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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미궁-48화 (48/354)

제48화

창을 그러쥔다. 나무로 이루어진 매끈한 창대가 손에 척 달라붙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안감이 남았다. 더욱 힘을 줘 창대를 잡았다.

크랏!

시작의 미궁의 1층 몬스터 중에서도 가장 약한 축에 들어가는 빅랫이 그 특유의 앞니를 들이대며 위협한다.

일반인에게는 위협적인 상황이었겠지만 무장을 한 연결자에게는 귀찮은 재롱일 뿐이었다.

거기에 다른 사람에게 호위까지 받고 있는 상황이라면 승기는 더 확실하게 연결자 쪽으로 쏠린다.

푸욱!

힘차게 내지른 창이 쏜살같이 빅랫에게 날아들었다. 빅랫은 거슬리는 괴성을 내지르며 숨이 끊어졌다.

“이제 1층의 몬스터 정도는 무리가 없겠군요.”

빅랫이 남긴 월석을 회수하며 성윤이 중얼거렸다. 그의 눈이 작게 한숨을 내쉬고 있는 에밀리를 쫓았다.

성윤이 빌려준 창을 들고 있는 그녀는 척 보기에도 피로해보였다. 육체적인 피로가 아닌, 철저하게 정신적인 피로였다.

“괜찮습니까?”

“네, 네. 괜찮아요.”

조금은 창백한 안색으로도 그녀가 꿋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밀리는 현재 지금껏 해보지 못한 몬스터와의 직접 전투를 경험하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오빠인 팀과 파티를 짜 철저하게 후방에서 활약해 왔다. 다르게 말하면 팀에게 보호받아 온 것이다.

당연히 몬스터와 직접 맞선다는 경험을 할 수 없었고, 그건 예전 빅풋과의 전투에서 빅풋의 기세만으로 짓눌린 꼴사나운 결과로 나타났다.

성윤이 없었다면 그 꼴사나운 결과가 그녀의 인생에서의 마지막 실패가 됐을 것이다.

그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한 성윤의 제안에 의해 에밀리는 조금씩 조금씩 성윤과 팀의 호위 아래에서 몬스터를 직접 상대하고 있었다.

물론 성윤과 팀 모두 에밀리에게 굉장한 근접전투 능력을 기대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조금 강한 몬스터가 나타났다고 기세에서부터 눌려버려,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방해를 하는 행위를 없애보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적어도 몬스터의 눈빛에 겁을 먹어 주저앉아버리는 동료는 그게 아무리 직접 전투를 거의 하지 않는 후방전투요원이라도 쓸모없었다.

“그래도 많이 고쳐진 것 같군요.”

이제는 제법 창을 내지를 때의 기세가 삼엄했다. 적어도 강력한 몬스터의 눈앞에서 주저앉을 정도에서는 벗어난 것 같았다.

에밀리가 부끄러운지 벌게진 얼굴로 땅을 바라봤다. 하지만 살짝 올라간 그녀의 입꼬리가 그녀의 감정이 결코 나쁘지 않다는 걸 피력하고 있었다.

팀도 자랑스럽다는 듯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럼 아래층으로 내려가볼까요?”

콧김을 뿜으며 당장이라도 아래 층에 있는 몬스터들을 모두 어육으로 만들어버리겠다는 느낌으로 팀이 도끼를 허공에 휘둘렀다.

‘괜찮으려나?’

성윤은 시계를 봤다. 깊이 내려가지는 못 하지만 적어도 2층에서 몇 번 전투를 더 할 수는 있는 시간대였다.

“시간도 괜찮고. 2층까지는 가능할 것 같군요.”

“좋았어!”

시간이 아까운지 팀이 먼저 앞서기 시작했다. 마치 커다란 코끼리가 주변을 위협하며 걷는 것 같았다.

192cm라는 덩치는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위협적인 분위기를 풍기게 만들었다.

그렇게 일행은 미궁의 아래층으로 향했다.

***

성윤과 일행은 차츰차츰 미궁을 공략해 내려갔다. 기본적으로 파티의 연계 그리고 거기에 에밀리의 연습을 추가하여 조금은 느린 속도지만 꾸준하게 아래로, 아래로 향했다.

그리고….

‘드디어로군.’

성윤은 조금 감명 깊은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처음 만난 팽보어의 강력함에 막혀 결국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던 곳. 시작의 미궁의 4층에 다시 발을 디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예전보다 강력한 무구가 있고 수준 높은 동료도 생겼다.

하지만 확인은 해야 했다. 자신의 능력이 이 층에서 통하는지.

“팽보어로군요.”

팀이 미궁의 한 쪽을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봤다. 기다란 이빨을 이쪽으로 향한 채 콧김을 뿜어 대고 있는 팽보어가 보였다.

“일단 가볍게 저놈부터 잡고 시작할까요?”

팀이 도끼를 흔들며 방패를 들었다.

“그러죠.”

성윤도 팀의 뒤쪽에 비스듬히 서서 자세를 잡았다. 에밀리도 언제든 둘을 지원할 수 있도록 지팡이를 들었다.

쾅!

지금까지 계속 해 온 포메이션대로 팀이 팽보어의 공격을 받았다. 커다란 소리가 났음에도 큰 덩치의 팀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예전, 팽보어의 돌진을 피하기에 급급했던 성윤으로서는 꽤 부러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잊지 않았다.

후웅!

강력한 메이스가 휘둘러진다. 예전의 약했던 창과는 그 삼엄함부터 확연히 달랐다.

콰직!

두 손으로 창대를 잡고 힘껏 내지르지 않으면 제대로 박히지 않던 팽보어의 가죽이 움푹 파였다.

손끝에서 무언가 우그러지고 박살나는 감촉이 짜르르 흘러들어왔다.

퀘에엑!

침과 함께 피를 토하며 팽보어가 옆으로 굴렀다. 꺽꺽대며 발을 마구 휘두르는 게 상당히 고통스러워 보였다.

콰직!

바로 팀의 도끼가 팽보어의 머리에 박혔다.

“뭐, 대충 이 정도려나.”

박혀 있던 도끼를 빼며 팀이 중얼거렸다. 그에게 팽보어는 지금까지 잡아 왔던 익숙한 몬스터일 뿐이다.

하지만 성윤은 달랐다. 그는 피를 흥건히 흘리며 눈을 감고 있는 팽보어를 내려다봤다. 녀석의 옆구리가 움푹 파여 있었다.

성윤의 눈이 자신이 들고 있는 메이스로 향했다. 자신의 공격이 팽보어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준 것이 확실했다.

‘예전에는 잘 뚫리지 않았었는데.’

이번 공격에 힘을 듬뿍 담긴 했지만, 예전 퍼플 랭크의 창으로 팽보어를 공격했을 때처럼 모든 힘을 쏟아부은 건 아니다. 하지만 이번 공격은 확실히 팽보어에게 통했다.

“팀 씨. 다음 팽보어의 공격은 제가 방어를 한 번 해보고 싶습니다.”

“성윤 씨가요?”

팀이 의문 섞인 투로 반문했다.

“네. 예전에는 이 녀석에게 고전했거든요. 적어도 혼자서 이 녀석의 공격을 받아낼 수 있는지 보고 싶습니다.”

팀이라는 지원군도 있고 에밀리라는 회복역도 있으니 시험 삼아 팽보어에게 도전하기에 좋은 기회였다.

“아, 그랬나요? 그럼 그러세요.”

팀이 흔쾌하게 수긍했다. 그리고 당장 성윤 몫의 팽보어를 찾으려는 듯 미궁을 헤집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어슬렁거리고 있는 팽보어를 다시 발견했다.

녀석이 눈치를 챈 기미가 보이자마자 성윤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미궁의 몬스터가 언제나 그러하듯 팽보어가 미친 듯이 일행에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성윤은 방패를 앞세우고 팽보어의 앞을 막았다.

쿵!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성윤의 발이 뒤로 밀리고 왼팔에 저릿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뿐, 팽보어의 날카로운 엄니는 성윤의 방패에 막혀 그 어떤 피해도 입히지 못했다.

콰직!

옆에서 팀이 도끼를 날렸다. 거력이 실린 도끼의 날이 단숨에 팽보어의 목을 반쯤 베어냈다.

질긴 외피를 무시하고 사정없이 팽보어의 목을 도륙낸 팀의 괴력이 무서웠다.

“어떤가요?”

팀의 질문에 성윤은 방패의 상태를 살폈다. 단단하게 덧대어진 철판에는 흠조차 나지 않고 멀쩡했다. 왼팔의 저릿함도 이미 사라진 후였다.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군요.”

충분히 공략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 성윤은 조금 기분 좋게 대답했다.

“다행입니다. 그럼 다시 미궁 공략을 계속 해볼까요?”

팀의 의견에 따라 성윤 파티는 다시 미궁 공략을 계속했다. 그리고 그날, 성윤은 미지의 계층인 5층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오늘의 일당인 월석을 나눈 후 성윤은 그 짧은 한 마디를 놔두고 숙소로 향했다. 그 뒤를 팀과 에밀리는 조용히 지켜봤다.

“음, 여전히 붙임성이 없는 사람이네.”

팀이 한탄했다. 하지만 그 뉘앙스는 남의 뒷담을 하는 게 아닌, 조금 더 친해지지 못해 아쉽다는 투에 더 가까웠다.

“너도 조금 더 말을 붙여 봐. 오늘도 성윤 씨랑 몇 마디 못했잖아.”

“…시끄러.”

안 그래도 마음에 두고 있던 일을 섬세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오빠라는 작자가 들쑤셔오자 에밀리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쓰고 있던 신관복에 달린 후드를 더 푹 눌러 썼다.

“얼굴부터 제대로 못 보겠단 말이야.”

아무래도 그녀의 내성적인 성격이 더욱 도진 모양이었다.

“그래도 한 마디를 못 하냐. 어프로치를 해 봐. 저런 사람에게 네 미묘한 태도는 안 먹혀.”

애초에 성윤이 에밀리에게 향하는 이성으로서의 감정은 제로다. 내기해도 좋다고 팀은 생각했다.

상대 쪽에서 반하면 모르겠지만 에밀리 쪽에서 반한 것이니 어떻게든 상대의 관심을 끌어야 할 텐데, 그녀는 그쪽으로는 영 젬병이었다.

‘뭐, 에밀리는 지금까지 고백을 받는 쪽이었으니.’

팀은 자신의 여동생을 살폈다.

풀이 죽은 얼굴로 땅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는 주관적인 입장으로는 어렸을 때부터 대부분의 것을 놓고 싸워 온, 한숨 나올 정도로 괘씸한 놈이었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정말로 굉장한 미인이었다.

그가 알기로 지금까지 에밀리에게 고백한 남자 놈만 한 트럭이다. 그러나 그녀가 먼저 반한 케이스는 없었다.

게다가 그 내성적인 성격과 대미궁을 목표로 하겠다는 압박감에 연애를 한 적도 없었다.

‘하필이면 반한 게 저 사람이냐.’

물론 그는 성윤을 나쁘게 보지 않는다. 자신들의 생명을 구해준 사람이고 그의 흔들림 없는 대미궁으로의 목표도 존경스럽다.

1세대의 특성상 그의 한계는 빨리 오겠지만 그게 그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이유는 되지 않는다. 만약 그와 에밀리가 사귄다면 확실하게 응원해 줄 생각도 있다.

‘하지만 에밀리에게 완전히 관심 없어 보이는 게 문제란 말이야.’

맹세코 저런 남자는 처음이었다. 그의 친구들도 그를 만나면 하는 얘기가 에밀리를 소개해달라는 소리다.

그 어떤 남자라도 일단 관심을 보이는 게 에밀리이건만 성윤은 철저하게 에밀리를 여자로 보지 않고 있었다.

혹시 이미 가정이 있는가 생각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가정이 있는 남자라도 에밀리를 저렇게까지 관심 없어 하진 않는다. 하물며 연결자란 공공연하게 중혼을 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그러면 그럴수록 관심이 있는 사람이 어필을 해야 하건만.’

아직도 성윤과 제대로 대화 한번 나누지 못하고 있는 여동생을 보며 팀은 가볍게 한숨 쉬었다.

***

성윤이 우주로 나간 뒤, 지민은 다시 성윤의 집에서 신혜를 돌보며 생활하다시피 했다. 누가 보면 엄마와 딸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오늘. 지민은 신혜를 데리고 백화점에 나와 있었다. 아이의 옷을 사기 위해서였다.

“맛있니?”

푸드 코트에서 스파게티를 맛있게 먹고 있는 아이를 보며 지민은 웃었다.

언제나 냉정한 표정만을 짓고 있는 그녀인지라 그 미소의 가치는 더욱 높았다. 물론 그 미소를 짓게 만드는 신혜는 그 가치를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응!”

입에 소스가 덕지덕지 묻은 채 신혜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포크를 스파게티에 찔러 넣어 가득 퍼올려 입에 가져다 넣었다.

지민도 자신의 음식을 먹으면서 간간이 손수건으로 아이의 입을 닦아냈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 지민이 아니니?”

익숙한 목소리였다. 지민은 조금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어머니?”

낯익은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나이가 조금 있는, 꽤 성숙한 외모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처녀적의 모습이 아직 사라지지 않아 무척 고왔다.

아니, 어떻게 보면 웬만한 20대보다도 더 아름다워 보일 정도였다. 짧게 잘린 단발이 활달해 보이는 그녀의 태도와 결합해 나이답지 않은 발랄함을 풍기고 있었다.

“역시 지민이었구나!”

그녀가 지민을 와락 껴안았다. 지민은 당황해서 대응하지 못했다.

“이봐! 여기 좀 봐! 지민이가 있어!”

그녀가 뒤를 보며 누군가를 불렀다. 뒤에서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와 함께 또 다른 여성이 등장했다.

“어머, 정말 지민이구나.”

휘날리는 긴 머리와 차분해 보이는 분위기가 확연히 대비되었지만 이번에 등장한 여성도 방금의 여성 못지않게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그녀가 눈꼬리를 살짝 휘게 만들며 상냥하게 웃었다.

그녀들은 지민의 친어머니가 아닌, 아버지의 다른 아내인 의모(義母)들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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