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화
퍼억!
창날이 쓰러진 블러디라이노에게 날아갔다. 하지만 날카로운 무언가가 꽂히는 섬뜩한 소리 대신 질긴 가죽을 날붙이로 건드리는 맥빠지는 소리만 났다.
고작해야 퍼플 랭크인 성윤의 창으로 블러디라이노의 두터운 가죽은 뚫을 수 없었다. 하지만 상관 없었다. 애초에 블러디라이노에게 상처를 입히려 한 행위가 아니다.
“확실히 죽었군요.”
성윤이 몇 번을 더 건드려 봐도 블러디라이노는 움직이지 않았다. 성윤 일행은 그때서야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있었다.
‘확실히 7층 쯤 오니까 힘들군.’
성윤은 빛에 휩싸이는 블러디라이노를 보며 생각했다.
팀과 에밀리와 파티를 짠 덕에 그는 훨씬 더 빠르게 미궁을 공략할 수 있었다.
4층에 막혀 3층에서 전전하던 때를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와 신혜의 미래라고 할 수 있는 월석이 모이는 속도도 뻥튀기 됐다.
하지만 역시 젬만큼은 잘 나오지 않았다.
‘이거라도 나와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성윤의 다리에는 못 보던 정강이 보호대가 달려 있었다.
단단한 나무에 질긴 가죽을 덧대어 만든, 정강이 부분만을 간신히 가리는 퍼플 랭크의 방어구였지만 그나마 이게 어딘가.
이 젬이 나오자마자 팀은 깊이 생각조차 하지 않고 성윤에게 양보했다. 팀이야 더 좋은 걸 끼고 있었고 후방 요원인 에밀리보다는 성윤에게 더 필요한 방어구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성윤의 장비는 참으로 언밸런스했다. 무기와 방어구는 5등급의 블루라는, 시작의 미궁에서는 꽤 고위 랭크의 젬이었지만 그 외는 전부 밑바닥인 퍼플 랭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빅풋을 쓰러뜨리고 얻은, 자그마치 4등급의 그린 랭크의 젬마저 장착할 수 있는 팔찌는 현재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조금 쉴까요?”
월석을 회수한 팀이 주변을 훑어보며 말했다.
성윤은 시간을 확인했다. 사냥을 시작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나 있었다.
셋은 조금 떨어진 곳에 벽을 등지고 앉았다.
“여기요.”
성윤의 앞에 깨끗한 물이 담겨 있는 물컵이 내밀어졌다. 차갑고 울퉁불퉁한 벽에 등을 댄 채 맞은편에 있는 미궁 벽면을 멍청하게 쳐다보고 있던 성윤의 시선이 돌아갔다.
에밀리가 물 컵을 내밀고 있었다. 쓰고 있는 두건에 가려 그녀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성윤은 물 컵을 받았다. 이미 함께 한 지도 꽤 된 터라 의미 없는 사양 같은 건 사라진 지 오래였다.
“벼, 별 말씀을요.”
혹시라도 손가락이라도 닿을까 움찔거리던 에밀리가 모기만한 목소리를 쥐어짜며 대답했다. 하지만 성윤에게 물컵을 건넸다는 사실이 기쁜지 어깨가 조금 흔들렸다.
그 광경을 팀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쳐다봤다.
‘저 녀석은 뭘 하는 거야?’
지금 저걸 어필이라고 하는 걸까? 이제 막 말을 배운 아이들도 저것보다는 호감을 확실하게 표현할 것이다.
“자.”
에밀리가 이번엔 팀에게 물컵을 내밀었다. 하지만 건성건성한 태도가 성윤에게 하는 것과 완전히 비교됐다. 물론 팀은 실망하지 않았다.
아니, 만약 에밀리가 성윤에게 한 것처럼 자신에게도 쭈뼛쭈뼛 부끄러워하며 물컵을 건넸다면 당장 온 몸에 소름이 돋아 돌연사 일보 직전까지 몰렸을 것이다. 그는 확신했다.
성윤은 물을 가볍게 목구멍 뒤로 넘겼다. 미지근했지만 달에서는 귀하기 이를 데 없는 수분이다. 한 방울 한 방울을 온 몸 가득 흘려보낸다는 느낌으로 마셨다.
‘미궁에 들어온 지 벌써 3일 째인가.’
컵에서 입을 떼고 성윤이 생각을 가다듬었다.
그가 예측하기로 하루 만에 왕복할 수 있는 거리는 4층이 한계. 그 이하는 적어도 1박 이상 미궁에서 보내야 한다.
그리고 실제로 지금 성윤은 미궁에서 이틀째 숙박을 하고 있었다.
딱딱한 미궁 바닥에서 모포 하나 달랑 덮고 자는, 그것도 불침번을 서야 해서 푹 쉬지도 못하는 생활은 분명 힘들었다.
‘그나마 모포라도 하나 있는 게 다행인가.’
초보자의 미궁에 숙박을 하러 간다니 지원소에서 그나마 싼 가격으로 지원해준 게 이 모포였다.
퀘퀘한 냄새에 해지기 일보 직전인, 모포라고 부르기도 뭐한 거적때기였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하지만 지원소에서 지원한 건 그게 전부였다. 미궁에서 먹을 물도 음식도 전부 사비로 구매해야 했다.
지원소에서 지원하는 물과 음식은 하루에 단 한 번뿐.
미궁에서 숙박을 하는 성윤이 제 시간에 받으러 갈 수 있을 리 없다. 지민에게 무슨 일이 생길 때 쓰라고 받은 지원금이 대대적으로 깨져나갔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투자라고 자신을 타일렀다. 그리고 그 대가는 시작의 미궁 상층보다 더 큰 월석으로 보상받고 있는 중이기도 했다.
대충 휴식을 취한 세 명은 다시 미궁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스윽!
앞서가던 팀이 손을 들었다. 파티의 움직임이 멎었다.
“두 마리군요.”
팀의 말대로 전면에는 7층에서 흔하게 보던 블러디라이노와 2m는 훌쩍 넘는 키에 우락부락한 근육이 특징적인, 고릴라를 닮은 헤비머슬고릴라가 어슬렁대고 있었다.
“어쩔까요?”
녀석들은 아직 일행을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팀이 성윤과 에밀리를 보고 의견을 구했다.
성윤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두 녀석을 노려봤다.
녀석들은 확실히 시작의 미궁 7층에 어울릴 정도로 강한 녀석들이었다. 하지만 감당할 자신이 없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성윤의 다른 무장은 빈약했지만 적어도 무기와 방패는 시작의 미궁 모든 층에서 통하는 5등급의 블루 랭크다.
거기에 에밀리의 보조마법이 가미된다면 상황은 훨씬 더 유리해진다. 무엇보다 두 놈은 모두 성윤 파티가 잡아 본 경험이 있는 녀석이었다.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두 분은 어떻습니까?”
“저는 찬성입니다.”
성윤의 질문에 팀이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애초에 팀과 에밀리는 원래부터 6, 7층에서 터를 잡고 돌아다니던 자들이다.
특히 팀은 성윤이라는 믿음직한 지원군까지 들어온 판에 고작해야 몬스터가 두 마리로 늘었다고 꽁무니를 뺄 성격이 아니었다.
“저도 찬성이에요.”
에밀리도 쉽게 찬성했다.
“좋아! 그럼 가볼까요!”
의견이 모이자 팀이 성큼성큼 나섰다. 조심성 없는 행동처럼 보였지만 그건 계산된 작전이었다.
적들의 공격을 막아내는 벽인 그가 가장 눈에 띄어야 하기 때문이다.
호쾌하고 활달한 팀에게는 딱 맞는 역할이었다.
크륵!
우우!
두 몬스터의 시선이 팀에게 꽂혔다. 오금이 저리고 심장이 벌렁거릴 광경이었다.
하지만 팀은 담대하게도 옅은 미소조차 지었다.
“어이, 쓰레기들. 덤벼 봐.”
그는 몇 천 년을 살아온 거대한 고목의 나무뿌리같이 발을 바닥에 단단히 고정시키고 방패를 든 후 두 몬스터에게 손을 까딱거렸다.
도발이 통한 것일까? 아니면 그저 본능에 따른 것일 뿐일까? 이유야 어쨌든 몬스터들은 팀의 의도대로 착실하게 그를 표적으로 삼았다.
꾸어어어어!
가장 먼저 달려든 건 블러디라이노였다.
그 길고 단단한 뿔을 향하고 일직선으로 짓쳐드는 모습은 엄청났다. 과장 좀 보태서 지축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크리아아악!
그 뒤를 헤비머슬고릴라가 뒤따랐다. 팔까지 다리처럼 사용하여 뛰어오는 녀석의 돌진 기세는 블러디라이노보다는 못했지만 그래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아니, 오로지 돌격밖에 못 하는 블러디라이노보다는 팔을 사용하여 여러 가지 공격을 가하는 녀석이 오히려 더 위협적일지도 몰랐다.
후웅!
성윤과 팀의 몸에서 힘이 솟았다. 에밀리가 뒤에서 보조 마법을 건 것이다.
팀이 방패를 세웠다. 블러디라이노가 헤비머슬고릴라보다 훨씬 더 빨랐기에 팀은 먼저 커다란 뿔의 충격에 대비했다.
쿠우웅!
블러디라이노의 뿔이 그의 방패를 들이받았다. 아까 전처럼 팀은 몇 발자국 물러나긴 했지만 몬스터의 공격을 확실히 방어했다.
팀과 성윤의 시선이 힐끔 헤비머슬고릴라를 향했다. 녀석과의 거리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하아앗!”
성윤의 메이스가 블러디라이노의 오른쪽 앞 다리를 때렸다.
콰직!
녀석의 다리가 수수깡처럼 부러져 나갔다.
꾸어어어어!
녀석이 고통의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그에 아랑곳 않고 팀도 왼쪽 앞다리를 노려 도끼로 찍었다.
푸욱!
성윤의 메이스처럼 녀석의 다리를 완전히 못 쓰게 만들진 못했지만, 장애를 입히기에는 충분했다.
털썩!
블러디라이노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증오에 찬 것 같기도 구슬픈 것 같기도 한 울음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려 발버둥 쳤다.
하지만 망가진 앞다리가 그 무거운 체중을 버티지 못했다. 블러디라이노의 커다란 무기였던 돌진력이 완전히 사라졌다.
“빨리 정리 부탁합니다.”
팀이 그런 말을 남기고는 쓰러진 블러디라이노를 지나쳐 달려나갔다.
“흐랴!”
곧 팀은 헤비머슬고릴라와 거세게 충돌했다.
녀석이 주먹을 휘두르며 날뛰는 소리와 그걸 팀이 방패로 막는 소리가 미궁 가득 울려 퍼졌다.
“흡!”
성윤도 바로 자신의 일을 행했다. 팀이 헤비머슬고릴라를 막아주는 와중에 최대한 빨리 이 블러디라이노를 작살내야 했다.
크라악!
하지만 썩어도 7층의 몬스터다. 앞 다리가 못 쓰게 됐다지만, 그렇다고 쉽게 죽어주지도 않았다.
하지만 돌진력을 잃고 목만 움직여 날리는 뿔은 성윤의 방패에 너무 쉽게 막혔다.
퍼억!
녀석의 볼에 메이스가 박혔다. 녀석의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성윤은 쉬지 않고 다시 한번 메이스를 날렸다.
‘단단한 뿔은 잘 피해서!’
퍼어억!
한 번 때린 자리에 다시 메이스가 꽂혔다. 안 그래도 푹 들어갔었던 녀석의 볼이 완전히 함몰됐다.
쿠웅!
녀석이 쓰러졌다.
‘편하군.’
쓰러진 블러디라이노를 내려다보던 성윤의 시선이 에밀리를 향했다.
그녀는 팀과 성윤을 번갈아 보며 지팡이를 꼭 붙잡고 있었다. 언제든 치유 마법을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치유 마법이라는 보험이 있었기에 이런, 조금은 위험하고 난폭한 작전도 쉽사리 수행할 수 있었다.
블러디라이노에게 확인사살까지 하여 녀석의 숨이 완전히 끊어진 것을 확인한 성윤은 바로 팀에게 달려갔다.
“으라차!”
팀은 선전하고 있었다. ‘헤비머슬’이라는 칭호가 붙을 정도로 근육이 도드라진 녀석의 공격을 방패를 이용해 훌륭히 막고 있었다.
오히려 반격까지 가한 듯 몬스터의 몸 곳곳에는 도끼질로 인한 상처가 생겨 있었다. 하지만 역시 몬스터의 반격을 의식하여 공격한 듯 치명적인 상처는 없었다.
“돕죠.”
성윤이 팀을 스쳐지나갔다. 헤비머슬고릴라는 마침 팀을 공격한 직후 몸이 굳은 상태였다.
퍼어억!
가장 먼저 녀석의 팔을 공격했다. 그것도 구부러져 툭 튀어나온 팔꿈치를 목표로 했다.
단단한 쇳덩이가 관절을 때리자 녀석이 고통에 울부짖었다. 유인원처럼 생긴 게 어디 가지 않는 것인지 녀석은 다른 손으로 부상 입은 팔을 부여잡았다.
나름 부상 부위를 보호하고 고통을 억누르려고 한 본능적인 행동이겠지만 그건 잘못된 선택이었다. 두 팔을 모두 쓰지 못하게 된 것이다.
공격도 방어도 대부분 양 팔로 해결해 온 녀석이 양팔을 쓰지 못하게 됐다는 건, 기본적인 공격과 방어가 불가능하게 됐다는 뜻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성윤은 물론이고 팀도 성큼 앞으로 나와 방패를 열고 도끼를 휘둘렀다.
퍼억!
콰직!
메이스는 오른쪽 무릎관절을 파괴했고 도끼는 왼쪽 옆구리에 커다란 상처를 냈다.
우어어어어어!
녀석이 크게 비명을 질렀다.
벌려진 입 안으로 보이는 뾰족한 이빨들은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둘은 아랑곳없이 연신 무기를 휘둘렀다.
고작 그 정도로 겁을 먹기엔 지금까지 겪어온 경험들이 너무 과격했다.
쿠웅!
결국 헤비머슬고릴라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