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의 미궁-45화 (45/354)

제45화

“그러고 보니 통성명도 하지 못했군요.”

에밀리의 부축을 받으며 걷던 팀이 앞에서 걷고 있던 성윤에게 말했다.

“제 이름은 팀 로스입니다. 그리고 이 녀석은 제 여동생인 에밀리 로스고요.”

대략적인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풀네임은 처음 들었다. 성윤은 고개만 살짝 돌려 그들에게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우성윤입니다.”

둘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것 같기에 성윤은 다시 자신의 이름을 한자 한자 띄어 말해줬다.

“어느 나라의 이름이죠?”

“한국입니다.”

아무래도 둘은 한국식 이름이 익숙하지 않은 듯 입으로 계속 웅얼거렸다.

“저희는 캐나다 사람입니다.”

“그렇군요.”

성윤이 국적을 밝혔기에 그들도 자신들의 국적을 밝혔다.

애초에 영어로 대화를 하고 있었기에 성윤은 둘이 영어권 국가의 사람일 거라고 대략적인 추측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별로 관심은 없었다.

“우 씨는 어째서 미궁에 들어오고 있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생각대로 쾌활하게 붙임성 있는 성격인 듯 팀은 격식없이 성윤에게 말을 붙였다.

“역시 돈 때문입니까?”

“그것도 있죠.”

성윤은 짧게 대답했다.

팀은 뭔가를 생각하는 듯 잠시 입을 다물었다.

커다란 미궁 안에 세 사람의 발소리만이 울려퍼졌다. 하지만 뭔가를 결심한 듯 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흰 말이죠. 대미궁을 노리고 있습니다.”

질문에 건성건성 대답하던 성윤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 또한 대미궁을 목표로 하는 만큼 대미궁을 노리고 있다는 말을 흘려들을 수는 없었다.

“고작해야 시작의 미궁에서 이런 꼴을 당한 주제에 그런 말을 한다는 게 조금 우습긴 합니다만.”

팀의 얼굴에 자조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일견 부끄러워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하지만 성윤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의 건성대며 영혼 없이 대답하던 것과는 다르게 확신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빅풋의 등장은 철저한 사고입니다. 모두 초보자나 다름없는 이 시작의 미궁에서 자기 수준보다 훨씬 더 높은 몬스터에게 당했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죠. 그 때문에 대미궁 공략은 힘들 거라고 자조하는 건 더더욱 불필요한 일이고요.”

무엇보다 팀의 얘기를 긍정한다면 그들과 똑같이 빅풋에게 죽을 뻔한데다가 고작해야 1세대 연결자면서 대미궁을 목표로 하고 있는 성윤은 훨씬 더 비웃음을 당해야 했다.

팀은 묘한 표정으로 성윤을 쳐다봤다.

대미궁 공략을 목표로 하는 것을 비웃지 않고 오히려 긍정한다. 그 점이 팀은 놀라웠다.

“대미궁에 도전하는 게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겁니까?”

“왜요?”

성윤은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그 모습에 오히려 팀의 말문이 막힐 정도였다.

“부, 분명 수익은 올라가겠지만 그만큼 위험한 곳이 아닙니까. 개인 미궁으로도 충분히 편히 생활할 만한 돈을 모을 수 있고요. 대부분의 연결자들도 대미궁에 가지 않습니다. 개인 미궁에서 월석을 채집할 뿐이죠. 오히려 대미궁에 가는 걸 바보짓으로 여기는 자들이 대부분입니다.”

초조한 듯하지만 조금 기뻐하는 기색이 묻어 있는 복잡한 음색으로 팀이 물었다.

성윤은 그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꺼내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대미궁이 목표라고 하던 사람이 이제 와서 대미궁에 대한 단점만 늘어놓다니.

하지만 굳이 그 이유를 파고 들 생각은 없었다. 사람마다 사정은 다르니까.

성윤 자신도 장편 드라마로 만들면 시청률 50%는 손쉽게 찍을 사정이 있는 판에 저 사람이라고 없겠는가.

그랬기에 그는 단 한 마디만을 던졌다.

“하지만 당신은 가려고 하지 않습니까.”

“네, 그렇긴 합니다.”

“그럼 다른 이들의 평판이 뭔 상관입니까?”

이미 한 번 밑바닥까지 떨어져본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든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몇 백 명이 주변에 달라붙어 그를 손가락질하고 비웃는다고 해도 자신에게 직접적인 피해만 없다면 완전히 무시할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대미궁은 명성, 호기심, 자만심 같은 허깨비 때문에 목숨을 내버리는 걸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팀이 잠시 우물거리다 말했다.

“꿈 때문일 수도 있고요.”

그때의 팀은 묘하게 자신이 없어 보였다.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전혀요. 아무리 허깨비라고 해도 자신에게 중요하다면 그만입니다. 남들이 어리석다고 욕을 한다면 자신 안에서 중요도가 떨어지기라도 합니까?”

성윤의 계약 중시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리 중요한 계약이라도 자기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성윤은 그게 어떤 사소한 계약이라도 목숨보다 소중했다. 그건 분명 팀이 말하는, 사람들이 어리석다고 한 목소리로 외칠 일이었다. 하지만 성윤은 괘념치 않았다.

성윤의 답을 들은 팀이 입을 다물었다. 표정을 보니 뭔가 열심히 고뇌를 하는 것 같았다.

얼마 안 있어 팀의 질문이 계속됐다.

“우 씨는 어떻습니까? 우 씨도 혹시 대미궁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동지를 만났다는 생각 때문일까. 팀의 얼굴이 확연하게 밝아졌다.

“그…, 우 씨가 대미궁을 목표로 하는 이유를 들어도 되겠습니까?”

“‘계약’과 ‘집착’ 때문입니다.”

선문답 같은 그 대답은 팀을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조금 더 자세히 들어도 될까요?”

“안 됩니다.”

성윤은 냉정하게 끊었다.

이 얘기는 자신의 일만이 아닌, 사장인 지민의 과거까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성윤의 대미궁행은 지민과의 ‘계약’ 때문이었고, 지민의 아버지와 그 아버지를 잡아먹은 대미궁에 대한 지민의 ‘집착’이 원인이다.

터부라고까지 할 건 없지만 남에게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어디까지나 지민의 개인사인 것이다.

“그, 그렇습니까.”

팀은 조금 실망한 것처럼 어깨를 움츠렸다.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제 이유도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소위 ‘어리석은 일’일 거라는 겁니다.”

대미궁에서 사라진 아버지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 모든 재산을 쏟아 붓고 있는, 그녀 자신도 인정하는 어리석은 일.

“하지만 그 때문에 다른 인간들이 얼마나 비웃는다고 해도 저는 그 ‘어리석은 일’을 끝없이 긍정할 겁니다.”

인생의 낭떠러지 끝까지 밀려 있었던 성윤을 구한 건 그 ‘어리석은 일’이다. 성윤에게 남들의 비웃음을 무시할 이유는 그걸로 충분했다.

성윤의 대답은 팀의 심부 깊숙이 파고들어 그의 감정을 건드렸다.

그 이후로 더 이상의 질문은 없었다.

성윤은 간간이 에밀리의 보조 마법을 받으면서 덤벼드는 몬스터들을 처리했다. 이때 얻은 몬스터의 월석도 로스 남매는 성윤에게 양보했다.

얼마 쯤 지났을까. 드디어 암스트롱의 빛이 미궁 안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그 빛을 보고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곧 시작의 미궁의 큰 아가리를 벗어나 셋은 완연히 암스트롱의 영역 안으로 들어섰다.

“그럼 여기까지군요.”

미궁을 벗어났으니 성윤의 호위도 더 이상 필요 없다. 성윤은 창을 역소환시키고 둘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만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팀이 손을 내밀었다. 성윤은 그의 손을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서로의 손에는 빅풋을 포함한 이름 모를 몬스터의 피가 가득했지만 둘은 개의치 않았다.

“저, 정말로 감사드려요.”

옆에 있던 에밀리도 황급히 감사 인사를 했다. 고개를 한 번 끄덕여 인사를 받은 후 성윤은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그럼…….”

그걸 쿨하다고 해야 할까, 냉정하다고 해야 할까. 그의 몸짓에는 함께 생사를 나눈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없었다. 팀과 에밀리가 당황할 만큼.

“저, 저기요!”

팀이 황급히 성윤을 불러 세웠다. 다행히 냉정하다고까지 생각될 정도로 등을 돌려버린 성윤은 의외로 순순히 그 부름에 몸을 세웠다.

“더 볼일이라도 있습니까?”

“혹시 시간 괜찮으십니까? 시간 있으면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은데요.”

이게 뭔 지나가는 여자를 헌팅하는 남자 같은 반응인지. 팀은 자신이 말하고도 조금 낯뜨거웠다. 하지만 말을 취소하진 않았다.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권했다.

“목숨을 구해주신 은혜가 있으니까요.”

“계약이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빅풋에게서 나온 월석과 디바이스도 제가 가졌죠. 그걸로 충분합니다.”

성윤은 딱 잘라 거절했다. 하지만 팀도 끈질겼다.

“그래도 목숨을 구원받은 것과 비교할 바는 아니죠. 게다가 애초에 저희가 빅풋을 끌고 와 민폐를 드린 게 원인 아닙니까. 그리고 드리고 싶은 말도 있습니다.”

성윤은 고민했다.

아무리 목숨을 구해줬다고 해도 어차피 계약 상황. 약속한 대가를 받았을 때 성윤은 그에 대해 완전히 자기완결을 했다. 그들이 주장하는 민폐조차도.

하지만 팀의 생각도 충분히 이해할 만했다. 목숨이라는 것은 그만큼 소중한 것이다.

그때 팀의 결정적인 한 마디가 날아들었다.

“어차피 우 씨나 저희나 며칠 동안은 미궁에 들어가지도 못하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니 그랬지.’

성윤은 원래부터 차고 있던 팔찌형 디바이스를 내려다봤다. 방패 젬이 박혀 있던 홈이 텅 비어 있었다.

게다가 새로 얻은 방패인 블루 젬도 당장은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 그렇다고 방패도 없이 미궁에 들어가긴 위험하다.

천상 블루 젬이 다시 빛을 회복할 때까지 며칠 동안 쉬어야 했다.

“좋습니다. 언제로 할까요?”

팀의 표정이 환해졌다.

“모레쯤은 어떨까요? 제 상처도 그때쯤이면 다 나을 테니까요.”

“그럼 그렇게 합시다.”

그 후 약속 장소와 시간을 잡은 성윤은 휘적휘적 걸어갔다. 오늘은 너무 피곤했다. 빨리 옷을 갈아입고 푹 쉬고 싶었다.

성윤이 떠나자 팀과 에밀리도 천천히 자신들의 숙소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왜 그런 얘길 했어?”

에밀리가 물었다. 무엇을 묻는 것인지 모를 두루뭉술한 질문이었지만 팀은 어렵지 않게 그 의도를 알 수 있었다.

“대미궁에 대한 것 말야?”

“응.”

아무리 팀이 호탕하다고는 하지만 처음 본 사람에게 대뜸 물어볼 말은 아니었다.

‘뭐, 생각 없이 말한 걸 수도 있긴 하지만.’

조금 실례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생각. 그러나 종종 그 호탕한 성격이 독이 되어 생각 없이 폭주할 때도 있는 팀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뚜렷한 이유가 있었다.

“저 사람 어떤 것 같아?”

“저 우성윤이란 사람 말야?”

에밀리는 천천히 지금까지의 상황을 되짚어 봤다.

그러고 보니 팀의 상처를 걱정하느라 저 사람에 대해 뚜렷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를 처음 봤을 때 가장 먼저 생겨난 감정은 죄책감이었다. 아무리 사고라도 그 사고에 휘말려버리게 한 건 자신들이니까.

다음으로 생겨난 감정은 원망. 분명 그가 잘못한 건 없었지만 사람의 마음이 어디 옳고 그른 것만으로 움직이던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자신들을 버리고 가려던 그 매정한 모습에 울분이 솟았다.

그리고 다음 감정은 기쁨.

대가를 받기는 했지만 자신들의 편에 서서 무기를 빼드는 모습을 볼 때 인생 중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환희를 느꼈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구하고 팀이 위기에 빠졌을 때 홀로 빅풋을 처리할 때는…….

‘어라?’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다.

“괘, 괜찮은 사람이지 않아?”

조금 더워진 얼굴을 손으로 부채질하며 그녀가 말했다.

이해하지 못할 처음 느끼는 감정이 그녀를 당황 속으로 몰아넣었다.

누가 봐도 부자연스러운 태도였지만 팀도 자신의 생각에 빠져 눈치채지 못했다.

“처음엔 자조 때문이었어. 대미궁을 공략하겠다고 큰 소리는 펑펑 쳤지만, 알잖아. 회사에서 우리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

에밀리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얼굴에 불쾌감이 가득 들어찼다.

“헛된 꿈을 가진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멍청이들로 취급받지.”

그녀가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고 내뱉었다. 팀은 피식 웃었다.

“그래, 그런 식으로 취급 받지. 열은 받지만 그래도 상관없었어. 대미궁 공략은 우리의 꿈이자…….”

팀의 눈이 조금 몽롱해졌다.

“어머니의 꿈이었으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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