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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미궁-65화 (65/354)

제65화

지민이 드디어 그 바닥이 보이지 않는 늪 같은 사업을 포기한다는 소리는 확실한 낭보였다.

하지만 왜일까. 그 소리를 듣고 가장 기뻐해야 할 우성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이미 옛 저녁에 멈춰버린 심장이 다시 뛰는 건 아닐까 잠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왜 그러냐?”

인수가 고기 한 점을 집어먹으며 말했다.

“네가 그토록 원했던 일이잖냐. 조금 더 기뻐하는 표정을 지어야지.”

“그, 그렇죠! 기뻐해야죠!”

하지만 말만 그렇게 할 뿐, 우성은 기뻐하지 못했다. 본인도 자신의 감정이 당황스러운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인수는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희영과 아인은 담담했지만 우상도 입을 조금 벌리고 있는 게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쯧, 불쌍한 녀석들 같으니.’

그는 속으로 혀를 찼다. 저 아이들이 왜 그러는지 인수는 짐작이 갔다. 처음에 자신도 지민에게 이제 그만두겠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정도는 덜하지만 둘과 똑같았으니까.

“우상아. 입 좀 닫아라. 입에 파리 들어가겠다.”

우상이 ‘핫!’ 정신을 차리더니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뭐, 솔직히 너희들 감정 이해는 한다. 좋아해야 할 일인데 오히려 기분이 가라앉아서 이상하지?”

“…확실히 그렇군요.”

입 주변을 손으로 매만지며 우상이 대꾸했다. 그의 볼이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옆에서 상을 탕탕 치며 깔깔 웃어대는 희영 때문에 더 그런 감이 있었다.

우상이 희영을 째려봤지만 아들의 째려보기 따위에 겁을 먹을 희영이 아니었다. 오히려 보란 듯이 웃음 소리를 더 키웠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라. 그만큼 너희들이 지민이한테 기대하고 있었단 증거니까.”

“누나에게 기대한다고요?”

“그래.”

우성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건 우상도 마찬가지였다.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너희들도 누나가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줬으면 한 거야. 게다가 무슨 말을 들어도 아버지를 찾겠다는 누나를 보고 내심 기뻐도 했겠지. 어쨌든 너희 아버지 아니냐.”

우상도 우성도 말을 하지 않았다.

“물론 지민이가 회사를 그만두게 하고 싶다는 마음도 너희들의 본심이었을 거다. 당연히 그쪽 마음이 더 컸겠지. 하지만 지민이가 회사를 그만둔다는 건 너희 아버지의 흔적을 찾는 모든 일이 중단된다는 걸 뜻해. 즉, 정범이의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마저 사라지는 거지. 너희들이 충격을 받은 이유는 그 때문이다.”

“…잘 아시네요.”

“솔직히 처음 지민이한테 그만둔다는 애기를 들었을 때 내 심정도 너희들이랑 같았거든.”

인수는 껄껄 웃으며 우성의 말에 대답했다.

우성도 피식 웃었다. 그러곤 목을 뒤로 젖혀 천장을 바라봤다.

마치 저 천장 너머에 있는 달을 쳐다보려는 듯이.

“그래, 누나도 포기하는 거군요.”

그 말에 실린 감정은 무엇일까?

희열? 절망? 기쁨? 분노? 우성 자신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곧 큰 소리를 내며 그 감정을 털어버렸다.

“에이! 누나가 헛고생 그만두겠다면 좋은 거지, 뭐!”

자신의 앞에 있는 술잔을 들어 그대로 입에 털어 넣는다. 쓰디쓴 알코올 향이 목구멍 너머로 스르르 넘어갔다.

“오만상 찌푸릴 이유 없이 축하하자고요! 이제 누나도 곧 자기 행복 찾게 될 거예요!”

“그건 그렇지만 말이지.”

술잔과 소주병을 들고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왁자지껄 떠들려는 우성에게 우상이 조용히 말했다.

“어쨌든 넌 나랑 같이 누나한테 사과하러 간다.”

우성이 움찔했다.

“가, 갈 거야! 나도 사과해야 한다는 것쯤은 안다고!”

“내일 당장.”

“…조, 조금만 더 있다가 가면 안 될까?”

적어도 지민의 화가 어느 정도 가라앉았을 때 가고 싶었다. 자신을 쫓아 낼 때 그녀가 지은 표정을 생각하면 아마 지금까지 살아 온 인생 중에서 역대급으로 그녀를 화나게 한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의 형은 자비 없었다.

“안 돼.”

우성이 축 늘어졌다. 술잔과 소주병을 들고 떠들려 할 때와 완벽히 비교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우상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누나네 연결자에게도 사과하고.”

우성이 얼굴을 번쩍 들었다. 그의 얼굴이 죽상이 되었다

지민에게는 몰라도 아무리 지민이 넘겨줬다지만 아버지의 유품을 갖고 있는 성윤에게까지 고개를 숙이는 건 싫었다.

게다가 그는 아직 성윤에 대한 의심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지민의 전 계약자가 어떻게 지민의 뒤통수를 치고 나갔는지 아는 것이다.

하지만 우상의 얼굴을 보곤 포기했다. 그의 얼굴은 이견 따위는 받지 않겠다는 것처럼 엄격했다.

“알았지?”

“…알았어.”

결국 우성은 우물거리면서도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

“죄송합니다!”

커다란 사죄의 말과 함께 90도 가까이 머리를 숙인다. 누가 보면 크게 실패를 한 조폭 똘마니가 칼을 맞을까 봐 조직의 두목에게 필사적으로 사과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고개를 숙인 지 얼마나 지났을까. 아무런 반응이 없어서 우성은 슬쩍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빠르게 원위치했다.

시베리아 칼바람이 봄에 살랑거리는 산들바람처럼 보일 정도로 차가운 지민의 얼굴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러니까 내가 조금 텀을 두고 오고 싶었다고!’

진짜 용서해주지 않을 건가? 설마 하루 종일 이렇게 있어야 하나? 우성은 속을 졸이며 전전긍긍해했다.

그때, 우성을 두둔해주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쯤 용서해줘, 누나.”

오기 싫어하는 우성을 이 자리까지 질질 끌고 온 우상이었다.

잠깐은 지민의 기분이 풀리도록 원하는 대로 놔뒀지만 이 이상은 너무 심했다.

분위기를 보건데 지민은 정말로 우성이 하루종일 저러고 있도록 놔둘 것 같았다.

“저 자식이 멍청한 짓을 한 건 맞지만 그래도 딴에는 누나를 위한다고 한 일이었잖아. 애초에 단세포인 녀석이니 쉽게 흥분해서 되는 대로 내뱉은 거지 악의는 없었고.”

멍청한 짓, 단세포 같은 말들이 나올 때는 조금 울컥한 감이 있었지만 우성은 꾹 참고 지민이 용서해주길 기다렸다.

“나하고 어머니들에게도 많이 혼났어. 이 녀석도 많이 반성하고 있는 것 같으니 이번만 봐 줬으면 싶은데.”

“…후우!”

지민은 거나하게 한숨을 쉬었다.

저 철없는 동생의 생각 없는 행동을 생각하면 아직도 골이 지끈지끈 아팠다.

하지만 고개까지 숙이며 사과하고 있는 동생을 계속 무시하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디까지나 악의는 없었던 것이다, 악의는.

“한 번만 더 그래봐.”

결국 지민은 우성을 용서했다.

“응, 응! 앞으로 다시는 안 그래!”

용서받았다. 그 사실에 우성은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쇳덩이가 스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다시는 안 그러기는.”

“아, 정말로 안 그래!”

“됐고. 성윤 씨한테도 사과드려.”

“성윤 씨?”

“네가 대놓고 욕한 우리 회사 계약자.”

우성은 똥 씹은 표정이 됐다.

아직도 누나를 속여서 등골을 파먹고 있는 게 아닌가하는 의심이 강하게 드는 작자에게 사과를 하는 건 마뜩잖았다.

하지만 자신이 머뭇거리자 슬슬 다시 눈꼬리를 세우려고 하는 지민의 모습이 보였다. 게다가 우상도 지민에게 동조했다.

“당연하지. 애초에 그 사람한테도 사과시키려고 데려온 거야.”

누나, 형이 전부 압박을 넣고 있는 상황. 우성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하지만 아직 불만은 남아 있는지 목소리가 잔뜩 억눌려 있었다.

그러나 지민과 우상 모두 그것까지 타박하진 않았다.

마음으로 납득하는 건 누가 강요해서 되는 일이 아닌 것이다. 일단은 표면상 사과면 충분했다.

“그 사람은 언제 오는데?”

“안 그래도 오늘 오시기로 돼 있어. 조금만 기다리면 오실 거야.”

명백히 성윤이 오기 전까지 기다리라는 뜻이다. 우성은 입을 삐죽였다.

하지만 우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됐네. 안 그래도 묻고 싶은 것도 있었는데.”

“묻고 싶은 거?”

“솔직히 말해서 그 사람 어떻지?”

“누구, 성윤 씨?”

“응.”

지민의 눈이 가늘어졌다.

우성처럼 대놓고 반발하지는 않아도 우상도 평소 지민의 사업을 좋게 보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누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지만 이건 가족으로서 당연한 걱정이야. 게다가 전적이 없는 것도 아니잖아.”

여기선 지민도 할 말이 궁했다.

“고작 본 지 반년도 안 된 사람이라 겉핥기식으로밖에 모르지만, 일단은 좋은 사람이야.”

“수상한 낌새는 없어?”

“응. 전혀.”

그러기는커녕 전 직원들과는 다르게 정말로 진지하게 대미궁을 노린다는 모습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지민의 죄책감이 더 커진 것이고.

“그래, 그건 다행이군. 하지만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당장 우리한테 연락해. 어떻게든 도움을 줄 테니까.”

지민은 우상을 올려다봤다.

어렸을 때의 코찔찔이 모습은 나비가 허물 벗듯 벗어버리고 훌륭한 연결자로서 자란 그의 모습이 보인다.

격세지감이라고 해야 할까.

지민은 저도 모르게 그 차가운 얼굴에 한 줄기 미소를 띠었다.

“옷깃 붙잡고 누나, 누나 하던 녀석이 많이 컸네. 알았어. 뭔 일 있으면 의지할게.”

“나, 나도 도울게!”

한쪽에 쭈그러져 있던 우성이 황급히 끼어들었다. 하지만 지민은 날카로운 눈으로 우성을 째려봤다.

“넌 거기서 성윤 씨 올 때까지 반성이나 하고 있어.”

우성은 다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렇게 오랜만에 모인 남매가 떠든 지 얼마나 지났을까. 성윤이 도착했다.

“손님이 계셨군요.”

성윤의 목소리엔 경계심이 섞여 있었다.

지민은 내심 한숨 쉬었다. 자신의 손님을 보고 경계심부터 올린 성윤의 모습에 자괴감이 들었다.

‘대체 얼마나 안 좋은 꼴을 보였으면.’

생각해보면 성윤이 지금까지 보아온 지민의 손님이란 게 그녀에게 소리치던 아정과 우성이였으니 저런 반응을 보일 만했다.

지민은 우성에게 눈짓을 했다.

“예전에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우성이 성윤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성윤은 조금 놀랐다. 하지만 이내 상황을 파악했다.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않습니다.”

성윤은 흔쾌히 그 사과를 받아들였다. 정확히 말하면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던 것뿐이지만.

의외로 성윤이 사과를 쉽게 받아들이자 우성은 놀랐다.

자신이라면 저렇게 흔쾌하게 사과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상황 때문에 마지못해 받아들이고도 얼마 정도 앙금을 쌓아 두고 있었을 것이다.

우성의 사과가 마무리 된다 싶자 우성의 뒤에 있던 우상이 한 걸음 나섰다.

“동생이 폐를 끼쳤습니다.”

“당신은?”

“제 이름은 한우상이라고 합니다. 지민이 누나의 첫 째 동생이죠.”

그가 손을 내밀었다. 성윤은 살짝 지민을 쳐다봤다. 지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성윤입니다.”

성윤은 우상의 손을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여기 폐를 끼친 이놈은 한우성이라고 합니다. 누나의 둘째 동생이고요.”

우상이 우성의 머리를 조금 거칠게 쓰다듬었다.

우성의 머리가 흔들렸다. 우성이 기분이 나빠 인상을 찌푸렸지만 뭐라고 하진 못했다.

지금은 최대한 죽어지내야 했다. 괜히 여기서 또 큰 소리를 냈다가는 누나에게 진짜로 출입금지를 당할지 몰랐다.

“한우성입니다. 정말 실례가 많았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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