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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미궁-41화 (41/354)

제41화

2미터는 가볍게 넘을 것 같은 덩치의 빅풋은 꼭 커다란 원숭이 같았다.

얼굴을 제외한 모든 부분을 검은색의 털이 뒤덮고 있었고 팔은 길어 무릎 아래까지 내려왔다.

인간처럼 두 다리로 지면을 걸으며 유일하게 털로 덮이지 않은 얼굴은 쭈글쭈글해 마치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은 노인을 연상시켰다.

하지만 웬만한 남성의 허리통만한 팔과 다리가 그 녀석이 연약한 노인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크륵!

녀석의 말라비틀어진 것 같은 입술이 움직였다.

‘비웃었어.’

얼굴 가득한 주름 안에서도 또렷이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성윤은 화가 나지 않았다.

녀석이 정보대로의 녀석이라면 자신이 당해낼 몬스터가 아니니까. 오히려 목이 싸늘해지며 공포가 밀려들었다.

“티, 팀! 어쩌지!”

여자가 옆에 있는 남자를 보며 말했다.

그녀의 공포가 떨리는 목소리에 아주 잘 묻어났다. 하지만 팀이라고 불린 남자도 뾰족한 수는 없어 보였다.

그들을 보는 성윤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딱 봐도 그들이 저 무지막지한 놈을 끌고 온 게 확실했으니까.

게다가 대화를 들어보니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 정도로 능력이 있는 자들도 아니었다.

‘능력이 있다면 여기까지 끌고 오지도 않았겠지.’

성윤은 눈을 굴려 탈출로를 찾아봤다. 하지만 역시 보이지 않았다. 빅풋이 막고 있는 통로만이 유일한 길이었다.

‘빌어먹을!’

성윤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빅풋을 끌고 온 남녀도 뒤로 물러서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빅풋과의 거리는 멀어지지 않았다. 빅풋이 성큼성큼 그들에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키가 큰 만큼 별로 빠르게 걷는 것도 아닌데 그 속도는 제법 빨랐다.

팀이란 사내가 뒤쪽을 힐끔 바라 봤다. 그의 눈이 여자를 거쳤다가 성윤에게 멎었다. 그의 혼란한 감정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으득!

그가 이를 악물었다.

“내가 막고 있을 테니까 도망쳐, 에밀리!”

그가 방패를 전면에 내세웠다.

‘아, 막아주는 건가?’

그렇다면 다행이다. 다행히 몬스터를 끌고 온 대가는 본인들이 치르려고 하는 것 같았다.

사내가 자신을 돌아볼 때, 혹시 몬스터를 자신에게 붙이고 도망치면 어쩌나 하고 걱정까지 했던 터라 성윤에게 그의 행동은 무척 반가웠다.

“하지만, 팀!”

“얼른!”

연인일까? 친구일까? 아니면 그냥 동료? 남매인지도 모른다. 하나 확실한 건 둘 사이의 인연이 결코 엷지 않을 거라는 것이었다.

분명 안타깝고 가여운 상황인 건 확실했다. 느끼는 바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성윤은 그들을 도와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팽보어조차 간신히 잡을 수 있는 놈이 뭔 놈의 빅풋을.’

그건 용기가 아닌 오만이다. 골드 젬을 억지로 발동시킨다면 괜찮을지도 모르지만 골드 젬을 그렇게 쉽게 사용할 순 없었다.

무엇보다 새빨간 타인을 위해 목숨을 걸 생각이 없다. 전친구와 전아내의 배신으로 인해 성윤은 놀라울 정도로 타인에게 냉혹해져 있었다.

“거기 뒤에 있는 분!”

팀이 크게 말했다. 아마도 이건 성윤 자신을 부른 것이리라. 성윤의 눈이 자연스럽게 사내를 바라봤다.

“폐를 끼친 건 죄송하지만 제발 제 여동생을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여동생이었군.’

성윤은 가만히 상황을 살폈다.

‘한 명 정도는 괜찮나?’

만약 저 남자가 빅풋을 성공적으로 잡아 놓을 수만 있다면 여자 한 명 정도는 충분히 데리고 도망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미궁에 들어올 수 있다면 일단 연결자라는 뜻이니 여자라도 체력이나 뜀박질도 평범한 사람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여동생을 데리고 도망친다면 사내가 죽을 각오로 빅풋을 막아줄 것이라는 계산도 있었다. 아니, 그 계산 쪽이 오히려 더 진실한 감정이었다.

“만약 당신이 빅풋을 제대로 막지 못했을 때 버려도 된다는 조건이라면요.”

하지만 만약의 사태에도 대비해야 했다. 사내가 빅풋을 제대로 막지 못한다면 당연히 빅풋의 목표는 둘이 될 것이다. 그때에도 여자를 챙길 수는 없었다.

“좋습니다!”

의외로 사내는 시원시원하게 성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아니면 그만큼 성윤을 끌어들인 것에 대한 죄책감을 갖고 있는지도 몰랐다.

“팀! 난 싫어!”

“억지 부리지 마! 이것밖에 방법이 없단 말야!”

“엄마, 아빠를 무슨 낯으로 보라고! 나도 싸울 거야! 나도 전투 장비쯤은 있어!”

“한 번도 안 써봤잖아! 뒤에서 회복만 하던 녀석이 무슨 놈의 전투야!”

남매간에 싸움이 벌어졌다. 서로의 목숨을 걱정하는 애틋한 싸움이었지만 그 애틋한 싸움 때문에 목숨이 날아갈지도 모르는 성윤에게는 짜증나는 다툼일 뿐이었다.

“빌어먹을! 이런 때는 오빠 말 좀 들어!”

팀이 고함쳤다. 처절하다고까지 느껴질 정도의 외침. 하지만 에밀리는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로 고개를 저었다.

“싫어!”

‘글렀군, 이건.’

두 남매의 두터운 사랑이든 뭐든 동생이 오빠를 두고 도망갈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성윤은 두 사람에게서 슬금슬금 거리를 벌렸다. 안타깝다는 마음은 들지만 두 사람의 남매애에 말려들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휙!

한창 팀과 싸움을 하던 에밀리가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은 성윤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성윤이 움찔 놀랐다.

‘설마 날 희생시킨다거나 그런 생각은 아니겠지?’

하지만 다행히도 에밀리에게서 튀어나온 말은 성윤의 예상과는 다른 말이었다.

“저기, 죄송하지만 같이 싸워주실 수는 없나요?”

에밀리는 성윤까지 끌어들여서 빅풋을 퇴치하길 원하는 것 같았다.

성윤은 빅풋을 힐끔 쳐다봤다. 인간보다 훨씬 더 큰 거구가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리야.’

그의 하잘 것 없는 젬으로 저 녀석의 외피를 뚫을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러웠다. 무딘 창날은 튕겨나가고 허약한 방패는 부서져서 녀석의 주먹에 머리가 터지는 미래가 뚜렷이 상상됐다.

하지만 딱 잘라 거절할 수 없었다. 따지자면 저건 남매와 성윤, 두 타인 집단 간의 동맹 제의와 다를 바 없다. 여기서 성윤이 거절했다가 두 사람이 성윤을 미끼로 남겨두고 도망칠 수도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물론 적당히 거짓말을 하고 기회가 왔을 때 도망친다는 선택지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빌어먹을! 정말로 귀찮은 성격이 돼버렸어!’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목숨이 없어진다고 해도 그 개새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사탕발린 말로 자신을 믿으라 해놓고 약속을 사정없이 깨뜨린 그 개새끼 같은 놈만큼은.

“저기……!”

에밀리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빅풋이 방패를 내세운 팀의 바로 앞까지 당도해 있었다. 그 무쇠 같은 주먹을 들어올리며 언제라도 공격을 할 태세였다.

“죄송하지만 전 도움이 안 될 겁니다. 제가 지금 사용할 수 있는 젬은 전부 7등급인 퍼플 젬뿐입니다.”

밑바닥에서도 밑바닥. 시작의 미궁의 4층조차 뚫을 수 없는 수준이다.

“그, 골드 젬이 보이는데요.”

에밀리의 시선이 성윤의 팔찌에 꽂혀 있었다. 성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쉽게도 그녀의 눈치는 꽤 빠른 것 같았다.

“지금 제가 다룰 수 있는 젬이 아닙니다.”

“어, 억지로 발동시키면…….”

‘처음 본 당신들 때문에 골드 젬을 소비하란 소립니까?’

이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성윤은 말을 하지 않았다. 이것 또한 저들의 기분을 나쁘게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성윤의 기분 나쁜 침묵은 그의 의도를 분명하게 전했다.

콰아앙!

“크윽!”

거센 폭음에 에밀리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빅풋의 무쇠 같은 주먹을 팀이 간신히 막고 있었다. 그의 방패가 삐걱삐걱대며 비명을 지르는 게 무척 불안해 보이는 상황이었다.

에밀리가 다시 성윤을 쳐다봤다. 성윤은 전투 지점으로부터 보다 더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골드 젬을 발동시키기는커녕 전투에 끼어들 의지조차 없어보였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반발감이 생겼다.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인데 한낱 물건이 중요하단 말인가.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쥬얼 랭크의 젬은 어찌 보면 인간의 목숨보다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퍼플 젬밖에 없다고 했지.’

그녀의 머리가 빠른 속도로 돌아갔다.

퍼플 젬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면 저급 중에서도 저급의 연결자다.

미궁 공략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거나, 아니면 재능이 아예 밑바닥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 말은 그의 전력은 얼마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팀을 버리고 갈 순 없었다. 그게 연약하기 짝이 없는 지푸라기라도 물에 빠진 이상 잡아야 한다.

“젬을 드릴게요!”

에밀리가 외쳤다.

“도와드리면 젬을 드릴게요!”

젬. 그 하나의 단어가 성윤의 발목을 붙잡았다.

성윤이 구미가 당기는 모습을 보이자 그녀가 얼른 말을 이었다.

“브, 블루 젬! 퍼플 젬보다 두 단계는 더 높은 5등급의 젬이에요!”

블루 젬. 레인보우 랭크 중에서 다섯 번째 서열에 있는 젬이다. 게다가 개인 미궁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젬이기도 하다.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안 그래도 상위의 젬이 나오지 않아 애를 먹고 있지 않던가.

성윤은 빅풋을 다시 한번 쳐다봤다.

팀이라 불린 자를 몰아붙이는 그 위용은 확실히 매서웠다. 하지만 팀은 의외로 잘 버티고 있었다. 성윤은 팀의 디바이스에 박혀 있는 젬이 환한 빛을 내고 있는 걸 발견했다.

‘폭주시켰나.’

쓸 수 없는 젬을 억지로 발동시킨 것과는 다르다. 젬을 폭주시키면 일정 시간 동안 랭크의 한계를 뛰어 넘은 힘을 낼 수 있다.

하지만 그 반동으로 일정 시간 동안 젬은 힘을 잃는다. 그리고 만약 너무 혹사시킨다면 젬은 붕괴된다.

말 그대로 그는 젬을 잃을 각오를 하고 빅풋을 막고 있는 것이었다.

‘승산은 있나?’

만약 자신까지 합류했을 때 얼마나 저 몬스터에게 승리를 장담할 수 있을까.

빅풋이라는 몬스터는 확실히 시작의 미궁에는 없는 상위의 몬스터였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따지면 그리 강력한 몬스터는 아니다. 그리고 팀과 에밀리의 무장은 충실했다.

“말했지만 제 수준은 낮습니다. 여기서 골드 젬을 사용할 생각도 없고요. 그리고 위급해진다면 당장 빠지겠습니다. 그래도 됩니까?”

“무, 물론이에요!”

에밀리가 반색했다. 여전히 매정한 말이 섞여 있었지만 어떻게든 도움을 얻어낸 것이다. 팀과 자신만 있을 때보다 분명 승률은 더 올라갈 것이다.

성윤은 창을 꼭 쥐고 전투 지점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괴성을 지르며 팀의 방패를 연신 후려치고 있는 빅풋을 보며 성윤은 마음을 다잡았다.

‘이 자들을 믿는 건 아니지만.’

처음 본 자들을 어떻게 믿겠는가. 이 전투가 무사히 끝난 뒤 정말로 블루 젬을 줄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한 것도 있었다. 그는 정말로 고위의 젬을 갖고 싶었고, 적어도 저 자들은 자신에게 몬스터를 떠넘긴다는 선택지가 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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