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8화
팀도 에밀리도 코헨도 그 외의 사람들도 입만 달싹일 뿐 제대로 된 반응을 하지 못했다.
그만큼 지금의 상황은 갑작스럽고도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그나마 성윤의 실력을 알고 있던 팀과 에밀리가 먼저 깨어났다.
“무, 물론이죠!”
아직 얼떨떨한 감정이 남아 있었지만 팀이 확신에 차 말했다. 먼저 무기를 뽑고 달려든 상대를 상처조차 입히지 않고 무력화시켰다. 정당방위에 들어가고도 넉넉하게 여유가 남을 수준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서서히 충격에서 깨어났다. 하지만 충격에서 깨어난 후 맞닥뜨린 현실은 암담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루, 루이스!”
아무리 성질 더러운 녀석이라고 해도 동료는 동료다. 코헨은 그 정도의 인격은 갖춘 사람이었다. 무의식적으로 루이스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발을 움직였다.
“다가오지 말아 주시겠습니까?”
성윤이 할바드의 날을 움직이며 말했다.
“힉!”
날카로운 할버드의 날이 목 가까이 접근하자 루이스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이게 무슨 짓…!”
항의하려던 코헨은 곧 입을 다물었다. 자신, 정확히 말해서 루이스의 동료인 자들이 큰소리를 낼 상황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입을 앙 다물고 눈을 뒤룩뒤룩 굴리며 뇌를 풀가동했다. 하지만 뚜렷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았다. 그만큼 루이스는 대형 사고를 쳐버렸다.
암스트롱 안에서 젬을 발동해 다른 사람을 습격하다니.
어느새 머리에 손을 대고 있었다. 머리가 아팠다.
‘멍청한 자식!’
그는 성윤에게 밟혀 있는 루이스를 날카롭게 노려봤다. 루이스가 제정신인지조차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회사 건물 안에서 회사와 계약을 한 연결자가 성윤에게 해코지를 하려고 한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결국 머리를 숙이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까지 무시하던 자에게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게 무척 굴욕적이었다.
하지만 코헨은 성윤에 대한 평가를 재고해야하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 기습을 막았어.’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루이스의 돌발행동. 하지만 그는 태연하게 루이스를 격퇴했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루이스도 로스 남매만큼 회사에서 기대하고 있던 유망주다. 수월하게 시작의 미궁을 졸업했고 회사에서 수행하는 미궁 공략에서도 뚜렷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적어도 흔하디흔한 1세대 연결자에게 제압당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떤가. 그는 기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손조차 쓰지 못 하고 당해버렸다.
코헨은 성윤이 쥐고 있는 할버드와 전투 도끼를 봤다. 척 봐도 날은 날카롭고 단단해 보였으며 자루도 매끈하고 곧게 뻗어 있었다. 절대 저급의 무구가 아니었다.
‘적어도 3등급의 옐로우 랭크 이상이다.’
그렇다면 레인보우 랭크 중에서도 낮은 랭크의 젬만을 겨우겨우 다루는 일반 1세대 연결자와는 다르다는 얘기다.
‘젠장! 1등 복권 같은 인간이었나!’
정말로 간간이 나오는, 1세대면서도 1세대 같지 않은 능력을 가진 연결자. 코헨은 겨우 성윤의 본 실력을 어렴풋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거기에 그 젬 발동 속도.’
자신을 포함해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이 루이스의 기습을 막지 못한 건 젬을 바로 발동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윤은 루이스를 너무나 쉽게 무력화시켰다. 여러 개의 젬을 소환하고 역소환하는, 묘기라고까지 보이는 광경을 연출하면서. 마력을 집중하는 액션도, 그에 걸리는 시간도 없다.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줄줄이 나오는 무구들의 향연에는 코헨도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혹시 루이스의 공격을 예상하고 미리 발동을 준비한 것일까. 하지만 코헨은 고개를 저었다.
공격 방법과 타이밍까지 완벽히 꿰뚫어서 적정한 시간에 필요한 젬이 발동할 수 있도록 미리미리 젬에 마력을 공급해 놓고 있었다?
‘어림없는 소리.’
라플라스의 악마가 아닌 이상 그런 완벽한 예측은 불가능하다. 성윤의 젬 발동 속도가 눈 돌아갈 정도로 빠르다는 게 더 설득력이 있었다.
‘그것도 믿기 힘들지만.’
하지만 정말로 그의 젬 발동 속도가 그렇게 빠르다면.
‘로스 남매가 옳은 걸 수도 있겠군.’
그리고 자신들은 큰 실수를 한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흘러가자 머리가 띵해졌다. 하지만 이곳에서 지위가 가장 높은 자로서 그는 이 상황을 수습할 책임이 있었다.
“일단 저희 회사의 사원이 공격을 가한 점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죄송합니다.”
정중한 사과. 코헨은 최대한 몸을 낮췄다. 지금가지의 무례한 눈빛은 전혀 없었다.
일말의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는 코헨의 사과에 사람들이 놀랐다. 하지만 성윤은 속으로 조금 감탄했다.
‘할 일을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이군.’
여러 모로 불리한 상황에 처해 있음에도 자존심 때문에 스스로를 굽히지 못 하고 결국 더 나쁜 결과를 조장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다.
하지만 코헨은 좋아하지 않던 아니, 오히려 싫어하던 성윤에게 자세를 낮췄다. 그게 손해를 가장 덜 보는 방법임을 아는 것이다.
‘차라리 이런 사람이 상대하기에는 좋지.’
이성적으로 판단이 가능한 사람인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능한 일 같지만 의외로 그런 사람은 적다.
성윤의 발에 깔려 눈만 뒤룩뒤룩 굴리고 있는 루이스가 그 이성적 판단이 불가능한 사람의 대표적인 예였다.
“암스트롱에서 젬을 발동시키고, 그걸로 저를 공격했습니다. 인정하십니까?”
“…인정합니다.”
“암스트롱은 정당방위에 꽤 커다란 권리를 주는 것도 알고 계십니까?”
‘정말 잘못 걸렸어!’
코헨은 식은땀이 흘렀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 성윤 같은 꼴을 당했다면 극히 흥분했을 것이다. 폭력적으로 나오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생각이 꼬이거나 해서 작더라도 빈틈이 생기고, 그렇다면 어떻게든 그 틈을 파고들어 손해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윤에게는 일절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침착하고 냉정하다. 목숨의 위험을 받은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바보 놈을 이미 제압하지 않으셨습니까? 루이스의 잘못은 확실하게 인정합니다만, 더 이상 위협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해를 끼치지는 않으실 거라 믿습니다.”
“일리 있는 말이군요. 하지만…!”
콰직!
성윤의 발이 루이스의 팔을 밟았다.
“아악!”
그가 비명을 질렀다.
“무슨…!”
깜짝 놀라 코헨이 소리를 쳤다. 하지만 그는 곧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밟힌 루이스의 팔에 걸려 있던 디바이스에서 빛을 잃어가는 젬이 보였다.
루이스가 다시 젬을 발동시키려 한 것이다.
‘저 바보 자식!’
상황을 판단한 코헨은 숨이 턱 하고 막힐 정도로 답답했다. 멍청한 놈이 탈출을 하겠답시고 몰래 뒷수작을 부린 게 틀림없었다.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저도 어쩔 수 없이 조금 과하게 손을 쓸 수도 있을 것 같군요. 그런 불행한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이 분에게 충고를 좀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흥! 그딴 허세가 통할 것 같냐!”
아무래도 시간이 흐르면서 본인의 더러운 성격을 조금 되찾은 모양이다. 루이스가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개미 새끼 한 마리 죽일 배짱도 없어 보이는 새끼가!”
똥개도 자기 집에서는 반은 먹고 들어간다는 것일까. 시퍼런 도끼날과 창날이 목 바로 앞에 겨눠져 있는데도 루이스는 당당했다.
하지만 성윤의 시린 눈빛이 자신을 향하자 입을 다물었다. 지금껏 다툼도 여러 번 해봤고 그중에는 주먹다짐까지 간 적도 있다. 하지만 맹세코 저런 눈빛은 처음이었다.
“굳이 개미새끼를 죽일 이유는 없습니다만, 말하는 원숭이 한 놈은 죽여 봤죠.”
루이스의 입이 순간 닫혔다.
말하는 원숭이. 그 비유를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눈치 없지는 않았다.
“허, 허풍은….”
억지로 입을 열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루이스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아무리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살아가고 몬스터를 죽이는 일이 업인 그들이라지만 사람을 죽인다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허풍이 아닙니다. 별일 아닌 일로 원한을 품고 제 미궁까지 들어 온 원숭이가 한 마리 있었거든요. 물론 저도 죽을 뻔했습니다만….”
너무도 태연한 태도에 루이스는 할 말을 잃었다.
코헨은 짚이는 바가 있었다. 최근 어떤 연결자가 다른 연결자를 습격하려 했다가 역으로 공격당해 죽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게 저 작자였나?’
하지만 확실하진 않다. 저자도 그런 얘기를 듣고 허풍을 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코헨이 할 일은 변하지 않았다.
‘저 녀석들이 도와줄 기미도 안 보이고’
그가 로스 남매를 힐끔 쳐다봤다. 로스 남매의 기색을 보건데 오히려 성윤의 편을 들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루이스. 넌 좀 닥치고 있어라. 아무 짓도 하지 말고.”
코헨은 일단 루이스를 말렸다. 만약 루이스가 또 허튼 짓을 하고 그 때문에 성윤이 루이스를 죽이게 된다면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는 것이다.
반항할까 봐 걱정했지만 어쩐 일인지 루이스는 고분고분 코헨의 말을 들었다. 아무래도 성윤의 서슬 퍼런 기세에 질린 것 같았다.
“일단,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그의 목소리에 한층 더 조심스러움이 섞였다.
“그리고 이런 말 드리기 죄송합니다만 이번 일, 없었던 일로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뭐라고요?”
팀이 쌍심지를 돋웠다.
“지금 사람을 공격했는데 그걸 없었던 일로 해 달라고 했습니까?”
그것도 그가 무척이나 싫어하는 루이스가 존경하는 성윤에게 공격을 가한 것이다. 팀의 화가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코헨은 팀에게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성윤에게 얘기를 계속했다.
“보상이라면 충분히 해드리죠. 원하시는 게 있으면 말씀하세요. 게다가 그놈도 조급하고 성질이 더러울 뿐 나쁜 놈은 아닙니다. 실제로 이번 공격도 당신에게 겁을 줄 의도만 있었을 뿐입니다.”
“그건 그렇죠.”
두 사람의 실력차이가 크긴 했지만 루이스가 전력으로 공격을 했다면 성윤도 이렇게 쉽게 그를 제압할 순 없었을 것이다.
성윤도 루이스가 묘하게 힘을 빼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성윤이 납득하자 코헨은 속으로 안도했다. 동시에 전율했다.
안도는 성윤이 루이스의 공격에 살의가 없었다는 걸 인정해 준 것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전율은….
‘저 작자. 루이스가 힘을 빼고 공격한 걸 알고 있었어.’
그 말은 성윤의 실력이 그걸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나다는 소리다. 정말로 자신들이 단단히 오판했다는 것을 코헨은 뼈저리게 깨달았다.
“제가 원하는 걸 들어줄 수 있을 정도로 당신의 권한이 큽니까?”
“그렇진 않습니다만, 사건이 사건인지라 조금 무리한 부탁도 가능할 겁니다.”
루이스의 죗값을 치르느냐 아니냐를 떠나서 회사의 이미지까지 관련된 문제다. 회사에서도 덮을 수 있다면 필사적으로 덤벼들 것이다.
성윤이 로스 남매를 가리켰다.
“일단, 저분들의 계약 파기 때 손해가 없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거면 되겠습니까?”
예상보다 훨씬 더 가벼운 조건이다. 하지만 성윤은 고개를 저었다.
“나머지 대가는 저희 회사의 사장님과 상의해주세요.”
뭘 받아내야 좋은지 바로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러니 그냥 지민에게 의지하기로 했다.
여기서 있던 일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더 늘어날 거란 생각에 코헨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한숨을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아닌 성윤이거니와 회사 대 회사로 계약을 맺으면 조금 더 강제성이 강해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되면 협상의 책임을 자기가 지지 않아도 된다는, 조금은 얄팍한 생각도 있었다.
“…알겠습니다. 회사에 말해 놓죠. 그럼 이제 슬슬 루이스를 풀어주시겠습니까?”
하지만 성윤은 턱을 만지작거릴 뿐, 루이스를 풀어주지 않았다.
“음, 하지만 당신들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그거라면 걱정 마시죠.”
새빨갛게 성난 얼굴로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팀이 나섰다. 그가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건 비디오 카메라였다.
“달 풍경을 찍으려고 가져왔는데 꽤 유용하게 쓰이네요.”
성윤은 고개를 끄덕였고 코헨은 인상을 썼다. 하지만 한숨으로 인상을 지워 없앴다.
“그럼 증거도 있겠다, 루이스를 풀어주시겠습니까?”
코헨이 다시 한번 말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성윤은 코헨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일단 팀 씨는 그 카메라를 들고 바깥에서 기다려주세요.”
“…굉장히 조심성이 많으시군요.”
“인생의 실패를 굉장히 쓰게 맛 봐서 말입니다.”
성윤과 코헨이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 팀은 성윤의 말대로 카메라를 들고 건물을 나섰다. 성윤은 그제야 루이스를 풀어줬다.
후다닥!
루이스가 황급히 회사의 일행이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동료들과 섞이자 자신감을 되찾았는지 그가 성윤을 죽일 듯이 노려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성윤은 루이스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성윤은 에밀리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허락을 맡고 로스 남매의 짐을 전부 보관 젬에 집어 넣었다. 그 발동 속도에 사람들이 다시 경악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성윤은 에밀리를 데리고 건물 입구로 걸어갔다. 회사 사람들은 감히 그 움직임을 막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럼, 다음에는 좋은 얼굴로 만날 수 있도록 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성윤은 건물을 나갔다.
하지만 성윤을 따라 나갈 것 같던 에밀리는 잠시 망설이는 듯한 얼굴을 했다.
혹시 그녀는 생각이 바뀐 것일까. 회사 사람들의 눈에 미약한 희망이 어렸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사람들, 특히 코헨에게 지금까지의 충격보다 더욱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래도 코헨 씨는 어머니의 친한 동료였으니 말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어요.”
그녀가 뚜렷한 눈동자로 코헨을 보며 말했다.
“이번에 어머니의 시신을 찾았어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