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의 미궁-74화 (74/354)

제74화

시작의 미궁의 앞은 미궁에서 돌아오는 자들로 붐볐다. 오늘도 살아남았다는 안도와 앞으로의 생활을 풍족하게 해 줄 월석의 무게로 사람들 대부분은 생기 가득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성윤과 팀, 에밀리는 조용히 바라봤다.

“처음 왔을 때는 빨리 경험을 쌓고 개인 미궁이나 배정받아 나가자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막상 이 시간이 오니 묘하게 감정이 들쑥날쑥하네요.”

팀이 말했다.

에밀리와 함께 어머니의 꿈을 이루자며 기세도 등등하게 시작의 미궁에 첫발을 디딘 날이 생각났다.

저 미궁에 정이라도 든 것일까. 헛소리도 정도가 있다며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정말로 끝이네요.”

팀의 옆에서 미궁을 쳐다보던 에밀리가 한숨 쉬듯 말했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이라고 했던가.

시작의 미궁의 공략을 끝낸다는 건 꿈에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는 걸 의미한다.

분명 기뻐해야 할 상황. 그리고 기뻐하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가슴 한편에 아쉬운 감정이 머무는 것도 사실이었다. 시작의 미궁의 공략을 완료한다. 그건 곧 성윤과의 파티를 해산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야.”

에밀리의 마음을 이해한 팀이 나름 그녀를 생각해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가차 없었다.

“웃기고 있네.”

팀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너는 진짜…!”

곧 남매간의 익숙한 말다툼이 벌어졌다. 아웅다웅하며 서로에게 면박의 말을 주고받는 게 물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10년 전에 파이를 누가 더 먹었네 같은 유치한 말까지 오고가는 그 상황을 성윤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바라봤다.

생각해 보면 참 인상 깊은 인연이다.

처음엔 몬스터를 끌어들인 민폐쟁이들로서 만났다.

물론 악의가 없었고 목숨을 걸고 책임을 지려 했던 사람들이라 남아 있는 앙금은 없었다.

그 후에 파티 제안을 받고 반 년 넘게 어둡고 음습한 미궁에서 함께 싸워왔다. 그들과 헤어지는데 느끼는 게 없다면 거짓말이다.

평소 같았으면 급한 일이 없는 이상 둘의 싸움이 끝나길 조용히 기다렸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슬슬 가야 하지 않을까요?”

끼어든 성윤 덕에 남매는 말싸움을 멈췄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다며 겸연쩍은 얼굴을 하는 둘이었지만 서로를 힐난하는 눈빛은 여전했다.

성윤은 손으로 미궁 반대편, 도심부 쪽을 가리켰다.

“초보 연결자로서 시작의 미궁의 공략을 끝내고 한잔 하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시간도 얼마 없으니 바로 가는 게 좋을 것 같군요.”

혹시 나중에 간간이 팀워크를 재정비하기 위해 다시 시작의 미궁에 들를 수는 있겠지만, 그때 마실 술과 오늘 마실 술이 같을 리 없었다.

“확실히 여기서 시간 낭비할 틈은 없군요.”

마지막은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코가 비뚤어지게 마시자며 큰 소리를 탕탕 치던 팀이 넙죽 말을 받았다.

아직도 도끼눈을 뜨고 있는 에밀리를 거의 연행하다시피 해서 앞서 갔다.

에밀리가 팀에게 뭐라 불평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녀도 이견은 없었는지 순순히 팀의 뒤를 따라갔다.

그날, 팀과 에밀리는 정말로 죽자고 마셔댔다. 평소에는 간단하게 캔 맥주 몇 캔 비우는 걸로 끝났지만 그날은 독한 증류주까지 시켜서 사정없이 들이부었다.

아무리 연결자의 신체가 강인해 쉽게 취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도 한도가 있는 법이다.

둘이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을 말 그대로 목구멍 너머로 들이붓자 결국 둘은 사이좋게 인사불성이 되어 탁자 위에 엎어졌다.

둘과는 다르게 권하는 술도 거부하고 평소처럼 맥주만 홀짝이던 성윤만이 제정신으로 남았다.

‘결국 이렇게 됐나.’

캔 안에서 찰랑거리는 맥주를 쭈욱 들이켜 완전히 비운 후 성윤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로스 남매가 계산한 영수증이 탁자 한편에 나뒹구는 게 보였다.

성윤은 그 액수를 보지 않으려 애쓰며 탁자를 정리했다. 그리고 완전히 정신이 나간 둘을 부축했다.

‘정말로 연결자의 육체가 고맙군.’

190이 넘는 거대한 체격의 팀과 170이 이상의 여자치고는 큰 키를 가진 에밀리를 동시에 부축하면서도 그렇게 많이 힘들지 않았다.

흐느적거리는 취객 특유의 몸이 귀찮았지만 그래도 부축한 상태로 이동하면 둘 다 따라 걷기는 했다.

성윤은 가게를 나와 로스 남매의 숙소로 이동했다. 이미 그들의 숙소는 알고 있었다. 다행히 가게에서 그다지 먼 곳도 아니었다.

약 30분 정도를 걸어 성윤은 어떠 건물 앞에 도착했다.

콘크리트로 지어진 무개성한 3층의 건물. 회사 차원에서 빌려주는 숙소라고 했다.

좋은 집은 아니었지만 ‘닭장’에 사는 성윤보다는 훨씬 나았다.

성윤은 일단 에밀리를 깨워봤다.

“에밀리 씨. 숙소에 다 왔습니다. 에밀리 씨.”

다른 손은 팀을 부축하고 있는지라 에밀리를 부축한 손을 조금 세게 흔들었다. 에밀리의 몸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얼굴이 축 늘어지고 긴 머리는 미역줄기처럼 얼굴을 모두 뒤덮으며 내려와 있다.

하지만 성윤이 몸을 흔든 게 효과가 있었는지 에밀리가 신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으음.”

간신히 의식이 돌아온 것 같지만 아직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았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부축하고 있는 성윤을 쳐다봤다.

“아~! 성윤~씨돠~!”

축축 늘어지는 목소리. 혀가 꼬인 발음. 어디를 봐도 훌륭한 취객이었다.

그녀가 두 손을 번쩍 들어 성윤의 목에 휘감았다. 그대로 어미에게 달라붙은 아기 원숭이처럼 매달려 왔다.

턱!

팔과 다리에 힘이 없으니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을 뻔한 걸 성윤은 그녀의 허리를 안아 막았다.

여자 치곤 큰 키를 가진 그녀였지만 성윤의 키도 180이 넘어간다. 그녀가 성윤의 목에 대롱대롱 매달리는 구도를 만들기에는 충분한 키 차이였다.

눈이 돌아갈 정도의 미모를 지닌 에밀리다. 남자라면 비강을 간질이는 좋은 향기와 온몸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가슴이 두근거릴 시추에이션이었다.

하지만 역시 성윤은 인상을 찌푸리고 한숨만 내뱉었다.

그에게 있어 지금 에밀리란 존재는 귀찮은 취객일 뿐이었다.

“저~기요~! 나 정~~말 아쉬워요~!”

성윤의 목을 감고 있는 팔에 힘을 주어 에밀리는 성윤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댔다.

그녀의 백옥 같은 피부와 커다란 갈색의 눈, 그리고 알코올 섞인 날숨을 뿜어내는 입술이 보인다.

색기까지 묻어나는 그 모습에 얼굴을 붉힐 만도 하건만 성윤은 귀찮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올려 그녀의 얼굴을 피했다.

“계~속! 성윤 씨랑! 파티를 맺~고 싶은데~!”

“그랬습니까. 그것 참 아쉽군요.”

“그~래요! 저어어어엉마아아알 아쉬워~요!”

“네, 네, 그래요, 그래.”

영혼 없는 대답을 하며 성윤은 에밀리를 정신 차리게 하는 걸 포기했다.

칭얼대며 엉겨오는 에밀리를 적당하게 상대해주면서 성윤은 이번엔 팀을 흔들었다.

“…….”

일어나지 않았다. 아주 꿈의 세계로 각 잡고 여행을 떠난 것처럼 팀은 아주 잘 자고 있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미약하지만 코까지 골고 있었다.

한 명은 들러붙고 한 명은 깨지 않는 상황. 어쩔 수 없이 성윤은 건물의 현관까지 둘을 데리고 이동했다.

딩동!

부축하고 있는 손에서 간신히 집게손가락만 펴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후 인터폰에서 지직거리는 잡음이 들리더니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 누구시죠?

“안녕하십니까, 우성윤이라고 합니다. 팀 로스 씨와 에밀리 로스 씨의 파티원인데, 두 분이 술에 취해서 데리고 왔습니다.”

-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인터폰의 카메라 너머로 팀과 에밀리의 엉망진창인 모습이 보였는지 상대방은 다른 질문을 던지지 않고 바로 인터폰을 끊었다.

잠시 후.

끼익!

문이 열리고 남성 한 명이 나왔다. 수염이 듬성듬성 난 젊어 보이는 남성이었다.

하지만 그 또한 연결자로, 보이는 것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의 눈이 성윤을 향했다가 성윤에게 매달려 있는 둘에게 옮겨갔다.

성윤에게 얼굴을 비비적대고 있는 에밀리와 코를 골며 자고 있는 팀.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것들, 꼬라지 하고는….”

그는 성윤을 쳐다봤다.

“우성윤 씨라고 하셨습니까? 이 녀석들의 파티원인?”

“그렇습니다.”

남성은 건물 안으로 무언가 큰 소리를 쳤다. 잠시 후 남녀 두 명이 건물 밖으로 나왔다.

젊은 청년과 처녀였다. 그들도 팀과 로스의 꼴을 보고는 잠시 굳었다. 하지만 이내 남성의 지휘를 받아 둘을 데려갔다.

팀이야 곯아떨어진 터라 쉽게 데려갈 수 있었지만 어설프게 일어난 에밀리는 성윤의 목을 붙잡고 떨어지지 않으려 애썼다.

그 모습에 사람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성윤은 어떻게든 에밀리의 손을 떼어내기 바빴다.

여성이라 해도 연결자다. 바이스로 조이는 것 같은 그녀의 팔을 떼어내는 데 상당한 힘이 필요했다.

성윤에게 팔을 허우적거리며 에밀리마저도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성윤은 벌게진 목을 어루만졌다. 무슨 야생동물에게 습격을 받은 것 같았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저희 녀석들이 폐를 끼쳤군요.”

사내가 감사의 표시를 했다.

“괜찮습니다, 그럼.”

둘을 데려다준다는 목적은 끝냈다. 더 이상 여기 있을 이유가 없어 성윤은 사내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멀어지는 성윤의 등을 사내는 조금 탐색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저게 그 우성윤이라는 작자인가.’

팀과 에밀리의 파티원. 성윤은 그들의 회사에서 꽤 유명인이었다. 전도유망한 연결자인 팀과 에밀리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는 사람.

하지만 회사 내에서 성윤에 대한 여론은 좋지 않았다. 팀이 성윤을 존경하는 이유를 자랑스레 늘어놓았지만 돌아간 건 비웃음뿐이었다.

애초에 연결자들이 대미궁에 도전하는 걸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회사고 회사의 연결자들이다.

그들에게 성윤은 세상물정 모르는 멍청이와 다를 바 없었다. 게다가 1세대 능력자란다.

올라가지도 못할 나무를 올려다보며 꿈만 꾸는 허풍선이. 성윤의 이미지가 그렇게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팀은 사람들이 성윤을 비웃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몇 번은 동료와 싸움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다행히 주변 사람들이 말려 큰일은 터지지 않았다.

그 이후로 팀에게 그 일을 언급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 일 때문에 팀의 평판은 안 좋아졌고 덩달아 성윤의 이미지도 더 내려앉았다.

게다가 에밀리가 성윤에게 호감을 내비치는 행동도 성윤의 이미지를 안 좋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였다.

출중한 미모를 가진 에밀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회사 내에서도 굉장히 많았다.

어차피 중혼이 일반적인 데다가 죽을 때까지 젊음을 유지해 나이차 많은 결혼도 흔한 게 연결자인 만큼 거의 전 남성 연결자가 에밀리를 노리고 있다고 봐도 좋았다.

하지만 갑자기 나타난 웬 개뼈다귀 같은 놈이 에밀리의 마음을 훔친 것이다. 그것도 같잖은 1세대 연결자가.

이래저래 성윤이 로스 남매의 회사에 좋게 보일 건더기가 없었다.

지금에 이르러 성윤은 멍청이, 허풍선이, 사기꾼 등등 로스 남매의 회사에서 좋을 대로 불리고 있었다.

당연히 성윤의 등을 바라보는 사내의 눈빛도 곱지 않았다.

‘그래도 이걸로 끝이겠지.’

고작해야 1세대인 그와 3세대인 팀과 에밀리는 이제부터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사는 세계가 다른 것이다.

본인들은 대미궁에 들어가기 전 간간이 만나 팀워크를 계속 다진다고 한다만, 어디 그게 쉬운가. 대충 핑계를 대서 찢어놓으면 된다.

만약 이 인연을 핑계 삼아 성윤이 떡고물이라도 얻어먹기 위해 달라붙으려 한다면….

‘어떻게든 처리해야겠지.’

이미 저 멀리 멀어진 성윤의 등을 보며 그가 살기 어린 눈동자를 희번덕거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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