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의 미궁-90화 (90/354)

제90화

성윤은 월면주행차를 세우고 문을 열어 지면에 발을 디뎠다. 뒤쪽으로 하늘거리며 떠다니는 먼지를 피해 황급히 거리를 두면서 미궁 앞으로 걸어갔다.

미궁은 여전히 변함없었다. 불길한 아가리를 드리우고 들어올 테면 들어오라고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몸에 긴장을 두르고 성윤은 디바이스와 젬을 점검했다.

마지막 남은, 특수능력 젬을 꽂을 수 있는 만능 홈을 쳐다봤다. 그 곳에는 3등급인 옐로우 랭크의 젬이 반짝이고 있었다.

성윤은 결국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골드 젬보다는 젬의 수준을 높일 수 있는 옐로우 젬을 끼기로 한 것이다.

옐로우 젬이 랭크를 높일 수 있는 젬은 같은 디바이스에 끼워져 있는 젬뿐. 성윤이 고른 건 퍼플 랭크인 창과 근력배가였다.

그렇게 디바이스를 하나하나 점검하던 성윤의 눈이 손목에 끼워져 있는 시계에 닿았다.

전투를 앞두고 긴장감을 두르고 있던 성윤의 눈이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그가 평소에 차고 있던 시계랑은 달랐다. 나름 값이 나갈 것 같은 그 시계는 바로 신혜가 준 선물이었다.

시계에 손을 대 봤다. 금속의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지만 그 안에서 신혜의 따뜻한 온기가 올라오는 느낌도 들었다.

‘아, 이거 바꿔야지.’

혹시나 전투 때 시계가 부서질 수도 있다. 신혜가 준 시계를 몸에서 떼어내는 건 정말 싫었지만 성윤은 신혜가 준 시계를 월면주행차에 고이 모셔두고 원래 자신이 차고 있던 시계를 찼다.

그걸로 모든 준비가 끝났다.

‘가볼까?’

젬들을 발동시키고 성윤은 미궁 안으로 들어갔다. 미궁 입구에서 빅풋에게 죽을 뻔한 경험이 바로 전이었기에 그의 발걸음은 조심스러웠다.

다행히도 마나 스트림이 끝난 후에도 어느 정도 시일을 두고 들어온 게 정답이었는지 갑자기 강한 몬스터가 튀어나오진 않았다.

입구 근처의 몬스터들을 박멸하다시피 사냥한 게 얼마 전인데 미궁 안은 다시 몬스터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미궁에 들어가 몇 걸음 떼지 못하고 몬스터와의 전투가 시작됐다.

가장 먼저 환영한 건 매드독이었다. 시작의 미궁의 녀석보다는 강한 녀석이었지만 그래봤자 매드독이다.

콰직!

성윤이 날린 메이스가 녀석의 골통을 부쉈다.

우웅!

매드독이 죽음에 이르렀을 때 디바이스에서 미세한 진동이 울렸다. 성윤의 시선이 움직였다.

주인공은 3등급의 옐로우 젬을 끼운 디바이스였다.

옐로우 젬과 같은 디바이스에 껴 놓은 두 젬에 옅은 노란빛이 어려 있는 걸 발견했다. 그 빛은 얼마 안 가 사라졌다.

하지만 성윤은 추측할 수 있었다. 노란 빛이 휩싸였던 두 젬의 성장이 시작된 거라고.

만능 홈에 골드 젬 대신 옐로우 젬을 끼워 넣은 게 실수가 아니길 바라며 성윤은 계속 미궁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시작의 미궁보다 높은 수준의 미궁이라도 고작해야 1층의 몬스터는 지금의 성윤에게 상대가 되지 않는다.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적절하게 때려잡으며 성윤은 쾌진격을 했다.

갈래길이 나왔다. 개인 미궁에서 연결자들의 발목을 붙잡는 원인 중 하나. 처음 왔을 때도 성윤을 상당히 곤란하게 한 것이었지만 이번엔 대비를 해 왔다.

성윤은 가져온 짐에서 주섬주섬 종이와 펜을 꺼냈다. 자신이 온 길을 삐뚤삐뚤한, 아무리 좋게 봐 줘도 능숙하다고 할 수 없는 솜씨로 그리기 시작했다.

그건 지도였다. 조잡하기 짝이 없었지만 당장 그릴 지도는 이 정도면 됐다. 나중에 지금 그린 지도들을 합쳐 제대로 된 지도를 만들 생각이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메고 있던 배낭에서 튼튼한 천을 오려 만든 화살 표식을 꺼낸 성윤은 그걸 미궁 벽면에 붙였다.

표식에 붙어 있던 끈끈한 접착제가 표식을 미궁 벽면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미궁 표식용으로 만든 녀석이라 떨어질 위험은 적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두꺼운 전용 펜을 꺼내들어 표식 아래 화살표를 크게 그렸다. 그것들은 모두 미궁의 출입구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 정도면 되겠지.’

처음으로 공략하는 개인 미궁은 이게 귀찮다. 하지만 필요한 일이다.

성윤은 다시 미궁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일단은 1층의 구조를 전부 파악하는 게 먼저였다.

***

성윤이 개인 미궁을 본격적으로 공략하기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났다. 그는 부지런하게 미궁을 누비며 몬스터들을 사냥했다.

아무래도 팀, 에밀리와 같이 시작의 미궁 최하층에서 사냥을 할 때보다는 얻는 월석의 수준이 떨어져 수익이 줄어들 것 같았지만 몬스터들이 워낙 많았기에 그럭저럭 숫자로 메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성윤의 발걸음이 멎었다. 그의 앞을 단단한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막다른 길. 미궁에서는 흔한 곳이다.

성윤은 종이와 펜을 꺼내 지도에 표시를 했다.

‘끝났군.’

이곳이 지도에 그려지지 않은, 미궁의 마지막 장소였다. 한 달만에 성윤은 1층의 지도를 완성할 수 있었다.

‘1층의 지도를 완성하는데 한 달이 걸렸다라.’

빠른 건지 늦은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 한 걸음은 완전히 내딛었어.’

그 점에 관해서는 기분이 좋았다.

성윤은 시계를 들여다봤다. 슬슬 사냥을 끝낼 시간이 되어 있었다.

등을 돌려 막다른 길에서 벗어났다.

1층의 모든 장소를 전부 돌아다니며 몬스터를 해치웠는데도 몬스터는 여전히 나타나 성윤에게 덤벼들었다.

아마 성윤과 엇갈린 놈들과 2층에서 올라오는 놈들일 것이다. 하지만 그 숫자와 빈도가 뚜렷이 적어진 것도 확실했다.

성윤은 덤벼드는 몬스터들을 처치하고 월석들을 챙기며 전진했다. 갈래길이 나왔다.

혹시라도 길을 잃을까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던 얼마 전과는 달리 그는 미궁벽면에 표시해둔 화살표를 따라 가볍게 움직였다.

그렇게 걷길 얼마. 성윤은 미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너른 달 지면에 덩그러니 서 있는 월면 주행차로 향했다. 채취한 월석을 짐칸에 쏟아 넣고는 차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걸터앉아 오늘 완성한 지도를 꺼냈다.

미궁의 1층이 상당히 넓었던 터라 종이 한 장으로는 미궁의 모든 통로를 그려넣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에 지도는 한 장이 아니었다.

그는 월면주행차 바닥에 모든 지도를 펼쳐 놓았다.

‘…복잡해.’

한숨을 내쉬고 싶었다. 하지만 주변에 공기가 없어 그것도 불가능했다.

삐뚤삐뚤한, 아이의 낙서 같은 선이 종이 위를 지렁이처럼 기어 다닌다. 아마 다른 사람에게 이 지도 같지도 않은 것들을 주고 길을 찾으라고 한다면 벌컥 화를 내며 지도를 권유한 사람 면상에 사정없이 뿌려버릴 게 확실했다.

‘차라리 신혜가 더 잘 그렸겠어.’

그러나 다행히도 성윤 자신은 자세히 살피면 알아볼 수는 있는 수준이었다.

‘이 다음은 전문가에게 맡기자.’

전문가라면 이 선들의 난잡한 나열을 보기 깔끔하게 고쳐줄 거라고 믿었다.

지도를 다시 챙긴 후 성윤은 급수통과 영양제를 확인했다. 전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슬슬 암스트롱에 돌아가야 할 때가 됐군.’

성윤은 운전석으로 이동했다. 시동을 걸고 가속페달을 강하게 밟았다. 성윤의 차가 먼지를 흩날리며 움직였다. 크게 U턴을 한 후 암스트롱을 향해 그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한 달만의 귀환이었다.

***

네온사인이 번쩍거리는 거리. 세계 최고 수준의 치안과 특유의 술문화 덕에 한국의 밤거리는 오늘도 북적거렸다.

태양의 빛을 쫓아내고 하늘을 뒤덮은 밤이란 개념에 정면으로 도전을 하는 것 같은 휘황찬란한 불빛사이로 사람들이 지나다닌다.

일행과 함께 크게 웃는 사람. 남과 싸우는 사람. 술에 먹혀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 등 사람들의 행동과 표정은 다양했다.

그리고 그 안에 수빈도 있었다.

꿀꺽! 꿀꺽!

들고 있던 독한 양주를 그대로 들이킨다. 취하는 것 이전에 목구멍이 아프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하지만 수빈은 아랑곳 않고 계속 술을 위장으로 처넣었다.

“젠장!”

나직이 욕을 내뱉는다. 아무리 연결자가 잘 취하지 않는 신체라고 해도 정도가 있다. 수빈의 걸음은 어느 모로 보나 취객의 걸음이었다.

회사에서 계약 연장 불가 통보를 받은 지 벌써 한 달. 계약 해지 시기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수빈은 달에 올라갈 생각도 안 하고 새롭게 계약할 회사를 찾아다녔다. 당연히 지금 다니는 회사와는 연락을 끊다시피 했다.

하나, 회사도 곧 계약이 끝날 수빈에게 신경을 쓸 생각이 없는지 굳이 연락을 하진 않았다. 그게 더 수빈의 분통을 터지게 만들기도 했다.

그의 노력이 무색하게 그가 찾아간 어떤 회사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처음에는 대기업 출신이라는 간판 때문에 관심을 보이던 회사들도 그가 1세대 연결자에 시작의 미궁을 공략하는데 꽤 오랜 시간을 들인 얘기를 듣고는 난색을 표했다. 아예 문전박대하는 곳도 적지 않았다.

“빌어먹을!”

와장창!

먹고 있던 술병을 던졌다. 바닥에 부딪친 술병이 깨져나가며 유리 파편과 남아 있던 술이 사방으로 퍼졌다.

“꺄악!”

“우악!”

주변 사람들이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소리가 들린 곳을 쳐다봤다. 자연히 술을 던진 것으로 짐작되는 수빈에게 시선이 몰렸다.

사람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술병을 던진다는 그의 안하무인격 행동에 불쾌감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수빈의 기세가 워낙 살벌하여 직접적으로 불만을 표하는 사람은 없었다.

주변의 시선을 무시하고 수빈은 계속 걸었다.

“개자식들! 1세대라고 무시하기는!”

그가 다시 성을 냈다.

사실 그가 그렇게 많은 회사와 계약을 하지 못했다는 건 좀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리 성장 한계를 맞은 1세대 연결자라고 해도 수빈은 평균적인 1세대 연결자의 능력은 갖고 있었다.

당연히 이유가 있었다.

수빈은 눈이 너무 높았다.

처음을 지민이라는, 수익을 도외시한 채 소속 연결자에게 무제한적인 지원을 행하는 사장의 비정상적인 회사에서 시작했고 다음은 세계 굴지의 대기업과 계약했다.

그런 수빈에게 이제 와 평범한 1세대 연결자들이 들어가는 밑바닥 회사는 성에 차지 않았다.

그 분수를 모르는 생각 때문에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회사와만 계약을 하려고 하니 잘 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수빈은 그런 이유는 생각지도 않고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회사들을 욕하기 바빴다.

“뭐~가 ‘우리는 1세대 연결자는 받지 않는다.’야! 개쓰레기 같은 새끼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큰 소리로 떠든다.

“그놈들도 그래! 내가 이제까지 해준 게 얼만데 그깟 미궁 공략 좀 늦었다고, 뭐? 인연이 없어? 이런 썩을 새끼들!”

그의 불만이 그를 거절한 회사를 넘어 그의 원래 회사에까지 닿았다. 하지만 그것도 끝이 아니었다.

“한지민 그년도 쌍년이야! 제 회사에 좋은 연결자 하나 들어왔다고 사람을 그딴 식으로 괄시하고! 그놈은 뭐 나랑 다를 것 같아? 어차피 1세대는 그저 그런 밑바닥 놈들일 뿐이야! 대미궁 좋아하네!”

자신이 지민에게 한 짓은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자신만이 피해자인 척 나댄다. 누가 어떻게 봐도 꼴불견인 모습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도 아랑곳 않고 꽥꽥 대던 수빈이 입을 다물었다.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지 소변이 마려웠다. 그는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들어갔다.

사람이 아예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이 들어가자 바지춤을 열고 벽에 오줌을 갈기기 시작했다. 방광을 깨끗하게 비우고 엉거주춤 지퍼를 올릴 때였다.

“김수빈 씨.”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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