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화
“좋아, 그러면 오늘도 대미궁을 향해 열심히 노력해 볼까요?”
팀이 도끼를 쥔 손에 힘을 주고 붕붕 휘두른다.
본인은 신이 나서 하는 일이겠지만 육중한 연결자의, 그것도 젬에 의해 증폭까지 된 힘으로 휘두르는 흉기는 장난이 아니다.
곧 에밀리의 매서운 손바닥이 팀의 갑옷으로 가려지지 않은 몸으로 날아갔다.
뒤이어 타박이 이어지자 팀은 흉포하기 이를 데 없던 기쁨의 행동을 멈췄다.
하지만 기분은 여전히 좋았다.
물론 성윤이 자신들을 완전히 신뢰하게 됐다는 설레발은 치지 않는다. 동행하며 어렴풋이 파악한 그의 성격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들을 타인보다는 더 위의, 동료 정도로는 인식하고 있다는 건 틀림없었다.
‘그래, 천천히 가자.’
대미궁에 관한 이야기로 인해 성윤에게 존경의 감정을 품게 된 팀이다. 천천히라도 성윤과 인연의 실을 강하게 엮고 싶었다.
하지만 팀과 에밀리의 좋은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건 성윤 또한 마찬가지.
돈도 되지 않는 저급 몬스터들은 적당히 무시하거나 달려드는 놈만 순살을 시키며 일단 그들의 주 공략 층계인 7층으로 향했다.
미궁이라는 이름답게 이리저리 뻗어 있는 통로들 중에도 그들은 익숙하게 이용해온 통로로 계속 걸었다.
그러나 그들의 발걸음은 중간에 멈춰야 했다.
“또야!”
팀이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그들이 지나가려 한 통로에 보초가 한 명 서 있었다.
봉쇄구역이었다.
콕!
팀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누군가 자신을 손가락으로 살짝 찌른 것이다. 에밀리가 눈짓을 하고 있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예전에 봉쇄구역을 맡고 있는 보초에게 구시렁거렸던 전적이 있는 팀인지라 에밀리가 먼저 선수를 친 것이다.
이번에도 아무 생각 없이 불만을 투덜거리려던 팀은 조용히 입을 닫았다.
그들은 천천히 봉쇄구역에서 벗어나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 보초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 젠장! 저 작자들은 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보초에게 불평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거리가 생기자 팀이 성을 냈다.
에밀리도 말리지 않았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지 에밀리도 불만이 많았던 것이다.
“아무래도 이번에도 조심해야 할 것 같아. 봉쇄구역만이라면 조금 귀찮아지는 걸로 끝나지만 예전처럼 시작의 미궁의 몬스터들보다 수준이 높은 녀석이 튀어나올지도 모르니까.”
“빅풋 때 말이지?”
에밀리의 말에 팀이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도 이렇게 미궁에 들어오긴 하지만 그때는 정말 트라우마가 걸리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몰렸었던 것이다. 전화위복으로 성윤을 만났지만 다시는 경험하기 싫은 사건이었다.
“역시 이것도 미궁의 이상 중 하나인가?”
묵묵히 둘의 말을 듣고 있던 성윤의 귀에 무시할 수 없는 말이 들려왔다.
“에밀리 씨. 그게 무슨 말이죠?”
성윤이 물었다.
“성윤 씨는 모르시나요?”
“네, 미궁의 이상이라는 건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성윤에게 모르는 걸 가르쳐 줄 기회. 에밀리는 살짝 미소까지 지으며 말했다.
“요새 미궁에서 특이한 일이 일어나고 있어요.”
“특이한 일말입니까?”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미궁이 더 위험해졌다고 해야 하나요?”
위험. 이건 필히 들어야 할 일이다. 성윤은 에밀리의 얘기에 더 집중했다.
“저희들도 이번에 지구에 내려갔을 때 들은 이야기인데, 마나 스트림 이후 나타나는 미궁의 몬스터들의 숫자가 늘어났다고 해요. 그것 때문에 다른 미궁들도 난리인가 봐요. 저희 회사도 반쯤 비상사태에 들어갔고요. 다행히 저희 회사에 죽은 사람은 없지만, 다른 회사에는 죽은 사람도 여럿이라고 들었어요.”
“그럼 시작의 미궁의 청소가 끝나지 않은 이유도 늘어난 몬스터 때문입니까?”
“그럴 확률이 크지 않겠어요?”
저번 시작의 미궁의 청소는 마나스트림이 다시 시작되기 전까지 끝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예상치 못한 방해. 성윤의 눈이 찌푸려졌다.
“원인은 알아냈습니까?”
“몰라요. 애초에 미궁이라는 것 자체가 여러모로 미스터리 투성이니까요.”
달이라는 천체에 왜 미궁이라는 곳이 존재하는지, 마력은 무엇인지, 몬스터들은 대체 어디서 오는지 등 미궁의 대부분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몬스터의 폭발적인 증가 원인을 이렇게 빠른 시간 내에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행히 시작의 미궁은 고용된 연결자들이 초보자들에게 알맞게 몬스터들을 솎아내주니, 봉쇄 구역에 들어가지만 않으면 괜찮을 겁니다.”
팀이 심각해진 성윤을 달래려 말했다.
“그렇긴 하군요.”
성윤은 팀의 말을 긍정했다. 하지만 그 고용된 연결자에게 죽을 뻔한 성윤으로서는 썩 공감 가는 말은 아니었다.
어쨌든 지금 당장 그들에게 닥쳐온 불이익은 봉쇄 구역 때문에 시작의 미궁의 전 구역을 돌아볼 수는 없다는 사실과 혹시라도 강한 몬스터가 튀어나올 수도 있다는 위험뿐.
다른 연결자들처럼 당장 큰 위협에 노출되는 건 아니다. 그들은 조금 불평불만을 내뱉으면서도 계속 아래로 아래로 향했다.
***
셋은 꼬박 하루를 소모하여 6층까지 내려갔다.
목적은 7층이었지만 이동하는 데만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하였기에 7층보다는 안전한 6층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부터 본격적으로 사냥을 시작했다.
꾸이이이익!
돼지가 째진 울음 소리를 낸다면 이럴까. 조금은 웃긴 소리를 내며, 하지만 그 기세만은 절대 웃을 수 없는 몬스터가 그 큰 입을 벌려 위협해 왔다.
퍼억!
위 아래로 길게 뻗어 있는 송곳니가 팀의 커다란 방패에 막혔다. 근 1m는 될 것 같은 몬스터의 입 크기는 사람 한 명 정도는 단숨에 집어 삼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으적!
방패 째로 팀을 삼기려는 것처럼 몬스터, 하드레더히포포타무스가 입에 힘을 줬다. 당장이라도 굵고 거대한 송곳니가 방패를 파고 들 것 같았다.
“이 자식이!”
팀이 눈에 불을 켜고 도끼를 휘둘렀다.
퍼억!
괴력을 머금은 도끼가 가죽 위를 두드린다. 하지만 하드레더히포포타무스는 눈만 조금 움찔거릴 뿐이었다.
“쳇, 단단하잖아!”
투덜거리며 팀이 도끼를 회수했다. 팀의 공격이 별 것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하드레더히포포타무스가 다시 팀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팀은 방패에 몸을 기대는 것처럼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본격적인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이익!”
팀의 발이 조금씩 뒤로 밀렸다. 아무래도 힘은 하드레더히포포타무스 쪽이 훨씬 더 강해보였다.
하드레더히포포타무스가 가소롭다는 시선으로 팀을 노려볼 때였다.
팀의 뒤쪽에서 성윤이 튀어나왔다.
“흐앗!”
힘찬 기합성과 함께 메이스를 휘두른다. 한 손으로, 그것도 힘겨루기를 하고 있던 터라 무기에 제대로 힘을 싣지 못했던 팀과는 달리 성윤은 메이스를 두 손으로 쥐고는 몸의 반동과 회전까지 더해 제대로 일격을 날렸다.
그 결과.
퍼어억!
꿰에에에엑!
팀의 도끼질과는 전혀 다른 위력의 공격에 하드레더히포포타무스가 비명을 질렀다.
녀석이 주춤대며 팀에게서 떨어졌다.
스윽!
성윤의 손에서 메이스가 사라지고 창이 나타났다. 성윤은 그대로 창을 내질렀다.
아무리 힘을 제대로 싣지 못했다지만 팀의 도끼마저 튕겨낸 하드레더히포포타무스의 가죽에 고작 퍼플 젬의 창이 통할 리 없다.
하지만 성윤이 노리는 건 두터운 가죽으로 뒤덮인 녀석의 몸통이 아닌, 분홍색 살이 선명하게 보이는 커다란 입 안이었다.
푸욱!
성윤의 예상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창의 수준이 낮아 부드럽게 꽂히진 않았지만 어떻게든 힘으로 쑤셔 넣을 수 있었다.
끄에에에!
녀석이 날뛴다. 혹시 창을 놓칠까봐 성윤은 얼른 창을 역소환했다.
일부러 창을 빼는 것보다는 이게 더 효율이 좋았다.
빈손에 다시 메이스가 잡혔다. 입으로 침이 섞인 피를 줄줄 흘리며 켁켁대던 녀석의 머리를 힘껏 내리쳤다.
콰직!
꾸워어어어어어!
머리가 움푹 함몰되며 녀석이 비명을 질렀다. 성윤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렇게 해도 안 죽나.’
다른 몬스터라면 방금의 일격에 머리가 터지듯 박살나며 무력화됐어야 한다.
하지만 하드레더히포포타무스는 머리가 움푹 함몰된 상태에서도 어떻게든 견뎌냈다.
‘단단한 가죽 하마라니. 이름값 하는군.’
하지만 공격이 통하지 않는 건 아니다. 성윤은 다시 한번 메이스를 휘둘렀다.
“으랏차!”
팀도 힘을 보탰다.
단순 근력만 따지자면 팀이 성윤보다 강하다. 근력을 높이는 젬의 랭크가 성윤의 것보다 높은 것이다.
하드레더히포포타무스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터라 방패에 신경을 쓸 필요도 없다. 그는 도끼를 두 손으로 잡고 원 없이 휘둘렀다.
콰직!
우지직!
섬뜩한 소리가 화음을 연주하며 주변에 흩뿌려진다.
치명적인 공격을 두 번이나 받은 하드레더히포포타무스는 결국 비통한 단말마를 유언으로 남기며 쓰러졌다.
“하여간 방어력 높은 것들은 귀찮다니까.”
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에밀리의 어이없다는 시선이 쏟아졌다.
“아까는 공격력 높은 것들이 귀찮다며.”
“그랬나?”
“그 전에는 속도 빠른 것들이 귀찮다고 했고.”
“그것들도 귀찮은 건 맞잖아?”
킬킬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팀은 손을 휘휘 저었다.
“하여간 뻔뻔하기는.”
오빠의 두꺼운 낯짝은 익히 알고 있다. 에밀리는 평소대로의 팀에게 톡 쏘아붙였다.
남매가 재밌게 다투는 동안 성윤은 하드레더히포포타무스의 월석을 챙겼다.
“움직이죠.”
성윤의 말에 남매는 장난을 멈추고 다시 이동했다.
7층의 몬스터들을 보이는 족족 잡고 간간이 보이는 봉쇄구역을 피하며 움직이길 얼마. 셋은 8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팀이 성윤에게 물었다. 성윤은 잠시 자신의 몸을 훑어봤다. 단단한 쇳조각들이 찰랑거리며 존재를 주장하는 스케일 메일이 보인다.
자그마치 4등급인 그린 랭크의 갑옷. 시작의 미궁이라면 10층까지도 문제없을 갑옷이다.
아무리 강한 몬스터가 들이받는다고 해도 최소한 일격사하지는 않을 것이다.
‘투구가 없는 게 아쉽지만.’
하지만 몸통을 방어해주는 든든한 갑옷을 얻었으니 여차할 상황에서는 머리만 보호하면 될 터다. 죽지만 않는다면 에밀리라는 회복역이 대기하고 있으니까.
“내려가죠.”
그렇게 성윤은 8층이라는 미지의 장소로 발을 내딛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