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화
수빈은 술이 확 깨는 느낌을 받았다.
노상방뇨를 하는 모습을 들켜 부끄러워서 그런 건 아니다. 그런 수치심이 남아 있었다면 고성방가를 하며 남에게 폐를 끼치지도 않았다.
인적 없는 곳에서 낯선 자를 만나서도 아니다. 썩어도 연결자인 그다. 동네 불량배 무리라면 얼마나 몰려온들 죄다 때려눕힐 자신이 있었다.
그저,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지독히도 차갑고 소름끼쳤기 때문이다.
무의식적으로 지금은 끼고 있지 않은 디바이스와 젬을 찾을 만큼.
수빈은 천천히 등을 돌렸다. 상대가 악마든 귀신이든 일단 상대는 해야 했다.
다행히도 상대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수빈은 더더욱 경계심을 올렸다.
아직 초봄이라 날이 완전히 풀리진 않아 긴 팔, 거기에 더해 가벼운 외투까지 착용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눈앞의 사내의 차림새는 그 정도가 아니었다. 아니, 한파가 몰아치는 한겨울이라도 지금 눈앞의 사내 같은 차림을 하진 않는다.
칠흑 같은 로브가 전신을 가리고 있다. 얼굴은 로브에 달린 후드를 푹 눌러썼다.
그것도 모자라 후드 안으로 언뜻 보이는 얼굴엔 가면까지 쓰고 있었다.
어느 모로 보나 수상하기 짝이 없는 광경.
키와 덩치도 제법 컸지만 이 정도로 수상한 차림새를 하고 있으니 그 키와 덩치도 의심이 갈 정도였다.
“당신 누구야?”
혀 꼬부러진 소리는 이미 사라졌다. 수빈은 슬쩍 자세를 잡고 물었다.
아무리 능력이 안 돼 회사에서 쫓겨났다고 하더라도 몇 년 동안의 실전 경험은 착실하게 쌓아왔는지 그의 자세는 훌륭했다.
그리고 사내도 마찬가지의 감정을 품은 것 같았다.
“훌륭하군요. 아무리 1세대라도 몇 년 동안 몬스터를 사냥한 관록은 있는 것 같습니다.”
사내가 말했다.
정말로 정체를 드러내기 싫은 듯 그의 목소리는 짙은 기계음이 껴 변조되어 있었다. 아마 목소리를 변조시키는 장치가 가면 아래에 붙어 있는 것 같았다.
칭찬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말투는 분명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열등감에 찌들어 좋은 말조차 곡해해 들을 정도가 된 수빈에게 그 말투는 불난 집에 부채질 하는 것과 같았다.
“지금 시비 거는 거냐!”
수빈이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며 위협했다. 하지만 사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김수빈.”
사내가 담담히 말을 꺼냈다.
“1세대 연결자. 제법 빠른 성장으로 주목을 받고 굴지의 대기업과 계약까지 체결한, 1세대로서는 크게 성공한 케이스. 하지만 성장 한계가 빨리 와 결국 그저 그런 1세대 연결자로 판명. 지금은 회사에서도 쫓겨나는 게 확정되어 다른 회사들을 알아보고 다니는 중. 하지만 그조차 용이하지 않음.”
“이 새끼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처럼 듣기 싫은 말을 태연히 내뱉는 사내에게 수빈은 주먹을 날렸다.
강맹한 기세가 공기를 가른다. 수빈의 주먹은 과연 연결자답게 평범한 사람은 물론이고 제대로 운동을 한 사람보다도 빨랐다.
하지만 수빈은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터억!
수빈의 눈이 동그래졌다. 상대의 후드와 가면을 뚫고 얼굴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려야할 자신의 주먹이 막혔다. 그것도 한 손으로 가볍게.
손바닥으로 수빈의 주먹을 막은 사내는 힘을 줘 수빈 자체를 밀어 내듯 수빈의 주먹을 떨쳐냈다. 수빈이 주춤대며 물러났다.
“연결자였냐.”
연결자의 육체를 막을 수 있는 건 같은 연결자뿐. 거기에 주먹을 낚아 챈 움직임이나 자신을 밀어낸 괴력을 봤을 때 자신보다 급이 더 높은 연결자였다. 수빈의 경계도가 한층 더 올라갔다.
“자, 자. 흥분하지 마시죠. 저는 당신이랑 싸우러 온 게 아닙니다.”
하지만 수빈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저는 당신에게 제안을 드릴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제안?”
사내의 얼굴은 후드와 가면에 가려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수빈은 그가 가면 안에서 소름끼치도록 불길한 웃음을 짓고 있다고 확신했다.
“당신의 ‘정당한 권리’, 되찾고 싶지 않으십니까?”
“‘정당한 권리’라고?”
“네, ‘정당한 권리’. 1세대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강한 연결자로 성장해 부와 명예를 모두 누리는, 당신을 무시한 자들이 역으로 설설 길 수밖에 없는, 당신이 상상했던, 미래의 당신이 누렸어야 할 모든 권리 말입니다.”
수빈은 침을 꿀꺽 삼켰다.
사내의 말이 그의 내면을 거세게 흔들었다. 보무도 당당하게 대기업과 계약을 하고 선망의 대상이 되어 장밋빛 미래를 꿈꾸던 때가 기억났다.
그때는 미래의 모든 게 잘 풀릴 것 같았다. 사내의 말은 그때 수빈이 꿈꿨던 미래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게 한낱 꿈이었다.
“댁이 말한 것처럼 그저 그런 1세대 연결자인 나한테 그게 가능할 것 같아?”
말을 하면 할수록 자신이 비참해지는 것 같았다.
“가능하다면?”
그래서였다. 눈앞의 수상하기 이를 데 없는 사내가 한 말에 관심이 가버린 것은.
“가능하다고?”
“네, 가능합니다.”
수빈은 입을 꾹 다물었다.
혹시 자신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건가? 그렇게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진지하게 고민하는 게 우스웠다.
하지만 사내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미 몰릴 데로 몰린 수빈은 그게 지푸라기라도 어떻게든 잡고 싶었다.
“…어떻게 가능하지?”
결국 물었다. 설령 이게 자신을 놀리기 위한, 쓸데없고 어처구니없는 이벤트인 것까지 각오했다.
사내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수빈은 사내의 손바닥 위에 있는 물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수빈의 시선이 놀라움에 물들었다.
그건 젬이었다.
“이걸 어떻게?”
디바이스와 젬은 연결자들이 지구로 내려올 때 철저하게 회수한다. 그건 어느 나라든 마찬가지였다.
“뭐, 나름의 방법이 있습니다.”
사내는 자세한 얘기는 알려주지 않았다.
수빈은 캐묻지 않았다. 로브에, 후드에, 가면까지 쓴, 자신의 신분을 철저하게 숨기고 있는 사람이다. 불법적일 게 뻔한 루트를 알려주지 않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이 젬으로 뭘 어떻게 하란 거야?”
주변이 어두워서 젬의 색깔이 잘 구분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게 최고 랭크 젬인 다이아 랭크의 젬이라도 수빈에겐 별 소용이 없다.
강제 발동을 시켜 단 한 번, 엄청난 힘을 휘두를 순 있겠지만 그게 끝. 수빈이 꿈꿨던 미래를 보증해줄 순 없다.
“한번 잘 봐 보시죠.”
사내가 수빈의 앞으로 젬을 더욱 가깝게 갖다 댔다. 수빈은 미심쩍어하면서도 핸드폰을 들어 라이트를 켰다. 젬을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레드 젬이잖아.”
그래도 귀한 젬이지 않을까 싶어 조금은 기대했는데 김이 팍 새버렸다.
레인보우 랭크의 최고 등급인 1등급의 레드 젬이라고 해도 전체 젬들로 따지면 고작해야 중하급의 젬인 것이다.
사내가 웃음소리를 냈다. 남을 무시하는 것 같은 기분 나쁜 웃음이었다.
“아뇨, 이건 레드 젬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귀한 겁니다.”
의심의 눈초리를 날리면서도 수빈은 다시 한번 젬을 살폈다.
‘어라?’
분명 그 젬은 선명한 붉은 색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수빈이 알던 것과는 달랐다. 조금 더 짙고 조금 더 탁했다.
“뭐야, 이거?”
“블러디 젬이라고 합니다.”
불길한 이름이 흘러 나왔다.
그건 마치 악마의 유혹 같았다.
수빈은 침을 꿀꺽 삼켰다.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한 젬의 출현. 분명 보통 희귀한 게 아닐 것이다.
사내의 말에 설득력이 생겼다.
‘이, 이게 나한테 성공을 가져다 줄 물건.’
홀린 것처럼 젬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수빈은 젬을 잡을 수 없었다. 사내가 내밀고 있던 손을 회수한 것이다.
마치 한여름 밤의 꿈처럼 수빈의 앞에서 젬이 사라졌다.
마치 받은 선물을 다시 빼앗긴 아이처럼 수빈의 눈이 날카로워지며 사내를 노려봤다.
“그런데 말이죠. 이게 보통 귀한 물건이 아니거든요. 마음 같아서는 수빈 씨의 미래를 위해 기쁜 마음으로 드리고 싶지만, 저도 땅 파고 장사하는 놈은 아니라서 말이죠.”
사내가 쭈뼛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정말로 사내가 부끄러워하거나 무서워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저건 그저 놀고 있는 거다.
수빈은 알아챘다. 이건 악마의 유혹이다. 정체를 모르는 자가 내미는, 자신이 원한 미래를 그릴 수 있게 만든다는 물건.
당연히 상대가 원하는 게 있을 것이다.
위험한 일일 게 뻔했다. 사내를 무시하고 이 자리를 뜨는 게 좋았다. 하지만 수빈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받은 굴욕, 분노, 절망 그 모든 걸 갚을 수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도 좋았다. 수빈은 그 정도로 몰려 있었다.
“원하는 게 뭐야.”
결국 묻고 말았다.
“그게 정말로 내가 꿈꿨던 미래를 쥘 수 있게 해 주는 거라면, 엔간해서는 다 들어주겠어.”
“역시 김수빈 씨는 말이 잘 통하시는 분이군요.”
말은 감탄한 것처럼 하지만 그 이죽이는 어투나 태도로 보면 수빈을 존중하는 게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수빈은 상관하지 않았다. 악마에게 혼조차 팔 의향이 있는 판국에 남의 태도를 지적할 여유는 없었다.
“김수빈 씨가 해줄 일은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사내가 손가락 하나를 들어올렸다.
“주제 모르는 1세대 연결자 한 놈만 죽여주시면 됩니다. 아무도 모르게.”
***
성윤은 암스트롱에서 예상치 못하게 3일이란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지도를 완성해달라고 찾아간 전문가가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열심히 그린 지도를 보고 어이없다는 눈길을 보낸 건 잊고 싶었다. 하지만 다행히 불가능하다고 하진 않았다.
예정으로는 하루, 길어야 이틀만 머무르려고 했는데 예상이 틀어졌다.
이미 급수와 영양제 보급은 끝났다. 시간이 붕 떠버렸다. 다른 사람들은 예기치 않은 휴식 시간에 만세를 부르고 푹 쉴지도 몰랐다.
하지만 성윤은 아니었다.
퍼억!
날카로운 팽보어의 엄니를 방패로 쳐낸다. 단, 정면이 아닌 비스듬하게. 정면으로 짓쳐들던 팽보어가 방패에 막혀 옆으로 빗겨 나갔다.
꾸이이이익!
성질이 뻗친 팽보어가 제 분에 못 이겨 괴성을 내지른다. 하지만 그게 팽보어의 마지막 울음이었다.
퍼어억!
자비 없는 메이스가 팽보어의 머리를 가격했다. 팽보어는 단말마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이젠 4층 정도는 쉽군.’
월석을 주우며 그는 생각했다.
성윤은 오랜만에 시작의 미궁에 들어와 있었다. 이미 4층까지의 몬스터는 성윤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조금 더 내려가고 싶었지만 시간상 무리였다. 그래도 나름 쏠쏠한 수익을 얻었다.
시간 때우기 겸 용돈벌이 개념으로 시작의 미궁을 휘젓길 얼마. 시간이 지나 슬슬 미궁을 올라가야 할 때가 되었다.
성윤은 무리하지 않고 시작의 미궁을 벗어났다.
암스트롱 바깥으로 방향을 잡았다. 개인 미궁을 배정받은 이상 지원소의 지원은 받지 못한다. 돈을 내고 비싼 숙박을 잡아야 하는 것이다.
지민이 숙박비와 식비를 경비처리 하라고 꽤 많은 돈이 든 카드를 주긴 했지만 성윤은 그 돈을 쓰지 않았다. 은인이라고 생각하는 지민에게 부담을 주기도 싫었고 굳이 그 돈을 쓸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밥이야 영양제로 때우면 되고 숙박이야 월면주행차에서 자면 되니까.’
정말로 자신에 대해서는 수도승 저리가라 할 정도로 돈을 쓰지 않는 성윤이었다.
그는 얻은 월석을 전문 운반 회사에 맡기고 천천히 월면주행차로 가기 위해 암스트롱 출입구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성윤은 알지 못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자신을 비릿한 웃음과 함께 쳐다보고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