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화
‘젠장, 여전히 아프군.’
성윤은 니들헤지호그의 가시가 꽂혔던 팔을 어루만지며 인상을 찌푸렸다.
매드독의 이빨이나 슬래쉬캣의 발톱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위력이 떨어졌기에 받아냈을 뿐, 니들헤지호그의 가시도 엄연한 몬스터의 공격이다.
그냥 피부가 까진 것 같은 별 거 아닌 부상일 리 없었다.
실제로 니들헤지호그의 가시는 약 5cm가량 피부를 파고들었었다.
‘뼈에 맞지 않은 게 다행이로군.’
살이 화끈거릴 뿐, 뼈가 시큰거리진 않으므로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근거는 없었다. 정밀 검사 같은 걸 한 게 아닌 것이다.
그래도 연결자의 상처가 굉장히 빨리 아문다는 건 사실 같았다. 상처가 확연하게 줄어 있었다.
고통이 덜해진 것도 기분 탓이 아닐 것이다. 이 정도 상태라면 내일은 문제없이 행동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이것도 기분이 그런 것일 뿐, 근거는 없었다.
성윤은 닭장 같은 방의 딱딱한 바닥에 누워 옆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뭘 찾는 듯 바닥을 더듬었다.
곧 그의 손에 딱딱한 무언가가 잡혔다. 성윤은 망설임 없이 그걸 잡아채 눈앞으로 들어 올렸다.
‘그나마 이걸 건진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 악몽 같은 협공을 간신히 제압한 성윤에게 주어진 보상은 녀석들이 남긴 세 개의 월석만이 아니었다.
성윤은 천천히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을 손으로 돌려가며 관찰했다.
그건 목걸이였다. 얇은 체인으로 이루어진 그 목걸이에는 위아래로 길쭉한 프레임이 달려 있었다. 하지만 목걸이로서의 가치는 얼마 없을 것 같았다.
프레임을 장식해서 목걸이를 더욱 빛낼 보석이 달려 있어야 할 자리에 구멍만 뻥 뚫려 있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오망성 모양의 홈 두 개가 일렬로 나란히 새겨져 있었다.
그건 디바이스였다. 협공을 한 대가였는지는 몰라도 슬래쉬캣은 성윤에게 그나마 쓸 만한 물건을 남기고 세상을 떴다.
‘오망성 모양이라. 분명 육체능력을 올리는 젬이라고 했던가?’
성윤은 조금 입맛을 다셨다. 물론 육체능력 젬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죽을 고비를 넘긴 성윤으로서는 더 크고 튼튼한 방패나 토시나 각반 같은 갑옷 종류를 더 갖고 싶었다.
하지만 방패를 소환하는 젬은 십자형태고 갑옷을 소환하는 젬은 엑스 형태다. 목걸이에 새겨져 있는 오망성 형태가 아니었다.
‘게다가 두 개 모두 퍼플 랭크.’
프레임에 있는 홈 모두 무지개의 마지막 색깔인 보라색을 띠고 있었다.
그 말은 곧 두 개의 홈은 젬을 일회용으로 쓰는 강제발동이 아닌 이상 그가 가지고 있는 팔찌형 디바이스와 같이 가장 밑바닥 등급인 퍼플 젬밖에 장착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성윤은 마음을 다스렸다.
‘서두르지 말자.’
첫 술부터 배부를 수가 있겠는가. 아무래도 목숨이 위험해지니 몸을 지키는 것에 대해서 조금 다급해진 모양이다.
적어도 이건 월석 이외의 물건으로서는 자신의 첫 수확이었다. 여기에 맞는 젬을 찾아낸다면 자신도 훨씬 더 강해질 수 있다.
‘대미궁까지 한 걸음 더 나아갔다고 생각하자.’
아주 미세한 한 걸음이었지만 그래도 한 걸음을 또다시 뗀 게 어딘가. 가만히 정체되어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럼 다음 임무는 이것에 맞는 젬을 찾아내는 건가?’
디바이스를 얻는 데만 해도 그 고생을 했다. 아마 젬을 얻는 것도 순탄치는 않을 것이라 예상됐다.
성윤은 디바이스를 옆에다 두고 다치지 않은 팔을 베개 삼아 누웠다.
그때였다.
띠디디디! 띠디디디!
성윤의 옆에서 벨소리가 들렸다. 성윤은 누워있던 그대로 고개만 돌렸다.
커다란 관이나 다를 바 없는 좁은 방 벽면에 붙어 있는 전화기에서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그건 지원소와 연결되어 있는 내선 전화였다. 성윤은 전화기를 들어 귀에 갖다 댔다.
“네.”
- 쉬시는데 죄송합니다, 우성윤 씨.
낯익은 목소리였다. 분명 매일 물과 영양제를 보급 받을 때 듣는 접수원의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 지금 우성윤 씨를 뵙고 싶다는 분이 계셔서요.
성윤은 고개를 갸웃했다.
달에는 그가 친분을 가진 사람이 없다. 아니, 지구까지 친분관계를 확장해 봐도 이미 사업이 망하며 대부분의 관계가 작살난 그에게 찾아올 사람이란 생각나지 않았다.
혹시 무슨 일이 생겨 사장이 다시 달까지 온 것일까. 궁금증과 경계심을 품으며 성윤은 상대의 정체를 물었다.
“누구죠?”
- 첼시 스트로브라고 하십니다. 한지민 씨의 친구분이시라는데요.
‘그 사람인가?’
그제야 성윤은 자신에게도 달에 안면이 있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왜?’
그녀는 성윤의 사장인 지민을 통해 한 번 만나봤을 뿐인 사람이었다.
말 그대로 한 다리 건너 아는 사이. 게다가 만났을 때도 별로 친해진 기억은 없었다. 데면데면하게 얘기했을 뿐이다.
거기에 상대는 성윤이 꺼리는 미녀. 그것도 그의 전 와이프 수준 정도가 아닌, 지민, 선아 정도의, 눈이 돌아갈 만한 클래스다. 당연히 만나기 꺼려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만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일단은 사장님의 지인이니.’
성윤은 탐탁지 않아 하면서도 억지로 그 감정을 내리 눌렀다.
“알겠습니다. 지금 그쪽으로 가겠다고 알려주세요.”
- 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성윤도 전화를 놓고 방의 문을 열었다.
그의 움직임이 묘하게 무거워 보인 건 착각이 아닐 것이다.
***
“또 뵙네요.”
며칠 만에 만난 첼시 스트로브라는 사람은 여전히 쾌활하고 유쾌해보였다.
“네, 그렇군요.”
그리고 그녀를 만나는 성윤은 여전히 음침하고 어두워보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성윤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예전에도 생각했지만 참 그녀가 경험한 남자들과는 다른 남자라고 첼시는 생각했다. 지금도 성윤은 그녀를 별로 반기지 않는 티를 팍팍 냈다.
‘끙. 조금만 참자.’
첼시도 기분이 조금 상했다. 성윤이 다른 남자와 다르게 집적거리지 않는 것만으로 호감이 솟긴 했지만 그건 아주 조금일 뿐이다.
이렇게 자신을 대놓고 꺼리는 사람을 친근하게 여길 만한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하지만 성윤의 사람 됨됨이를 알아보기 위해 첼시는 꾹 참았다.
‘만약 예전 그 새끼들처럼 지민을 이용하려 하는 놈이라면 가만히 있진 않을 거야.’
그때는 자신의 사적인 감정도 조금 실어서 사타구니를 걷어차버릴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잘 지내고 있는지 보려고요. 지민한테서 당신을 잘 챙겨주라고 부탁받았거든요.”
“그렇습니까?”
성윤의 반응은 그게 다였다. 눈을 멀뚱멀뚱 뜬 채 자신을 바라보는 성윤에게 첼시는 조금 더 짜증이 났다.
‘집적대는 남자도 싫지만 이렇게 협조성 없는 남자도 최악이야!’
오늘 만나는 인간들은 어떻게 이렇게 극단적일 수 있을까. 성윤이란 인간은 방금 전 만났던 빌어먹을 남자와는 완전히 반대로 그녀의 성질을 긁고 있었다.
하지만 첼시는 이번에도 참았다.
‘지민. 다음에 만날 때는 스테이크 하나로 안 끝날 거야.’
단, 이 웃기지도 않는 짓의 원인인 자신의 친구에게 빚을 잔뜩 달아두고서.
게다가 이 정도까지 오니 오기도 생겼다. 첼시 자신도 참 쓸데없는 오기란 걸 이해했지만 그녀의 성격이 참지 못하게 했다.
‘혹시라도 나를 이런 식으로 학을 떼게 해 떨어뜨려 놓고 지민을 자빠뜨리려 하는 걸지도 모르니까.’
그럴 듯한 핑계를 대고 첼시는 성윤의 앞에서 꿋꿋하게 버텼다.
“잘 지내고 있나요?”
“그럭저럭은 적응하고 있습니다.”
성윤은 팔에 부상을 입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깊은 상처도 아니었고 이제 두 번째 얼굴 본 사람한테 할 만한 말도 아니었다. 아무리 그가 사장의 지인이라도.
“그거 다행이네요. 혹시 시간 있으면 얘기라도 할까요?”
솔직히 말하자면 성윤은 방에서 푹 쉬고 싶었다. 상처도 입은 데다가 오늘 한 경험이 너무 스펙타클하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까 첼시가 말했던, 지민이 잘 챙겨 주라고 했다는 말이 걸렸다.
즉, 자신의 상태가 이 사람을 통해 사장의 귀에 들어갈 수도 있다는 말이다.
거절할 수 없었다. 지민을 믿지는 않지만 은혜를 입은 것도 사실이다.
즉, 그에게는 은혜를 입은 지민에게 최대한의 성의를 다할 의무가 있었다.
딸에게 해가 될 만한 일이 아니라면, 지민이 자신을 먼저 배신하기 전까지는 그녀에게 최선을 다해야 했다.
“……그러죠.”
성윤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요. 그럼 조금 걸을까요? 여기서 말을 하기는 좀 그렇네요.”
첼시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돌아다니는 사람도 꽤 많았고 호기심 섞인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인물들도 있었다.
첼시가 앞장서 지원소를 나섰다.
“요 근처에 광장이 있다고 해요. 그쪽으로 가죠.”
성윤은 묵묵히 첼시의 뒤를 따랐다.
그는 이 근처에 광장 같은 게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요새 그의 생활패턴은 일어나서 미궁에 가 사냥을 한 다음, 다시 숙소로 돌아와 자는 게 전부인 단순한 패턴이었다.
얼마쯤 걷자 첼시의 말처럼 너른 광장이 보였다. 사이드 쪽에는 많은 벤치가 있었고 음료나 커피, 디저트를 파는 가게도 있었다.
물론 성윤이나 첼시 둘 모두 가게 쪽에는 시선조차 던지지 않았다. 가격을 확인하는 것조차 무서웠다.
둘은 적당히 벤치 하나에 앉았다.
“이거 받아요.”
첼시가 들고 있던 봉투를 성윤에게 건넸다. 아까 첼시에게 집적대던 연결자가 비웃어댔던 삶은 통감자가 들어 있는 봉투였다.
“그때 지민과 같이 먹었던 스테이크 이후로 영양제 빼곤 아무것도 못 먹었죠? 먹어요. 연결자는 칼로리를 섭취하지 않아도 된다지만 이건 기분 문제니까요. 입에 뭘 넣고 씹는다는 것 자체가 인간에겐 행복이에요.”
성윤은 봉투를 부스럭거렸다. 거기에는 차게 굳은 삶은 감자가 있었다. 지구에서는 흔하디흔한 음식.
하지만 암스트롱에서는 이것조차 굉장히 값나가는 음식이다.
배는 고프지 않았다. 하지만 오랜만에 보는 큼직한 먹거리는 그게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음식이라고 해도 성윤의 침샘을 자극했다.
“부담 갖지 말고 먹어요. 아무리 연구소에서 빠듯하게 음식이 나온다고 해도 그 정도는 충분히 건네줄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감자는 하도 먹어서 슬슬 질린 걸요.”
성윤이 부담을 가지지 않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그 말엔 첼시의 진심도 분명 포함되어 있었다.
솔직히 감자는 질리는 걸 넘어 슬슬 신물이 났다. 성윤에게 가져다 준 음식이 감자인 것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아니, 이유의 절반 이상일지도 몰랐다.
성윤은 감자를 손에 들고 빤히 쳐다봤다. 누가 봐도 망설이는 게 보였다.
“정 부담스러우면 당신이 해줄 얘기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하셔도 돼요.”
첼시가 덧붙였다. 성윤은 잠시 고민하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감자를 한 입 덥석 물었다.
다 식어 퍽퍽한 감자였지만 지금 성윤에게 있어서는 지구에서 먹던 어떤 음식에도 뒤지지 않을 그런 음식이었다.
마치 경건한 신도가 신이 내려준 음식을 먹듯 성윤은 조심스럽게 감자를 씹었다.
첼시는 감자를 먹는 성윤을 빤히 쳐다봤다. 보는 사람마저 행복해질 정도로 그는 맛있게 감자를 먹고 있었다. 준 사람으로서 기분이 나쁠 리 없었다.
하지만 문득 아까의 집적대던 연결자가 생각났다. 감자를 비루하고 천한 음식이라고 비웃었던 작자. 그리고 그런 걸 먹는 연구원들을 비참한 자들이라고도 했다.
“맛있나요?”
정신을 차려보니 첼시는 그렇게 묻고 있었다. 성윤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당신도 미궁 탐색이 본 궤도에 오르게 되는 나중에는 이걸 싸구려 취급하게 될 거예요.”
성윤도 어차피 그 남자와 같은 연결자라는 생각이 이런 빈정거림을 내뱉게 만든 건지도 모른다. 첼시는 자신이 내뱉고도 자신이 한 말에 조금 당황했다.
‘이건 무슨 화풀이 같잖아.’
오늘 받은 짜증을 성윤에게 풀면 안 된다고 그렇게 다짐했건만 결국 입 밖으로 튀어나와버렸다.
성윤은 먹는 걸 멈추고 잠시 첼시를 쳐다봤다.
첼시는 황급히 사과를 하려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성윤의 말이 먼저였다.
“미래에 어떨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은 이게 제일 맛있군요.”
그렇게 말하고 성윤은 마저 남은 감자를 입에 밀어 넣기 시작했다.
첼시는 말이 없었다. 솔직히 허를 찔렸다. 성윤이 저렇게 말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적어도 예전 그 두 놈 같은 사람은 아닐 것 같아.’
헤어질 때 들었던 지민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첼시는 다시 성윤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는 이제 조금밖에 남지 않은 감자를 조금씩 깨작대고 있었다.
아직 모든 의심을 버린 건 아니다. 방금 말도 자신을 속이기 위해 그럴 듯한 말을 지껄인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지민의 말에 일리는 있는 것 같네.’
첼시는 조금, 성윤에 대한 경계도를 내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