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의 미궁-141화 (141/354)

제141화

성윤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의 미인을 꺼려하는 성질이 조금 나아진 것인가 아니면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것인가.

뛰어난 미녀인 그레이스 공주에게 다가가는 성윤의 움직임에 망설임은 적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멈칫멈칫 하는 면은 보였다.

그레이스 공주의 얼굴에 손을 갖다 댔다. 온기는 있었다.

‘일단 살아는 있는 것 같은데.’

심장이 뛰지도 않고 호흡도 하지 않는 연결자는 생사를 확인하기가 까다롭다고 느끼며, 성윤은 가볍게 그레이스의 몸을 흔들었다.

“이봐요!”

하지만 그레이스는 눈을 뜨지 않았다.

“주, 죽었나요?”

에밀리가 성윤의 뒤편에 서서 불안한 눈으로 그레이스를 쳐다봤다.

“죽은 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저 잠든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기절한 것 같은데요.”

만약 그저 잠이 든 정도였다면 키메라와 전투를 했을 때 일어났을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찾긴 찾았군요.”

솔직히 성윤은 그레이스의 생존률을 굉장히 낮게 봤다. 수습한 두 구의 시체처럼 시체라도 찾을 수 있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 바로 올라가죠.”

성윤이 에밀리를 쳐다봤다.

성윤과 팀은 아무래도 급작스러운 사태에 대비해야 하기 때문에 그레이스를 업으려면 아무래도 후위인 에밀리가 나았다.

연결자라서 여성 한 명 업는다 해도 체력 손실이 크지 않을 뿐더러 아무래도 같은 여자가 업는 게 그레이스에게도 나으리라 생각됐기 때문이다.

에밀리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군말 없이 그녀를 업었다.

성윤 일행은 바로 미궁을 오르기 시작했다. 팀이 가장 앞에 섰고 중간에 그레이스를 업은 에밀리가 섰다. 성윤은 뒤를 맡았다.

팀과 에밀리는 유명 인사인 그녀가 신기한지 힐끔힐끔 쳐다봤다.

올라가는 길은 상당히 수월했다. 출현하는 몬스터들은 보통 그 층계의 수준에 맞는 몬스터들. 키메라 같은 녀석들이 더 나오진 않았다.

하루가 지나고 여전히 성윤 일행이 미궁의 입구를 향해서 나아갈 때였다.

“으음.”

자그마한 신음 소리가 들린다. 연결자의 좋은 귀가 그 자그마한 소리를 포착했다. 세 명의 시선이 바로 소리의 주인인 그레이스에게 돌아갔다.

‘깨어나려는 건가.’

성윤의 예측대로 공주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경련하더니 곧 눈이 스르르 떠졌다.

세상에 나온 아름다운 푸른 눈이 몽롱한 상태에서도 상황파악을 하려는 듯 이리저리 움직인다. 그러다 곧 뇌리가 완전히 각성했는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아, 일어나셨어요?”

그녀를 업고 있던 에밀리가 고개를 돌려 그레이스를 봤다. 그레이스의 눈에 혼란해 하는 빛이 여실히 드러났다. 자신의 안전을 확인하려는 듯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여기는 어디죠?”

붉은 그녀의 입술이 움직였다. 에밀리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내려 놨다. 다행히 그녀는 혼란해하는 와중에도 최대한 침착성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일행에겐 다행인 일이었다.

“저희는 공주님을 구하러 온 사람입니다.”

성윤이 한 걸음 앞에 나섰다. 호위 대상, 그것도 얼마 전까지 목숨의 위협을 받던 사람을 대하는 것이니 성윤의 목소리는 평소답지 않게 부드러웠다.

물론 성윤은 굉장히 어색했지만, 이것도 일이라는 생각에 신혜와 얘기를 하는 자신을 필사적으로 떠올리며 말했다.

“구하러요?”

“네. 공주님이 실종되신 후, 영국 정부에서 공주님의 미궁 주변에 개인 미궁을 갖고 있던 연결자들에게 SOS를 보냈습니다.”

그레이스의 얼굴에 안도감이 서렸다. 혼란해 보이던 눈동자도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다급한 소리로 말했다.

“동료! 제 동료들은 어떻게 됐죠?”

성윤이 살짝 고개를 떨궜다. 옆에서 얘기를 듣고 있던 팀과 에밀리도 고개를 돌렸다.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전달되기에는 충분했다. 그레이스의 낫빛이 창백하게 질렸다.

“한 분은 공주님의 위기를 통신으로 알린 후에 그대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두 분은 저희가 수습했습니다.”

성윤은 보관의 젬이 꽂혀 있는 디바이스를 들어보였다. 이번의 의미도 충분히 전달됐다.

털썩!

그레이스가 무릎을 꿇었다.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그녀의 몸에서 짙은 절망의 아우라가 감돌았다.

로스 남매가 그녀를 안타깝게 쳐다 본다. 성윤도 동료를 추모하는 시간을 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시간을 끌 상황이 아니었다.

“죄송하지만 공주님, 지금 당장 움직이셔야 합니다.”

그녀의 시선이 성윤에게 움직인다. 눈에 그렁그렁한 눈물이 당장이라도 하얀 뺨을 타고 흘러내릴 것 같았다.

어떤 남자라도 무의식적으로 위로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 분위기.

하지만 성윤은 아니었다.

“이 미궁에서 뭔가 이상 사태가 발생했다는 건 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 저희가 있는 층계에 위협적인 몬스터가 있는 건 아니지만 혹시라도 또 이상 사태가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이 정도에서 알아들어 줬으면 싶은데.’

그들 셋만 있으면 모르지만 지금은 호위해야 할 그레이스 공주가 있다. 에밀리가 그녀를 업을 때 언뜻 확인한 그녀의 디바이스에는 곳곳에 빈 곳이 눈에 띠었다.

그나마 남은 젬들도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마 죽은 그녀의 동료들과 같이 젬을 폭주시켰을 것이다.

때문에 그녀의 능력은 무척 떨어져 있을 게 뻔했다. 전력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뭣하다면 신파극이라도 찍어야지.’

‘먼저 간 당신의 동료들도 당신이 살길 바랄 것이다’ 같은 입 바른 말이라도 해야 했다.

‘그것도 통하지 않는다면 강제로라도 끌고 갈 수밖에.’

나중에 일이 커질 가능성도 있지만 그 커진 일을 감당하는 것도 살아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성윤의 걱정이 다행히 그레이스는 스스로 몸을 일으켰다.

“그래요. 당신 말이 맞아요. 지금은 위험한 상황이었죠.”

눈물을 훔치면서도 그녀는 똑바로 성윤을 쳐다봤다.

“실례했어요. 지금 당장 움직이죠.”

“알겠습니다.”

성윤은 팀에게 신호를 보냈다. 팀이 고개를 끄덕이고 아까처럼 앞장섰다.

에밀리가 그레이스에게 다가가 손짓을 하는 게 보인다. 그레이스가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를 따라 갔다.

성윤은 혹시나 뒤에서 있을 습격을 대비하며 역시 열의 맨 후미에 섰다.

‘당찬 공주님이로군.’

힘든 사건이 있었음에도 어깨를 펴고 의젓하게 이동하고 있는 그녀를 뒤에서 보며 성윤은 생각했다.

TV에서 본 행동이나 예전 니콜라스에게 대항했던 행동을 보면, 저러니 공주의 몸으로 직접 목숨 걸고 미궁에 뛰어들 생각을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조금씩 어깨를 떠는 게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난 건 아닌 것 같았다.

그 모습에 찝찝함을 느끼면서도 성윤은 그레이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그레이스의 몸이 순간 멎었다. 팀과 에밀리가 성윤에게 비난의 눈초리를 보냈다.

성윤을 존경하면서 언제나 성윤의 말을 철석같이 듣던 로스 남매가 이런 태도를 보일 정도로 그의 질문은 그레이스의 아물지도 않은 상처를 후벼 파는 말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그레이스는 다시 걸음을 뗐다.

“좋아요.”

“정말로 괜찮나요?”

옆에 있던 에밀리가 물었다.

“괜찮아요. 솔직히 우리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아야 혹시 같은 일이 일어나더라도 대응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죠?”

그레이스가 고개를 돌려 성윤에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상처를 후벼 파는 일이 되더라도 혹시나 하는 상황이 걸린 것이다.

성윤이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이제야 파악한 로스 남매가 조금 멋쩍은 표정으로 성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성윤은 괜찮다고 손짓을 한 후 그레이스를 쳐다봤다.

“저희는 여느 때처럼 미궁 공략을 하고 있었어요. 이제 쥬얼 랭크의 젬 몇 개만 얻으면 파티 전부 대미궁에 들어갈 수 있으니 분위기는 좋았죠.”

성윤은 얼마 전에 본, 그레이스가 나왔던 뉴스를 떠올렸다. 분명 그 때 그레이스가 대미궁에 들어갈 자격을 곧 얻게 될 것 같다고 한 걸 들었다.

“저희가 주로 활동을 하는 층계에 다다른 후 며칠 동안 사냥을 하고 있을 때 그 일이 일어났어요.”

그레이스는 자신의 양 팔을 부여잡았다. 아무리 당차게 행동하고 있어도 공포를 쉽사리 떨쳐낼 수 없었다.

“갑자기 주변 마력이 날뛰기 시작했죠. 네, 마나 스트림이었어요. 하지만 이상해요. 이 미궁의 마나 스트림은 아직 세 달이나 남았는데 말이죠.”

갑작스러운 마나 스트림. 성윤과 팀과 에밀리가 서로 눈을 부딪쳤다. 갑작스러운 마나 스트림이라면 그들도 겪어본 일이다.

“혹시 미궁에 손상을 내셨습니까? 벽을 무너뜨렸거나, 바닥에 구멍을 냈다거나 말입니다.”

성윤이 대표로 물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아뇨. 미궁의 벽은 단단하기 그지없기로 유명한데 저희가 어떻게 부술 수 있나요?”

오히려 성윤을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봤다.

“그럼 공주님을 습격한 게 이상한 로봇 같은 녀석이 아니었습니까?”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강하긴 했지만 습격한 녀석들은 몬스터였어요.”

대체 영문을 알 수 없는 성윤의 질문에 그레이스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성윤은 물론이고 팀과 에밀리도 안색이 굳었다. 그레이스가 경험한 건 자신들과는 또 다른 이상 사태인 것이다.

“…얘기를 계속해도 될까요?”

성윤 일행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잠시 눈치를 보던 그레이스가 입을 열었다.

“실례했습니다, 공주님. 얘기를 계속해주시죠.”

“그것 말인데요. 절 공주님이라고 부르지 말아주세요.”

그러고 보니 그레이스에게 공주란 칭호를 붙이는 건 다른 사람들이 애정을 담아서 멋대로 부르는 행위다. 보아 하니 그레이스는 공주란 칭호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럼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테일러라고 부르세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성이니까요.”

“알겠습니다, 테일러 씨.”

성윤이 테일러라고 부르자 그레이스는 만족했다. 그리고 설명을 계속했다.

“예정에도 없는 마나 스트림 때문에 분명히 당황했지만 그렇다고 심각하게 여기진 않았어요. 마나 스트림 때 몬스터가 튀어나온다고 해도 산발적으로 튀어나오는 정도니, 조금 강한 몬스터가 나온다고 해도 한 마리 정도야 저희 네 명이면 적어도 도망은 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그 생각은 너무 물렀다.

“마나 스트림에 이상이 생겼다면 다른 이상 사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을 했어야 하는데 말이죠.”

그 음성에는 깊은 후회와 슬픔, 자조가 깃들어 있었다.

“올라가는 중에 갑자기 빛이 나타났어요. 몬스터가 나타나는 빛이요. 아까 말했듯이 우리는 자신이 있었어요. 그 빛이 한두 개 정도였다면요.”

자신들을 포위하듯 나타난 빛들 때문에 미궁의 안이 대낮처럼 환하게 물들었었다.

“나타난 건 몬스터였어요. 그것도 굉장히 강한. 한두 마리 정도라면 감당할 수 있었겠지만 녀석들을 숫자가 너무 많았어요.”

정확한 숫자는 기억나지 않지만 열 마리는 충분히 넘었다. 그때부터 생명을 건 사투가 시작됐다.

하지만 젬을 폭주까지 시키며 싸웠음에도 중과부적이었다. 그녀들의 몸에 상처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면 전멸할 상황. 그들 아니, 그레이스를 제외한 세 명은 결단을 내렸다.

그레이스만은 도망시키기로.

그레이스는 처음엔 완강히 거부했다. 어차피 죽을 각오 정도는 미궁에 들어올 때부터 하고 있었다. 동료들을 두고 도망치는 짓은 하기 싫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동료들은 도망가길 거부하는 그녀의 뺨을 때리며 호소했다.

땀과 피, 그리고 흐르는 눈물로 미친 듯이 외쳤던 동료들. 어느 순간, 마치 귀신에 홀린 것처럼 그레이스의 발은 동료들이 뚫어 놓은 퇴로 사이를 달리고 있었다.

“그 이후에는 그저 도망 다녔어요. 화력중시의 마법이 주인 제 젬으로는 혼자서 미궁을 탈출할 수 없었으니까요. 계속 도망 다니다가 피로 때문에 정신을 잃은 것 같은데, 눈을 뜨니 여러분들에게 구해진 상태였어요.”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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