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의 미궁-76화 (76/354)

제76화

“여긴 어떻게?”

“시작의 미궁 공략을 완료하셨다면서요? 그러면 개인 미궁을 배정받으셔야 할 테니, 그 수속을 밟으러 올라 왔죠.”

성윤의 놀람에도 지민은 태연하게 말했다.

‘…과연 사장님. 행동력이 끝내주는군.’

팀과 에밀리의 회사의 일처리가 빠르다고 내심 부러워한 걸 취소해야 할 듯싶었다.

가능성도 없는 아버지의 흔적을 찾겠답시고 몇 년을 대미궁에 매달려 있는 그녀다. 그 한 걸음을 내딛은 기쁜 날에 그녀가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자신의 생각이 물렀음을 성윤은 인정했다.

“그런데 신혜는 왜 데려오셨습니까?”

“아이 혼자 두기 그렇잖아요. 마침 유치원 방학시즌이라 데려왔어요. 그 나이에 해외여행 가는 애들도 많으니까요.”

해외여행 가는 느낌으로 아이를 달에 데려왔다니, 이것에는 성윤도 기가 막혔다.

“나 오면 안 되는 거야?”

신혜가 성윤의 옷깃을 쭉쭉 당기며 물었다. 아이의 얼굴에 불안감이 언뜻언뜻 보였다.

성윤의 왜 데려왔냐는 질문이 신혜의 불안감을 부추긴 것 같았다.

“설마. 그냥 아빠가 놀라서 그런 거야.”

성윤은 황급히 부정하며 다시 신혜를 꼭 껴안았다. 신혜도 성윤의 말에 마음을 놓았는지 또 꺄르르 웃으며 성윤에게 매달렸다.

“그런데 예전에 아빠가 말한 달이랑은 달라.”

신혜가 주변을 훑어보며 말했다.

성윤은 예전, 온갖 과장과 허풍을 섞어 동심이 가득 들어간 달에 대해 얘기해준 걸 기억했다. 조금 식은땀을 흘리며 그는 열심히 변명을 늘어놓아야 했다.

오랜만에 만난 부녀의 재회를 겉으로 티는 안 내지만 흐뭇하게 보고 있던 지민이 고개를 조금 돌렸다.

지민과 신혜의 갑작스러운 등장과 신혜를 안고 있는 성윤을 옆에서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놀라서 쳐다보고 있는 낯선 인물 둘이 보였다.

“성윤 씨. 이분들은?”

지민의 질문에 변명을 끝내고 다시 신혜와 놀고 있던 성윤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던 로스 남매의 존재를 깨달았다. 그대로 신혜를 안고는 무릎을 세워 몸을 일으켰다.

“아, 소개가 늦었군요. 알려드렸던 제 파티원들입니다.”

지민에게 로스 남매를 소개한 후 성윤은 다시 남매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희 회사 사장님입니다.”

지민을 가리킨 후 그렇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지금까지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던 지민의 입에서 유창한 영어가 흘러 나왔다.

“아, 안녕하십니까?”

팀이 허둥지둥 지민이 내민 손을 잡았다.

그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저 며칠 전 주정부린 것에 사과를 하러 온 것인데 설마 성윤의 회사의 사장을 만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안녕하세요.”

에밀리도 지민과 악수를 나눴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에는 당황보다는 경계심이 앞서고 있었다.

‘예쁜 사람이네.’

에밀리도 자신의 미모가 어디 가서 떨어진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성윤이 굉장히 대단한 사람으로 밝혀진 후에 위기감이 들었지만, 자신의 외모라면 어떻게 들이밀 수 있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할 정도였다.

그리고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만할 정도로 그녀의 외모는 출중했다.

하지만 성윤의 회사의 사장이라고 밝힌 지민을 본 에밀리는 충격을 받았다.

인종은 다르지만 에밀리의 눈에도 위기감이 느껴질 정도로 지민의 외모는 뛰어났다.

그나마 차가운 표정이 옥에 티일까. 하지만 그게 개성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팀이 지민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의 불쾌감을 잔뜩 실어 팀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그 아이가 성윤 씨의 딸인가요? 신혜라고 하던?”

아픈 옆구리를 부여잡고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치는 팀을 무시한 채 에밀리가 물었다.

사진에서 본 기억은 있지만 아무래도 인종간의 차이가 있다 보니 정말로 그 아이가 맞는지 애매했던 것이다.

물론 성윤의 행동만으로도 90%맞다고 확신할 수 있었지만.

“네, 제 딸입니다.”

그때 성윤의 표정은 팀과 에밀리가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이었다.

무뚝뚝하거나 음습한 표정은 어디 가고 아이를 가진 부모의 사랑스러움이 가득했다.

에밀리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언제나 무뚝뚝한 모습만 보이던 그의 새로운 모습이 그녀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 모양이었다.

“어디 보자.”

일단 동생에게 다시 마음을 추스를 여유를 주기 위해 팀이 성윤과 신혜에게 다가갔다.

물론 신혜에 대해 궁금한 면도 있었다. 일이 정말 잘 풀린다면 피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조카가 될 수도 있는 아이인 것이다.

“네가 신혜니?”

아빠보다 커다란 사람이 고개를 들이밀어 오자 신혜가 움찔 놀랐다.

게다가 팀과 신혜는 말도 통하지 않는다. 신혜가 성윤의 품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어? 어? 위, 위협하려던 건 아닌데?”

신혜가 척 봐도 무서워하자 오히려 팀이 당황했다. 제 딴에는 호감 있는 모습을 보이려 노력한 것이다.

“비켜. 너 같은 곰같이 생긴 인간이 얼굴을 들이밀면 그게 위협이지 뭐가 위협이야?”

에밀리가 팀을 뒤로 끌어냈다. 팀은 억울해하면서도 순순히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괜찮니?”

이번엔 다른 목소리가 들린다. 신혜가 성윤의 품에서 눈만 살짝 빼 상대를 확인했다.

이번엔 곰 같은 아저씨가 아닌, 요정같이 예쁜 언니였다. 신혜가 조심조심 고개를 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조금 떨어져서 지켜보고 있던 팀의 표정이 재밌게 변했다. 누가 보면 하늘이라도 무너진 줄 알 것 같았다.

에밀리가 슬쩍 팀을 돌아봤다. 그 얼굴에 떠오른 득의양양한 모습에 팀의 안에서 뭔가가 울컥 솟았다.

“나는 에밀리라고 해. 네가 신혜지?”

상냥하게 말을 건다. 하지만 아직 한글도 떼지 않은 신혜에게 영어가 통할 리 없었다. 성윤이 에밀리의 말을 번역해줬다.

“응.”

“언니는 에밀리라고 해. 신혜 아빠의 동료야.”

성윤을 매개삼아 신혜와 에밀리는 얘기를 나눴다. 관심이 관심인 만큼 그녀는 신혜에게 계속 호감을 표했고 신혜도 그녀의 질문에 곧잘 대답했다.

대략적인 인사와 소개가 끝나자 에밀리가 성윤을 향해 말했다.

“귀여운 아이네요.”

“그렇죠?”

만약 그게 에밀리가 성윤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행한 전략이라면, 그 전략은 무척 효율적이었다.

에밀리로서는 처음 보는 성윤의 환한 미소가 그의 얼굴에 걸렸다.

예상치도 못한 그 미소에 정면으로 노출된 에밀리는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렸다. 새빨갛게 상기된 얼굴을 감추려면 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성윤은 신혜와 노느라 그녀의 행동을 보지 못했다.

“슬슬 저희는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부끄러움에 쭈뼛대는 에밀리를 한심하게 쳐다보며 팀이 성윤과 지민에게 말했다. 반가운 부녀의 재회를 위해 이쯤에서 빠지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되시나요?”

갑작스럽게 지민이 물었다.

혹시 데이트 권유인가. 지민 같은 미녀에게 시간 있냐는 말을 듣는다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리라. 그러니까 내심 마음이 설렌 팀이 이상한 건 아니었다.

물론 현실적으로 그럴 가능성이 극히 적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예, 있습니다.”

하지만 결코 흑심 때문에 무리하게 이런 대답을 한 건 아니었다. 최소 하루를 꼬박 써야 하는 미궁 공략을 못 할 뿐이지 정말로 한시도 몸을 뺄 수 없을 정도로 바쁜 건 아닌 것이다.

“잘 됐네요. 성윤 씨가 꽤 신세를 진 것 같아 두 분께 식사 한 끼 대접해드리고 싶은데, 괜찮나요?”

역시나였다. 각오는 하고 있었으면서도 가슴 한편에서 올라오는 짙은 아쉬움을 내리누르며 팀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너도 시간 되지?”

“응.”

에밀리에게도 OK가 떨어졌다.

“그럼 조금 있다가 저녁에 뵙죠.”

“네, 저녁에 뵙겠습니다.”

“저녁에 봬요.”

둘은 인사를 하고 숙소에서 멀어져 갔다. 그들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지민은 성윤을 쳐다봤다.

그는 로스 남매가 보이지 않게 되자 바로 신혜와 대화를 나누며 웃고 있었다. 그 행복한 모습을 방해하고 싶진 않았지만 그래도 당장 할 일이 있었다.

“그럼 저희도 움직여볼까요?”

“그러죠.”

성윤은 여전히 신혜를 안은 채 지민을 따라가려 했다. 하지만 그는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아빠.”

“응?”

그의 사랑하는 딸이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했다. 성윤은 신혜의 입에 귀를 가져다댔다.

“그런데 냄새 나.”

“…….”

성윤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는 지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입가에 손을 대고 몸을 부들부들 떨어대고 있는 지민이 보인다.

평소의 차가운 그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아무래도 신혜의 말이 그녀의 웃음보를 직격한 것 같았다.

“…잠시 씻고 오겠습니다.”

“풋! 그, 그러세요!”

성윤은 지민에게 신혜를 맡기고 유료 샤워실을 찾았다. 아무리 돈이 많이 들더라도 이것만큼은 당장 해결해야 했다.

***

온몸을 씻고 성윤은 깔끔하게 옷도 새로 꺼내 입었다. 지구에 갈 때 입으려 고이 모셔둔 옷이었다.

성윤이 오자마자 바로 다시 성윤의 품에 안긴 신혜는 이제 냄새 안 난다고 꺄르르 웃었다.

성윤도 같이 웃었지만 그 웃음 어딘가에 어색한 일면이 있는 것은 그의 탓이 아니리라.

지민은 둘을 데리고 암스트롱을 앞서 걸었다. 성윤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거리였다.

그렇게 걷길 얼마. 갑자기 건물들이 사라지고 넓은 공터가 나왔다.

그곳은 차량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는 곳이었다. 주차장, 혹은 중고차 시작을 방불케 하는 곳.

하지만 세워져 있는 게 평범한 차량은 아니었다.

일단 크기가 컸다. 대형 버스보다 조금 더 커 보이는 그것은 사각형의 무성의한 디자인을 하고 있었다.

커다란 바퀴는 총 12개가 달려 있어 험한 지형에서도 보통 차보다 더 잘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커다란 차다!”

신혜가 눈을 반짝이면서 차를 쳐다봤다. 아이의 눈에 커다랗고 바퀴가 많이 달린 자동차가 퍽 신기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 커다란 차네.”

성윤은 신혜를 조금 더 높이 들어 올려 차들을 잘 보이게 해 줬다.

그때 누군가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토실토실 살이 찐, 욕심 많아 보이는 남성이었다.

가느다란 눈 속의 눈동자가 마치 얼마나 돈을 쓸 손님인지를 파악하려는 듯 열심히 돌아다녔다.

지민이 앞으로 나섰다.

“차를 받으러 왔어요.”

“성함이?”

“한지민이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남성이 들고 있던 태블릿을 들고 이것저것 조작했다. 곧 목적하던 걸 찾았는지 그가 얼굴에 웃음을 띠웠다.

딴에는 손님에게 친절하고 밝은 이미지를 주려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투실투실 살 찐 얼굴로 그런 표정을 지으니 마치 사람을 돈으로만 보는 악덕 상인 같았다.

“이쪽으로 와주십시오.”

사내는 그들을 데리고 차량들이 가득 서 있는 곳으로 향했다. 빼곡하게 서 있는 차량들의 사이를 복잡하지도 않은지 거침없이 빠져나간 그가 걸음을 멈추고 무언가를 가리켰다.

“이게 주문하신 물건입니다.”

그의 손이 향한 곳에는 다른 차량과 비슷하게 생긴 커다란 사각형의 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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