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화
첼시 스트로브는 오랜만에 연구소에서 나왔다.
평소에는 연구소와 기숙사에만 콕 박혀 있는 그녀의 외출은 분명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녀는 웬 종이봉투 하나를 품에 안고 가볍게 걸으면서 도시를 돌아봤다.
암스트롱은 여전히 북적북적댔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절대 여기를 달에 있는 도시라고 보지 않을 것이다.
쇼윈도에 진열되어 있는 멋진 옷들과 구수하게 흘러나오는 음식의 냄새가 첼시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정말, 이래서 연구소에서 나오기 싫다고.’
첼시는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일단 그녀는 UN직속으로 마련된 국제 연구소에 젊은 나이로 뽑힌 재녀다. 봉급도 다른 회사원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충분하게 받고 있다.
문제는 이 암스트롱이란 도시가 정신 나간 물가를 자랑하는 도시라는 것이다. 쇼핑을 좋아하는 편인 첼시로서는 꽤나 버티기 힘든 환경이었다.
고작해야 스테이크 하나를 써는 데도 간간이 달에 올라오는 돈 많은 친구에게 들러붙어야 하다니.
옆으로 창녀 두 명을 낀 연결자가 웃으며 지나갔다. 첼시는 창녀들을 조금 부러운 눈초리로 쳐다봤다.
물론 몸 파는 게 부럽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녀가 부러워한 건 그녀들의 옷차림과 생활이었다.
첼시라고 언제나 꾀죄죄한 옷에 부스스한 산발, 촌스러운 안경으로 다니는 걸 좋아하겠는가.
그녀도 지구에 있을 때는 화장을 하고 좋은 옷을 쫙 빼 입고 다닌다. 하지만 달에서는 그게 불가능했다.
좋은 옷도 화장품도 너무 비싸다. 그렇다고 그것들을 지구에서 가져올 수도 없었다.
우주선은 kg단위로 가격이 늘어나기 때문에 달로 가는 연구원들은 철저하게 가져갈 수 있는 짐의 무게가 정해져 있었다. 그런 상황에 사치품을 가지고 오는 건 꿈이나 마찬가지였다.
꾸밀 수 없으니 첼시는 그 반동 때문인지 달에서는 외모에 대해선 완전히 관심을 끄고 철저하게 연구에 대해서만 파고들었다.
하지만 창녀들은 다르다. 그녀들은 말 그대로 외모가 무기인 사람들. 비싸더라도 꾸며야 한다.
그뿐인가. 피부나 몸매,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말 그대로 돈을 쏟아 붇는다. 물론 그만큼 그녀들의 화대는 비싸다.
하지만 이곳은 현재 유일한 월석 채취의 거점 도시인 월면 도시 암스트롱이다. 그 비싼 화대를 지불할 재력이 있는 자들이 차고 넘친다.
하물며 목숨을 걸고 월석을 채취한 스트레스로 평소보다 여자를 더 찾을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니 창녀의 수요는 언제나 만원이었다.
방금 그 연결자도 그 비싼 창녀를 두 명이나 끼고 가지 않았는가.
첼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다고 그녀가 외출하기 싫어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그녀 앞을 가로막았다.
“어라? 뭐야, 아가씨. 가만 보니까 엄청나게 미인이네?”
찐득찐득한 목소리가 그녀의 목에 소름을 돋게 만들었다. 이번에 첼시는 대놓고 한숨을 내쉬며 앞을 쳐다봤다.
한 사내가 뺀질뺀질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꽤 젊은 사람이었다. 아니, 젊어 보이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 터였다.
진짜 젊은이든, 중늙은이든, 아니면 노인이든 연결자의 외모는 20대에 고정되니 섣불리 나이를 추측할 수 없다.
그의 모습은 화려했다. 옷은 평범한 것을 입고 있었지만 반지와 귀걸이 팔찌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장식을 위해 달고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디바이스였다. 보이는 것만 네 개. 거기에 꽂혀 있는 젬은 총 열 개가 넘어갔다. 게다가 그 중 하나의 젬은 은색 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아마 개인 미궁을 공략하는 연결자 중에서도 꽤 상위에 있는 인물일 것이다.
하지만 첼시에게는 귀찮기만 한 존재였다.
“연결자는 아니고, 연구원인가? 하핫, 좋네! 나랑 한잔 어때? 맛있는 거 사줄 테니까. 어차피 연구원 봉급으로는 제대로 된 거 먹지도 못하고 있지?”
마치 자신을 음식 얼마에 몸을 파는 창녀쯤으로 인식하는 것 같은 상대의 언행에 첼시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첼시는 그를 무시하고는 그의 옆을 스쳐지나가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어어, 튕기는 거야? 그거 참 귀엽네.”
그 무례한 작자가 따라왔다. 은근 슬쩍 어깨에 손을 올리려 하기에 손을 쳐냈다. 하지만 꽤 힘을 줬음에도 불구하고 사내의 손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손이 더 아팠다.
‘빌어먹을 연결자의 신체!’
결국 그녀는 어깨를 비틀어 피했다.
노골적으로 싫다는 표현을 했음에도 그 사내는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 이런 끈질긴 인간은 처음이라 첼시도 조금 당황했다.
“응? 그게 뭐야?”
첼시가 들고 있던 종이봉투를 사내가 들여다봤다.
“뭐야, 이거. 삶은 감자야?”
그러더니 남자가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뭐야, 이게! 이걸로 끼니를 때우는 거야? 연구원들도 달에서는 꽤 비참하게 산다고 하던데 틀린 말이 아니었나 보네!”
첼시의 눈초리가 싸늘해졌다. 사내의 언사로 부끄럽다거나 그런 감정은 전혀 없었다.
자신과 동료들은 이 머저리 같은 작자가 초라하다고 비웃는 끼니로 때우면서도 이 달과 미궁에 대해 하나라도 더 밝히기 위해서 노력하는 중이다.
자신의 일에 긍지를 갖고 있는 첼시에게 사내의 발언은 천박하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게다가 사내의 말처럼 연구원 생활이 그렇게 비참한 건 아니다. 명색이 국제 연구소에서 아무리 돈이 많이 나간다고 해도 연구원들을 무슨 거지나 부랑자처럼 밑바닥 생활을 시킬 리가 없다.
이 삶은 감자는 그녀의 식단 중 하나를 받아온 것에 불과했다.
“다 비웃으셨나요? 그럼 비켜주시죠?”
첼시는 턱을 꼿꼿이 들고 사내를 보며 말했다. 이런 작자에게 얕잡혀 보이는 건 죽어도 사양이었다.
“그런 빈티 나는 음식 말고 좋은 거 사 줄 테니까 같이 가자고.”
“거절할게요. 그렇게 돈이 많으면 창녀라도 사세요. 전 바쁜 일이 있어서요.”
첼시는 다시 그의 옆을 스쳐지나가려 했다.
턱!
사내가 첼시의 손목을 잡았다. 첼시의 눈꼬리가 거칠게 올라갔다.
“이게 무슨 짓이죠?”
첼시가 뾰족하게 말했다. 하지만 사내의 표정도 썩 좋지는 않았다. 아니, 험상궂게 일그러져 있었다.
“좋게 말해주니까 이게 나를 병신으로 보나!”
사내가 고함을 쳤다. 흥분한 듯도 했지만 첼시를 겁박해서 자기 마음대로 하게 하려는 모양새였다.
‘아아, 정말로…….’
하지만 사내의 의도와는 달리 첼시는 겁을 먹기는커녕 짜증스러움만을 느꼈다. 그녀는 소매 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건 방범 부저였다.
“당장 이거 놓고 꺼지지 않으면 경찰을 부를 거예요.”
달의 미궁에도 경찰은 있다. 하지만 사내는 콧방귀를 끼었다.
“경차알? 어차피 권총 같은 걸로 무장한 놈들을 내가 무서워 할 것 같아?”
‘젠장, 이래서 제 힘에 취한 연결자는 싫다니까.’
달에서 막강한 힘을 휘두를 수 있는 연결자에게 권총 정도는 딱총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치안을 확보하는 수단이 그것뿐이었다면 암스트롱은 무법지대로 변했으리라.
“왜, 경찰도 우습나요? 달에만 있다면 그럴 수도 있죠. 그런데 당신, 지구로 내려갈 생각은 아예 없는 건가요?”
여기서 사내가 움찔했다. 그가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것은 미궁의 마력을 많이 그리고 강하게 공급받을 수 있는 달에서만일 뿐.
아직, 지구에선 능력을 쓸 순 없었다. 지구에서 그는 힘이 조금 더 센 인간에 불과했다.
“뭐, 달에서만 살 각오가 있다면 경찰 무시하면서 계속 사고치고 다는 것도 괜찮겠죠. 그런데 당신이 제 힘에 취해 계속 막무가내식으로 나다닌다면 당신 회사에서, 그게 안 된다면 월면도시 자체에서 현상금을 걸 텐데요?”
첼시의 손목을 잡고 있던 사내의 우악스러운 손에서 살짝 힘이 빠졌다.
아무리 그라도 달에만 사는 건 꺼려졌다. 게다가 현상금이란 건 말 그대로 척살령이었다.
월면도시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반항하는 범죄자들을 잡으면 그 범죄자가 소속했던 회사나 도시, 정확히 말하면 도시를 운영하는 나라들에서 많은 이득을 주는 것이다.
그게 돈이 될 수도 있고 다른 무언가가 될 수도 있다.
게다가 연결자들은 자신들이 달에 마음 편히 있을 수 있는 월면도시를 무척 아낀다. 그렇기에 월면 도시에서 누군가 분탕질을 해 도시가 소란스러워지는 걸 두고 보지 않는다.
그게 월면도시에서 누구보다 편하게 살 수 있는 고위 연결자면 고위 연결자일수록 더더욱.
“죽으면 끝이고. 잡히면 아무리 못 해도 얼마 동안 달에 올라오지 못하겠죠.”
그게 결정타였다. 그도 연결자인 만큼 1년 중 얼마 정도는 달에 있어야 마음이 편해짐을 느낀다.
하지만 범죄자의 신분으로 지구로 압송돼서 감방이라도 들어가 만약 달에 올라올 수 없게 된다면? 그런 건 생각하기도 싫었다.
“그래도 계속할 건가요?”
첼시가 방범 부저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사내는 감정이 다시 욱하고 치솟았지만 방금 전 첼시의 말을 기억하고는 억눌렀다. 안 그래도 주변 사람들, 특히 연결자들의 표정이 안 좋은 것도 영향을 줬다.
‘젠장!’
사내는 첼시의 손목을 신경질적으로 내쳤다.
“꺼져! 드럽게 재수 없어가지고는!”
그래도 마지막 자존심이라도 챙기는 것일까. 사내는 첼시의 발치에 침을 한 번 뱉고는 몸을 홱 돌렸다.
“재수가 없다니. 누가 할 소리를.”
첼시도 성격 하나는 알아주는 여자다. 멀어져 가는 사내의 등에 빈정거렸다.
사내가 첼시의 말을 들었는지 고개를 돌려 첼시를 노려봤다. 하지만 첼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몸을 돌려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사내는 한동안 첼시의 등을 노려봤다. 하지만 그렇게 있어봤자 사내가 얻는 건 없다. 오히려 꼴불견처럼 보일 뿐이다.
결국 사내는 다시 욕설을 내뱉고는 첼시와 반대편으로 사라져갔다.
“정말 별꼴이야!”
오랜만에 나온 외출에서 최악의 경험을 한 그녀는 연신 구시렁거리며 발길을 재촉했다.
그냥 연구소에서 잠이나 자며 편하게 있으면 될 것을 도시로 나와 욕을 봤다. 괜히 자신을 도시로 나오게 만든 원인인 남자한테 불만이 쌓였다.
하지만 일단 진정했다. 그 사람한테 뭐라고 해 봤자 괜한 화풀이일 뿐이었다.
씩씩대면서도 걸음 속도는 줄이지 않은 그녀는 곧 한 건물에 도착했다. 높은 장대에 태극기가 올려져 있는 그곳은 한국의 초능력자 지원소였다.
건물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첼시를 묘하게 바라봤다.
한국인이라고는 보기 힘든 이국적인 외모에 더해서 꾸미지 않았는데도 부스스한 겉모습을 뚫고 발광하는 그녀의 미모 때문이었다.
그녀는 지원소에 들어가 접수원에게 똑바로 걸어갔다.
“어, 어떤 용무로 오셨나요?”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외국인임이 분명한 그녀에게 접수원은 조금 당황하며 영어로 물었다.
다행히 달의 지원소에 보내지는 인재들은 전부 엘리트들이라 영어를 꽤 유창하게 할 수 있어 의사소통에 문제는 없었다.
지민의 영향으로 한국어를 조금 할 수는 있지만 아무래도 모국어가 편한 법이다.
첼시는 접수원이 영어로 물어보자 망설임 없이 영어로 대답했다.
“여기에 우성윤 씨라고 있나요?”
“우성윤 씨요?”
“네, 있다면 만나보고 싶은데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접수원은 앞에 있는 컴퓨터를 조작했다.
“지금 방에 계신 것 같긴 합니다.”
‘그걸 방이라고 해도 되나?’
자신의 나라의 지원소 숙소를 알고 있는 첼시는 내심 헛웃음을 흘렸다.
지원소는 어디나 마찬가지라고 하니 미국 지원소에서 본, 무슨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나오는 우주선의 빽빽한 냉동 수면실 같은 형태는 이곳도 같을 것이다.
물론 첼시가 가지고 있는 상식으로는 그걸 방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잘 됐네요. 만날 수 있나요?”
“연락을 해보도록 하죠. 누구라고 전해드리면 될까요?”
“한지민의 친구인 첼시 스트로브가 찾아왔다고 전해주세요.”
접수원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컴퓨터 옆에 있는 전화기를 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