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화
평소 같지 않은 그의 강한 어조에는 공감의 빛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저 그런 위로의 말이 아니다. 그 자신이 겪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진심 어린 말이었다.
“고마워요. 그 말을 들으니 조금 기분이 나아지네요.”
아무리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진짜 그 일을 겪어보지 않는다면 완벽하게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습기 그지없는 일이지만 그녀와 비슷한 일을 겪었던 성윤의 공감은 지금까지 들어온 그 어떤 발언보다 더 큰 힘이 됐다.
하지만 계속 이 일을 붙들고 있을 수도 없었다.
“신세한탄은 이 정도로 할까요. 다시 우리 본연의 일로 돌아가죠.”
“괜찮겠습니까?”
“괜찮아요. 어차피 이제 저 여자가 할 수 있는 건 쳐들어와서 듣기 싫은 목소리로 꽥꽥 질러대는 것밖에 없어요. 뭣 하면 접근금지 명령을 다시 신청하면 돼요. 뭐, 그 여자가 그걸로 물러날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요.”
실제로 아정은 지민이 어렸을 때 받은 접근금지 명령을 여러 번 어긴 전적이 있었다. 그만큼 독한 여자였다.
“귀찮으실 텐데요.”
“그렇다고 죽일 수는 없잖아요?”
그건 어머니나 쓰레기 운운 이전의 문제였다.
“이 얘기는 이제 끝내죠. 일 얘기로 돌아가요.”
지금까지의 조금은 감정적이었던 지민의 모습이 꿈이라도 되는 양 그녀의 얼굴이 다시 냉막하게 돌아갔다.
성윤의 얼굴도 마찬가지로 원래의 무뚝뚝함을 되찾았다. 만약 제삼자가 이 장면을 봤다면 정말 기묘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가장 먼저 드리고 싶은 건 이거예요.”
지민은 책상 서랍에서 흰색의 봉투 하나를 꺼냈다. 봉투는 두툼하게 부풀어져 있었다.
또 무슨 서류인가 하고 받은 성윤은 별 망설임 없이 봉투를 열어봤다. 그리고 눈을 크게 치켜떴다.
“이건…….”
성윤이 봉투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무언가가 잡혔다. 성윤은 망설임 없이 그걸 끄집어냈다.
그건 돈이었다.
빳빳한 오만원권이 그의 손에서 팔락거렸다.
“아무래도 첫 수입은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는 게 좋겠다 싶어서요.”
성윤은 손가락 하나를 뻗어 돈을 넘겨봤다. 촤르륵 넘어가는 지폐의 움직임은 언제 봐도 황홀한 것이었다.
“400이예요.”
‘많군.’
그가 일을 한 기간은 고작해야 2주. 그것도 초보자로서 감을 잡는다고 슬금슬금 한 일이다. 한데 그 결과가 이런 두툼한 돈 다발이라니.
노가다를 한 달 동안 뛴다 해도 이 정도의 돈을 버는 건 특수한 기술이 없다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런 거금을 고작 2주 만에 번 것이다.
하지만 지민은 생각이 다른 것 같았다.
“조금 적지만 어쩔 수 없죠. 성윤 씨는 아직 초보고 게다가 채취 기간도 그렇게 길지 않았으니.”
“이게 적은 겁니까?”
“적다 못 해 빈약한 수준이에요. 본격적인 연결자들의 수입에 비하면요.”
성윤은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이 없었다. 연결자들이 많이 버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거금을 들고 있으니 새삼 실감이 났다.
“그걸로 신혜에게 맛있는 거라도 사주세요. 달에서 지낼 때도 종종 사용하시고요.”
지민의 말대로 성윤의 머릿속에는 당장 이 돈의 사용처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신혜에게 맛있는 음식을 먹인다거나 신혜를 재미있는 곳에 데리고 가준다거나 하는, 온통 신혜에 관련된 것들뿐이었다.
하지만 곧 성윤은 자신의 빚에 대해 생각이 미쳤다.
“일단 절반으로 빚을 갚도록 하겠습니다.”
성윤이 절반인 200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민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제가 예전에 말했죠? 제 궁극적인 목적은 성윤 씨가 대미궁에 들어가 아버지의 흔적을 찾는 것이라고요. 지금 당장 갚을 필요는 없어요. 그걸로 달에서도 조금이라도 좋은 생활을 하세요. 그래야 당신의 효율도 올라갈 테니까요.”
성윤은 고민했다. 한 푼이라도 먼저 빚을 갚고 싶었다. 이제 빚이라면 지긋지긋했다. 어서 이 빌어먹을 굴레를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세고 있던 돈을 다시 봉투에 집어넣었다. 그의 은인인 지민의 결정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그럼 빚을 갚는 건 나중으로 미루겠습니다.”
“네, 그래주세요.”
성윤은 돈 봉투를 품속에 소중히 넣었다. 오늘은 이걸로 신혜에게 근사한 저녁을 사줄 생각이었다. 절로 마음이 들떴다.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서, 성윤 씨의 디바이스와 젬이 하나씩 늘었더군요.”
“예, 그렇습니다.”
“아주 좋아요.”
설마 단 2주 만에 디바이스와 젬을 늘릴 줄은 몰랐다.
“어떻게 늘렸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디바이스는 몬스터를 잡자 나왔습니다. 그리고 젬은 죽은 자의 물품을 가져다 준 후에 보답으로 얻은 거고요.”
“…….”
지민은 잠시 말없이 성윤을 쳐다봤다.
“시체를 보셨나요?”
“네.”
성윤의 그 짧은 대답 한 마디에는 어떤 감정이 스며들어 있을까. 그걸 추측하기엔 성윤의 표정이 너무 태연했다.
“괜찮나요?”
“괜찮습니다.”
지민은 더 이상 묻지 못했다. 그가 괜찮지 않다면 그녀가 어떻게 할 것인가.
어차피 그녀 자신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성윤을 사지로 모는 사람일 뿐이었다.
“……그래요. 능력 확인은 했나요?”
“네.”
“어떤 능력이죠?”
“근력을 두 배로 증폭시키는 젬이었습니다.”
“심플한 능력이네요. 하지만 그게 좋을 때도 있죠. 나쁘지 않은 젬이에요.”
육체능력은 목숨을 걸고 몬스터와 싸워야 하는 연결자의 베이스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그 베이스 자체를 올리는 젬은 분명 좋은 젬이다.
“다른 젬들과 함께 발동시켜봤나요?”
“네. 전부 같이 발동하더군요.”
이것 또한 좋았다. 이것으로 성윤은 총 네 개의 퍼플 젬을 동시발동 시킬 수 있다는 게 증명됐다.
퍼플 젬을 고작 세 개 발동시키는 것만으로 성윤의 마력이 한계에 다다른다는 최악의 가능성이 회피된 것이다.
“다행이네요. 이제 조금 더 수월하게 미궁 공략을 할 수 있겠어요.”
성윤이 한 걸음 더 앞으로 내딛을 수 있게 된 걸 지민은 축하해줬다.
“그럼 이제 푹 쉬세요. 아마 다음에 달에 올라가는 건 2주 쯤 뒤가 될 테니까요.”
“그렇게나 뒤에 말입니까? 너무 늦는 것 아닌가요?”
벌써 1주일가량을 쉬었다. 여기서 2주를 쉰다면 거진 한 달을 쉬게 되는 것이다.
“지금은 마나스트림 기간이라서 어차피 올라가봐야 성윤 씨의 능력으로는 미궁에 들어갈 수 없어요.”
“마나 스트림이라. 그럼 어쩔 수 없군요.”
마나 스트림. 그건 미궁에서 일어나는 특이 현상이다.
미궁은 원래 마력이 들끓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자기기는커녕 평범한 인간조차도 미궁에 출입할 수 없다.
하지만 평범한 인간은커녕 수준이 낮은 연결자조차 미궁에 입장하지 못하는 시기가 있다. 그게 바로 마나스트림이 몰아닥치는 시기이다.
일정한 주기로 몰아치는 이 마력의 폭풍은 엄청난 기세로 미궁 구석구석을 헤집는다.
어떤 학자들은 이 마나스트림 자체가 미궁을 만드는 현상이라고 주장할 정도로 그 기세는 거세다고 한다.
그리고 그 마나 스트림의 노도 같은 위력은 저급 연결자들의, 달에 가면 자동으로 생기는 보호막마저 뚫어버리고 육체를 갈가리 찢어버린다.
그 안에서 움직일 수 있는 건 몬스터와 일정 수준 이상의 연결자뿐이었다.
“시작의 미궁에 몰아치는 마나 스트림의 기간은 대략 일주일 정도예요.”
마나 스트림의 주기와 기간은 각각의 미궁마다 다르다. 시작의 미궁의 주기는 대략 3개월마다 한 번씩. 그리고 기간은 일주일 정도였다.
그리고 그동안 시작의 미궁은 거의 봉쇄 상태나 다름없었다. 시작의 미궁을 이용하는 연결자들은 대부분이 마나 스트림을 견딜 수 없는 저급 능력자였으니까.
이렇게 마나 스트림은 저급 연결자들을 방해하는, 쓸모라고는 없는 현상처럼 보였다. 하지만 마나 스트림은 연결자들에게 무척 중요한 현상이었다.
마나스트림이 바로 몬스터를 미궁에 보충하기 때문이다.
마나 스트림이 몬스터를 자연 발생시키는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옮겨오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마나 스트림은 확실히 미궁에 몬스터를 증가시켰다.
“마나 스트림 때문에 몬스터가 잔뜩 늘어났을 테니 그 정리에도 시간이 걸릴 테죠.”
시작의 미궁이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우연하고도 적당하게 초보 연결자들을 키울 만한 미궁이 떡하니 존재할 리가 없었다.
시작의 미궁도 원래 여타의 미궁과 마찬가지의 평범한 미궁이다. 순수 미궁의 수준으로만 따지면 적어도 중하급 정도.
시작의 미궁이 초보 연결자들을 위한 미궁이 된 것은, 마나 스트림이 지나간 후 수준 높은 연결자들이 고용되어 초보 연결자들이 잡을 만한 몬스터만을 남겨 놓고 나머지 몬스터들을 싸그리 쓸어버렸기에 그리 된 것이다.
“고용된 고위 연결자들이 초보 연결자들에게는 위험한 몬스터들을 대충 잡고, 몬스터들끼리 세력 싸움을 해서 마력이 짙은 하층에는 그나마 강한 놈들이, 마력이 적은 상층에는 약한 놈들이 포진할 때까지 대략 1주 정도 걸려요. 하지만 아직 성윤 씨는 많은 몬스터와 싸워 본 경험이 없죠. 그러니 안전을 위해서 한 주 정도 더 기다렸다가 올라가도록 하세요.”
그렇게 해서 성윤에게는 2주라는 시간이 생겼다.
“올라가는 날짜는, 어디 보자.”
지민은 사무실 한쪽에 붙어 있는 커다란 달력을 쳐다 봤다.
“다다음주 월요일이 좋겠네요. 괜찮죠?”
“네, 괜찮습니다.”
성윤도 달력을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그때 만나도록 하죠.”
성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벼운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나가려 몸을 돌렸다. 하지만 문득 뭔가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신혜가 놀이공원에 가자고 해서 시간이 난 김에 갈 생각입니다. 사장님과도 같이 가고 싶어 하는 눈치던데, 어떻습니까?”
다시 업무로 복귀하려던 지민의 행동이 멈췄다. 눈이 또르륵또르륵 움직이는 걸 보니 내적 갈등이 상당한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깊이 한숨을 쉬고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번엔 거절할게요. 신혜에게도 미안하다고 전해주세요.”
아직 성윤의 귀환과 함께 생긴 일이 끝나지 않았다. 정말로 아쉽지만 이번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십니까. 알겠습니다. 신혜에게는 그렇게 전하죠.”
성윤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번엔 지민이 성윤을 잡았다.
“하나 괜찮을까요, 성윤 씨?”
“네, 괜찮습니다.”
성윤이 별 불만 없이 몸을 돌렸다.
하지만 지민의 표정을 보고 움찔했다. 지민의 얼굴이 평소보다 더 냉막해져 있었다. 냉기가 등허리를 찔렀다.
“그러고 보니 신혜에게 제 소개를 할 때 저를 아줌마라고 불렀다더군요?”
그녀는 신혜 얘기가 나오자 자연스럽게 생각난 화제를 입에 올렸다.
이때의 지민의 눈은 분명 평소보다 100도는 더 싸늘했다.
“일단 신혜에게 말은 해 뒀어요. ‘언니’라고 부르라고요. 하지만 혹시 또 모를 일이니 성윤 씨가 다시 말해주시겠어요?”
목소리는 나긋나긋하게 하나 육중한 기세를 실어 두들기듯 그녀는 말을 내뱉었다.
“아줌마가 아니라 ‘언니’라고요.”
“……꼭 말하겠습니다.”
조금 공포를 느끼며 성윤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