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2화
그리고 침묵이 내려앉았다. 말을 한 그레이스나 들은 성윤 일행이나 별 다른 말이 없었다.
로스 남매가 그레이스를 동정 섞인 눈으로 쳐다봤다. 하지만 성윤은 로스 남매와는 다르게 그레이스의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또 다른 이상이 생겼어.’
안 그래도 목숨을 걸고 있는 판에 계속된 이변은 절대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하지만 성윤은 곧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레이스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힘드실 텐데 쾌히 얘기를 해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아뇨. 저도 차라리 시원하네요.”
그녀의 푸른 눈이 성윤을 바라 봤다.
“그런데 너무 늦게 묻는 것 같은데 여러분은 누구신가요?”
그러고 보니 아직 자기소개도 하지 않았다.
“제 이름은 우성윤이라고 합니다. 퍼스트 네임이 성윤, 라스트 네임이 우입니다.”
“동양식 이름이 그렇다죠? 도와주셔서 감사드려요, 우 씨.”
그녀가 감사 인사를 했다. 하지만 성윤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예의 차리실 필요 없습니다. 보상도 있고, 예전 테일러 씨가 도와주신 것에 대한 보답을 하는 거니까요.”
“…우리 구면인가요?”
그레이스가 성윤의 얼굴을 뜯어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기억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구면이라고 할 것까진 아닙니다. 얼마 전 암스트롱에서 연결자 한 명이 시비를 거는 것에 대해서 도와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레이스가 머리를 굴려 옛 기억을 헤집었다.
“아!”
그녀가 손뼉을 쳤다.
“그때, 연인과 계셨던 분!”
그레이스의 말에 에밀리가 먼저 반응했다.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성윤을 바라 봤다.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연인이 아닙니다.”
“아, 참! 그랬었죠.”
성윤이 부정하자 놀랐던 에밀리의 얼굴이 다시 원상태로 돌아 왔다.
“그럼 그것 때문에 절 구하러 오신 건가요?”
“겸사겸사입니다. 보상이 탐나기도 했고요.”
그레이스는 놀랐다. 성윤과의 만남은 흐릿하긴 해도 기억이 난다. 그레이스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대단한 도움을 줬던 게 아니다.
하지만 그런 작은 인연 하나 때문에 자신을 구하러 오다니. 물론 성윤이야 이것저것 생각한 후에 구하러 온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성윤에게 느낀 조그마한 신뢰를 가슴에 품은 채 그녀는 로스 남매와도 인사를 나눴다. 남매에게도 그레이스는 착실하게 인사를 했다.
그때였다.
움찔!
성윤의 손이 떨렸다. 그가 물살을 헤집듯 손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레이스와 로스 남매도 같은 걸 느낀 것 같았다.
로스 남매는 성윤과 비슷한 행동을 보였고 그레이스는 고양이 앞에 선 쥐처럼 굳어버렸다.
‘마나 스트림!’
손에서 느껴지는 건 분명 서서히 격해지고 있는 마나의 흐름이었다.
위험하다. 그레이스의 파티가 그녀를 빼고 전멸한 것도 정상적이지 않은 시기에 일어난 마나스트림 때문이 아니던가.
“뛰어요!”
성윤은 바로 판단을 내리고 사람들에게 명령했다. 로스 남매는 물론 그레이스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힘껏 뛰었다.
그들이 떠난 잠시 후.
화아아악!
미궁이 빛에 물들었다.
다행히 성윤 일행의 앞 쪽에는 별 다른 몬스터들이 나오지 않았다. 그레이스의 말처럼 열 몇 마리가 동시에 튀어나오는 일도 없었고 그렇다고 강한 몬스터가 나오지도 않았다.
“흐랴!”
쩍!
가로막는 몬스터들은 팀의 일격에 무참히 베어 넘겨졌다. 확인사살을 할 여유는 없었다.
그저 간혹 다시 일어나려는 녀석을 맨 뒤에서 따라오던 성윤이 할버드로 찍는 게 다였다.
한참을 달렸다. 몇 개의 층을 단숨에 뛰어올라 1층에 다다랐다. 그대로 출입구까지 뛰었다.
저 멀리 출입구가 보이자 그레이스와 로스 남매가 적이 마음을 놓았다.
하지만 성윤은 달랐다.
그는 마나 스트림 때 입구에 나타난 빅풋 때문에 죽을 뻔한 경험이 있지 않은가.
아니나 다를까.
파앗!
그들의 앞쪽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성윤은 이를 악물었다.
“그대로 뛰세요!”
다행히 미궁의 입구도 얼마 남지 않은 상황. 빛이 나타난 후 그 속에서 몬스터가 나타나기까지는 조금의 시간이 필요하다. 일행은 덩치를 키워가는 빛을 빠른 속도로 지나쳤다.
후욱!
빛이 사라지고 몬스터가 드러났다. 일행은 모두 고개만 돌려 등장한 몬스터를 쳐다봤다.
“빌어먹을!”
팀이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는 게 보인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심정은 마찬가지였다.
나타난 몬스터는 두툼한 갑옷을 입고 있었다. 몸통은 물론이고 팔과 다리까지 물샐 틈 없이 덮고 있는 갑옷은 무척 단단해 보였다. 거기다 길게 난 뿔이 붙어 있는 투구와 날카로운 칼까지.
하지만 진짜 몬스터의 특성은 따로 있었다.
피부가 없다. 근육이 없다. 피도 혈관도 내장도 없다. 있는 거라곤 새하얀 뼈와 두개골의 눈구멍 사이로 보이는 시뻘건 불길뿐.
“스켈레톤.”
성윤이 신음했다.
예전 성윤이 즐기던 게임에서 스켈레톤은 그다지 강한 몬스터가 아니었지만 적어도 미궁에서는 다르다. 저 녀석은 어찌 보면 사이클롭스보다도 윗줄인 녀석이다.
녀석의 불꽃같은 불길한 눈동자가 어둠 속에 파묻혀 있는 눈구멍을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그러다 성윤과 일행을 포착했다.
딱! 딱! 딱! 딱!
녀석의 턱뼈가 움직이며 이빨을 부딪치기 시작한다. 성대가 없어 스켈레톤은 다른 몬스터와 달리 괴성이나 포효를 내지르지 못한다.
하지만 오히려 그 무기질적인 이빨 부딪치는 소리가 더 소름 돋게 들리는 건 기분 탓이 아닐 것이다.
탓!
녀석이 일행을 쫓아오기 시작했다. 속도는 빨랐지만 아무래도 일행이 입구로 빠져나오는 편이 더 빠를 것 같았다.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그들은 미궁의 입구를 뛰쳐나왔다.
탈출했다는 생각에 전신에 안도감이 가득 들어찬다. 그들은 그제야 달리는 걸 멈췄다.
미궁 입구는 그들이 들어갈 때와 비슷했다. 그 사이 지원군이 더 왔는지 월면주행차가 더 늘었을 뿐이었다.
미궁에 들어가기 전 만났던, 영국 정부에서 파견된 직원들이 성윤 일행을 보고 눈을 끔벅였다.
그러다가 일행 중 그레이스가 섞여 있는 것을 보고 손을 번쩍 올렸다. 우주복 안에서 커다란 환호를 지르고 있는 게 바이저 너머로 보였다.
그들이 황급히 이쪽으로 달려오는 것이 보인다. 성윤 일행도 몸에 힘을 풀고 미궁에서는 맛볼 수 없는 ‘안전’을 만끽했다. 그건 성윤도 마찬가지.
‘겨우 이번 일도 끝났나.’
이번에 일어난 이상 사태를 지민에게 보고하고 할 수 있으면 첼시와 상담을 해야겠다고 생각할 때였다.
후웅!
부드러운 촉감이 손을 간질였다. 처음엔 산들 바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달에서 바람이 불 리 없다. 촉감도 조금은 달랐다.
이건 마력의 움직임이었다.
성윤의 등허리가 서늘해졌다. 뒤를 돌아 봤다. 붉은 눈동자가 미궁 입구에서 자신들을 보고 있었다.
몬스터들은 절대로 마력이 없는 곳에 오지 않고, 그러니 미궁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건 상식이다.
당연히 스켈레톤도 마찬가지.
하지만 성윤의 불길한 생각은 점점 더 깊어졌다.
‘이상이 생겼다면 다른 이상 사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을 했어야 하는데 말이죠.’
아까 들은 그레이스의 말이 떠올랐다.
터억!
녀석의 발이 입구에 걸쳤다. 그리고 무릎을 굽히는 게 보였다.
‘씨발!’
급히 경고를 날리려고 했지만 여기는 대기가 없어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이 이상 사태를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챈 기색도 없었다.
‘어쩔 수 없나!’
성윤은 바로 창을 소환했다. 그대로 달려오는 사람들에게 던졌다. 그들이 화들짝 놀라 몸을 멈추는 게 보인다.
성윤은 이번엔 양쪽으로 손을 뻗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에밀리와 그레이스 공주를 껴안았다. 놀란 눈초리로 성윤에게 고개를 돌리던 그녀들이 더욱 당황했다.
‘미안하긴 하지만.’
퍼억!
조금 더 떨어져 있던 팀은 발로 걷어찼다. 그가 경악한 얼굴로 뒤로 날아갔다. 힘을 싣긴 했지만 갑옷 위를 걷어찼으니 무거운 대미지는 없을 것이다.
성윤은 이번엔 바닥을 걷어찼다.
에밀리와 그레이스를 안은 그의 몸이 뒤로 쭈욱 날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그리고 빠른 속도로 이루어진 행위였다.
그때였다.
퍼어어어엉!
소리는 없다. 하지만 폭탄 터지듯 퍼지는 먼지와 땅을 울리는 진동이 주변을 휩쓸었다.
성윤을 미친 사람 보듯 쳐다보던 사람들이 그것을 눈치 챘다. 경악한 눈초리로 자신들이 있던 곳에 피어 오른 먼지 기둥을 바라본다.
성윤은 가볍게 착지한 후, 에밀리와 그레이스를 내려놓고 먼지 기둥을 경계했다.
‘안 보여.’
시야가 완전히 차단돼 짜증이 났다. 하지만 그건 적도 마찬가지.
스으윽!
자욱한 먼지 기둥을 뚫고 녀석이 걸어 나왔다. 천천히 그리고 여유롭게. 마치 사냥감을 몰아세운 포식자 같은 모습이었다.
‘어떡하지.’
성윤은 검을 녀석에게 겨누면서 긴장했다.
상대는 사이클롭스보다 강한 녀석. 설상가상으로 필요해서 한 일이긴 했지만 팀과는 거리가 떨어져버렸다.
‘도망쳐야 할까.’
일단 그게 베스트다. 하지만 지금 아마도 미궁에서 흘러나왔으리라 생각한 마력이 어디까지 퍼져있느냐가 문제다.
이 마력이 굉장히 넓은 지역에 퍼져 있다면 그 범위를 벗어나기 전에 쫓기다 죽을 게 뻔하다.
‘그나저나 저 인간들은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스켈레톤을 보고 엉덩이를 질질 끌며 뒤로 가고 있는 직원들이 보인다.
적어도 저기까지는 마력의 영역일 터. 하지만 적어도 그들이 다른 사람들이 미궁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인 마력 중독에 빠진 느낌은 들지 않았다.
‘지금은 알 바 아냐.’
호기심도 살아남은 이후다. 성윤은 뒤에 있는 에밀리와 그레이스에게 지시를 내리려고 했다.
목소리가 안 나와 의사소통이 어려운 것에 불만을 느낄 때.
타앗!
스켈레톤이 움직였다. 녀석의 목표는 엉덩이를 질질 끌고 가는 직원들이었다.
‘젠장!’
성윤은 바로 대지의 마법을 발동했다.
투확!
옅게 깔린 먼지를 뚫고 석순들이 솟아올랐다. 마법은 성공적으로 스켈레톤의 움직임을 멈췄다. 하지만 성윤은 좋아할 수 없었다.
스켈레톤은 달려드는 걸 멈추고 중간이 부서져 나간 석순 위에서 성윤을 내려다봤다. 녀석의 곁에 있던 석순은 하나같이 스켈레톤을 꿰뚫지 못하고 깨져 있었다.
‘켄타우로스의 마법 저항력도 저 정돈 아니었는데.’
성윤은 이 싸움이 무척 어려울 거라는 걸 새삼 느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직원들이 몸을 일으켜 황급히 달아난 것이다.
그 사이에 팀이 성윤의 곁으로 달려 왔다.
후웅!
몸이 가벼워지고 힘이 넘친다. 에밀리가 보조 마법을 걸어준 것이다.
평소보다 더 효과가 높은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젬을 폭주시킨 모양이었다.
성윤도 바로 젬을 폭주시켰다.
‘공주님은 어떻게 해야 하지?’
역시 피난시키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는 그레이스에게 도망치라며 뒤쪽을 가리켰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성윤이 인상을 찌푸리려는 찰나, 그녀가 자신의 디바이스를 들어올렸다.
‘…돌아왔군.’
그녀의 디바이스에 박힌 젬이 선명한 색을 보이고 있었다. 게다가 그 중 두 개는 실버 젬이었다.
그녀가 갖고 있던 쥬얼 젬은 다행히 가루가 되는 운명을 피한 모양이었다.
‘화력 집중형이랬지?’
마법의 위력은 굉장히 강하다. 그녀의 능력이 돌아왔다면 좋은 전력이 될 것이다.
성윤은 그녀를 전투에 참가시키기로 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의사소통이 필수. 성윤은 미궁 안을 가리키고는 뛰었다.
“대체 뭐야, 저 녀석!”
미궁에 들어와 말문이 트이자마자 팀이 소리쳤다.
“저 녀석에 대한 건 나중에 알아보고, 일단 목숨부터 지키고 보죠.”
그러며 성윤은 그레이스를 쳐다봤다.
“테일러 씨와 느긋하게 작전이나 진형에 대해 말할 시간은 없습니다. 마법을 준비했다가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을 때 무조건 쏘세요. 물론 저희한테 피하라고 외쳐주시는 것 잊지 마시고요.”
“알겠어요.”
“갑시다, 팀 씨.”
성윤은 자신들을 따라 다시 미궁으로 들어온 스켈레톤에게 팀과 함께 돌진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