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4화
타타탓!
미궁 깊은 곳에서 달리는 소리가 들린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미궁 안쪽에서 사람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아마도 성윤 일행 외의, 그레이스를 구하러 들어갔던 연결자들일 것이다.
파티 몇 개가 합친 무리인지 수가 많았다. 열 몇 명은 되어 보였다.
하지만 달려 나오는 건 그들만이 아니었다.
“…늦었네요.”
에밀리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미궁 안쪽에서 등장한 사람들 뒤로 스물은 넘어 보이는 몬스터들이 달려 오고 있었다.
그것도 전부 상당한 수준의 몬스터들로, 사이클롭스, 스켈레톤 수준의 몬스터들이었다.
“도망칠까요?”
팀의 물음에 성윤은 고개를 저었다.
“어디로 말이죠? 저놈들도 미궁 바깥까지 쫓아올 게 뻔한데요.”
성윤은 자신의 디바이스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아직까지 폭주는 계속되고 있었다.
‘바로 폭주를 풀지 않아서 다행이군.’
하지만 과연 지금 이 상태로 자신들이 저 몬스터들을 해치울 수 있는지는 의심스러웠다. 일단 지금 도망 오고 있는 사람들과 협력은 필수였다.
“어이! 이봐요!”
성윤이 큰 소리로 외쳤다.
“뭐 하는 겁니까! 빨리 미궁 밖으로 도망쳐요!”
맨 앞에서 도망치고 있는 남자가 황급히 마주 외쳤다.
“미궁 밖으로 도망쳐도 소용없습니다! 지금은 몬스터들이 미궁 바깥까지 따라 나와요!”
“그게 뭔 놈의 개소리야!”
성윤에게 먼저 말을 건 사람은 충격을 먹은 얼굴을 했지만 그 뒤를 따라오던 남자가 대번에 욕설을 내뱉었다.
그리고 반응을 보아하니 성윤의 말을 믿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아니, 오히려 성윤을 자신들의 탈출을 막는 방해물로 인식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역시로군.’
신뢰도 증거도 없이 지금껏 믿어 온 상식을 뒤집어엎으라는 말을 한 것이다.
쉽게 받아들여질 리 없다. 이럴 땐 증거를 들이대고 차분히 설명을 해 상대를 납득시켜야 한다.
‘문제는 그럴 짬이 없다는 건데.’
짬은커녕 까딱하다가는 목이 날아갈 판국이다.
“이 분의 말은 사실이에요, 여러분! 지금은 힘을 모아야 합니다!”
성윤의 뒤쪽에 있던 그레이스가 앞으로 나섰다.
도망치던 사람들이 그레이스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성윤의 말을 믿지 않는 걸 넘어 성윤의 의도 자체를 의심하던 기색이 싹 사라졌다.
‘과연, 사랑받는 공주님의 말은 무게 자체가 다르군.’
그리고 이번엔 그 사랑받는 공주님에게 도움을 톡톡히 받을 것 같았다.
“정말입니까?”
어느새 성윤 곁에 도달한 사람 중 한 명이 물었다. 성윤에게 도망치라고 외친 사람이었다.
“정말입니다.”
성윤은 담담하게 말했다. 질문한 사람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몬스터들이 미궁 바깥까지 따라온다는 의미를 정확히 캐치한 것 같았다.
그나마 일이 잘 풀린다고 성윤이 생각했을 때였다.
그의 옆을 누군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궁 입구로 도망가는 그는 성윤의 말에 반발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이봐요! 이대로 도망가도 바깥에서 몬스터에게 전부 죽을 뿐이라니까요!”
그레이스가 다시 외쳤다.
도망가던 사내가 고개만 돌려 성윤 일행을 쳐다봤다. 그리고 중지를 세웠다.
“좆 까, 씨발! 그딴 헛소리를 믿을 줄 알아! 그럼 니 새끼들이 막던가! 우린 네년을 구하러 왔다가 이 꼴이 났다고! 네년이 책임을 져!”
그 말을 남기고 미궁 밖으로 쏙 빠져나갔다.
그레이스는 입을 다물었다. 얼굴이 창백한 게 무척 충격을 먹은 것 같았다.
‘아무리 험한 생활을 한다고 해도 테일러 씨에게 정면으로 저딴 말을 날리는 놈은 없었겠지.’
성윤은 내심 혀를 찼다.
하지만 문제는 그레이스가 충격을 먹은 게 아니었다.
힐끔! 힐끔!
성윤의 일행 근처에 멈춰 섰던 사람들이 눈치를 보더니 미궁 입구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공주님의 말도 소용이 없었군.’
군중심리로 생긴 용기를 발휘해 하나같이 미궁 입구로 뛰어 가는 사람들을 성윤은 힐끔 쳐다봤다.
그중에는 성윤에게 도망치라고 말을 걸고 그레이스 공주의 말을 믿는 것 같았던 사내마저 섞여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성윤 일행만으로 저 몬스터들을 감당할 순 없다.
“에밀리 씨.”
성윤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레이스를 위로하고 있던 에밀리를 불렀다.
“네?”
“지금 당장 우리 월면주행차에 문을 열고 시동을 걸어 놓으세요.”
성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에밀리는 여타 다른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윤은 이번엔 그레이스를 쳐다봤다.
“테일러 씨는 월면주행차에 시동이 걸리면 우리한테 신호를 보내고 미궁 입구에 아까의 그 냉기 마법을 시전해 주십시오.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레이스가 성윤을 바라본다. 아직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모습이다.
하지만 고개는 끄덕였다.
‘정말로 당찬 사람이야.’
성윤은 감탄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팀을 바라봤다.
“팀 씨는 저와 함께 미궁 입구에서 몬스터들을 최대한 막아 보죠.”
“…네?”
팀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에밀리와 그레이스를 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아무리 저와 성윤 씨라도 저것들을 막지는 못할 것 같은데요?”
생각보다 쉽게 잡긴 했지만 스켈레톤 한 마리를 해치우는 데도 네 명이서 엄청 공을 들이지 않았는가.
하지만 성윤은 단호했다.
“안 하면 여기서 죽습니다.”
팀은 입을 다물었다.
“죽일 필요는 없습니다. 치명상을 입힐 필요도 없어요. 어차피 몇 놈 죽인다고 상황이 바뀌진 않습니다. 우리 임무는 탈출 준비가 될 때까지 몬스터들을 미궁 안에 가둬 놓는 겁니다.”
“…까짓것 한번 해보죠!”
억누르는 공포를 떨쳐 내려는 것처럼 팀이 자신감 있게 말을 내뱉었다.
억지로 짜낸 용기라는 게 훤히 보였지만 공포에 부들부들 떠는 것보다는 나았다.
“우리가 몬스터들을 잡아 놓고 에밀리 씨가 탈출 준비를 마친 후, 테일러 씨의 마법이 몬스터들을 잠깐이라도 막아 놓는 사이 우리는 바로 월면주행차를 타고 이곳을 빠져나갈 겁니다.”
“잠깐만요! 그럼 방금 전의 사람들은 어떻게 할 건가요?”
그레이스가 다급하게 물었다.
그들이 미궁에서 나가자마자 월면주행차를 타고 바로 미궁 앞에서 벗어났다면 괜찮지만, 만약 몬스터들이 바깥으로 나오지 못한다는 상식에 얽매여 미궁 앞에 털퍼덕 주저앉아 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버려야죠.”
성윤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팀이 코를 씰룩였고 에밀리의 눈이 아래로 깔렸다.
“…그 수밖에 없는 건가요?”
의외로 그레이스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성윤은 단호하게 답했다.
“우리는 저들을 구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리고 계약은 어디까지나 그레이스 공주의 보호뿐이었으니까.’
그 외의 이유로 목숨을 걸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알겠어요.”
다행히 그레이스는 수긍했다.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설명을 하면 납득한다. 성윤은 그레이스에 대한 평가를 한 단계 더 올렸다.
‘동료들이 도망가라고 할 때는 버팅긴 것 같지만….’
그 정도로 모질지는 못한 듯싶었다.
“자, 그럼 우리도 뜁시다!”
어느새 몬스터들이 상당히 가까워져 있었다.
성윤은 그레이스와 에밀리를 앞세운 후 팀과 함께 뒤의 몬스터들을 견제하면서 입구로 뛰기 시작했다.
에밀리와 그레이스는 입구를 지나쳐 그대로 뛰었고 성윤과 팀은 입구 근처에서 반전해 아직 빛을 흘리고 있는 무기를 들고 미궁 입구를 막아섰다.
갑자기 뛰어 나온 두 사람을 사람들이 쳐다본다. 먼저 미궁을 빠져나간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보고 그레이스와 에밀리가 움찔했다. 하지만 뛰는 건 멈추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경고 한 마디는 해주고 싶었지만 대기가 없는 이상 말을 하지 못하니 어쩔 수 없었다.
‘역시 긴장 풀고 나뒹굴고 있었군.’
성윤도 미궁 입구를 통해 그들을 볼 수 있었다.
찝찝해하는 사람은 있을 것이다. 긴가민가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사람들은 바로 미궁 앞을 빠져나간다는 선택을 하지 않았다.
‘이러니 군중심리가 무서운 거지. 대다수가 죽을 수도 있겠어.’
불쌍하긴 하다. 안타깝기도 하다. 남에게 신경을 안 쓰게 된 성윤이었지만 그렇다고 남의 생명을 함부로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내 코가 석자야.’
순식간에 몰아닥치는 몬스터의 공격을 성윤은 방패로 막았다. 좁은 미궁 입구를 막고 어떻게든 몬스터들을 통과시키지 않기 위해 정신없이 검과 방패를 휘둘렀다.
“흡!”
팔에 전해지는 무거운 충격에 신음을 내뱉었다. 그 사이로 몬스터의 날카로운 손톱이 스쳐지나갔다.
우지직!
입고 있는 갑옷이 손톱에 뚫린다. 상처가 화끈거렸다.
그나마 갑옷이 막아서 이 정도이지 맨몸으로 맞았다면 허리에 1/3 정도는 뜯겨나갔을 것이다.
다급히 허리를 움직여 손톱을 빼내고는 검으로 몬스터를 위협했다.
파악!
“크윽!”
이번엔 옆구리에 몬스터의 주먹이 스쳐지나갔다. 날아갈 것 같은 몸을 순간 자신의 몸에 중력 부하를 걸어 고정한다.
‘갈비뼈가 나간 것 같은데.’
옆구리가 엄청나게 아파 왔다. 슬쩍 상처 부위를 보니 갑옷이 움푹 우그러들어 있었다.
‘얼마 못 버티겠어.’
옆으로 날아오는 칼을 쳐내면서 성윤은 생각했다.
서걱!
“윽!”
자기가 생각해도 놀라울 정도로 잘 막고 있었지만 결국 한계가 왔다. 몬스터의 칼 하나가 성윤의 왼쪽 어깨에 깊이 틀어박혔다.
“젠장!”
몸을 비틀어 칼을 빼낸다. 하지만 이번 부상은 치명적이었다.
‘왼쪽 팔이 움직이질 않아!’
신경이 잘려나간 것일까. 왼팔에 감각이 없었다.
마치 바람 빠진 풍선처럼 축 늘어져 몸의 움직임에 맞춰 이리저리 흔들릴 뿐이었다.
지금 왼팔은 방해물 이상이 아니었다. 오른손에 든 검을 역소환시키고 방패를 오른손에 들었다.
성윤이 이를 악물고 미친 듯이 몰려오는 몬스터를 향해 방패를 들이밀 때였다.
타악!
미약한 소리였지만 분명 들렸다. 조그마한 돌덩이가 떨어지는 소리가.
성윤과 팀이 미궁 바깥이 아닌, 안쪽에서 버티던 이유. 그건 소리로 신호를 전달받기 위해서였다.
쾅!
또다시 날아오는 공격을 방패로 막는다.
하지만 성윤은 이번엔 몬스터가 해오는 공격에 버티지 않았다. 오히려 그 기세를 타고 뒤로 날아갔다.
탁!
지면에 발이 닿자마자 바로 등을 돌린다.
저 멀리 돌을 던져 성윤과 팀에게 신호를 준 그레이스가 긴장된 표정으로 손을 뻗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대로 미궁 밖으로 내달렸다. 온몸이 아프고 힘이 들어가지 않은 왼팔이 덜렁거렸지만, 그래도 필사적으로 달렸다.
‘그나마 다리는 다친 곳이 적어서 다행인가.’
뛰는 데 문제가 없는 것이 정말로 고마웠다.
‘팀 씨도 무사한 모양이군.’
그의 옆으로 팀의 육중한 덩치가 쏜살같이 달리고 있었다.
그도 만만찮은 부상을 입고 있었지만 다행히 달리는 건 가능한 것 같았다.
‘그래도 상처는 가자마자 치료해야겠어.’
팀은 옆구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언뜻언뜻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보이는 게 내장까지 비집어나올 정도의 큰 상처 같았다.
하지만 그 모든 건 일단 차를 탄 후에나 할 일이다.
목숨을 살리기 위해 열심히 뛰는 그들 사이로 무형의 기운이 지나쳤다.
투확!
미궁 입구에 극도의 냉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성윤과 팀을 회쳐버리겠다는 듯 달려드는 몬스터들의 움직임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퍼억!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끌기 위해 미궁 입구에 대지 마법과 중력 마법까지 갈긴 후 성윤은 바로 월면주행차로 달렸다.
성윤과 팀이 미궁 입구에서 전투를 하자 그제야 조금 위기감을 느꼈는지 연결자들이 미궁 입구에서 슬슬 거리를 두는 게 보인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 몬스터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성윤은 단호하게 그들에게 향하는 시선을 끊고 자신의 월면주행차로 달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