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의 미궁-59화 (59/354)

제59화

‘안 돼! 이런 식으로 끝날 순 없어!’

그의 시선이 독해졌다. 여기서 순순히 끌려갔다가는 모든 비밀이 탄로날 것 같았다.

자신이 그 구더기와 시비를 붙은 장면을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젬을 발동시킬 시간은 있나.’

그는 빈틈을 찾아 방 안으로 들어온 두 명을 샅샅이 훑었다.

하지만 상대는 만만치 않았다.

슥!

니콜라스의 목에 커다란 검이 드리워졌다.

“허튼 생각은 하지 마라. 네가 젬을 완전히 발동시킬 때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리지? 적어도 내 검이 네 목을 치는 것보다는 빠르진 않다고 생각하는데.”

“…젠장!”

니콜라스는 울분을 토하며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

성윤은 대미궁의 앞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대미궁을 노려보고 있었다. 장사가 끝난 시장 안을 보는 것처럼 한적하기 짝이 없는 시작의 미궁과 비교될 정도로 대미궁에는 오늘도 사람들이 없었다.

‘대미궁은 마나 스트림이 멈추는 기간이 아예 없다고 했던가.’

격이 되지 않는 연결자라면 마나스트림 때문에 입장조차 할 수 없다. 몬스터가 죽어나가도 바로바로 재보충이 되어 연결자들의 앞길을 막아선다.

그건 분명 대미궁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흉악하기 짝이 없는 장애물이었다.

하지만 성윤은 물러 설 생각이 없는 듯 대미궁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성윤의 기행이 주변에 조금씩 퍼진 터라 그를 손가락질하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성윤은 개의치 않았다.

지금은 다시금 목표를 되새겨, 가슴에 어린 공포심을 무디게 만들어야 했다.

시작의 미궁에서 죽을 뻔한 뒤, 당연한 일이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가 다시 성윤을 옥죄어 왔다.

이 짧은 시간 안에 벌써 두 번이나 죽을 뻔했다. 한 번은 빅풋에게 걸려서, 또 한 번은 봉쇄된 구역에 들어가서.

차라리 전투를 할 때에는 어떻게든 살아날 궁리만 하느라 공포를 느낄 새도 없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끝나고 그가 배정받는은 지원소의 이른바 ‘닭장’에 드러누워 과거의 일을 되새기자 그때서야 공포가 밀려 왔다.

허겁지겁 딸의 사진을 꺼내 뚫어질듯 쳐다봤다. 이제 곧 만나게 될 딸의 사진에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비벼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모자랐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최우선 목표인 대미궁을 보러 온 것이다. 자신의 목표를 다시 새기기 위해서.

‘그래. 신혜에게는 좋은 환경에서 좋은 교육을 받게 하고 좋은 음식을 먹여야 해. 그리고 대미궁을 공략한다는 계약도 지켜야 하고.’

그걸 이루기 위해서는, 목숨 정도는 걸어도 좋다.

게다가 이번에 자신이 골드 젬을 다룰 수 있는 역량이 된다는 것도 알게 되지 않았던가.

‘사장님은 좋아하시려나?’

그녀의 집착에 가까운, 대미궁 공략이라는 소망이 드디어 현실성을 띄게 되는 것임을 생각한다면 무척 기뻐할 게 분명했다.

그렇게 자신을 타이르며 성윤은 자신의 마음 속에 스며든 공포심을 무디게 또 무디게 만들었다.

‘좋아, 그럼 슬슬 가볼까?’

성윤은 몸을 일으켰다.

오늘부터 시작의 미궁의 마나 스트림이 시작된다. 이제 더 이상 달에 있을 필요는 없다.

성윤은 지구로부터 가지고 온, 별 것 없는 짐을 가지고는 올드린 우주 공항으로 향했다.

***

“수고하셨어요.”

새하얗고 부드러운 손이 자신 앞에 내밀어진다. 성윤은 자연스럽게 그 손을 맞잡았다.

“감사합니다.”

“이제 또 한동안은 천국에서 보내시게 되겠네요.”

그녀, 첼시가 무척이나 부럽다는 어조로 말했다.

성윤은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응? 왜 그래요? 혹시 저한테 반하기라도 했나요?”

첼시가 두 팔로 자신의 몸을 감싸고 성윤에게서 슬쩍 떨어졌다.

“걱정할 필요는 없겠군요. 그런 식으로 장난도 치시는 걸 보면 말입니다.”

“아아. 뭔가 했더니.”

첼시가 웃었다.

“걱정 마세요. 확실히 그 개자식의 위협에 겁을 먹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걸로 언제까지나 움츠러들어 있을 만큼 귀여운 성격이 아니니까요.”

“그래도 앞으로는 조심해야 할 겁니다. 스트로브 씨 같은 미녀라면 더더욱 말이죠.”

첼시는 놀란 눈으로 성윤을 봤다. 설마 그의 입에서 미녀 운운하는 부끄러운 말이 나올지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성윤의 팔을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어머, 미녀라니, 고마워라. 혹시 우 씨도 관심 있어요?”

첼시가 머리를 슥 쓸어올리며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전혀 꾸미지 않은, 오히려 엉망인 행색을 하고 있는 첼시였지만 역시 본판의 미모가 사소한 것들을 압살했다. 주변에 우연찮게 첼시를 본 사람들이 그녀를 보고 넋을 놓았다.

단, 그녀가 장난을 건 성윤만큼은 한 걸음 물러서고 질색인 표정을 지었다.

“전혀 관심 없습니다.”

첼시의 눈썹이 꿈틀댔다.

아무리 얼굴만 보고 다가오는 작자들을 싫어하는 그녀라지만 이렇게 대놓고 싫어하는 모습에 성질이 났다.

‘진짜 한번 대놓고 유혹해봐?’

일순간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성윤의 행동은 얄미웠다. 하지만 첼시는 한숨과 함께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대체 뭔 유치한 생각이람.’

아무래도 아직까지 그 사고의 여파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게 분명했다.

“어쨌든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번에 그 개자식으로부터 도움을 주신 건 감사드려요. 지구에 돌아갔을 때 밥 한 번 살게요.”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뵙죠, 스트로브 씨.”

“첼시라고 불러요.”

“…괜찮겠습니까?”

성윤이 조금 놀란 눈초리로 물었다. 하지만 첼시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저도 성윤 씨라고 부를게요. 서로를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 정도의 친구 정도는 되지 않았나요, 우리?”

첼시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하지만 성윤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친구라….’

첼시로서는 별 어려움 없이 꺼낸 단어겠지만 성윤에게 친구란 단어는 그다지 좋은 감정을 갖게 하는 단어가 아니었다.

친구라는 말이 들릴 때마다 가장 친했던 그 개자식이 떠오르는 것이다.

“어, 그, 성윤…아니, 우…씨?”

첼시가 조심조심 성윤의 눈치를 봤다. 자신의 말을 듣자마자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성윤에게 당황한 것이다.

혹시 자신과 친구라는 관계가 되는 것이 불쾌한 것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성윤은 상념을 떨쳐냈다. 첼시의 저 말은 그저 호의일 뿐이다. 예전의 그 개자식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여기서 친구라는 관계를 거부하는 건 괜히 그 개자식에게 발목을 잡히는 것처럼도 느껴져 성윤은 반은 오기로도 첼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군요. 충분히 친구로서 볼 수 있겠죠. 알겠습니다. 앞으로는 서로 이름으로 부르도록 하죠, 첼시 씨.”

성윤이 답을 주자 첼시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내밀어진 그녀의 손을 성윤은 굳게 잡았다.

하지만 그의 속마음은 복잡했다. 과연 자신이 다시 친구라는 칭호에 신뢰를 가질 수 있게 될지를, 성윤은 확신하지 못했다.

***

산 너머로 태양이 넘어가고 어둠이 추적추적 깔리는 시각. 서울 외곽에 자리 잡은 한 단독 주택에 차 한 대가 들어섰다.

그건 비싼 브랜드의 차였다. 우주선을 연상시키는 모양만으로 같이 달리는 자동차가 슬금슬금 피할 그런 차.

마당 한편에 멈춘 차의 문이 열리고 한 사내가 내렸다.

그는 짧은 머리와 굳게 다물어진 입이 고집스러워 보이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행동에서 촐싹대는 성격이 언뜻언뜻 드러났다.

그는 한우성이라는 이름의, 나름 잘 나가는 연결자였다.

아직 20대 초중반밖에 되지 않았지만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젬, 디바이스와 회사의 많은 지원 그리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뛰어난 재능으로 벌써부터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현관으로 가 문을 열었다.

그리운 냄새가 솟구친다. 한창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 듯 집 안에서는 구수한 찌개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우성은 침을 한 번 삼켰다.

“우성이 왔구나!”

“어머니!”

누군가 부엌에서 나와 우성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우성도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띄고 그녀를 껴안았다.

“얘는, 어머니가 뭐니? 어머니가. 그냥 엄마라고 불러. 소름 돋는다, 얘.”

“아하하하. 그래도 나이가 나이인데요.”

“아인이가 시켰지? 하여간 그 녀석 딱딱한 건 참!”

우성을 반갑게 맞아준 여자는 지민의 의모 중 한 명인 희영이었다. 희영의 타박에 우성은 실실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잘 왔다. 어서 들어 와.”

희영이 우성을 집 안으로 들였다.

“배고프지? 조금만 기다려. 밥 차려 줄 테니까.”

“다른 어머니는요?”

“아인이라면 모임 갔어. 무슨 초등학교 동창 모임이라든가? 네 형은 언제 온 대니?”

“조금 더 늦게 내려온대요.”

“하여간 그 녀석은 가족 서비스가 최악이야, 정말. 너는 절대 저렇게 되면 안 된다. 알았지?”

우성은 쓴웃음으로 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희영이 마저 저녁을 차리러 부엌으로 들어가자 그는 집 안을 둘러 봤다.

집 안은 전체적으로 깔끔했다. 방금 청소를 했는지 먼지 하나 보이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필요한 것만 있는 심플한 인테리어였지만 벽에 걸린 사진만은 굉장히 많았다.

우성은 사진이 걸려 있는 벽 앞으로 걸었다.

액자 하나를 새삼스러운 손길로 만졌다. 벽에 걸린 사진은 모두 그의 가족을 찍은 사진이었다.

아빠, 엄마들 그리고 그의 남매의 사진.

그의 가족이 모두 함께 웃고 울고 다투고 사랑하며 살아갈 때의 모습이었다.

“그립지?”

어느새 다시 왔는지 희영이 우성의 옆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그러네요. 역시 모두 함께 살지 않으실래요? 형이나 누나도 찬성할 것 같은데. 정 안 되면 저라도 어머니들을 모실게요.”

“됐다, 얘. 저 딱딱이랑 둘이서 사는 것도 충분히 재밌어. 너희야말로 우리랑 같이 산다거나 그럴 생각하지 말고 빨리 결혼이나 해서 가정이나 가져.”

나왔다. 고향에 돌아오면 시작되는 부모님의 반복 레퍼토리 중 하나.

우성이 머릿속을 최대로 굴렸다. 어떻게든 이 개미지옥 같은 질문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그러고 보니 누나는 지금 뭐한대요?”

우성의 질문에 희영이 그를 빤히 쳐다봤다. 우성은 시선을 회피했다.

“쯧쯧, 잔머리만 늘어가지고는.”

그의 빤히 보이는 수는 어머니에게 단번에 들통난 것 같았다.

우성이 몸을 움츠렸다. 건장한 체격의 그가 꾸중 들은 강아지처럼 구는 게 어찌 보면 재미나게 보이기도 했다.

희영도 더 이상 잔소리를 계속할 생각은 없는지 더 이상 타박하지는 않고 우성의 질문에 대답해줬다.

“계속 회사 하고 있댄다.”

“아직도요?”

그 시간낭비를 아직도 하고 있단 말인가. 우성은 머리를 짚었다.

“그래도 이번이 마지막이래. 이번에 연결자와도 한 명 계약한 것 같더라.”

“개뼉다구 같은 놈일 게 뻔한데 안 말리셨어요?”

예전, 지민의 회사에 들어 왔었던 놈들을 떠올리며 우성이 말했다.

“말려도 들을 애니? 아니, 너를 포함해서 우리 자식들 중 말 잘 듣는 애가 한 명이라도 있니?”

“그건…그렇지만….”

어머니가 저렇게 나오는데 무슨 말이 있단 말인가. 우성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어머, 찌개 넘친다!”

무언가 끓는 소리를 듣고 희영이 다시 부엌으로 후다닥 들어갔다. 거실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우성은 바닥을 쳐다보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누나를 한번 만나 봐야 할 것 같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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