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3화
“수찬 씨! 그 이상은 용납 못 합니다!”
결국 원호가 큰소리를 냈다. 수찬도 더 이상의 충돌은 원하지 않는지 툴툴대며 물러섰다.
그 사건은 그렇게 일단락 됐다.
‘역시 다른 디바이스와 젬을 놓고 온 게 정답이었어.’
멀어지는 수찬의 등을 보면서 성윤은 그렇게 생각했다. 고작 4등급인 그린 랭크의 갑옷을 입고도 이런 반응인데 고위 젬들을 줄줄이 달고 왔다면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충분히 상상이 됐다.
성윤은 원호의 눈에 서린 결심이 더 깊어진 걸 느꼈다. 조기 해산을 할 것을 확실하게 정한 것 같았다.
‘아마도 오늘 사냥이 끝나고 말을 할 것 같은데.’
성윤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이 불편한 공기엔 성윤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것도 약속이라 그래도 끝까지 남아 있으려 했지만 제안자가 종결을 선언한다면 상관없다. 오히려 성윤은 쌍수를 들어 환영하고 싶었다.
하지만 정말로 무슨 마가 낀 듯 이번 파티는 마지막까지 곱게 끝나지 않았다.
시간은 슬슬 그 날 일정을 끝낼 시간 때에 일어났다.
파티는 자이언트스네이크와 대치했다. 예전 성윤과 로스 남매가 경험했듯이 녀석은 정말로 까다로운 녀석이었다.
원호가 맨 앞에서 방패를 들고 자이언트스네이크의 머리를 교란시킨다. 그의 뒤에는 성윤이 창을 들고 자이언트스네이크의 빈틈이 보이면 그대로 찔러 넣었다.
수찬은 혹시나 날아올지 모르는 꼬리를 견제하고 있었고 미나는 그 뒤에 숨어 계속해서 자이언트스네이크의 빈틈을 노렸다.
예나는 얼마 남지 않은 불의 마법을 준비했다. 커다란 불 구슬이 그녀의 손에서 생성됐다.
“조심하세요!”
예나의 큰 소리와 함께 불 구슬이 그녀의 손을 떠나 어렵지 않게 목표물에 명중했다.
퍼엉!
구체로 뭉쳐있던 불길이 사정없이 퍼지며 사정범위에 있던 모든 걸 태우기 시작했다.
키아아아아악!
자이언트스네이크가 높은 비명을 질렀다. 꼬리를 쭈욱 펴 불꽃을 털어내려 불꽃이 퍼진 범위를 비볐다. 꼬리가 쳐낸 불똥이 허공에서 찬란하게 빛났다.
‘지금!’
성윤이 눈을 빛냈다. 다른 파티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몸을 비비 꼬며 녀석의 신경이 불을 떨쳐내는 데에만 관심이 쏠린 걸 호기로 삼아 무기를 꾸욱 쥐었다.
하지만 성윤은 무턱대고 돌진하지 않았다.
“방어 부탁합니다.”
“네!”
원호를 스쳐 지나가며 부탁했다. 원호는 흔쾌히 수락하고는 성윤과 붙어 달렸다.
콰지직!
무기 등급이 낮기에 온몸의 탄력을 이용해 창을 날렸다. 강대한 근력으로 날아간 창날이 자이언트스네이크의 비늘을 부수고 몸에 깊은 자상을 남겼다.
캬아아악!
불똥을 털어내던 녀석이 다시 비명을 질렀다. 몸을 꼬아대며 커다란 꼬리를 움직였다.
“성윤 씨!”
성윤의 옆에서 자이언트스네이크를 검으로 찔러대던 원호가 성윤을 불렀다. 성윤은 바로 원호의 뒤로 돌아가 그의 등을 받쳤다.
휘익!
빠른 속도로 날아온 꼬리가 그들을 덮쳤다.
쿠웅!
“크윽!”
“읍!”
방패를 든 원호와 그를 받친 성윤이 신음을 내질렀다. 하지만 꼬리의 공격은 성공적으로 막았다.
“하앗!”
성윤은 다시 창을 내질렀다.
푸욱!
키이이이이잇
다시 자이언트스네이크의 비명이 울렸다. 꼬리를 황급히 뒤로 뺐다.
녀석의 붉은 눈동자가 성윤을 찾았다. 하지만 성윤과 원호는 이미 멀찌감치 물러난 상태였다.
“하앗!”
또 기합성이 울렸다. 이번엔 미나의 목소리였다. 자이언트스네이크의 신경이 성윤과 원호에게 집중된 걸 틈 타 그녀도 공격을 개시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공격한 부위는 좀 더 치명적인 곳이었다.
푸욱!
희예의 파이어 볼 때문에 잔뜩 눌어붙은 피부로 창이 꽂혔다.
캬아아아아아아아앗!
성윤의 공격 때보다 자이언트스네이크가 한층 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미나의 창이 옆으로 상처를 쭉 찢었다. 자이언트스네이크의 발광이 더 심해졌다.
“그나마 쉽게 잡을 수 있을 것 같군요.”
사냥이 수월해지자 원호의 얼굴이 오랜만에 밝아졌다. 성윤도 그 말에 동의했다.
지금 파티는 잘 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간다면 시간은 조금 걸릴지언정 성공적으로 사냥이 끝날 터였다.
‘뭐, 마지막 정도는 기분 좋게 끝내도 되겠지.’
시간 상 이번 사냥이 마지막이다. 성윤은 유종의 미라도 거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너무 이른 생각이었다.
“꺄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성윤과 원호 모두 비명이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둘의 얼굴이 뚜렷이 굳어 있었다. 방금 들린 비명은 놀라거나 당황해서 지른 비명성 치고는 너무 처절했다.
‘뭔가 잘못됐어!’
둘의 뇌리에 공통으로 지나간 생각이었다.
그들의 눈에 피를 뿌리며 허공을 유영하는 미나가 들어왔다.
“빌어먹을!”
수찬이 욕설을 내뱉으며 자이언트스네이크를 방패와 망치로 때리며 시선을 끄는 모습이 보였다.
“원호 씨는 수찬 씨를 도와주세요.”
그 말을 남기고 성윤은 미나에게로 뛰었다. 원호는 성윤의 말대로 수찬에게 가세해 자이언트스네이크와 사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미나는 전투 지점과 조금 떨어진 곳에 끈 떨어진 인형처럼 구겨져 있었다.
“어, 어떡하죠?”
그녀의 곁에 먼저 와 있던 희예가 울상을 지었다. 성윤은 냉정하게 자이언트스네이크를 손으로 가리켰다.
“치유 마법을 쓸 겁니다. 희예 씨는 자이언트스네이크를 상대하는 걸 도와주세요.”
우왕좌왕하던 그녀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고 전투 지점으로 향했다.
성윤은 미나의 상태를 살폈다. 보아하니 자이언트스네이크의 꼬리 공격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았다.
그녀가 입은 가죽갑옷이 길게 찢어지고 목구멍에서는 꾸역꾸역 피가 흘러 나왔다.
성윤은 서둘러 공격을 당한 것 같은 배 부분에 손을 얹었다.
후웅!
성윤의 팔찌에서 보라색의 기운이 흘러나와 미나에게로 흡수됐다. 꺽꺽 거리던 그녀의 숨이 안정됐다.
‘다행히 효과가 있군.’
치료를 끝낸 성윤이 몸을 일으켰다. 전투는 한창 계속 되고 있었다.
미나는 정신이 혼란해 있고 나머지 세 사람은 전투에 집중하고 있던 터라 성윤의 빠른 젬 발동 모습은 누구도 보지 못했다. 성윤은 바로 창을 그러쥐고 전투에 뛰어들었다.
얼마 뒤.
쿵!
자이언트스네이크가 거대한 몸을 땅에 떨궜다. 성윤이 녀석의 몸을 창으로 툭툭 찔렀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녀석의 숨이 끊어진 게 확인되자 사람들 전부 커다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나 씨는요?”
역시 리더는 리더인지 원호는 미나의 안부부터 물었다. 대답은 뒤쪽에서 들려 왔다.
“전 괜찮아요.”
미나가 천천히 일행 쪽으로 걸어 오고 있었다.
“괜찮습니까?”
“네, 이상이 있는 곳은 없어요.”
다친 부위를 어루만지며 그녀가 말했다. 말할 때 살짝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건 통증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부상을 입을 때의 기억이 나서였다.
“성윤 씨가 치료해주신 거죠? 감사 드려요.”
미나가 성윤에게 고개를 숙였다. 정신이 오락가락 했었는데 용케도 성윤이 치료해준 걸 안 모양이었다.
하지만 일행 중 치유의 젬을 가진 사람이 성윤뿐이니 그녀가 바로 깨달았다고 해도 놀라운 건 아니었다.
인사를 끝낸 그녀의 시선이 이번엔 수찬에게 돌아갔다. 눈꼬리가 사납게 치솟아 오르며 그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너, 대체 무슨 생각이야?”
“이 여자가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수찬의 표정도 일그러졌다.
“시치미 떼지 마! 방어를 맡았으면 제대로 보조를 했어야 될 거 아냐! 내가 공격하는데 그렇게 멀찍이 떨어져 있으면 어떡해!”
“그게 내 탓이냐! 나한테 언질 하나 없이 뛰쳐나간 네년 탓이지!”
“눈이 뚫려 있으면 봤을 거 아냐!”
“그러는 너야말로 입이 뚫려 있으면서 ‘간다!’라는 기본적인 말조차 못 하는 거냐!”
두 사람의 언성이 높아졌다. 예의 그 다툼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두 사람 모두 그 어느 때보다 예민했다.
잘못했으면 미나가 죽을 뻔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원호가 둘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던 희예에게 물었다.
“자이언트스네이크가 발광하기 시작했을 때, 두 사람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뛰어들었어요. 문제는 미나 씨가 창을 찌르려 수찬 씨의 방어 영역을 벗어나는 걸 수찬 씨가 알아차리지 못한 거예요.”
“과연, 그래서 자이언트스네이크의 공격을 미나 씨가 정통으로 얻어맞은 거로군요.”
원호는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희예 씨는 누구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둘 다 책임이 있지 않을까요? 미나 씨가 아무 말 없이 튀어나간 것도 잘못이고 미나 씨가 튀어나간 걸 봤는데도 불구하고 반응이 늦은 수찬씨도 책임이 있죠.”
성윤과 원호가 설명을 듣는 와중에도 둘의 싸움은 점입가경으로 격렬해졌다.
결국 둘 사이로 원호가 황급히 끼어들었다. 자칫했다가는 정말로 칼부림이 날 것 같았다.
“자, 자! 진정하세요!”
이번 파티 활동 내내 원호의 저 ‘진정하세요!’라는 말을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른다. 성윤은 그에게 작은 동정을 표했다.
“이 인간이 날 죽일 뻔했다고요!”
“그건 네 자업자득이라니까!”
하지만 원호의 중재도 그들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전 더 이상 이 인간이랑은 파티 못 하겠어요! 그런 줄 아세요!”
“흥, 나도 마찬가지야!”
두 사람은 결국 서로를 완전히 외면했다. 파티라는 공동체에 막대한 균열이 일어났다.
유구한 세월을 자랑하는 빙하조차 갈라버린 가파른 크레바스 같은 균열은 시간이 지나도 메워지지 않고 더욱 깊고 넓어질 게 분명했다.
“하아, 그러죠.”
원호가 한숨 쉬며 말했다.
“대충 미궁 상층의 수준 파악은 끝났고 대략적인 지도도 그렸습니다. 예상했던 시간보다 좀 빠르긴 하지만 이 파티는 이걸로 끝내도록 하죠.”
결국 파티가 해산했다. 반대 의견을 꺼내는 사람들은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전부 이 파국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 자이언트스네이크의 월석을 회수하기 위해 원호는 자이언트스네이크가 사라진 곳으로 걸었다.
“응?”
원호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의 의문성을 듣고 사람들의 시선이 자이언트스네이크가 사라진 곳으로 쏠렸다. 연결자의 좋은 눈이 월석 옆에 반짝이는 무언가를 포착했다.
그건 젬이었다.
연결자에게는 무엇보다도 갖고 싶은 물건. 하지만 젬을 본 원호의 표정이 굳었다.
‘젠장, 하필이면!’
이 빌어먹을 상황에 원호는 속으로라도 욕지기를 안 내뱉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온 젬을 없앨 수는 없다. 원호는 일단 월석을 주워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젬을 쥐어 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젬에 못 박혀 있는 것을, 원호는 보지 않더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원호는 일단 젬을 확인했다.
인디고 랭크의 젬으로 형태는 네모. 보조 마법 젬이었다.
원호는 자신의 디바이스의 빈 곳으로 남아 있던 홈에 젬을 끼워 발동시켜 봤다.
‘우라질!’
머릿속에 떠오른 젬의 정체를 확인한 그는 내심 욕설을 내뱉었다.
“무슨 젬이죠?”
미나가 물었다. 원호는 내키지 않은 투로 한숨 쉬듯 말했다.
“치유 마법 젬입니다.”
사람들의 눈이 변했다. 특히 수찬과 미나의 눈은 빛이 번쩍인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거 어떻게 할 겁니까?”
수찬이 물었다. 착각일까. 그의 목소리에 깃든 껄렁함이 무척 줄어든 느낌이 들었다. 마치 지금까지처럼 건방지게 행동하면 그 젬에 대한 권리가 줄어들기라도 하는 마냥.
사람들이 썩은 고기에 모인 하이에나처럼 침만 꿀떡 넘기는 꼴을 본 원호는 고민에 빠졌다.
‘이걸 어쩌지.’
디바이스나 젬의 분배는 파티의 가장 큰 갈등 요소다. 게다가 이건 치유 마법의 젬이다.
‘하필 이게….’
수찬과 미나가 파티가 본격적으로 돌아가기 전에도 대놓고 원한다고 했던 젬.
게다가 지금 파티는 그 어느 때보다 치유 마법 젬을 원하고 있다. 치명상을 입은 미나가 바로 회복한 걸 현장에서 봤기 때문이다.
솔직히 리더라는 입장만 아니었다면 원호 그도 어떻게든 이 젬을 차지하고 싶었을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