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의 미궁-53화 (53/354)

제53화

“휴, 무섭다 무서워!”

팀이 양팔로 몸을 감싸고 부들부들 떨며 너스레를 떨었다.

“하여간 넌 진짜 입이 싸다니까.”

에밀리가 팀을 타박했다. 만약 거기서 그 보초가 자신들에게 해를 입힐 생각을 했었다면 파티는 얄짤없이 전멸이었다.

“아니, 그래도 열 받긴 하잖아. 우린 그놈들이 일을 제대로 못 해서 죽을 뻔했다고!”

“그래도 그 사람이 기분 나빠져서 우릴 죽이려 했다면 끝이잖아!”

실제로 그 보초의 시선은 곱지 못했다. 게다가 초보 연결자 세 명이 시작의 미궁에서 사라져봤자 미궁에서 사라져 간 많은 연결자 중 하나로 처리될 뿐이다.

거기엔 팀도 이견이 없는지 입을 다물었다.

그때 성윤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분명 불평 정도는 해도 될 만한 일이긴 합니다.”

그들이 일을 게으르게 했든 아니면 최선을 다했는데도 힘에 부쳐 못했든 이쪽은 말 그대로 죽을 뻔했으니 불만 정도를 입에 올리는 게 그렇게 잘못된 일은 아니다.

팀과 에밀리가 성윤을 쳐다봤다. 웬만하면 먼저 말을 꺼내는 일이 없는 성윤이 먼저 대화에 끼어들어 조금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세상사가 상식만으로는 돌아가지 않죠. 무엇이든 조심하는 게 좋습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겪어온 비상식을 상기하며 성윤이 말했다.

그 어투에 묻어 있는 진한 경험과 씁쓸함 그리고 분노에 팀과 에밀리는 다른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

그 후로 성윤 파티는 계속해서 미궁 공략에 나섰다. 7층에서 나온 월석들은 세 명의 주머니를 분명 풍족하게 했다.

하지만 성윤이 원하는 젬은 나오지 않았다. 가장 밑바닥 랭크인 퍼플 젬조차도.

그러나 성윤은 마음을 가라앉혔다. 젬이란 게 쉽사리 나오는 물건이 아닌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시작의 미궁에 마나 스트림이 몰아닥칠 시기가 되었다.

“정말로 아쉽네요. 적어도 마나 스트림 직전까지는 성윤 씨와 같이 미궁을 돌고 싶었는데 말이죠.”

팀이 캔맥주를 입에 쭈욱 밀어 넣은 다음 투덜거렸다. 그 옆에서 에밀리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성윤과 팀, 에밀리는 그들이 처음 술을 마셨던 가게에서 다시 술자리를 가지고 있었다. 평소에는 달의 비싼 물가 때문에 이런 가게를 오지 않으려 하는 성윤이었지만 오늘만큼은 팀의 권유를 거절하지 않았다.

다음날이 일시적인 이별의 날이기 때문이다.

며칠 뒤부터 얼마간 마나 스트림 때문에 시작의 미궁을 공략하는 초보 연결자들은 미궁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 때문에 초보 연결자들은 슬슬 지구로 내려가기 위해 짐을 꾸리고 있었다. 벌써 지구로 내려간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그건 팀과 에밀리도 마찬가지였다.

생각 같아서는 성윤과 끝까지 사냥을 하고 싶은 두 사람이었지만 그들의 회사가 수송 회사와 지구행 단체 계약을 맺은 터라 회사에서의 발언권이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두 사람은 고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성윤 씨는 언제 내려가십니까?”

“시작의 미궁이 폐쇄되기 직전까지는 끝까지 남아 있을 생각입니다.”

“끙. 역시 그렇군요.”

“너무 아쉬워하지 마세요. 어차피 1개월 후에 다시 만날 것 아닙니까.”

“그렇긴 하죠.”

결국 팀은 아쉬움을 추스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주섬주섬 수첩 하나를 꺼내 페이지 하나를 찢어냈다.

“혹시라도 캐나다에 놀러 오실 일 있으면 꼭 저희를 불러주세요.”

팀이 찢어낸 종이에 자신의 전화 번호와 이메일 등 연락처를 적어줬다. 그에 편승해 에밀리도 슬쩍 자신의 연락처를 적어 성윤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혹시 여러분도 한국에 오실 일이 있으면 연락 주세요.”

성윤도 그들에게 연락처를 줬다.

그래도 근 3개월간 서로의 목숨을 의지하며 미궁을 공략했던 사이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걸 꺼리게 된 성윤도 연락처 정도는 나눠 줄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팀과 에밀리는 성윤의 연락처를 챙겼다. 특히 에밀리는 혹시라도 잊어버릴세라 종이를 곱게 접어서 품 안에 소중히 집어넣었다.

그것이 지구에 내려갔을 때 호감이 있는 상대와의 유일한 접촉 수단인 것이다.

그렇게 담소를 나누며 술을 마시길 얼마나 됐을까, 술자리가 파하고 드디어 이별의 시간이 됐다.

“그럼 다음에 보죠.”

다음에 만날 것을 기약하며 팀은 성윤과 힘 있게 악수를 나눴다.

“자, 너도 인사 해야지.”

팀이 에밀리의 등을 살짝 밀어 성윤의 앞으로 밀었다. 에밀리가 주춤주춤 앞으로 나와서는 손을 내밀었다.

“다, 다음에 봬요.”

성윤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희고 부드러운 손. 부끄러움을 타고 있었지만 그녀의 아름다운 갈색 눈동자는 또렷하게 성윤을 담고 있었다.

그가 꺼리는 미녀, 그것도 최고봉의 미녀인 그녀였지만 함께 생사를 나누는 전투를 겪어와서인지 지금은 그렇게 꺼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편하게 내뱉을 수 있었다.

“네, 다음에 봅시다. 에밀리 씨.”

에밀리의 표정이 환해졌다. 아름다운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것처럼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

둘과 헤어진 성윤은 다시 미궁 공략에 나섰다. 마나 스트림까지 남은 기간은 대략 일주일. 그때까지 계속 미궁에서 월석을 채집하고 젬을 찾을 생각이었다.

‘혼자서 사냥을 하는 게 얼마만이지.’

몬스터 한 마리를 사냥한 후 새삼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쾌활하고 호탕한 목소리로 항상 앞장섰던 팀과 어미 닭을 따라다니는 병아리마냥 그들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에밀리.

지금 생각해보면 꽤 유쾌한 사람들이었다. 만약 예전 성격이었다면 그들과 왁자지껄하게 웃으며 친분을 쌓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윤은 고개를 저었다.

10년지기였던 가장 친한 친구와 평생을 함께 하기로 맹세했던 부인의 배신은 아직도 그의 마음을 단단히 옭아매고 있었다.

콰직!

에밀리가 계속 빌려주겠다며 돌려 받는 걸 거절한 메이스에 몬스터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쓰러지는 몬스터의 몸을 성윤은 차갑게 내려다 봤다.

팀과 에밀리와 있을 때는 간간이 대화도 하고 그나마 조금은 사람답게 다니던 성윤이었지만 지금은 다시 달에 처음 왔을 때처럼 돌아가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기는커녕 오로지 미궁에 들어가 몬스터를 사냥하는 나날.

몬스터의 시체가 빛에 휩싸인 후 나타난 월석을 집어들며 성윤은 시계를 확인했다. 꽤 늦은 시간이었다.

‘올라갈까.’

성윤은 등을 돌렸다.

***

“좋겠네요. 이제 곧 다시 지구로 돌아가서.”

첼시가 부러움 반 질투 반을 담아 성윤에게 말했다. 감자를 연신 입에 넣고 있던 성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그렇습니다.”

다른 건 둘째 치고 이제 곧 신혜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정말로 부럽네요.”

“첼시 씨는 언제 내려갑니까?”

옆에서 ‘부럽다, 좋겠다’를 연발하고 있는 첼시에게 물었다.

성윤이 달에 올라오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첼시가 지구에 내려가 있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아직 반년 정도 남았어요. 가정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비교적 체류 기간이 길거든요. 정말이지.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은 사람도 아니라는 거야? 만날 시간을 줘야 가정을 꾸리든지 말든지 할 거 아냐!”

작은 목소리로 볼멘소리를 내뱉던 첼시의 음성이 점점 커지더니 나중에는 히스테릭하고 앙칼진 목소리가 되어 광장을 울렸다. 아무래도 쌓이고 쌓인 스트레스가 무척 큰 것 같았다.

“아아, 좋은 옷 입고 싶어. 맛있는 거 먹고 싶어. 푹신한 침대 위에서 뒹굴면서 TV만 보고 싶어.”

유아 퇴행을 한 것처럼 그녀가 한껏 몸을 꼬며 투덜거린다. 성윤은 아무 말 없이 그저 감자만 입에 집어넣으며 그녀의 한탄을 들었다.

성윤이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없거니와 이런 상태의 여자는 해결 방안을 내놓는 것보다는 얘기를 들어주며 공감해주기를 바란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성윤은 그렇게 한참을 첼시의 넋두리를 들어줬다.

“그럼 성윤 씨는 언제 내려가나요?”

드디어 말하고 싶은 만큼 내뱉은 모양이다. 시원한 얼굴로 그녀가 성윤을 보며 물었다.

“약 3일 후에 마나스트림이 몰아친다니, 그때까지 계속 사냥한 후에나 내려갈 생각입니다.”

“그런가요.”

그때, 두 사람의 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여어! 오랜만이지, 아가씨?”

불쾌한 미소를 짓는 남자가 어느샌가 그들의 앞에 서 있었다.

***

니콜라스 로턴은 요즘 기분이 최악이었다. 대미궁에 들어갈 자격을 얻은 사람들을 제외하면 최강급이라고 자부하며 콧대를 빳빳하게 세우던 그의 자존심이 시궁창 속으로 와장창 떨어지고 있었다.

시작은 시작의 미궁을 청소해달라는 암스트롱에서의 의뢰였다.

여기까진 괜찮았다. 많은 미궁 중에서도 중하급 정도의 수준인 시작의 미궁에서 몬스터들을 솎아내는 건 니콜라스 정도의 연결자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고용되는 건 그만이 아니다. 청소에는 초보 연결자들이 감당할 수 없는 몬스터들을 가능한 한 모두 섬멸하기 위해 꽤 많은 연결자들이 고용된다.

니콜라스는 의뢰를 흔쾌하게 받아들였다. 보수도 좋고 일도 쉬운데다가 시작의 미궁을 청소한 경험도 있다. 거기에 시작의 미궁을 청소한 연결자에게는 도시에서 소소한 이득도 준다.

줄이 늘어선 음식점에 우선적으로 들어갈 권리라든가 예쁜 창녀를 선점할 권리 같은, 어떻게 보면 정말로 사소한 이득이었지만 이미 쌓아 놓은 돈도 많은 그에게는 차라리 그런 이득이 돈보다 더 나았다.

마나 스트림이 끝난 후, 고용된 다른 연결자들과 같이 시작의 미궁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니콜라스는 얼른 일을 끝내고 대가를 받아 질펀하게 놀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기분 좋은 상상은 하루도 안 돼 무참히 깨졌다.

‘뭔 놈의 몬스터들이 그리 많아진 거야!’

시작의 미궁에는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많은 몬스터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얼른 몬스터들을 처리하긴커녕 그들은 청소 기한인 일주일이 지나도록 미궁을 모두 청소하는 것에 실패했다.

결국 암스트롱에 앓는 소리까지 해 인원을 더 배치 받고는 미궁의 일부를 봉쇄한 채 초보 연결자들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판국에 청소가 제대로 됐을 리 없었다.

그들이 놓친 고위 몬스터 때문에 피해를 봤다는 항의가 쇄도했다. 생명을 잃은 연결자들까지 나왔다.

당연히 욕을 얻어먹었다. 그나마 암스트롱에서 몬스터의 이상 증식을 인정해 그들에게 책임을 지우지 않은 것만이 다행이었다.

하지만 니콜라스의 자존심은 큰 타격을 받았다. 개인 미궁을 배정받는고 승승장구해 온 그의 연결자 인생에서 가장 처참한 실패였던 것이다.

오늘도 그는 빌어먹을 몬스터들을 쳐죽이고 오는 길이었다. 몇 날 며칠을 미궁 안에서만 보내며 혹시라도 남아 있는 고위 몬스터가 있는지 이 잡듯 수색했다.

이미 다음 마나 스트림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인데도 불구하고 암스트롱은 그들에게 시작의 미궁 청소를 그만두게 하지 않았다. 아직 시작의 미궁에 드나드는 초보 연결자들이 있다는 이유였다.

‘빌어먹을 새끼들! 어차피 지금 드나드는 놈들도 얼마 없잖아! 그놈들이 고위 몬스터를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암스트롱 상층부를 싸잡아 씹은 그는 분노를 이번엔 초보 연결자들에게로 돌렸다.

‘그리고 그 쓰레기 새끼들은 왜 아직까지 미궁에 드나들고 난리야! 마나 스트림까지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쓰레기들이 돈 몇 푼에 환장해가지고는! 웬만큼 하고 지구로 꺼지란 말이다!’

당장이라도 무언가를 부수고 싶은 기분이었다.

사람들도 그의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꼈는지 그를 슬슬 피했다. 그를 중심으로 커다란 원이 만들어졌다.

씨근덕거리며 걸어가는 눈에 누군가가 들어온 건 그때였다.

‘저건.’

커다란 안경에 부스스한 머리, 그리고 하얀 가운. 하지만 그 안에서도 빛나는 미모. 낯익은 얼굴이었다.

‘예전에 날 무시한 쌍년!’

정확히는 그의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헌팅을 그녀가 딱 잘라 거절한 것뿐이지만 그의 안에서 첼시의 이미지는 이미 건방진 쌍년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안 그래도 심기가 뒤틀려 있는 판국이다.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그는 첼시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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