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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미궁-94화 (94/354)

제94화

벅차오르는 인생의 고지에서 순식간에 떨어져 내린 자의 울분. 수빈의 말에는 그 울분이 거세게 표출되고 있었다.

그의 인생에 동정을 표할 수도 있고 반대로 적의를 키울 수도 있다. 사람들 각자의 사고방식에 따라 다른 감정을 가질 것이다.

당연히 성윤도 예외는 아니었다. 수빈의 말을 듣고 하나의 감흥을 가졌다.

‘그래서 어쩌라고?’

철저한 무관심이란 감각을.

‘그것도 제 팔자지.’

성윤에겐 공감을 해 슬퍼할 여유도 감정이 상해 비웃을 여력도 없다. 수빈의 그 울분에 찬 발언이 왜 그러는지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다른 놈 앞에서 해줬으면 했다.

한풀이도 받아 줄 여유가 있는 사람한테나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윤은 수빈의 말을 끊지 않았다. 녀석이 자신의 사정을 주저리주저리 말하는 통에 어떻게든 생각할 시간을 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수빈도 이제 적당히 한풀이를 끝낸 것 같았다. 성윤이 툭 말을 던졌다.

“지민 씨는 당신을 무시하지 않았을 텐데요? 그걸 무시하고 나간 당신이 그딴 말을 할 자격이 있는 겁니까?”

비꼴 생각도 정의감에 찬 것도 아니다. 그저 지금의 대화를 조금 더 끌어보려는 생각일 뿐이다.

그리고 다행히도 수빈은 성윤의 의도에 넘어왔다.

“아, 한지민!”

그가 미소지었다. 몇 번을 봐도 무척 싫은 미소였다.

“그 여자에겐 정말로 도움을 많이 받았지. 좋은 여자였어. 순순히 내 여자가 돼줬다면 나도 그 회사를 떠나는 걸 다시 생각해 봤을 텐데.”

역시 수빈도 지민에게 수작을 부렸던 것 같다.

“이 젬들을 모으는 데 그 여자의 도움도 컸어. 그 여자가 준 수준 낮은 젬들 몇 개와 수준 높은 젬 하나를 교환하는 식으로도 많이 모았으니까.”

여기서는 성윤도 조금 기분이 나빴다. 그가 쉽게 내뱉은 그 수준 낮은 젬들은, 지민이 단 한 줄기의 희망을 붙들기 위해 많은 돈과 온갖 노력을 쏟아 부어 모은 것들이다. 적어도 지민의 뒤통수를 친 작자가 말해선 안 되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때가 가장 좋은 시절이었어. 내 힘은 날로 커졌고 돈도 엄청나게 번데다 지민같이 예쁜 여자가 나를 위해 모든 걸 다 바칠 기세로 도와줬으니까. 뭐, 결국 사적으로의 접근은 철저하게 차단했지만.”

수빈의 눈이 조금 몽롱해졌다. 그의 생각이 과거의 좋은 기억 속으로 날아갔다.

성윤의 손이 움찔했다. 지금의 빈틈을 노려 바로 튀어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수빈은 상념에서 금방 빠져나왔다.

“하지만 이제 괜찮아. 난 다시 과거의 그때로 돌아갈 테니까.”

수빈의 눈이 현실을 보기 시작했다. 아니, 그건 정확히 말하자면 현실이라는 이름에 덧씌워진 허상이었다.

“내 재입사 요청을 거절한 그 여자지만 네가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유일한 희망이라고 여긴 연결자가 사라지면 굉장히 허탈할 테지. 그때 내가 회사에 들어가 준다고 하면 거절하기 어려울걸. 아무렴. 나는 굉장해졌으니까.”

수빈이 징그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그년을 내 아래에 깔아뭉개겠어!”

수빈은 크게 웃었다. 말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모양이었다.

“그러니 슬슬 끝내자고. 네놈이 슬금슬금 움직이는 걸 보고 있는 것도 짜증나니까.”

‘들켰나.’

수빈의 말에 적당히 반응하며 골드 젬이 떨어진 곳으로 움직이던 성윤이 멈칫했다.

‘거리는?’

아직 멀다. 지금 뛰더라도 골드 젬을 잡기 전에 수빈에게 따라잡힐 것이다.

그렇게 판단하자마자 성윤은 다시 뒤로 뛰기 시작했다.

“이 자식! 도망은 못 간다니까!”

수빈이 성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성윤은 그 모습을 돌아 봤다.

‘포즈는 저것.’

그리고 속으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쿠웅!

다시 한번 몸이 무거워졌다.

‘대략 5초.’

마법의 발동은 젬을 발동시키는 시간과 같다고 한다. 즉, 수빈의 젬 발동 시간은 5초 이상이라는 것.

‘다른 젬을 더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5초 동안은 사용하지 못할 테지.’

정보를 하나 얻었다. 하지만 이 정보를 얻기 위해서 감수하기로 한 위험이 닥쳐왔다.

“하아아앗!”

굼뜨게 움직이는 성윤을 향해 수빈이 할버드를 거세게 휘둘렀다.

성윤은 각오를 하고 이까지 악물고는 방패를 들어 올렸다. 몸이 무거워졌어도 미리 대비를 하고 있었기에 간신히 방패를 할버드 앞에 들이밀 수 있었다.

콰아앙!

거센 충격이 몰아닥쳤다.

‘젠장!’

성윤은 욕설을 내뱉었다. 아무리 예상했다지만 지금까지 몇 번이고 자신의 목숨을 지켜준 방패가 부서져 흩날리는 모습을 보는 건 정말 유쾌하지 않았다.

‘에밀리 씨에게 사과해야겠군.’

그런, 상황에 맞지 않는 낙천적인 생각을 하며 성윤은 다시 뒤로 나자빠져 데굴데굴 굴렀다.

스윽!

과중력이 사라졌다. 성윤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과중력이 사라지기까지는 대략 6초.’

또 하나의 정보를 손에 넣었다. 그 정보도 뇌리 한구석에 넣었다.

언제나 방패를 들고 있던 손이 허전했다. 성윤은 혹시나 하는 상황에 두 손으로 메이스를 잡고 수빈을 경계했다.

수빈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역시 갖고 노는 건가.’

예상대로 수빈은 자신을 단번에 끝낼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철저하게 자신을 얕보는 것이니 기분이 나쁠 만도 하건만 성윤은 오히려 좋아했다. 가지고 놀려고 한다는 건 방심을 하고 있단 뜻이고 빈틈도 나타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성윤은 옆으로 손을 뻗었다. 젬에 집중하는 척을 했다. 하지만 눈은 수빈에게서 떨어뜨리지 않았다.

성윤의 행동에 흥미를 느꼈는지 수빈도 성윤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다.

‘좋아.’

혹시라도 다짜고짜 덤벼오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수십 초 후.

후웅!

성윤의 손에 창이 잡혔다. 성윤은 메이스를 역소환하고 창을 수빈에게 겨눴다.

수빈이 조소했다.

“뭐야. 고작 창 하나 소환하는데 몇 십 초나 걸린 거냐? 젬 발동까지 느린 놈은 불쌍하구나! 나는 젬을 발동하는데 5초면 충분한데 말이야!”

성윤의 표정이 가볍게 일그러졌다. 수빈의 말이 불쾌해서가 아니었다.

‘젬 발동 시간을 알아내려고 방패까지 잃는 도박까지 했건만.’

한데, 수빈은 그걸 대놓고 알려 주고 있었다. 수빈의 태도를 보면 성윤이 직접 물어봤어도 자랑스럽게 알려줬을 것 같았다.

‘입 싼 놈이라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녀석의 가볍다 못해 민들레 씨처럼 바람 따라 허공을 유영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입이 성윤에게 굉장히 유리한 정보를 제공해주기는 했지만 애초에 전력의 차이가 너무 난다.

수빈이 떠벌이는 정보는 간극을 조금 좁혀 줄 뿐이었다.

성윤은 침을 삼켰다. 녀석이 중력 마법의 젬을 갖고 있는 이상 도망갈 수도 없다. 어떻게든 정면으로 쓰러뜨려야 했다.

물론 가지고 있는 젬의 수준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각오를 해야겠어.’

대략적인 작전은 짜 놨다. 하지만 작전이랄 것도 없다. 운과 상황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힘 한 번 쓰지 못하고 참살 당할 그런, 계획 같지도 않은 계획이다.

말 그대로 도박이다.

하지만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난 무조건 신혜를 보러 갈 거야!’

사랑스러운 딸의 얼굴을 떠올리며 각오를 다졌다.

“드디어 싸울 마음이 생긴 것 같네.”

수빈이 만족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수빈은 이걸 싸움, 전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리 상대가 빠르게 성장한 연결자라고 하지만 고작해야 막 시작의 미궁을 졸업한 자다.

전투 경험도 젬의 등급도 자신을 따라 올 수 있을 리 없다. 한계에 막혀 질질 짜던 예전의 자신이라면 모르겠지만 지금 자신은 커다란 힘도 얻지 않았는가.

‘이놈만 죽인다면 블러디 젬을 더 준다고 했지.’

정말로 환상적인 힘이다. 이 젬 하나로 모든 게 바뀌었다.

정상적인 랭크에서 벗어난 이질적인 젬. 착용하는 것만으로 발동시킬 수 있는 젬의 랭크, 숫자가 대폭 상승하고 발동 시간은 급속히 단축됐다. 게다가 몬스터의 피를 흡수하면 흡수할수록 그 능력은 상승한다.

‘이런 걸 더 얻는다면…!’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블러디 젬을 얻기 위해서라면 질투심 나는 인간 하나 죽이는 것 따위 일도 아니었다.

쾅!

수빈의 할버드와 폭주 시킨 성윤의 창이 충돌했다. 하지만 폭주 시킨 방패조차 몇 번 두들기는 것만으로 박살내버린 수빈의 공격을 고작해야 이제 막 인디고 랭크로 올라간 창으로 대응할 순 없었다.

단 두 번의 부딪침으로 창날에 거미줄처럼 금이 갔다. 게다가 수빈의 괴력은 성윤의 창을 멀찍이 튕겨낼 수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수빈의 할버드는 리치마저 성윤의 창과 비슷했다.

콰직!

“아악!”

할버드의 창날이 성윤의 왼쪽 어깨에 박혔다. 성윤이 비명을 질렀다.

히죽!

성윤의 비명이 미녀의 감미로운 노래 소리라도 되는 듯 수빈은 웃었다. 해맑고 만족스럽게.

“뭐야. 이 정도의 상처로 비명을 지르는 거야? 유망한 1세대 연결자께서 지를 만한 비명이 아니잖아!”

수빈은 할버드를 회수했다. 할버드의 창날을 따라 핏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성윤은 상처 부위를 붙잡고 무릎을 꿇었다. 화상을 입은 것처럼 부상 부위가 화끈거렸다. 샘솟는 피가 손가락 사이를 타고 흘렀다.

‘괜찮아. 이 정도면 괜찮아. 생각보다는 훨씬 경미한 부상이야.’

성윤은 필사적으로 자신을 달랬다. 아무런 부상도 없이 지금의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일부러라도 부상을 당할 생각이었다. 그래야 수빈이 자신을 더더욱 얕볼 테니까.

게다가 상정한 최악의 상황과 비교해보면 지금은 그나마 나은 편이기도 했다.

전투가 불가능한 중상을 입을 수도 있었고 부상을 입을 새도 없이 죽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정도는 딱 적절한 부상이었다.

성윤은 눈을 수빈에게서 떼지 않은 채로 창을 땅바닥에 내려 놨다. 하지만 언제든 사용할 수 있는 거리에 뒀다.

그 상태로 수십 초 동안 정신을 집중하는 척을 했다. 역시 수빈은 기다렸다.

스윽!

성윤의 손에 메이스가 잡혔다. 성윤은 그 즉시 창을 역소환시켰다.

“이번엔 메이스냐. 하긴, 창은 한 손으로 다루기엔 버겁지.”

성윤이 메이스를 잡고 일어서자 그제야 수빈은 전투 자세를 취했다. 잡은 쥐를 희롱하며 놀려는 고양이처럼 할버드를 장난스럽게 휘두르며 다가온다.

성윤은 통증을 참으면서도 수빈을 노려봤다.

‘대충 판은 짜였어.’

자신을 상처 입은 사냥감이라 생각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정보도 오판시켰다.

전세를 역전시킬 틈은 단 일순간이다. 성윤은 각오를 다졌다.

“하앗!”

일부러 커다랗게 함성을 지르며 수빈에게 뛰어갔다. 그와 비교되게 수빈은 여전히 느긋했다.

필사적으로 메이스를 휘둘렀다. 하지만.

카앙!

고작해야 한 손으로, 그것도 통증 때문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은 공격이 제대로 먹힐 리 없다.

수빈의 할버드에 성윤의 메이스가 허망하게 튕겨나갔다.

수빈이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 순간은, 성윤이 무엇보다 노리던 순간이었다.

무기도 튕겨 나가고 부상도 입은 성윤을 수빈은 완전히 얕보고 있다.

‘지금!’

성윤의 손에 창이 생성됐다. 아무런 딜레이도 없는 소환에 수빈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하지만 성윤은 수빈의 얼굴을 확인하지도 않고 창을 내질렀다.

푸욱!

수빈의, 갑옷으로 가려지지 않은 오른쪽 팔뚝에 창날이 꽂혔다.

“끄윽!”

지금껏 비열하고 야비한 웃음만을 짓던 수빈의 얼굴이 아픔에 크게 일그러졌다. 성윤은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상처 입은 왼팔까지 억지로 움직여 창대를 부여잡았다. 그 상태로 힘을 더 줬다.

쿠직!

“아아아아아아악!”

창날이 더욱 깊숙이 파고들어 팔을 완전히 관통했다.

상처 사이로 피분수가 튀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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