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화
성윤은 맹세코, 신혜의 자랑이라면 한시도 쉬지 않고 일주일 내내 말할 수 있었다. 말을 하느라 지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신혜의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라도, 듣는 첼시가 반쯤 자포자기하고 성윤의 말을 잘 들어주는 청취자가 됐다고 해도 시간이란 개념은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장애물이다.
언젠가 끝은 오는 법.
한국행 우주선이 출발 준비에 들어갔다는 방송이 울려 퍼졌다.
“시간이 됐군요.”
언제 신혜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았냐는 듯 성윤이 벌떡 일어섰다.
신혜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즐겁지만 당연히 신혜를 직접 보는 것보다는 못하다. 성윤은 한시라도 빨리 한국행 우주선을 타고 싶었다.
“그러네요.”
첼시도 그렇게 말하며 일어섰다. 두툼한 캐리어를 잡고 당장 이동할 채비를 했다.
그 모습을 성윤은 의아하게 쳐다봤다.
“미국행 우주선은 아직이지 않습니까?”
미국행 우주선도 출발 준비에 들어갔다는 방송은 나온 적이 없다. 첼시가 움직일 이유가 없다.
배웅해주기 위해 일어선 것인가 생각을 했지만 캐리어를 단단히 붙들고 있는 첼시의 모습은 단순히 배웅해주려는 모습이 아니었다.
“아, 말 안 했나요? 저 한국가요.”
첼시가 화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예전에 지민이를 따라 가 본 이후로 처음이네요. 오랜만의 해외여행인 걸 생각하면 정말로 기분이 좋아요.”
암스트롱에서 겪은 모든 스트레스를 한국에서 풀어버리겠다는 각오로 첼시는 의지를 불태웠다.
“그렇습니까?”
성윤은 그렇게만 답했다.
왜 고향에 먼저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 가는지 같은 질문이 나올 법도 했지만 성윤은 그런 건 묻지 않았다. 관심이 없었다.
성윤과 첼시는 그대로 우주선을 타고 한국으로 귀환했다.
***
지민은 이번에도 신혜를 데리고 나로 우주 센터에 나와 있었다.
신혜도 이제는 많이 익숙해졌는지 아빠를 만난다는 기쁨에 가슴 설레 하면서도 그 나이 대에 걸맞은 호기심을 안고 우주 센터 이리저리를 돌아다녔다.
지민은 그런 신혜를 천천히 따라다녔다.
신혜가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하거나 위험한 행동을 하거나 출입 금지구역 같은 곳에 들어가는 건 철저하게 막으면서도 그 외에는 아이가 하는 일을 막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는 심장이라는 마력 공급로를 가진 연결자처럼 어디 외부에서 에너지를 자체적으로 보급이라도 하는지 신혜는 정말 끝도 모를 체력을 가지고 우주 센터를 쏘다녔다.
아이들이 가진 불가사의한 체력의 돌출이었다. 하지만 지민은 전혀 불평하지 않고 신혜의 뒤를 쫓았다. 누가 봐도 화목한 모녀의 그림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성윤의 우주선이 도착할 때까지였다.
곧 우주선이 도착한다는 방송이 흘렀다. 지민이 신혜를 부르기도 전에 신혜가 쪼르르 지민의 곁으로 다가왔다.
“언니! 우주선 왔대!”
호기심을 자극하는 우주 센터도 아빠와의 만남에 비하면 별것 아니다.
그녀의 팔을 끌듯이 잡고는 언제나 성윤을 기다리는 곳으로 갔다.
그곳에는 지민과 신혜처럼 달에서 오는 사람을 맞기 위한 사람들이 늘어서 있었다.
얼마 안 있어 달에서 귀환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신혜는 혹시나 나오는 성윤을 놓칠까봐 눈을 부릅뜨고 나오는 사람들 하나하나를 살폈다.
“아빠!”
신혜가 큰 소리를 냈다. 드디어 보고 싶은 아빠가 나온 것이다.
신혜의 목소리를 들은 성윤이 활짝 웃으며 두 팔을 쫙 폈다. 망설일 것 없다. 신혜는 힘껏 달려가 성윤의 품속에 뛰어들었다.
“잘 지냈어?”
“응!”
오랜만에 느끼는 딸의 온기는 여전히 따스했다.
지민은 순식간에 뛰어간 신혜의 뒤를 따라 천천히 부녀상봉의 공간으로 걸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둘을 보고 있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사람이 성윤의 뒤에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안녕, 지민!”
조금은 어눌한 한국어를 하며 첼시가 보란 듯이 손을 크게 들었다.
“첼시? 어쩐 일이야?”
“오랜만에 휴가를 받아서 지민이나 만나볼까 하고 달려 왔지.”
성윤의 품에 있던 신혜가 지민과 첼시의 대화에 얼굴을 들었다.
“아, 달에서 봤던 예쁜 언니다.”
같은 여자라서 그런 것일까. 신혜는 어렵지 않게 첼시를 알아봤다.
“안녕! 신혜라고 했지?”
“응!”
아무래도 예전에 한 번 본데다가 성윤이 월면주행차를 태워줬을 때 암스트롱 바깥에서 둘이 우주복을 입고 실컷 놀아본 경험이 있는 터라 신혜가 낯을 가리진 않았다.
하지만 신혜는 시선을 첼시에게 두면서도 여전히 성윤에게서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읏차!”
작은 기합을 넣으며 성윤이 신혜를 안은 그대로 들어 올렸다. 신혜가 작은 비명과 함께 꺄르르 웃었다.
그 모습을 첼시는 흰 눈으로 쳐다봤다.
‘역시 익숙해지지가 않아.’
같은 우주선을 타고 왔음에도 친근감의 ‘친’자도 보이지 않던 성윤이 딸을 상대로는 온갖 애교를 다 떨고 있었다.
얼굴 근육이 움직이지 않는 걸까 의심이 될 정도로 무뚝뚝한 얼굴도 지금은 온갖 웃긴 표현을 지으며 망가지고 있었다.
“휴가를 빨리 받았네? 한두 달 정도 남지 않았어?”
“당겨졌어. 나야 땡큐지, 뭐.”
“집에 들르지 않아도 돼?”
첼시의 옆으로 지민이 다가오며 물었다. 그래도 친구라고 성윤은 대놓고 무시한 화제를 그녀는 착실하게 물어줬다.
“뭐, 집에 가면 부모님이 ‘애인은 있냐. 결혼은 언제 할 거냐. 이 기회에 남자라도 좀 만나라.’라고 묻기만 하니까.”
그녀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투덜댔다.
자유의 나라 미국. 미국은 전 세계의 인종, 문화, 풍습이 모인 거대한 용광로로 비유되는 곳이다.
사람들의 생각처럼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보수적인 사고에 물든 한국인조차 깜짝 놀랄 만큼 보수적인 사람들도 존재한다.
그리고 첼시의 부모님은 극단적이라고 할 순 없지만 충분히 보수적인 사고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지민은 첼시의 부모님의 말이 보수적인 사고관에서만 나오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걱정할 만하지 않아? 나이가 나이잖아? 그러고 보니 첼시는 올해 서른이던가?”
얼마 전에 새해가 밝았다. 아슬아슬하게 20줄이란 마지노선을 간신히 붙들고 있던 첼시도 더 이상 20대라고 주장할 수 없었다.
하지만 첼시는 이마에 핏대를 세우고 지민의 어깨를 붙들었다.
“스물여덟이야! 아직 생일 안 지났어! 애초에 태어나자마자 한 살로 치고 새해가 시작되면 무조건 한 살 더라니! 명백하게 한국의 나이 세기가 이상한 거라고! 난 미국인이야!”
여자에게 나이 얘기는 금기다. 그것도 첼시처럼 앞자리의 숫자가 바뀔 나이라면 더더욱.
“흐음, 미국식 나이로 스물여덟이구나. 나는 한국식 나이로 해도 스물여덟인데.”
“지민, 오랜만에 만난 친구 상대로 한 번 해보자는 거지?”
“설마. 그러보니 첼시는 생일이 4월이었지? 미국식 나이로도 스물아홉까지 얼마 안 남았네?”
첼시가 지민에게 달려들었다. 장난스럽게 헤드락을 걸고 꺅꺅댄다. 눈이 돌아갈 미녀 둘이서 얽혀 미소를 지으며 장난치는 모습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한 눈에 끌었다.
“아빠, 언니들 이상해.”
신혜가 손가락으로 둘을 가리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이 조금 풀렸는지 첼시가 지민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지민은 조금 흐트러진 머리칼을 다시 정돈하며 말했다.
“그래도 가서 부모님 말도 들어 봐. 너는 주변 환경도 남자 만나기 힘든 환경이잖아.”
멋진 만남은커녕 지인을 만나기조차 힘든 달에 처박혀 연구만 해대니 부모님이 걱정할 만도 하다.
무엇보다 어렸을 때는 공부, 커서는 연구밖에 하지 않은 첼시는 연애 경험은커녕 사회경험조차 별로 없었다.
“연애라면 지민 너도 마찬가지 상황이잖아.”
첼시가 공부와 연구 때문에 연애할 여유가 없었다면 지민은 회사를 운영하느라 연애할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지민은 어깨를 으쓱였다.
“난 아직 한국식으로도 스물여덟이니까. 생일은 더더욱이나 8월이고. 여유 있지.”
“크으으윽!”
나이 얘기를 하면 두 살이나 더 먹은 첼시가 이길 방도가 없었다. 결국 첼시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변했네, 너.”
방금 전까지 당장이라도 손수건을 물어뜯으며 원통한 눈물을 줄줄 흘릴 것 같던 첼시가 표정을 바꾸고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마치 손이 많이 가는 동생을 보는 언니 같은 자상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변해?”
“그래. 예전에는 이런 식으로 장난을 치진 않았잖아. 벼랑 끝에 몰린 사람 같은 얼굴을 해갖곤.”
예전에 치는 장난이라고 해 봤자 달에서 사준 식대를 갖다가 협박하는 정도. 하지만 지금의 지민은 훨씬 더 밝고 명랑하게 장난을 치고 있었다.
물론 그녀의 얼음여왕 같은 표정은 여전했다. 그러나 그 얼음의 표면이 조금은 녹아내렸다는 걸, 그녀의 오랜 친구인 첼시는 간파했다.
지민이 자신의 뺨에 손을 대봤다. 그녀의 시선이 새삼스럽게 신혜에게 돌아갔다.
아빠 품에 안긴 그 아이는 커다란 눈을 더욱 커다랗게 뜬 채 자신들을 보고 있었다. 깜빡이는 눈동자가 그렇게 귀여울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이 다시 움직였다. 신혜를 안고 있는 성윤을 바라봤다.
주변의 시선을 한눈에 모으는 그녀들의 소동에도 그는 오로지 오랜만에 만나는 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만약, 정말로 만약 첼시의 말처럼 자신이 변했다면 그 원인은 하나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또 네 뒤통수를 칠 만한 인간이 아닐까 하고 의심했는데말야. 지금은 저 사람이 너희 회사와 계약한 연결자라는 게 다행으로 여겨져.”
예전 니콜라스라는 쓰레기와 엮였을 때 그가 자신을 보호해줬던 걸 첼시는 기억했다.
그 사태로 인해 목숨까지 위협받았지만 그는 자신을 탓하지 않았다. 솔직히 첼시는 그 사건 이후로 성윤의 인성에 대해서는 완전히 마음을 놓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딸과 함께, 어느새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의 얼음까지 녹이고 있었다.
자세한 상황은 모른다. 지민의 심경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변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민의 심경이 확실하게 변하고 있다는 건, 조금 충격 받은 얼굴로 성윤과 신혜를 보고 있는 그녀의 태도로 충분히 짐작 가능했다.
“자, 그럼 가볼까?”
첼시가 활기차게 말했다. 지민을 뒤에서 밀고 성윤과 신혜를 불러 우주 센터를 나서기 위해 움직였다.
곧 일행은 디바이스와 젬을 맡겨야하는 곳에 도착했다. 성윤은 주섬주섬 자신의 디바이스와 젬을 카운터에 내려놨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민의 얼굴이 날카로워졌다.
“…또 늘었네요.”
이 사람은 대체 어떤 인간이기에 달에서 내려오기만 하면 디바이스나 젬이 늘어나 있는 것일까?
디바이스와 젬은 얻기 어렵다는, 자신의 상식 자체가 번번이 박살나는 느낌이었다.
물론 연결자에게 디바이스나 젬이 늘어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설사 사용하지 못한다고 해도 디바이스나 젬은 그 자체만으로도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
문제는 성윤이 디바이스와 젬을 늘릴 때는 항상 죽음에 이를 수 있을 정도의 위기 상황에 처했었다는 점이다.
당장 ‘이번에도 죽을 뻔했나요?’라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간신히 참았다.
성윤과 첼시만 있었다면 몰라도 지금은 신혜도 있었다. 이제 갓 여섯 살이 된 아이한테 아빠가 죽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들려줄 순 없었다.
“응? 디바이스나 젬이 늘면 좋은 거 아냐?”
상황을 정확하게 모르는 첼시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신혜가 듣지 못하게 조용히 설명한 지민의 말을 듣고는 상황을 알게 됐다. 그녀의 표정도 좋지 않아졌다.
“일단 상황은 나중에 들을게요.”
지민이 쌀쌀맞게 말했다. 성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