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의 미궁-93화 (93/354)

제93화

성윤의 2층 탐색도 거의 2주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탐색은 꽤 순탄하게 흘러갔다. 하지만 조금 힘에 부친다는 느낌도 있었다.

2층에서 나오는 몬스터들은 대충 시작의 미궁의 4층부터 7층까지의 몬스터들. 대부분 로스 남매와 파티로 잡던 녀석들이다.

게다가 시작의 미궁의 몬스터보다 강하기도 하니 힘이 부치는 게 당연했다. 이 상태면 3층은 성윤에게 위험할지도 몰랐다.

오늘도 2층을 돌아다니며 몬스터를 잡고 또 삐뚤삐뚤한 선으로 지도 비스무리한 걸 그리던 성윤은 미궁을 벗어나기 위해 1층으로 올라왔다.

표시해둔 화살표를 따라 최단거리로 미궁 출입구로 향하던 성윤이 발걸음을 멈췄다.

출입구와 가장 가까이 있는 갈래길에 뭔가 있었다.

‘몬스터?’

성윤은 무기를 고쳐 쥐고 그걸 쳐다봤다. 하지만 이상했다. 아무리 봐도 그건 몬스터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건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이 미궁에 나 말고 인간이 있을 리가.’

성윤이 천천히 다가갔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긴장감을 품었다.

그에 비해 드디어 성윤을 발견하게 된 수빈은 환희에 휩싸였다.

“네가 우성윤이지?”

수빈이 씨익 웃었다. 성윤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역시 상대는 인간이었다. 그것도 자신을 아는 듯한.

“누구십니까?”

“네 선배.”

뚱딴지같은 대답이 들려왔다. 성윤이 눈을 가늘게 떴다.

수빈은 투구를 쓰고는 있었지만 얼굴 가리개가 없는 타입이라 얼굴을 확인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본 것 같기도 한데.’

익숙한 얼굴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혀 모르는 얼굴이라고 단언하기에도 애매했다.

어쩌다 한 번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그런 얼굴. 하지만 그런 사람을 일일이 기억할 리도 없다.

특히 선배라고 칭할 만한 사람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김수빈이라고 하면 알겠냐?”

수빈이 답을 가르쳐줬다.

김수빈. 그 이름은 성윤의 기억에 남아 있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사장님을 배신하고 나간 첫 번 째 연결자.’

그제야 수빈의 선배라는 지칭이 이해가 갔다.

“…당신이 여긴 어쩐 일입니까?”

“너한테 부탁이 하나 있어서.”

초대면에 반말을 찍찍 내뱉는 수빈은 분명 예의 없는 태도였지만 성윤은 뭐라 하지 않았다. 그의 낮은 자존감이 다시 활약한 것이다.

하지만 수빈이 말한 내용은 성윤이 수상함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우리가 부탁을 들어주고 말고 할 사이였습니까?”

초대면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은 사이에 부탁이라니. 그것도 암스트롱에서 멀리 떨어진 성윤의 개인 미궁에까지 찾아와서.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지 말고 들어주라.”

애교를 부리는 말투. 하지만 아까부터 수빈의 얼굴에 진득하게 붙어 떠나지 않는 비릿한 조소가 그 부탁이 제대로 된 부탁이 아님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무슨 부탁입니까?”

“아, 별거 아냐.”

수빈은 환하게 웃었다.

“내 손에 죽어주면 돼.”

큐웅!

빛살 같은 일섬이 최단거리로 뻗어 온다. 만약 성윤이 대비를 하고 있지 않았다면 넋 놓고 당했을 그런 일격이었다.

성윤이 황급히 방패를 들었다.

콰앙!

무기로 방패를 때렸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소리가 미궁 안에 울려 퍼졌다.

“컥!”

간신히 공격을 방어했지만 할버드가 품고 있던 힘이 너무 강했다. 성윤이 뒤로 붕 날려갔다.

쿠웅!

구겨지듯 지면에 처박혔다. 온 몸이 아팠다. 하지만 성윤은 쉴 틈도 없이 벌떡 일어났다.

“호오, 과연. 빠른 시간 내에 시작의 미궁을 완전 공략한 능력자라는 소문이 거짓은 아니었나 봐?”

가지고 놀려는 것일까. 수빈은 성윤을 추적하지 않고 그를 비웃었다.

하지만 성윤은 비웃음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았다. 남의 비웃음 따위 성윤에게 단 1mm의 상처도 주지 못한다.

그는 불쾌한 감정도 없이 당장 해야 할 일을 했다.

방패를 살폈다. 사각형의 방패 앞면에 커다란 흉터가 나 있었다.

소름이 돋았다. 그가 갖고 있는 방패는 블루 젬의 방패다. 거기에 워낙에 공격이 흉맹했기에 폭주마저 시킨 상태다.

그런 방패가 단 일격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상위의 젬!’

그것이 무기든 육체 능력이든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이든, 폭주 시킨 블루 젬의 방패를 일격에 상처 낼 수 있는 무언가를 수빈이 가지고 있는 게 확실했다. 그리고 그건 성윤에게 무척 불리한 일이었다.

“왜. 시작의 미궁을 공략하는데 7년이나 걸린 내가 이런 힘을 가진 게 놀라워?”

수빈이 천천히 다가오며 말했다.

그건 분명 자랑이었다. 부모님에게 놀라운 선물을 받은 아이가 다른 이들에게 으스대는 말투와 다르지 않았다.

성윤은 대꾸하지 않았다. 상대와 떠드는 것보다 이곳에서 벗어날 타개책을 찾아야 했다.

‘역시 그것밖에 없어.’

블루 젬을 압살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를 상대로 성윤이 내놓을 카드는 얼마 없다. 하지만 그중 확실한 카드가 하나 있었다.

골드 젬.

벌써 두 번이나 성윤의 목숨을 구해준 비장의 카드. 하지만 지금 당장은 쓸 수 없었다.

성윤은 힐끔 바지의 주머니를 봤다. 골드 젬은 거기 들어 있었다.

‘젠장!’

젬의 성장을 우선시한다고 골드 젬 대신 옐로우 젬을 끼워 넣은 게 미치도록 후회스러웠다. 하지만 지금 후회한다고 해서 변하는 건 없다.

지금은 어떻게든 기회를 봐 옐로우 젬을 골드 젬으로 갈아 끼워야 했다.

수빈의 눈이 꿈틀거렸다.

자신의 대단함을 이제부터 천천히 말해주려고 했는데 성윤의 폼을 보니 듣는 모양새가 아니었다. 그 모습이 꼭 자신을 1세대라고 무시하던 놈들처럼 보였다.

“이 개새끼가! 내 말을 들으라고!”

수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성윤이 그의 말을 들을 리 없었다. 오히려 ‘이때다’ 하고 등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 틈에 골드 젬을!’

성윤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딱딱한 젬의 감촉이 느껴졌다. 슬쩍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도망치기 시작한 성윤에게 당황한 건지 수빈이 쫓아오는 기색은 없었다. 성윤은 급히 골드 젬을 꺼내들었다.

‘이제 이걸 끼기만 하면…!’

쿠웅!

성윤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마치 뭔가 몸을 잡아 누르는 것 같았다.

‘이건!’

느껴본 적 있는 감각이다. 달의 가벼운 중력을 느끼다가 암스트롱이나 미궁에 들어가 갑자기 중력이 늘어날 때 이런 느낌이 들었다.

“이 새끼가!”

뒤에서 욕설이 들린다. 그리고 뜀박질 소리도. 몸이 무거워지니 도망을 칠 수 없었다.

행동도 굼떠졌다. 어떻게든 거리를 벌리려 노력하며 옐로우 젬을 빼려 했다.

하지만 무리였다.

결국 중간에 젬 교체를 포기하고 방패를 들었다.

콰앙!

“크윽!”

다시 몸이 떴다. 충격으로 골드 젬이 저 멀리 튕겨나갔다. 성윤은 허망한 눈으로 금빛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젬을 바라봤다.

쿠당탕!

다시 땅바닥을 굴렀다.

“쿨럭!”

기침을 내뱉었다. 아까보다 더 타격이 컸다. 마치 사람들 몇 명을 더 이고 땅에 떨어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성윤은 바로 일어섰다. 몸이 아팠지만 드러누워 있다가 죽는 건 사양이었다.

슬쩍 방패의 앞면을 쳐다봤다. 두 번 째 공격을 허용한 방패에 또 다시 커다란 상처자국이 생겼다.

게다가 방패를 움직일 때마다 ‘끼익’거리는 불길한 소리도 들렸다. 방패 자체도 많이 일그러져 덧댄 철판과 나무 본체 사이가 일그러져 있었다.

‘앞으로 한 방. 잘 해야 두 방 정도인가.’

성윤이 속으로 뇌까렸다. 아무래도 그의 방패는 공격을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골드 젬이로군.”

수빈이 저 멀리 떨어진 젬을 쳐다봤다.

‘위험할 뻔했어.’

내색은 안 했지만 수빈은 조금 놀랐다. 정확히 어떤 능력인지는 모르겠지만 쥬얼 랭크의 젬이라면 그도 위험한 것이다.

‘만약 저 녀석이 저걸 끼고 있어서 바로 강제발동 시켰다면….’

등에 조금이 돋았다. 아직 자신의 능력은 쥬얼 랭크를 상대할 정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도 금방이야.’

블러디 젬만 있다면 그의 능력은 어디까지고 뻗어나갈 것이다.

‘저 녀석처럼 목숨 구제용으로만 갖고 다니는 게 아닌, 진짜 쥬얼 랭크를 다루는 연결자가 될 수 있어.’

수빈은 성윤이 골드 젬을 다룰 정도의 격이 된다는 걸 몰랐다. 당연히 목숨을 한 번 구하기 위한 예비용으로만 생각했다.

만약 성윤이 골드 젬도 다룰 수 있는 격이 된다는 걸 알았다면 질투심에 휩싸여 더더욱 열폭했을 것이다.

궁지에 몰린 쥐새끼처럼 자신을 경계하는 성윤에게 수빈은 천천히 다가갔다.

“눈 돌아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타개책을 찾기 위해 성윤이 계속 주변을 살피는 걸 비웃었다.

하지만 성윤은 역시 비웃음을 흘려버렸다.

수빈은 다시 울컥했다.

뭔가 반응이 있어야 재밌는데 반응이 없다. 흘러가는 강물을 자기 분에 못 이겨 첨벙거리는 찌질이가 된 것 같았다.

스윽!

성윤의 몸을 짓누르고 있던 무언가가 풀렸다.

“중력이 풀렸군.”

수빈이 중얼거렸다.

중력. 신경 쓰이는 말이 들렸다.

성윤은 수빈이 한 말을 곱씹었다. 분명 자신의 몸에 일어난 현상이 중력과 관련되어 있다면 이해할 수 있다.

말 그대로 신체에 더 강력한 중력이 적용된 것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마법, 아니면 특수 능력의 젬.’

정보가 필요했다.

성윤이 반응하자 수빈이 히죽 웃음지었다.

돌부처처럼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표정 변화가 없던 성윤의 반응에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그 얼굴에 비참한 혹은 절망적인 표정이 내비치는 걸 보고 싶었다.

“도망치려 해봤자 소용없어. 이 몸에게는 중력 마법의 젬이 있거든. 네 녀석이 도망치려 할 때 언제든 네 몸에 여덟 배의 부하를 걸어 주마!”

수빈이 킬킬대며 말했다.

고대하던 정보가 들어 왔다. 성윤에게는 메마른 가뭄을 적셔주는 단비나 마찬가지인 정보.

하지만 성윤은 수빈의 말을 전부 믿지는 않았다. 방금 전의 말이 사실인지 아니면 자신에게 오판을 하게 만들려는 술수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수빈의 득의양양한 표정을 보고 있으면 의심하는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정말로 수빈이 할리우드 유명 배우 뺨치는 연기를 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래도 일단 들은 정보는 뇌리 한구석에 저장을 해놨다. 그게 설령 썩은 동아줄이라고 해도 지금은 일단 챙겨놔야 했다.

“대단하지? 고작해야 연결자가 된 지 1년도 채 되지 않는 너 같은 놈은 본 적도 없는 젬일 거다.”

수빈은 팔찌에 박혀 있는 자신의 젬들을 쓰다듬었다.

“자그마치 7년간 내가 밑바닥에서 굴러다니면서도 모아온 것들이야. 몬스터에게서 얻기도 하고 구매도 하고 교환도 했지. 한계에 다다른 녀석이라는 비웃음도, 자기가 발동할 수 있는 젬보다 높은 랭크의 젬을 모아서 뭐 할 거냐는 빈정거림도 받았지만 무시했다.”

진주 목걸이를 모으는 돼지. 당시 그의 별명이었다.

“난 믿었어! 언젠가는 격이 오를 거라고! 다른 패배자 1세대들과는 달리 나는 성공한 자가 될 거라고!”

하지만 그의 격은 오르지 않았다. 아무리 몬스터를 잡고 아무리 미궁을 헤매어도 그의 격은 대기업에 입사했을 때 그대로였다.

빠른 성장과 지민의 과잉 투자, 그리고 대기업의 입사까지, 연결자로 각성한 후 승승장구한 수빈은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이미 너무도 커져버린 자존심은 그런 자신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쓸모도 없는 상위의 젬을 악착같이 모았다.

7년이란 시간과 현실을 인정 못하는 광기는 고작 시작의 미궁에서 전전하는 그가 상위의 젬을 꽤 모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줬다.

“그리고 나는 이 힘을 손에 넣었다! 나를 무시하던 녀석들을 무릎 꿇릴 수 있는 힘을! 내가 마땅히 누려야 했을 미래와 성공을 가질 수 있는 힘을!”

수빈은 부르짖었다.

“이제 아무도 나를 무시하지 못해!”

그 말, 오로지 그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수빈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성윤은 그렇게 생각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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