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화
달이 휘황찬란하게 떠 검은 어둠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유유히 뽐내고 있는 시간. 우성은 자신의 세련된 외제차에서 내렸다. 무슨 일이 있는지 그는 죽을상을 하고 있었다.
‘어쩌지.’
우성은 앞을 쳐다봤다. 그의 어머니들이 사는 단독 주택이 보인다.
하지만 그 건물은 저번과는 명백히 달라 보였다. 저번에 본 주택의 모습이 언제나 그를 따뜻하게 보듬어 줄 화목한 가정의 집처럼 보였다면, 지금은 영화나 소설에서 나올 법한 번개가 치고 흡혈 박쥐들이 날아다니는 마왕성처럼 보였다.
물론 아인과 희영의 집이 그렇게 급격하게 이미지 체인지를 할 리 없다. 그저 우성 안에 있는 두려움이 그 집을 다르게 보이게 만드는 것뿐이었다.
그는 마당 안을 훑어 봤다.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차가 두 대 더 보였다.
그건 오늘 모일 사람이 이미 전부 왔다는 얘기.
‘죽었다, 진짜.’
우성은 각오를 다질 수밖에 없었다.
떨어지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그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찌르고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우성은 슬금슬금 거실로 들어갔다.
“우성이 왔냐?”
술에 거나하게 취해 걸걸대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를 확인한 우성의 얼굴이 밝아졌다.
무서운 건 무서운 거고 반가운 건 반가운 거다.
“아저씨!”
그는 달미궁사업관리처 지원과의 과장인 전인수였다. 지민에게 성윤을 추천한 그가 껄껄대며 웃고 있었다.
“이 자식, 아주 듬직해졌구만! 이젠 장가갈 일만 남았나?”
그가 벌떡 일어나 우성의 어깨를 두드렸다. 장가 얘기에 우성이 어색하게 웃었다. 옆에 앉아 있는 어머니들의 눈치를 힐끔 봤다.
“자, 자! 앉아라, 앉아.”
우성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그대로 거실에 펼쳐져 있는 커다란 상 앞으로 이끈다. 우성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에게 끌려갔다.
“한 잔 해야지.”
인수는 우성의 앞에 소주잔을 들이밀었다. 우성은 두 손으로 공손히 술을 받고는 인수와 함께 들이켰다.
“캬아! 설마 내가 너랑 우상이랑 술을 주고받을 날이 올 줄이야.”
그가 감개무량한 눈으로 우성의 등을 탁탁 쳤다.
우성은 주변을 둘러 봤다. 커다란 상 주변으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그의 어머니들인 아인과 희영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으로 한 명의 젊은 사내가 앉아 있었다.
얼핏 차갑다고 생각될 정도로 침착한 분위기. 속눈썹이 길고 코는 오똑하다.
사내라는 건 쉽게 알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미인 소리를 들을 만한 사람이었다.
“오랜만이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우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이야, 형.”
그는 우성의 형이자 지민의 또 다른 동생인 한우상이었다. 그 또한 연결자로, 우성과 같이 달에 가기는 하지만 미궁의 위치나 맺고 있는 파티가 달라 얼굴 보는 건 힘들었다.
실제로 둘은 거의 두 달만에 얼굴을 직접 맞대고 있었다.
오늘은 오랜만에 하는 가족 모임이었다. 달에서 지내는 날이 많은 우상과 우성이 동시에 지구에 내려와 있는 날은 드물다.
그랬기에 보통 이런 날은 가족끼리 모여 오붓하게 보내곤 했다. 거기에 오늘은 아인, 희영의 남편이자 세 남매의 아버지인 정범의 오랜 친구, 인수까지 얼굴을 비쳤다.
“이제 지민이만 오면 되겠구나.”
아인이 말했다. 별다른 의미 없이 가볍게 한 그 말에, 우성이 몸을 움찔 떨었다.
“그러고 보니 늦네? 얘 우성아. 지민이한테 연락한 게 너였지? 뭔가 말 없든? 일이 있어서 늦는다거나 뭐, 그런 거 말야.”
희영의 물음에 우성의 이마에 땀까지 맺혔다.
“그, 그게, 누나는 오늘 못 온다고 하네요. 바쁜 일이 있어서.”
거짓말은 아니다. 분명 지민은 우성에게 그렇게 말했다.
문제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지민의 목소리에 여전히 냉기가 풀풀 날린다는 것이었다.
‘나 보기 싫어서 안 오는 거겠지.’
무슨 일이 있든 가족 모임에는 어떻게든 참가하려 하던 지민이었기에 더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지민이가? 별일이네.”
인수는 놀랐다. 지민이 가족을 얼마나 끔찍하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고 납득하기도 했다.
일단은 사회생활을 하는 아이이지 않은가. 게다가 그가 연결자 한 명을 소개시켜준 게 몇 달 전이다. 그 때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반응은 달랐다. 아인, 희영은 물론이고 우상 또한 우성을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봤다.
뭔가 있다. 오랜 세월을 부대끼고 살아 온 그들이 우성의 의심스러운 반응을 놓칠 리 없었다.
“너 뭐 사고 쳤냐?”
우상의 질문에 우성은 움찔했다. 그걸로 확정이었다. 우상은 작게 한숨 쉬었다.
“좋은 말할 때 불어.”
우상은 물론이고 아인과 희영마저 눈으로 독촉을 하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우성은 떠듬떠듬 지민의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빠악!
우상의 손이 우성의 뒤통수를 시원하게 후려갈겼다. 우성이 뒤통수를 부여잡았다.
“아, 형! 쫌!”
억울한 표정으로 소리를 빽 지른다.
하지만 우성에게 동정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아인은 한 술 더 떴다.
“우상아.”
“네, 어머니.”
“한 대 더 때려라.”
빡!
시원스런 타격음이 한 번 더 울렸다. 우성은 울상을 지으며 끙끙거렸다.
“하여간 내 너 언젠간 그럴 줄 알았다. 흥분하지 말고 침착하고 사려 깊게 행동하라고 내 그렇게 일렀건만. 제발 네 형의 반이라도 좀 닮아라.”
“아, 엄마!”
“엄마는 무슨. 네 나이가 몇 갠데 아직도 엄마야?”
아인의 꾸중에 우성은 입을 삐죽였다.
하지만 우성을 두둔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우성이가 지민이한테 한 건 분명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성격까지 뭐라고 하는 건 너무한 거 아냐? 우성이 성격이 뭐 어때서. 사람이 적당히 흥분도 할 줄 알고 활기차야 인간미가 있지.”
희영이 턱을 괴고는 반문했다. 그러며 시선을 돌려 우상을 바라봤다.
“재미없이 언제나 무뚝뚝하게 있는 것보다야 훨씬 나은데, 뭘.”
우상이 한숨을 쉬었다.
“무슨 소리야? 철없게 짤랑짤랑 대는 것보다 듬직하고 무게 있는 게 낫지. 어딘가의 바보처럼 사고를 치는 것도 아니고.”
“아, 진짜!”
아인의 말이 다시 자신의 타박이 되어 돌아오자 우성은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그 모습을 인수는 제3자의 입장으로 술을 들이키며 재밌게 지켜봤다.
‘하여간 성격을 묘하게 닮았단 말이야.’
언뜻 보면 활발한 희영과 우성이, 조용한 아인과 우상이 친모자지간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정반대였다.
차분한 장남 우상을 낳은 사람은 활달한 희영이었고 철없는 차남 우성을 낳은 사람은 조용한 아인이었다.
성격이 그렇다 보니 희영, 아인 둘 모두 자기가 배 아파 나은 자식보다 다른 자식을 더 마음에 들어 했다. 그건 아이들도 마찬가지.
그게 정범이라는 구심점이 없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이 가족이 화목하게 지낼 수 있는 강한 원동력 중 하나라고 인수는 생각했다.
서로의 선호하는 성격 차이로 생긴, 하지만 악의는 없는 다툼을 보면서 인수는 홀로 소주를 들이켰다.
“왜 그랬냐?”
술잔을 탁 놓으며 그가 우성에게 물었다. 네 사람의 다툼이 뚝 끊겼다.
“네?”
“지민이에게 그런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우성은 바로 말을 하지 못하고 가족들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누나가 헛고생을 하는 게 뻔하고. 힘든 게 보이기도 했고. 이제 슬슬 누나도 좋은 남자 만나서 자기 행복을 찾았으면 하고.”
“그래서 설득을 했는데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아서 흥분했다?”
우성이 깜짝 놀랐다.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네 성격 보면 뻔하지, 인마.”
단순한 녀석. 하지만 그만큼 착한 녀석이다.
인수는 킬킬거리며 다시 자기 잔에 술을 따랐다. 가장 가까이 있던 우성이 얼른 소주병을 받쳤다.
“어렸을 때는 그렇게 싫어하던 녀석이 이제는 제 누나라고 챙기기는.”
“그, 그거야 어렸을 때 얘기 아닙니까.”
우성이 볼을 조금 발갛게 물들이며 항의했다. 우상도 얼굴을 조금 돌렸다. 그 주제는 우상도 껄끄러웠다.
“그, 그리고 애일 때는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아버지가 철저하게 누나를 우선시한 것도 사실이고요.”
예전 생각이 떠오른다.
한창 부모의 관심과 이쁨을 받고 싶어 할 나이에 그들의 아버지 정범은 항상 지민을 먼저 챙겼다.
어렸을 때는 그게 너무 싫었다. 그래서 괜히 지민에게 짜증을 내고 반발하며 싫어했다.
그리고 그건 우상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지금은 아니시다?”
“당연하잖아요.”
인수의 말에 우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철도 들 만큼 들었으니까 이해를 했죠. 무엇보다 누나의 어머니란 작자가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누구 하나 다를 것 없이 모두의 얼굴에 짙은 불쾌감이 깃들었다.
‘서아정.’
인수는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마치 기억하기 싫은 인간을 그 술과 함께 넘겨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다는 듯이.
“지금 생각해보면….”
우상이 입을 열었다.
“정말로 그렇게 드라마의 악역이 고스란히 튀어나온 듯한 인간이 있다는 것 자체에 감탄마저 나옵니다.”
처음 그 사람을 봤을 때는 충격이었다. 그 어린 마음에도 하나의 생각이 뇌리에 짜르르 흘렀던 게 아직까지 기억났다.
절대로 저런 사람만큼은 되지 말자고.
“뭐, 현실은 픽션을 능가한다고 하니까.”
희영이 말했다. 아인도 얕게 한숨 쉬었다.
왕년에 정범과 함께 한창 아정과 드잡이질을 한 두 사람이니 당연히 우상, 우성 형제보다도 더 아정에게 치를 떨었다.
“솔직히 지금 가장 후회되는 것 중 하나가 그 녀석의 첫 결혼식을 말리지 못한 거야.”
당신에는 인수도 경험이 없던 평범한 젊은이였다. 설마 친구가 데려온 참하고 예뻐 보이는 여자가 그런 인간 쓰레기였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래도 덕에 지민이가 태어났잖아요.”
“그래요. 그 아이의 존재만으로도 그 빌어먹을 여자와 드잡이질을 한 대가로 충분해요.”
희영과 아인이 인수를 위로했다. 그리고 둘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지민이에게 이번엔 우성이가 가슴에 대못을 박았고.”
겨우 그 화제가 넘어갔는가 싶어 안도하던 우성이 깜짝 놀랐다. 말을 꺼낸 인수가 장난기 어린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와 대비되게 다시 그의 가족의 칼날 같은 시선이 날아와 꽂혔다. 우성은 울고 싶었다.
이만큼 놀렸으면 됐다. 인수는 이제 적당히 상황을 수습하기로 했다.
“뭐, 걱정 마라. 지민이도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까.”
“네?”
우성은 물론이고 우상도 놀랐다. 하지만 그에 비해 백화점에서 지민을 만나 대충 이야기를 들었던 아인과 희영은 침착했다.
“솔직히 그 사람은 내가 지민이한테 소개시켜 준 거야.”
“아저씨가요?”
우성의 눈이 크게 떠졌다. 언뜻 배신감마저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럼 어떡하냐. 정말로 한탄하며 매달리는데. 지민이는 나한테도 딸 같은 아이야. 할 수 있는 건 해 줘야지. 그게 뭐 불법적인 일도 아니고 말이야.”
“…우리한테는 그 비슷한 거라도 안 해주시지 않았나요?”
“냄새나는 남자 놈은 걍 알아서 해.”
우성의 볼멘소리를 인수는 쿨하게 씹었다.
“참고로 난 내 아들딸한테도 이러니까 오해하지 말고.”
“오해할 건덕지도 없습니다.”
“하여간 귀염성 없기는. 어쨌든 그때 들었어.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지민이도 더 이상 계속 할 여유가 없는 거겠지. 골드 젬을 건네줬다는 것에 대해서는 좀 놀랐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오히려 더 수긍이 갈 만한 이야기야. 만약 골드 젬이 부서진다면 정말로 정범이와의 마지막 물질적인 연결 고리마저 끊기는 거니까.”
인수는 지민의 내심을 꽤 정확하게 읽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