 건 사실이다. 그건 분명 전위인 성윤과 팀의 부담으로 이어질 터.
‘하지만 그 때의 화력을 생각하면.’
솔직히 커다란 한 방이 부족하다고 느끼긴 한 참이다. 성윤도 마법을 쓰긴 하지만 젬의 랭크가 낮아 주력으로 사용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때 제대로 된 상태도 아니라고 했었으니.’
폭주의 영향으로 마법을 증폭시켜줄 대부분의 젬이 사라진 상태에서도 그 정도의 위력이 나왔다.
물론 그레이스가 부서진 젬을 얼마나 다시 보충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저번에 봤던 위력 정도만으로도 전력으로는 충분했다.
‘가장 중요한 쥬얼 랭크의 젬은 부서지지 않았으니까.’
아무래도 성능이 좋은 만큼 폭주에 버틸 수 있는 시간도 많은 법이다.
성윤은 그레이스를 받아들이는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걸 느꼈다. 하지만 당장 ‘아, 그럼 그러죠.’라고 할 수는 없었다.
“어째서 우리 파티에 들어오시려는 건지 알 수 있을까요? 테일러 씨가 파티를 잃어버리신 건 압니다만, 다른 파티를 충분히 구할 수 있을 텐데요?”
성윤의 진지한 눈빛에 그레이스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말하기 시작했다.
“맞아요. 저라면 다른 파티에 손쉽게 들어갈 수 있겠죠. 하지만 그게 싫어요.”
“무슨 뜻입니까?”
“이번에 파티를 잃고 똑똑히 깨달은 게 있거든요. 우 씨는 제가 공주 취급을 싫어한다는 걸 알고 계시나요?”
“네. 테일러 씨가 그런 성향을 가지고 계시다는 건 유명하니까요. 그리고 짧은 인연이긴 하지만 지금까지 보여주신 행동도 소문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왕실의 특별 취급을 거절하셨고 그 뜻은 저도 같아요. 왕실의 일원으로서 대접 받지 않고 스스로도 특별 취급을 받지 않도록 노력했어요. 하지만 역시.”
그레이스는 파티가 전멸하기 직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갑자기 나타난 몬스터에게 습격을 받았을 때, 제 파티원들은 절 살리기 위해 죽음을 택했죠. 그분들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어요. 당연하죠. 남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거는 것만큼 고귀한 행위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 분들이 절 살린 건 제가 더 잘 살아남을 것 같아서가 아니에요.”
“당신이 ‘그레이스 공주님’이기 때문이란 건가요?”
“네. 당시 전 다른 분을 살리려고 했어요. 젬을 마법 특성에 몰아넣은 저보다 훨씬 더 살아남을 확률이 높은 분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러지 못했어요. 그들이 제 뺨을 때리고 울부짖으면서 저 보고 도망가라고 한 순간, 전 느낄 수 있었어요.”
그레이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들은 절대로 먼저 도망치지 않을 거라는 걸. 제가 그 어떤 고집을 부린다 해도 절 두고 도망가지 않고, ‘공주님’의 호위를 최우선으로 할 거라는 걸 말이죠.”
그걸 안 그레이스는 터질 것 같은 마음을 억누르며 그들에게 등을 돌렸다.
“테일러 씨가 원하시는 건 당신을 ‘그레이스 공주’가 아닌 ‘테일러 씨’로 대하는 사람이라는 겁니까?”
그레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일이긴 하지.’
성윤은 맹세코 중요한 순간에 꼭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사랑받는 공주님’을 데리고 다닐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게 아무리 화력 좋은 연결자라고 해도 말이다.
성윤은 그녀 옆에 앉아 있는 러셀의 눈치를 봤다. 그는 본인이 판을 깔아 놓고는 마치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이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래도 관심이 없는 건 아니겠지.’
성윤의 시선을 느낀 그가 성윤을 바라봤다.
“왜 나를 보나? 난 이 일에는 철저하게 제3자일 뿐이야.”
‘한 마디로 그레이스 공주의 저 발언에 불만은 없단 뜻인가.’
성윤 정도는 이제 막 알에서 부화한 햇병아리로 치부할 수 있을 정도로 경험을 쌓은 그인 만큼, 그레이스 공주의 발언을 이해하고 공감한 거라고 성윤은 이해했다.
성윤은 다시 그레이스에게 집중했다.
“소모된 젬은 채우셨습니까?”
“정말 중요한 주력 마법은 대부분 살아남았어요. 그 마법들의 위력을 증폭하거나 발동 시간을 줄이는 등의, 마법을 보조할 젬이 문제인데 그것들도 예비를 꺼내거나 구매를 해서 다시 채워 넣었어요. 벌어 놓은 돈의 대부분이 날아갔죠.”
그레이스가 이제는 땡전 한 푼 없다는 듯 손을 털어 보였다.
“전력은 확실히 예전보다 더 떨어질 테지만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닐 거예요.”
“지원을 받으시진 않은 모양이군요.”
“그게 싫어서 파티원으로 받아달라고 하는 걸요.”
그러며 그레이스는 옆에 있는 러셀을 흘겨봤다.
“그래도 여러모로 계속 손을 뻗치는 분이 있기는 하지만요.”
러셀은 헛기침을 했다. 고개를 돌리고 딴청을 피웠다.
“테일러 씨의 마음은 알겠습니다만, 너무 결벽증처럼 피할 일은 아닙니다. 저도 여기 있는 팀 씨와 에밀리 씨도 각각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여기까지 온 것이기도 하니까요. 거기다 러셀 경은 ‘그레이스 공주님’이 아닌 ‘테일러 씨’에게 도움을 주고 싶을 겁니다.”
“그래, 그렇지! 그레이스가 공주인가 아닌가는 상관없이 그레이스니까 준 거야! 자네 정말 마음에 드는구먼!”
러셀이 크게 웃으며 일어서 성윤의 어깨를 퍽퍽 두드렸다. 이것도 노익장이라고 해야 할까. 연결자의 근력 때문에 어깨가 아팠다. 엄청.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군요.”
자신이 너무 완고하게 굴어 왔는가. 그레이스는 조금 생각을 바꿀 필요를 느꼈다.
하지만 방금 성윤이 한 말은 놀라운 것이었다. 실제로 성윤이 여러 도움을 받아 여기까지 성장한 것은 맞다.
최초로 지민의 도움이 있었고 그 외에 첼시와 로스 남매, 선아, 현우 그리고 눈앞의 그레이스까지.
그러나 만약 친구와 아내에게 막 배신당한 때의 성윤이었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말이기도 하다.
그건 성윤의 심적 변화가 얼마나 진행됐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장면이었다.
하나, 당사자인 성윤도 자기가 얼마나 변했는지를 지금은 깨닫지 못 하고 있었다.
성윤은 질문을 계속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어째서 저희였습니까?”
“이유는 몇 개 있어요. 저번에 본 당신들의 실력도 있고, 당신들이 대미궁을 노린다는 점도 있죠.”
그러고 보니 예전에 자신들이 대미궁을 노린다고 언뜻 흘렸던 기억이 났다.
“대미궁을 노리는 파티는 소수에요. 충분히 관심을 가질 만해요.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레이스는 성윤을 똑바로 바라봤다.
“당신은 제가 ‘테일러’라고 불러달란 후로 절대로 저를 공주 취급하지 않았어요.”
옆에서 팀과 에밀리가 움찔하는 게 느껴진다. 그들도 나름대로 그레이스의 부탁을 들어주긴 했지만 행동과 어투에서 잠깐씩 그녀를 공주 취급하는 모습이 보인 건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 필요하다면 충분히 당신을 버릴 수도 있는 사람이라 느꼈단 겁니까?”
“그래요.”
불쾌하다면 불쾌한 말. 하지만 듣는 그레이스는 오히려 엷게 미소까지 지으며 긍정했다.
“어떻게 할 건가?”
러셀이 묻는다. 그레이스가 긴장한 눈초리로 쳐다봤다.
“확실히 나쁜 조건은 아니군요.”
“그럼…!”
그레이스의 눈이 기대에 부풀었다.
“동료와 상의한 뒤에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레이스와 러셀은 물론이고 성윤과 그레이스의 대화를 숨죽이고 보고 있던 팀과 에밀리조차 맥이 탁 풀렸다. 영락없이 성윤이 지금 결정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러셀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동료와 상의를 해야겠지.”
그는 로스 남매에게 시선을 돌렸다.
“긍정적으로 검토해주길 바라겠네.”
“아, 네!”
팀이 얼떨떨한 말투로 대답을 했다.
파티에 대한 대략적인 얘기가 끝났다. 하지만 성윤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영사관에 와 높으신 분을 만나면 반드시 물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 사건에 대한 처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번에 겪은 사건은 단순히 영국의 공주님이 실종된 정도의 사건이 아니다.
“안 그래도 자네들한테 그 얘기도 하려고 했어.”
러셀이 티스푼을 휘휘 저었다. 하지만 그 가벼운 손짓에 상당한 고뇌가 섞여 있다는 걸 성윤은 눈치 챌 수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거리의 상태를 봤나?”
“인적이 상당히 드물어졌더군요.”
을씨년스럽다는 말이 딱 들어맞을 정도로 사람이 줄어든 게 눈에 보였다.
특히 성윤 일행이 살고 있는 외곽 쪽 저가 주거 구역이라면 몰라도 암스트롱의 주요 기관 대부분이 모여 있는 여기 1지구조차 사람이 줄어 든 게 훤히 보일 정도였다.
“그럴 수밖에. 미궁에서 마력이 새고 몬스터가 바깥으로 나왔어. 적어도 미궁 바깥은 안전하다는 상식이 깨진 거지.”
“그 미궁은 어떻게 됐습니까? 분명 테일러 씨의 미궁이었죠?”
“완전히 원상태로 돌아갔어. 미궁 바깥의 마력도 사라졌고, 국지적 마나 스트림도 포착되지 않아.”
“국지적 마나 스트림?”
흘려들을 수 없는 단어가 들렸다.
“그래. 자네들이 마나 스트림 때문에 한창 스켈레톤과 싸우고 있을 때, 내가 조사를 하던 곳을 포함해 다른 구역은 잠잠했어. 딱 자네들이 있던 곳만 마나가 난리를 피운 게지.”
“…그런 현상이 자주 일어납니까?”
“나도 처음 본 현상이야.”
러셀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암스트롱이고 각국이고 간에 거듭되는 이상 현상 때문에 난리가 났어. 일각에서는 암스트롱을 폐쇄하자는 말까지 나오는 형편이니.”
“그럼 곤란한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닐 텐데요.”
“그렇지. 그래서 지금 그 의견은 소수의견일 뿐이야. 문제는 아무리 소수라도 그런 의견마저 튀어나올 정도로 지금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거지.”
“그래서 사람들이 떠나고 있군요.”
“지진에서 이번 사태까지 이상한 일이 연이어 일어났으니. 불안하겠지.”
하지만 이해하고 동정하며 끝날 문제가 아니다.
“그럼 암스트롱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에밀리가 걱정 가득한 음색으로 물었다.
연결자들이 아무리 돈이 많다 하더라도 물건을 팔지 않으면 아무런 가치조차 없다.
게다가 암스트롱은 연결자들의 돈을 노리고 온갖 고급 서비스들이 들어서 있는 곳.
그것들이 사라진다면 연결자들의 고통은 더욱 커질 것이다. 물론 연결자들의 돈을 어떻게든 가져가려는 지구의 나라들도 곤란할 수밖에 없다.
“일단은 현상 유지를 한다는 입장이네. 아직 그 특이한 현상은 그레이스의 미궁에서밖에 발견되지 않았으니까. 거기에 당장 암스트롱을 폐쇄할 수도 없지. 경제, 사회 온갖 곳에서 혼란이 장난 아닐 테니까. 하지만 사람들이 떠나는 것까진 막지 못 해. 하지만 너무 걱정은 하지 마. 의외로 암스트롱을 벗어나는 사람들이 적기도 해. 암스트롱에서 장사를 하는 것만으로도 천문학적인 돈을 버니, 목숨 정도는 걸어보는 사람들이 당연히 나오지.”
아무리 돈보다 목숨이라고 해도 돈의 액수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사람들은 위험 부담을 안으면서도 계속 목을 들이민다. 때문에 적어도 당장 암스트롱이 몰락하는 사태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나쁜 정보만 있는 것도 아냐.”
“좋은 정보라도 있습니까?”
“자네들이 전투를 할 때 도망간 정부 직원들을 기억하나?”
“아, 그 분들이 있었군요. 몸은 괜찮으시답니까?”
“다행히 팔팔하다네.”
그건 분명 좋은 정보였다. 하지만 동시에 놀라운 정보이기도 했다.
“무척 이상한 일이지.”
“…그러고 보니 그분들은 마력에 노출됐었죠.”
당시에 성윤도 이상하게 생각했었던 기억이 났다. 스켈레톤이라는 무지막지한 위험이 당장 눈앞에 있어 바로 생각을 접었지만.
“그것뿐만이 아냐. 자네들이 탈출할 때 월면주행차를 사용했었지?”
“그러고 보니….”
미궁 안에는 마력의 영향으로 모든 전자기기가 작동을 멈춘다. 하지만 성윤이 탈출할 때 쓴 월면주행차는 분명 작동했다. 몬스터가 미궁 밖으로 기어나올 정도로 마력이 퍼져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생각을 못 했어.’
성윤은 내심 등허리가 서늘해짐을 느꼈다. 월면주행차의 동력원은 분명 월석이지만 차를 직접적으로 움직이는 에너지원은 전기다.
만약 그때 월면주행차가 마력 때문에 작동을 하지 않았다면 그 결과는 생각하기도 싫다. 그건 분명 작전을 짠 성윤의 실수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지만 너무 괘념치 말게. 실제로 당시에 그 실수를 알아차리지 못한 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니까. 단, 그 실수를 교훈삼아 다시는 저질러선 안 돼.”
“명심하겠습니다.”
“좋아. 젊은 사람이 성장하는 걸 보는 건 기분이 좋다니까.”
러셀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쨌든 미궁에서 새어 나온 마력은 직원들을 해치지도 않고 기계 장치에도 영향을 끼치지 않았어. 검사를 더 해야겠지만 미궁 밖으로 나온 마력이 정말로 보통 사람에게도 무해하다면 한시름 더는 거지. 지금 가장 걱정되는 건 대미궁과 시작의 미궁에서 마력이 새서 암스트롱에 사는 연결자가 아닌 사람들이 몰살하는 거니까.”
“제발 무해하길 바라야겠군요.”
“그렇지.”
그걸로 성윤이 듣고 싶었던 얘기는 끝났다.
“용건은 모두 끝난 것 같군요. 그럼 저희는 일어나 보겠습니다.”
성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을 배웅하기 위해 러셀과 그레이스가 같이 일어섰다.
“파티에 대해서는 잘 부탁드려요.”
“최대한 긍정적으로 검토해보죠.”
그레이스에게 대답해준 성윤은 로스 남매를 데리고 방을 나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