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의 미궁-133화 (133/354)

제133화

오늘도 현우는 양팔에 미녀를 끼고 술을 먹고 있었다. 하지만 성윤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2주 동안 꽤 친분을 쌓은 터라 겨우겨우 자신에게 여자를 붙이려는 시도를 어색하지 않게 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현우의 게이를 보는 것 같은 눈빛은 더욱 깊어졌지만.

“그래, 겪어보니 어때? 상위의 몬스터라는 건.”

몇 잔째인지 모를 술을 들이키며 현우가 물었다. 조용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겁나는 술을 홀짝이며 안주나 축내던 성윤은 아까까지의 몬스터 사냥을 돌아봤다.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과연 현우의 미궁은 최상위급의 미궁다웠다. 현우가 뒤를 봐주지 않았다면 목숨이 100개라도 부족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얻은 것도 많습니다.”

몬스터의 특징과 전투 스타일을 머릿속에 새겨 넣을 수 있었고 갖고 있는 젬들을 더욱 매끄럽게 사용할 수 있게 됐다.

“그렇다면 나도 보람이 있군. 그래도 방심은 절대 금물이야. 대미궁의 몬스터는 같은 종류의 몬스터라도 개인 미궁에 있는 녀석들보다 훨씬 더 강하니까.”

“알겠습니다.”

현우의 조언을 성윤은 가슴 깊이 새겼다.

“아, 그러고 보니 제가 얻은 월석은 언제 처분하는 게 좋겠습니까?”

현우의 개인 미궁에서 나온 월석은 성윤이 잡은 것이든 현우가 잡은 것이든 모두 성윤의 보관의 젬 속에 들어 있었다.

과연 높은 몬스터의 수준을 증명하듯 이번에 얻은 월석은 전부 큼지막했다.

만약 성윤이 보관의 젬을 얻지 못했다면 운반하는 것만 해도 엄청난 수고가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정도의 크기와 양인만큼, 환금했을 때의 가격도 엄청날 것이라 짐작됐다.

하지만 현우는 심드렁해했다.

“그냥 자네 가져.”

“네? 아니, 그래도 이런 거금을 저 혼자 가질 순 없습니다. 무엇보다 적어도 월석의 3/4은 현우 씨가 잡은 몬스터에게서 채취한 거잖습니까.”

성윤의 반박에 현우는 잔을 들어 술을 한 번에 목구멍 안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진심을 털어놨다.

“솔직히 푼돈밖에 못 얻을 그런 월석, 갖고 다니면서 환금하는 것도 귀찮거든.”

“…….”

할 말이 없었다. 성윤이 예상하기로 그가 지금 보관하고 있는 월석을 환금한다면 최하 몇 십 억은 얻을 것이다.

아니, 그것도 적게 잡은 것이다. 그런데 눈앞의 사내는 그런 돈을 푼돈이라고 한다.

최고 랭크 연결자의 무지막지한 금전감각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자네가 가져. 필요 없으면 어디 갖다 버리든가.”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성윤은 그의 은혜, 정확히는 귀찮음을 받기로 했다.

“좋아좋아. 그래야지. 늙은이가 주는 용돈은 거절하는 게 아냐.”

현우는 껄껄 웃었다. 어쩌다 한 번 씩 터지는 그의 늙은이 언급에는 도대체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아직까지 알 수가 없었다.

그 후로도 술자리는 계속 됐다. 현우는 계속해서 술을 들이켰고 성윤은 현우에 맞춰 조금씩 술을 홀짝였다.

대부분 현우가 이야기를 하고 성윤이 듣고 대꾸하거나 맞장구를 치는 수준이었다.

그러길 얼마.

“죄송합니다만, 전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성윤이 말했다.

시계를 보니 상당히 야심한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시곗바늘이 한 바퀴 돌아 로스 남매와 약속한 날이 오늘이 된 상황.

또다시 미궁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최대한 좋은 컨디션으로 있고 싶었다.

성윤은 현우의 투정어린 잔소리를 예상하고 있었지만 의외로 현우는 흔쾌히 허락했다.

“벌써 그런 시간인가? 그래, 가 봐. 오늘까지 늙은이랑 어울리느라 고생했어.”

“아니요. 정말로 도움이 되는 며칠이었습니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성윤을 허리를 꾸벅 숙였다.

“그렇게 말해준다면 다행이고. 위에 방 잡아 놨으니까 오늘 푹 쉬고 또 열심히 공략 하도록 해.”

다시 그 휘황찬란한 방에서 지내야 하는 것인가. 약간 얹힌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하지만 현우의 선의를 거부하진 못한 채 성윤은 술자리에서 벗어나려 일어섰다.“잠깐!”

그때 현우가 성윤을 막았다. 그가 자신의 보관의 젬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받아.”

현우는 그걸 휙 던졌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여 성윤은 그걸 받아냈다.

“이건….”

술집 특유의 어스름한 빛을 반짝이며 그것이 자신의 존재를 과시한다. 성윤이 눈을 깜빡였다. 일자 형태의 작은 보석이 금색 자태를 단아하게 뽐내고 있었다.

“골드 젬이 아닙니까?”

지금 성윤이 갖고 있는 젬 중 가장 높은 랭크의 젬과 같은 등급의 젬.

지금까지 성윤이 갖고 있는 골드젬이 그의 목숨을 얼마나 구해줬는지를 생각해보면 이 젬의 위상은, 적어도 성윤에게 있어서는 절대 낮지 않았다.

“가져.”

현우가 툭 내뱉었다. 하지만 그 두 글자의 짧은 문장이 가리키는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네?”

성윤이 황망하게 반문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늙은이랑 어울린 선물이라고 생각해.”

현우의 너무도 태평한 말에 성윤은 순간 자신이 젬의 가치를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너무 과한 선물입니다. 월석도 제가 다 가졌는데 이것까지 받을 수는 없습니다.”

성윤이 강하게 거부하며 테이블 위에 젬을 올려놓았다. 현우가 양 옆에 끼고 있는 여성들이 젬을 흥미진진한 눈으로 쳐다봤다.

“하여간 딱딱한 놈들은 선물을 주는 것도 힘들다니까.”

그가 푸념을 했다.

“가져 가. 어차피 나한테 골드 젬은 후보 젬으로서도 미묘한 놈이야. 쓸 데도 없으니 차라리 자네가 사용하는 게 나아. 정 그렇게 찝찝하다면 빌려가는 걸로 해도 상관없어.”

“…혹시나 원하시는 게 있습니까?”

너무도 일방적인 선의. 성윤의 의심병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애초에 성윤 같은, 다른 사람을 잘 믿지 않는 사람이 현우를 졸졸 따라다닌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다.

그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의 은인인 지민이 무척 믿고 있는데다가 몇 년 전에 죽은 친구를 아직까지 그리며 그 딸을 챙기고 있다는 인성.

세계 최고의 연결자인 현우가 자신을 이용해 먹어봤자 뭘 이용해 먹겠냐는 생각. 거기에 자신을 돌보는 이유가 지민을 위해서 그러겠거니 하는 추측도 있었다.

대미궁에 들어가기 위한 경험을 얻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건은 그런 이유들로 납득시키기에도 너무 과했다.

“원하는 거라….”

현우가 피식 웃었다.

“지금 굉장히 건방떨고 있다는 것 아나? 내가 원하는 걸 자네가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해?”

“…….”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었다. 상대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대부분의 것을 이미 가지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뭐, 지금까지 본 자네 성격상 의심이 많은 것 같으니 그것도 어쩔 수 없나. 정 원하면 최대한 강해지게. 그게 자네에게 원하는 거야.”

이상하다면 이상한 답변.

하지만 성윤은 그걸 ‘빨리 강해져서 지민의 힘이 되어라.’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현우가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계속 뻗댈 수도 없었다.

“…그럼 잠시 빌리겠습니다.”

성윤은 내려놓은 젬을 다시 손에 쥐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젬을 갖는 게 아닌, 빌리겠다는 표현을 하는 성윤을 현우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은혜는 반드시 갚도록 하죠.”

“…하여간 끝까지 답답한 친구야, 자넨.”

포기한 것일까. 현우가 나가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성윤은 꾸벅 고개를 한 번 숙이고 술집을 나갔다.

성윤이 나간 후, 다시 여자를 끼고 미친 듯이 술을 퍼먹으리라 생각되던 현우는 오히려 여성들을 전부 내보냈다.

지금까지 조금 철딱서니 없이 나이를 먹은 사람처럼 행동하던 그의 얼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툭!

양주잔에 들어 있는 얼음이 무너졌다.

그는 무감정한 눈으로 잔을 내려다봤다. 그러다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전까지 성윤이 앉아 있던 자리가 눈에 들어 왔다.

그의 눈빛이 변했다. 짙은 희열이 그의 눈동자 속에서 날뛰었다.

‘정말 굉장한 녀석이야!’

성윤에게 전투를 시키면서 그는 성윤을 자세히 관찰했다. 그 결과, 그는 성윤의 재능이 정말로 굉장하단 걸 확실하게 깨달았다.

‘수빈이 녀석은 발끝에도 미치지 못해!’

비교하는 게 성윤에게 미안할 정도다.

현우는 예전 김수빈이 전투를 하는 장면을 본 기억이 있다. 그때, 녀석의 전투 센스는 그럭저럭이었다.

그나마 연결자로서 격이 빠르게 상승해 기대하고 있었지만, 그 기대도 빠른 속도로 박살났다.

당시 굉장히 아쉬워했던 걸 기억한다.

하지만 이제 그 녀석은 필요 없다.

김수빈 따위는 성에도 차지 않는 진짜 굉장한 녀석이 튀어 나왔으니까.

현우는 다시 잔을 비웠다. 오늘처럼 술이 맛있는 날도 얼마 없다. 다시 술을 채우기 위해 반쯤 남은 술병을 들었을 때였다.

쿠르르르!

지면이 가볍게 떨렸다. 상과 의자가 흔들리고 들고 있던 병에서 술이 찰랑거렸다. 현우의 몸도 살랑살랑 흔들렸다.

지진이었다.

그렇게 심할 정도의 진동은 아니다. 실제로 건물도 그렇게 거세게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바깥에서는 상당히 시끄러운 소란이 나고 있었다. 아련하게 비명성도 울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달에는 지진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통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우는 일절 당황한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옅은 미소까지 지어졌다.

‘시작됐군.’

그는 몸을 흔드는 지진과 바깥에서 일어나는 소란을 개의치 않고 술병에 입을 대 그대로 꿀꺽꿀꺽 마셨다.

호박색 술이 그의 식도를 타고 내려간다. 순식간에 병 하나가 비었다.

그건 좋을 일을 기리기 위한 축배일까, 아니면 끔찍한 일을 위안하기 위한 위로주일까.

투명한 유리병 너머로 비치는 그의 미소가 마치 섬뜩한 악귀처럼 보였다.

***

성윤은 상당히 찝찝하게 하루를 시작했다. 어제 일어난 지진은 당연히 성윤도 느꼈다.

다행히 암스트롱 최고의 건물이라는 말이 허투가 아닐 정도로 튼튼하게 지어진 이 호텔은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복도로 나와 웅성거리는 손님들을 지배인이 최선을 다해 달랬다.

그 노력에 힘입어 곧 호텔에서의 소란은 진정이 되고 사람들은 하나 둘 방으로 들어갔다.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차피 어디 갈 데도 없었다.

달에 있는 지구의 세력권은 암스트롱뿐이었다. 차라리 가장 튼튼하게 지어졌다는 이 호텔이 가장 나아 보였다.

하지만 호텔을 빠져나가는 사람들도 몇 보였다. 연결자로 보이는 사람들로, 차라리 월면주행차에서 하루를 보내는 게 낫겠다는 소리를 성윤의 귀가 잡아냈다.

성윤도 상당히 고민을 했지만 결국 호텔에 머무르기로 했다.

하지만 잠은 잘 오지 않았다. 겨우겨우 잠이 들었던 성윤은 호텔 자체에서 마련된 조식을 먹고는 호텔을 나왔다.

암스트롱의 거리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기분 탓인지 사람들의 표정이 당혹감에 휩싸여 있는 것 같았다.

성윤은 약속장소인 올드린 우주 공항에 도착했다.

‘…많군.’

원래 인파가 많긴 하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더욱 많았다. 아마도 새벽에 일어난 지진 때문일 것이다.

표를 구하지 못해 큰 소리로 항의를 하는 사람들도 군데군데 보였다.

성윤은 공항 로비에 있는 커다란 시계 아래에서 팔짱을 끼고 묵묵히 기다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성윤 씨!”

팀이 손을 크게 흔들며 다가왔다.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큰 덩치를 자랑하는 그인지라 뚜렷하게 눈에 띄었다. 그의 곁에서 에밀리도 보였다.

성윤도 팔짱을 풀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2주 동안 즐겁게 보내셨습니까?”

팀이 손을 내밀며 물었다.

“즐겁진 않았지만, 나름 보람은 있었습니다.”

성윤도 그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에밀리를 쳐다봤다.

“잘 지내셨습니까?”

“네. 잘 지냈어요.”

에밀리가 함초롬하게 웃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세 명은 다시 달에서 합류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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