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화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긴장감이 끊어지며 피로가 몰려왔다. 성윤은 발동하고 있는 젬을 정지시켰다.
폭주시켰던 젬들이 일제히 회색으로 물들었다. 앞으로 일정 시간 동안 젬들은 빛을 잃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구에 갈 생각인 성윤에게 문제가 되진 않았다.
문제는 다른 것이었다.
파직!
소리가 들리진 않는다. 하지만 성윤은 디바이스를 걸친 팔목에서 올라오는 기분 나쁜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툭!
골드 젬이 먼지 구덩이의 달 표면에 떨어져 반쯤 박혔다. 성윤은 골드 젬을 들어 올려 주머니에 그냥 쑤셔 넣었다.
망가진 홈을 확인하고 새로 얻은 디바이스를 조사하는 등 할 일이 많았지만 성윤은 일단 달 지면에 주저앉았다.
전투 때는 극한의 흥분상태였기에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미궁 밖으로 나오자 방금 겪었던 위기가 새삼 생각났다.
등에 식은땀이 잔뜩 돋아난 상태였다. 조용히 품 안에 손을 넣었다. 꺼낸 건 그의 보물의 사진.
성윤은 한동안 신혜의 사진을 쓰다듬으며 정신없이 바라봤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음이 상당히 진정된 걸 느끼며 성윤은 신혜의 사진을 도로 품 안에 넣었다.
인간이란 것들은 죽음의 공포조차 익숙해지는지 처음 죽을 뻔했을 때보다 훨씬 더 회복이 빨라진 걸 느꼈다.
성윤은 골드 젬이 박혀 있던 디바이스의 홈을 봤다. 역시 새까맣게 타들어가 있었다.
‘빌어먹을!’
그의 눈이 험악해졌다. 망가진 홈은 7등급 퍼플 랭크의 젬을 끼울 수 있는 홈.
아깝긴 하지만 성윤이 이렇게 인상을 쓸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이 홈의 파괴는 성윤에게 충분한 불이익을 주고 있었다.
‘이제 골드 젬을 끼울 수 있는 디바이스가 없어.’
예전 봉쇄 구역에서 골드 젬을 써 살아난 이후로 성윤은 이래저래 골드 젬에 의지하고 있었다.
성윤이 감당할 수 없는 위기에 빠져도 그 위기를 충분히 극복하게 만들 수 있는 힘을 골드 젬이 가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대단한 젬이라도 사용할 수 없으면 무소용이다. 성윤이 가지고 있는 디바이스의 홈 중 육망성 모양인 특수능력의 젬을 장착할 수 있는 홈이 더 이상 없었다.
‘여기에는 있으려나?’
방금 빅풋을 잡고 얻은 디바이스를 들어봤다. 이것도 팔찌형태였다. 아무래도 팔찌 형태의 디바이스가 굉장히 많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외양적 형태보다도 특수능력의 젬을 끼울 수 있는 홈이 더 필요했다.
성윤의 얼굴이 미묘해졌다.
홈은 세 개였다. 숫자가 좀 적긴 하지만 대신 등급이 높았다. 자그마치 4등급 그린 랭크 홈이 둘, 그리고 3등급 엘로 랭크 홈이 하나.
그린 랭크의 홈은 무기 젬을 꽂을 수 있는 일자 모양과 육체능력 젬을 꽂을 수 있는 오망성 모양이었다.
하지만 옐로우 랭크의 홈은 뭔가 달랐다. 그 모양은 원형. 그러나 원형의 젬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능 홈.’
그 안에 모든 형태의 젬을 꽂아 넣을 수 있는 홈이 바로 그것이었다.
특수 능력 젬을 꽂을 수 있는 홈은 나오지 않았지만 대신 만능 홈이라 불리는 원형의 홈이 나왔다. 다행히 골드 젬을 꽂을 수 있는 홈이 나온 것이다.
하지만 성윤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옐로우 랭크의 홈이 지금 성윤이 가진 디바이스의 홈 중 가장 랭크가 높은 홈이라지만 그래봤자 레인보우 랭크다.
골드 젬을 장착하고 강제 발동 시 망가지는 건 변함없다. 게다가 만일을 대비해 골드 젬을 옐로우 홈에 끼도 다닌다면 수준 높은 홈 하나를 완전히 놀리는 게 돼버린다.
그가 3등급 옐로우 랭크의 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고민할 필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옐로우 랭크 젬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 무슨 능력인지 볼까.’
한 번도 발동을 시키지 않았기에 옐로우 랭크의 젬이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모른다.
성윤은 주머니를 뒤적여 옐로우 젬을 꺼내 옐로우 홈에 끼었다.
원형 안에서 금속 조각 같은 것들이 밀려 나와 육망성 형태의 옐로우 젬을 단단히 고정했다.
조금 신기함을 느끼며 젬을 발동했다. 젬의 첫 발동인지라 시간이 조금 걸렸다. 하지만 성윤의 마력을 흠뻑 머금은 젬은 이내 자신의 능력을 알렸다.
성윤은 놀랐다. 골드 젬도 그렇고 이 특수 능력의 젬들이란 정말로 특이하기 이를 데 없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름값을 한다고 해야 할까. 성윤은 자신의 머리에 떠오른 옐로우 젬의 능력을 정리했다.
같은 디바이스에 장착된, 자신보다 더 낮은 랭크의 젬을 자신의 랭크까지 성장시키는 젬. 발동 중 몬스터를 잡을 때마다 몬스터의 마력을 조금 빼앗아 젬을 성장시키는 것이다.
분명 좋은 젬이다. 다룰 수 있는 젬의 능력이 곧 연결자의 힘이니 이 젬은 연결자의 힘을 상승시키는 젬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 성장한 젬을 장착할 수 있는 디바이스가 있다면의 얘기지만.’
하지만 적어도 당장 4등급 그린 랭크의 홈이 두 개씩이나 늘어났다. 다른 젬 두 개를 그린 랭크까지 성장시킨 후 써먹으면 좋은 전력이 될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다시 골치가 아파왔다.
옐로우 젬이 그저 그런 젬이라면 조금 손해를 무릅쓰고 골드 젬을 끼우려 했는데, 상당히 좋은 젬이 나와 버린 것이다.
‘…어쨌든 일단 돌아가자.’
어차피 지금은 지구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생각할 시간은 많다. 성윤은 빅풋에서 나온 월석도 짐칸에 던져 넣고는 운전석에 들어가 차를 출발시켰다.
***
성윤은 올드린 우주 공항에 앉아 있었다. 월석을 전부 전문 운반 회사에 맡긴 그의 짐은 매우 단출했다. 달로 올 때 갖고 왔던 얼마 안 되는 짐들. 그게 전부였다.
신혜를 만나야 하기 때문에 깨끗하게 씻은 터라 몸에서 옅은 향기가 풍겼다.
옷도 지구에 내려갈 때 입으려 따로 준비해 둔, 달에서 한 번도 입지 않은 새 옷이었다.
우주선 시간을 기다리며 성윤은 신혜의 사진을 꺼내 들여다봤다.
대체 얼마나 사진을 들여다본 건지 사진은 너덜너덜해 있었다. 새로운 사진을 준비해야겠다며 성윤이 내심 생각을 할 때였다.
“어머?”
성윤의 앞에 누군가 멈췄다.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미성. 궁금증에 고개라도 한 번 들어볼 만하건만 성윤은 신혜의 사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그녀를 쳐다봤다.
“성윤 씨.”
그녀가 끌던 캐리어를 세우며 성윤을 불렀다.
한창 집중하고 있던 상황에서 방해를 받았다. 성윤은 상대가 누군지 확인도 하지 않고 우거지상을 쓰며 고개를 들었다.
처음에 성윤은 그녀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말끔하게 손질된 화사한 금발은 넘치는 생명력을 자랑하며 곧게 등허리까지 흘러내리고 오밀조밀 모인 얼굴은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며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딱 달라붙은 스키니진과 풍만한 가슴을 전혀 숨기지 못하는, 성조기가 프린트 되어 있는 티셔츠가 그녀의 몸매를 그대로 드러냈다.
“우연이네요. 성윤 씨도 지금 내려가는 건가요?”
성윤은 눈을 깜빡였다. 자신의 이름을 알고 친한 척을 하는 걸 보니 자신을 아는 사람인 것 같다. 하지만 성윤은 눈앞의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누구십니까?”
괜히 고민할 필요 없다. 성윤은 대놓고 상대의 이름을 물었다.
남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어떻게 보면 실례일 수도 있는 일이다. 당연히 기억되지 못한 사람이 기분이 좋을 리 없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마치 장난을 성공시킨 아이 같았다.
“저예요. 첼시 스트로브요.”
성윤이 그녀, 첼시를 다시 한번 자세하게 뜯어 봤다.
평소의 커다란 안경과 부스스한 머리카락, 꾀죄죄한 연구복의 그녀와는 완전히 달랐다.
보통의 여자들처럼 제대로 꾸미고 안경도 콘택트렌즈로 바꾼 것 같았다.
안 그래도 그 초라한 모습으로도 자체발광을 하던 그녀다. 조금 꾸민 것만으로 엄청난 수준의 미녀로 다시 태어나 있었다.
첼시는 조금 가슴을 두근거리며 성윤을 쳐다봤다.
‘어떻게 반응을 할까?’
자신의 연구원으로서의 외모와 평범하게 다닐 때의 외모의 갭이 굉장히 크다는 건 그녀도 익히 알고 있다.
연구원으로서의 자신을 알고 있던 사람들이 자신의 원래 모습을 보고 놀라는 모습을 보는 건 그녀의 작은 재미였다.
“첼시 씨입니까?”
“그래요.”
“지구에 내려가시는 건가요?”
“네.”
“그렇군요. 잘 내려가시기 바랍니다.”
‘응?’
첼시의 환한 미소에 작은 금이 갔다.
‘어라?’
이게 아니다. 그녀가 원한 반응은 절대로 이게 아니다.
하지만 그녀의 의도야 어쨌건 성윤은 다시 신혜의 사진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얼굴을 붉히고 자신을 칭찬하며 경험 없는 숫총각처럼 흘끔흘끔 훔쳐보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하지만 놀라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잠시간이라도 저 무뚝뚝한 얼굴에 경악의 빛이 지나가는 걸 잡고 싶었다.
하지만 성윤은 쿨하다는 표현을 넘어 아예 자신에게 관심조차 없었다. 보통 남자들은 자신이 이렇게 앞에 서 있으면 무슨 일 있냐며 물어본다.
아니, 앞에 서 있는 게 자신이 아닌 타인이라도 누군가 앞에 서 있다면 일단 신경은 쓰이지 않는가.
하지만 성윤은 대체 신경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여전히 사진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스윽!
성윤의 행동에 변화가 생겼다.
첼시의 눈이 빛났다. 결국 자신에게 말이라도 한 마디 건네려는 게 아닌가 하는 기대감이 반짝였다.
하지만 성윤은 품에서 신혜의 사진 한 장을 더 꺼냈다. 그리고 다시 그걸 보기 시작했다.
“…….”
첼시의 눈이 죽었다. 어처구니없는 눈길로 성윤을 내려다봤다.
하지만 이내 커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인간한테 뭘 기대한 거야.’
털썩!
그대로 성윤의 옆에 주저앉듯 앉았다. 그의 어깨에 턱을 걸치듯 하며 고개를 들이밀었다.
“저도 보여줘 봐요.”
갑작스러운 첼시의 행동에 성윤이 인상을 찌푸렸다.
다른 남자들이라면 자기가 얼굴을 들이밀면 얼굴을 붉히면 붉혔지 인상을 쓰지 않는다. 첼시가 입을 삐죽였다.
성윤의 불만도 개의치 않고 고개를 더 들이밀었다. 그녀는 성윤의 불만을 단 한 번에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역시 신혜는 귀엽네요.”
“그렇죠?”
성윤의 얼굴에 인상이 싹 사라지고 바보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이번엔 오히려 성윤 쪽에서 첼시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건 신혜가 네 살 때 찍은 사진입니다. 지금도 귀엽지만 당연히 그때도 무척 귀여웠던 터라….”
성윤의 입에서 신혜에 대한 자랑이 주저리주저리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좋을까.’
신혜 자랑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사진을 보고 연신 떠들어대고 있는 성윤의 얼굴을 쳐다봤다.
제법 잘생긴 얼굴이 보인다. 게다가 평소의 우중충한 몰골이 아닌, 신혜를 만나기 위해 꽤 꾸민 터라 성윤의 외모도 충분히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첼시가 보는 건 그의 외모가 아니었다. 마치 나이 먹지 않은 소년 같은 얼굴로 딸에 대해 신나서 말하는 그의 표정이 두 눈에 박혔다.
‘정말로 특이한 인간이야.’
아마 희귀도로 따지면 충분히 멸종 위기종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다.
결국 첼시는 복잡하게 생각하는 걸 포기했다.
“그럼 이때 신혜는 아빠를 참 좋아했겠네요?”
“이를 말입니까. 예전에 어떤 일이 있었냐면….”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첼시는 성윤이 떠벌이는 신혜의 자랑을 계속해서 들어줬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