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7화
“일단 자네가 싸워봐.”
“네?”
생각도 전에 입이 먼저 반응했다. 그만큼 성윤은 놀랐다. 하지만 이미 현우는 근처에 자리를 잡고 털썩 주저 있었다.
“응? 왜 그래? 설마 이 늙은이 보고 싸우라는 건 아니겠지?”
그가 천연덕스럽게 말한다.
“…저번부터 생각했는데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나? 올해로 예순. 내년에 환갑이다.”
지민 아버지의 친구라면 그 정도 나이는 될 것이다. 하지만 연결자 특유의 20대 초반의 얼굴로 그런 말을 하니 어처구니없다는 감정이 먼저 들었다.
현우가 보란 듯이 허리를 두드리기 시작하자 그 감정은 더해졌다.
“어이구, 하여간 늙으면 죽어야 한다니까.”
“…….”
“그런 시선으로 쳐다보지 말고 빨리 상대하기나 해봐. 여차하면 구해줄 테니까. 이런 식으로 고위 연결자가 뒤를 봐주는 식의 전투는 자네 회사에서는 받기 힘들잖아?”
“그렇긴 하죠.”
시작의 미궁에서 고위 연결자에게 훈련을 받는 초보 연결자를 본 기억이 떠올랐다. 상당히 부러웠던 기억이다.
그런데 그 기억 속의 훈련을 최강의 연결자 중 하나라 불리는 현우가 해준다는 것이다.
“게다가 내가 들었던 자네의 경험과 자네가 갖고 있는 디바이스, 젬으로 판단컨대 오거 정도는 충분히 잡을 수 있을 거야.”
현우의 말이 자신감을 심어준 것일까. 성윤은 자신의 도끼와 방패를 꾹 잡았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오거에게 천천히 다가가는 성윤. 그 뒷모습을 현우는 지금까지의 심드렁한 태도와는 전혀 다른 진지한 모습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자, 전투 센스는 어떠려나.’
연결자로서의 격은 1세대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준수하다. 지금 다다른 수준만 하더라도 2, 3세대의 상위 수준이다.
하지만 연결자로서의 격이 전투력으로 직결되진 않는다.
‘일단 지금까지의 말만 들어보면 나쁘진 않은데 말이야.’
나쁘지 않은 것 정도가 아니라 무척 우수하다. 현우의 눈은 성윤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날카롭게 빛났다.
턱!
오거와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지자 성윤은 걸음을 멈췄다. 어김없이 방패를 내밀고 도끼를 쥐었다.
멈춘 성윤과는 다르게 오거는 오히려 속도를 높였다. 빠르게 걷는 걸 넘어서 뛰기 시작했다.
쿵! 쿵!
무거운 거체가 미궁 안에 커다란 소음을 만든다.
우어어어어어!
다시 한번 오거가 커다란 포효를 내질렀다. 하지만 아까의 포효와는 다르다. 살기가 잔뜩 섞인 그 포효는 사냥감을 사냥하기 위해서 내지르는 거친 포효였다.
순식간에 성윤의 앞까지 짓쳐든 녀석이 주먹을 휘둘렀다. 성윤은 눈을 크게 떠 오거의 주먹을 시선 안에 넣었다.
‘일단 이번엔 흘려내는 데만 집중하자.’
오거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해야 했다. 도끼까지 역소환시키고 방패에만 신경을 집중했다.
쿠웅!
거센 충격이 방패를 들이박았다. 하지만 주먹은 대미지를 주지 못하고 성윤의 의도대로 위쪽으로 튕겨 나갔다.
‘어라?’
성윤은 놀랐다. 방패에 들어오는 충격은 분명 강했지만 잔뜩 긴장하고 있던 것에 비해서는 가벼웠던 것이다.
그 사이 오거의 두 번째 주먹이 날아왔다.
‘어디.’
성윤은 이번엔 방패를 정면으로 세웠다.
쿠우웅!
‘큭!’
아까처럼 주먹을 흘려내지 않은 터라 이번의 충격은 확실히 컸다. 하지만 견디지 못할 정도도 아니었다.
성윤의 뇌리에 현우의 말이 스쳤다.
[내가 들었던 자네의 경험과 자네가 갖고 있는 디바이스, 젬으로 판단컨대 오거 정도는 충분히 잡을 수 있을 거야.]
그 말이 확실히 현실성을 띄기 시작했다.
‘이 정도라면….’
성윤은 역소환시켰던 도끼를 다시 소환했다.
우어어어어어!
공격이 두 번이나 실패로 돌아가자 오거도 성질이 돋았다. 두 손을 깍지 끼고 그 큰 키를 사용해 위에서 아래로 내려쳤다.
성윤이 황급히 옆으로 굴렀다.
후웅!
거센 파공음이 울렸다. 소름이 쭈뼛 솟을 정도의 파워가 그대로 느껴졌다. 역시 그저 한 손으로 한 주먹질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벌떡!
성윤은 바로 몸을 일으켰다. 뺨으로 흐르는 한 줄기 식은땀이 기분 나빴다.
‘일단 좀 거리를 둘까.’
스으윽!
도끼와 방패를 역소환시키고 할버드를 소환했다.
전투를 바라보던 현우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저건가.’
성윤에게 듣긴 했다. 하지만 실제 보니 성윤의 젬 발동 속도는 경악스러울 정도로 빨랐다.
‘0.1초 내. 아니, 시간을 따지는 게 의미 없을 정도로군.’
정말로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그 특성은 연결자로서 엄청난 장점이 될 것이었다.
“흡!”
성윤이 할버드를 내질렀다. 긴 리치가 장거리에서 오거를 찔러갔다.
퍼억!
오거의 팔이 할버드의 옆면을 후려쳤다. 힘을 이기지 못하고 할버드가 옆으로 돌아갔다.
보통 사람이라면 위기에 빠질 상황. 하지만 성윤의 대처는 간단했다.
후욱!
달려드는 기세는 멈추지 않고 그대로 튕겨나간 할버드만 역소환시켰다. 그리고 방패를 들었다.
쿠웅!
방패에 충격이 올랐다. 파고들려는 성윤을 황급히 막으려 오거가 팔을 휘두른 것이다.
성윤이 주춤거리며 뒤로 조금 밀렸다. 하지만 이번엔 방패를 없애고 다시 할버드를 들었다. 그대로 휘둘렀다.
성윤의 말도 안 되는 돌격에 당황해 황급히 팔을 휘두른 터라 오거는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콰직!
할버드의 도끼날이 오거의 팔에 박혔다.
꾸어어어어어어!
오거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정작 할버드를 휘두른 성윤도 당황했다.
‘이렇게 쉽게?’
저항감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들지 않은 무딘 날로 두꺼운 가죽을 억지로 뚫는 그런 느낌이 나는 것도 아니다.
상처 입은 오거의 움직임이 더 흉포해졌다.
쿠어어어어!
오거가 성윤에게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가했다.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한다. 그 두터운 몸을 이용해 몸통 박치기를 날릴 때도 있었다. 하지만 성윤은 침착하게 그 모든 공격을 막아나갔다.
솔직히 말해서 조금 버거웠다. 긴장감에 신경이 비명을 지르고 입에서 단내가 풍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말로 꾸역꾸역 성윤은 오거를 몰아붙였다.
오거의 몸에 많은 상처가 생겼다. 대부분은 자잘한 상처였지만 몇 개는 꽤 치명상인 상처도 있었다.
아무리 녀석이 상처와 고통을 분노로 승화시키는 터프한 녀석이라 해도 서서히 몸의 기능 자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면 그럴수록 성윤의 숨통이 트여 점점 더 공세적으로 나갈 수 있게 됐다.
콰직!
도끼가 오거의 허벅지를 때렸다. 도끼 끝에 딱딱하게 걸리는 감촉이 있었다. 가죽과 피부, 근육은 물론 뼈까지도 상처를 낸 것이다.
크아아아아!
오거가 다시 공격해 들어왔다.
성윤은 몸을 슬쩍 피했다. 도끼와 방패조차 역소환시킨 터라 그는 좀 더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공격을 피하자마자 할버드를 소환, 갈고리로 녀석의 다리를 걸었다.
휘청!
넘어뜨릴 순 없었지만 균형을 잃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퍼어억!
다시 도끼로 후려친다. 이번엔 팔뚝이었다.
그대로 도끼를 손에서 놓고 물러났다.
후욱!
상처에 박혀 있던 도끼가 사라진다. 그리고 다시 성윤의 손에 나타났다.
뚜렷이 성윤이 유리한 상황. 하지만 그렇다고 금방 오거를 때려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녀석은 온 몸에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한번 해볼까.’
평소 생각하던 것이 하나 있었다. 성윤은 도끼를 다시 역소환하고 방패를 내밀었다.
후웅!
다시 한번 주먹이 날아온다. 성윤은 방패로 녀석의 주먹을 튕겨냈다.
몸이 뒤로 밀리는 걸 최대한 막는다. 그리고 방패를 역소환시키고 할버드를 높이 치켜들었다.
아픈 공격이 온다는 걸 안 오거가 황급히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번 공격은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성윤이 힘껏 할버드의 도끼를 내려쳤다. 오거의 손과 할버드의 도끼날이 맞부딪치기 직전이었다.
쿠웅!
성윤이 갖고 있던 중력 마법의 젬에 마력이 흐르며 중력이 일변했다. 순식간에 여덟 배의 하중이 가해졌다.
하지만 마법의 목표는 놀랍게도 적인 오거가 아닌 성윤 자신이었다.
‘크으으윽!’
온 몸에 걸리는 부하를 억누르며 계속 힘을 줬다. 지금까지의 기세에 더불어서 불어난 무게 때문에 내려치는 할버드의 속도가 상승했다.
속도는 곧 힘. 그리고 무게 또한 곧 힘이다.
할버드와 오거의 주먹이 맞붙었다. 지금까지 성윤의 공격은 치명적이라고 해 봤자 오거의 뼈를 약간 상하게 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의 일격은 달랐다.
콰드득!
소리부터 달랐다. 할버드는 오거의 주먹을 가르고 팔뚝의 절반을 파고들었다.
꾸어어어어어!
오거가 비명을 질렀다. 지금까지의 고통과는 차원이 다른 고통이 느껴졌다.
황급히 다른 팔을 휘둘렀다.
쿠웅!
성윤이 소환한 방패가 다시 오거의 팔과 충돌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성윤의 걸음이 밀리지 않았다. 성윤의 몸을 누르고 있는 중력이 아직 풀리지 않은 것이다.
커다란 바윗덩이처럼 꼿꼿하게 자리에서 버틴 성윤이 마법을 풀고 다시 도끼를 소환했다.
그대로 내리찍었다.
콰직!
오거의 가슴에 도끼가 박혔다. 녀석이 또 울부짖었다.
다시 성윤을 공격했지만 성윤은 다시 방패를 든 이후였다.
퍼억!
이번엔 마법이 풀린 터라 성윤은 몇 걸음 뒤로 밀렸다. 하지만 그 뿐. 이렇다 할 대미지는 입지 않았다.
그에 비해 오거는 한쪽 팔이 걸레가 됐고 다른 몸도 곳곳에 상처를 입은 상황.
결과는 뻔했다.
쿠웅!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드디어 오거가 쓰러졌다. 온 몸에 피를 흘린 채 쓰러진 오거는 숨이 끊어져 미동도 없었다.
확인사살까지 끝마친 성윤은 오거의 시체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걸 내가….’
빅풋을 어렵지 않게 이긴 녀석이다. 한데 그런 오거를 자신이 힘겹긴 하지만 혼자서 이긴 것이다.
“내가 말했지?”
건들거리는 폼으로 걸어온 현우가 말을 했다.
“네 실력이면 이 녀석 정도는 충분히 잡을 수 있다고.”
“그렇군요.”
그래도 쉬운 싸움은 아니었다. 성윤은 괜히 이마를 훔쳤다.
“그런데 참 흥미 있게 싸우는군.”
“네?”
“무기를 교환하며 싸우는 것 말야.”
현우는 성윤이 싸우는 모습에 꽤 깊은 감명을 받았다.
“젬 발동 속도가 빨라서 그게 가능한 거지?”
“네. 아무래도 그때 그때 적절한 무기를 선택하는 게 더 유리하니까요.”
“마법도 바로 발동했었고.”
뚜렷하게 티가 나지 않는 중력 마법을, 그것도 오거가 아닌 성윤 자신에게 걸었음에도 현우는 눈치 채고 있었다.
“네. 제 자신의 무게를 늘려서 한 방의 파괴력을 높인 겁니다.”
“좋은 발상이군. 오거랑은 처음 붙은 게 확실하지?”
“네.”
현우는 성윤의 전투를 떠올렸다. 처음 대적한 오거를 상대로 천천히 상대의 전력을 파악하고 무척 적절하게 오거를 몰아갔다.
‘거기에 젬 발동 속도까지.’
그리고 그 젬 발동 속도도 멋지게 활용하고 있었다. 좋은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제대로 쓰지 못한다면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나 마찬가지다.
그가 본 성윤의 전투 센스는 충분히 합격점을 줄 만했다. 아니, 분명 그 이상이었다.
그는 사라지기 전의 오거를 조금 더 자세히 조사하기 위해 할버드로 찌르고 있는 성윤을 보고 내심 웃었다.
화악!
순간 미궁 안에 빛이 나타났다. 성윤과 현우의 시선이 자동적으로 빛이 나타난 쪽으로 돌아갔다.
공중에 빛 덩이가 자신의 존재를 화려하게 알리고 있었다.
“또 한 마리 나오려나보군.”
긴장한 성윤과는 달리 현우는 무감각한 목소리로 말하며 턱을 긁적였다.
빛이 점점 커지며 몬스터를 뱉어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후욱!
빛은 나타났던 순간만큼 사라질 때도 순식간이었다.
하지만 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몬스터 한 마리가 남아 있었다.
성윤은 굳었다. 빅풋을 쓰러뜨린 오거를 쓰러뜨리고, 박살난 자존감 사이로 조금 솟아난 자신감이 빛 속에서 나타난 몬스터를 보고는 다시 굴을 파고 숨어버렸다.
그 정도로 지금 나타난 몬스터의 박력은 대단했다.
“싸이클롭스로군.”
현우가 몬스터의 정체를 알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