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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미궁-26화 (26/354)

제26화

철컥!

문 건너편에서 마지막 자물쇠인 걸쇠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문이 활짝 열렸다.

“들어오세요.”

“실례할게.”

지민은 조심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갔다.

세간살이는 얼마 없었다. 꼭 필요한 물건만 있는, 어떻게 보면 실용적이고 어떻게 보면 살풍경한 집이었다.

그녀가 고용한 사람들이 일은 잘 하고 있는 듯 집 안은 깨끗한 편이었다. 식기는 깨끗하게 씻겨 찬장에 들어 있었고 바닥은 먼지나 얼룩 하나 없이 말끔했다.

그러다 지민이 고개를 내렸다. 그녀의 허리 어름 즈음에서 신혜가 움찔움찔 몸을 꼬고 있었다.

낯선 사람의 방문이 어색한 것 같았다. 물론 어색한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으음, 뭐 불편한 건 없니?”

기껏해야 내뱉은 말이 그런 말이었다. 신혜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언니가 집 안을 좀 봐도 될까?”

일단 보이는 곳은 합격이었지만 다른 곳은 어떤지 모른다.

신혜가 이번엔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허락이 떨어지자 지민은 곧바로 집 구석구석을 살피기 시작했다. 나머지 방도 청소 상태는 좋았고 냉장고 안도 깔끔했다.

그러다 그녀는 작은방 책상 위에 스케치북 하나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두 명의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성인 남성 같은 사람 하나와 여자 아이 같은 사람 하나.

‘가족 그림인가?’

척 봐도 성윤과 신혜를 그려 놓은 것이었다. 하지만 보통 아빠, 자식과 같이 그려져야 할 엄마란 존재는 그 그림에 존재하지 않았다.

더 이상 엄마란 존재는 가족이 아니다. 신혜의 그림은 그걸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지민은 다시 거실로 나왔다. 신혜가 안방에 앉아 TV를 보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러다 지민이 나온 걸 보고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 그림 그리고 있었니?”

“……네.”

귀여운 얼굴만큼이나 신혜는 목소리도 귀여웠다. 하지만 그 귀여운 모습 뒤에는 아프고 아련한 모습이 숨어 있었다.

마치 예전의 자신처럼.

“……오늘 언니가 자고 가도 될까?”

그래서였을 것이다. 갑자기 그런 말이 튀어나온 것은.

신혜가 조금 놀라는 모습이 보였다. 지민 자신도 놀랐으니 아이는 오죽했겠는가.

“이것도 신혜를 돌봐주는 것 중 하나거든.”

황급히 변명을 해봤다. 신혜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변명이 먹혀든 것 같았다.

“고마워.”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지민은 내심 자신이 뭘 하고 있는 걸까 생각했다.

여분의 옷도 화장품도 없다. 잘 때 입을 잠옷도 없다. 어쩔 수 없이 내일 아침 일찍 집에 한 번 들렀다가 출근해야겠다고 생각할 때였다.

신혜가 안방에 쏙 들어갔다. 그러더니 무언가를 질질 끌고 나왔다.

그건 이불이었다. 신혜는 고사리 같은 작은 손으로 끌고 온 이불을 작은방에 펼치기 시작했다.

“아줌마 이불이요.”

신혜는 그렇게 말하고 책상 위에 있던 자신의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를 챙겨 나왔다.

“어머, 이불 깔아준 거니?”

“네.”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를 식탁 위에 올려놓으며 신혜가 대답했다. 아이의 귀엽고 기특한 모습에 지민은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아이가 이렇게 성숙해진 이유에는 마음의 아픔이 있다는 것을 짐작하고는 안쓰러워지기도 했다.

‘어쨌든 나도 좀 씻고 시작할까?’

그 이후에는 별 일이 없었다. 지민이나 신혜나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 붙임성 있게 말을 붙일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침묵이 흘렀다. 신혜는 식탁 위에서 다리를 흔들며 그림을 그렸고 지민은 평소 핸드백에 넣고 다니는 책을 꺼내 식탁 의자에 앉아 읽었다.

번쩍!

창밖으로 다시 빛이 번쩍였다.

‘또 치나?’

지민이 이 집에 도착했을 때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지만 번개와 천둥은 잦아들어 있었다. 하지만 낌새를 보니 다시 시작되려는 모양이었다.

“우으……!”

옆에서 무언가 억눌린 울음소리 같은 게 들렸다. 지민이 소리가 들린 곳으로 얼굴을 돌렸다.

조금 구부정한 포즈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신혜가 보였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 열심히 크레파스를 놀리고 있던 손이 뚝 멈춰 있었다.

번쩍!

다시 한번 번개가 쳤다. 그리고 뒤따라 하늘을 무너뜨릴 것 같은 천둥이 쳤다.

화들짝!

지민의 눈에 신혜의 몸이 크게 흔들리는 게 똑똑히 보였다.

“훌쩍!”

신혜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작게 흐느끼는 소리도 들렸다.

이제 고작해야 5살. 천둥번개가 칠 때마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 덜덜 떨 나이다.

하지만 지금 신혜에게 엄마나 아빠처럼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은 없다. 그 조그마한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이 무서운 시간이 어서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지민이 벌떡 일어났다. 신혜에게서 자신의 어린 시절의 모습이 비쳤다.

미궁에 가 있는 아버지와 일찌감치 이혼당한 쓰레기 같은 친어머니.

하지만 그녀에겐 의존할 수 있는 다른 어머니들이라도 있었다. 그랬기에 힘들었지만 견딜 수는 있었다.

하지만 지금 신혜에겐 아무도 없었다.

지민은 가만히 신혜의 어깨를 짚었다. 신혜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울상이 된 신혜의 얼굴이 보였다.

“무섭니?”

지민도 자신이 붙임성 없는 성격인 건 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신혜가 주춤거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지민이 신혜를 와락 껴안았다.

“괜찮아. 아줌마가 있으니까 괜찮아.”

그렇게 싫어하던 아줌마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지민은 신혜를 달랬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신혜의 몸이 뻣뻣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번쩍!

다시 한번 번개가 치자 신혜는 본능적으로 지민의 품에 파고들었다.

지민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신혜의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줬다.

신혜의 몸에 떨림이 조금 멎었다. 물론 아직까지 번개가 칠 때마다 몸이 튀긴 했다. 하지만 아까보다는 확실히 안정되어 있었다.

지민은 그렇게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신혜를 안고 있었다. 귀찮을 만도 하건만 그녀의 얼굴에는 오히려 자상해 보이는 미소가 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고른 숨소리가 들려 왔다.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이 신혜가 잠들었음을 알렸다.

지민은 조용히 신혜를 안고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아이를 눕혔다. 이불을 꼭 덮어주고 머리카락을 한번 쓰다듬었다.

조금 웅얼거리는 소리를 내며 신혜가 뒤척였다. 지민은 살짝 웃고는 몸을 일으켜 거실 겸 부엌으로 나왔다.

‘자, 이제 어떻게 한다.’

지금이라면 집에 충분히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지민은 머뭇거렸다.

‘아직 천둥번개가 멎지 않았어.’

도중에 천둥소리 때문에 신혜가 깨서 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일단 자고 간다고 했으니까.’

그녀는 집에 가는 걸 그만뒀다. 대신 신혜가 펴준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그녀 또한 고운 숨소리와 함께 잠이 들었다.

***

꿈을 꿨다. 아빠가 멋있지 않고 엄마는 무섭지 않던 시절.

아침이 되면 엄마가 조용히 깨워주고 자신은 일어나기 싫다며 투정을 부린다. 그러면 아빠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자신을 안아 올린다.

아빠의 까끌까끌한 턱이 자신의 볼에 닿으면 자신은 필사적으로 피하고, 그렇게 일어나면 따뜻한 밥을 먹고 아빠가 일을 나가는 모습을 배웅한다.

신혜의 얼마 안 되는 인생에서 장밋빛으로 물든 시간.

하지만 신혜는 그게 꿈이라는 걸 알았다.

그 모습은 다시는 오지 않을 추억이라는 것을, 신혜는 그 어린 마음에도 알고 있었다.

“신혜야. 신혜야.”

하지만 착각일까. 예전 그때처럼 누군가 자신을 흔들며 깨우고 있었다.

그 따뜻하면서도 다정한 목소리에 신혜는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말했다.

“엄마?”

초점이 잡힌 신혜의 눈동자에, 조금 어색한 표정을 하고 있는 지민의 얼굴이 비쳤다.

“음, 신혜야.”

그녀는 조금 어색하게 웃으며 부엌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침 먹지 않을래?”

신혜는 생각할 새도 없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식탁에는 따뜻한 아침이 준비되어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과 따뜻한 국, 여러 가지 반찬까지.

“맛있게 먹으렴.”

지민이 숟가락과 젓가락을 가지런히 모아주며 말했다. 신혜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밥을 한 술 크게 떠서 입 안으로 가져갔다.

“맛있니?”

“네! 맛있어요, 아줌마!”

‘……역시 저 호칭은 바꿔줘야 하겠지?’

어제는 신혜를 달래기 위해 자신을 아줌마라고 칭하는 끔찍한 짓까지 저지르긴 했지만 그래도 역시 아줌마라고 불릴 때마다 마음에 소소한 상처가 났다.

“저기, 신혜야. 언니는 아줌마라고 불릴 나이가 아닌데. 언니라고 불러주지 않을래?”

신혜가 입가에 밥풀을 붙이고 가볍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빠가 지민 아줌마 얘기 할 때 아줌마라고 했는데?”

‘그 사람 때문이구나!’

그를 만나고 처음으로 그에게 분노를 느꼈다. 다음에 만날 때 한소리 하겠다고 생각할 때였다.

“음, 그럼 언니라고 부를게요. 언니.”

그 말을 하고 신혜는 다시 밥공기에 숟가락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민의 숟가락은 움직이지 않았다. 동상처럼 굳어버렸다.

‘언니. 언니라.’

꽤 많이 들어본 말이다. 살면서 언니, 누나 소리 한 번 듣지 못한 여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하지만 방금 전까지 아줌마 소리를 달고 살던 아이가 하는 언니라는 소리는 의외로 지민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하고 있었다.

“많이 먹으렴.”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고기반찬을 신혜 앞에 밀어주고 있었다. 신혜는 사양 않고 젓가락을 고기에 가져갔다.

“이거 언니가 한 거예요?”

드디어 호칭이 언니라고 굳어졌다. 가벼운 감동을 느끼면서도 지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어제 아줌마가 만들어놓은 거야.”

지민은 다재다능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고 실제로 꽤 다재다능했지만 요리 실력만큼은 별로였다.

자취를 한 시간도 꽤 됐지만 애초에 음식을 스스로 잘 하지 않았다.

“그래도 맛있지 않니? 엄마가 해준 밥이랑은 좀 다르겠…….”

말을 하다 지민은 황급히 입을 닫았다. 신혜 앞에서 엄마 얘기는 꺼내지 않는 편이 좋다는 걸 순간 잊었다.

슬쩍 신혜의 눈치를 보자 아니나 다를까. 신혜의 표정이 급격히 우울해져 있었다. 방금 전과 달리 신혜는 깨작깨작 밥을 입에 넣었다.

“……했어요.”

“응?”

당황하느라 신혜가 한 말을 듣지 못했다.

“엄마도 반찬은 사오거나 외식 같은 것만 했어요. 밥 잘 안 해줬어요.”

“……그래?”

하긴, 딸을 버린 인성을 가진 여자가 평소에 아이를 잘 챙겨줬을까.

‘그것마저 똑같네.’

소름 끼치는 자신의 ‘친어머니’를 생각하며 지민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요리를 배울까.’

그 여자들과 똑같은 취급을 받긴 싫었다. 지금부터 조금씩이라도 요리 실력을 쌓겠다고 다짐했다.

신혜는 밥을 다 먹고는 유치원을 가야한다며 씻겠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손이 안 가는 아이. 그건 신혜 나름대로의 생존방식이었을 것이다.

씻고 나온 아이는 혼자서 옷을 찾아 입고 가방을 챙겼다. 모두 어제 아줌마가 준비해준 것일 것이다.

“언제 나갈 거니?”

지민이 물었다. 준비를 끝내고 T.V를 틀어 지민 그녀도 봤던 오래된, 어린이 프로를 보고 있던 신혜가 시계로 시선을 돌렸다.

“음, 짧은 바늘이랑 긴 바늘이 다 8에 가 있으면 알람이 울리거든요. 그때 집에서 나가요.”

아직 시계를 보는 법은 모르는 모양이다. 지민도 시계를 봤다. 10분이 남아 있었다.

“언니도 같이 나갈까?”

“정말요?”

신혜가 벌떡 일어났다.

“나랑 같이 버스 기다려줘요?”

“버스?”

“응. 다 엄마랑 같이 기다리는데 나만 혼자 기다려요.”

신혜가 풀이 죽었다. 확실히 주변 아이들이 전부 엄마 손을 잡고 있을 때 자기 혼자 뻘쭘하게 서 있는 건 어린 마음에 상처를 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래, 같이 기다려줄게.”

“와아~!”

신혜가 손을 번쩍 들었다.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던 어제와는 다르게 신혜는 활기찼다.

신혜가 두근거리는 표정으로 안방을 돌아다녔다.

아직 시간은 5분이나 남았음에도 벌써 가방을 맸다.

어제 막 만난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을 이렇게 기대하다니, 좀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정을 갈구하는 신혜에게 한창 번개가 치고 무서울 때 지민이 엄마 대신 토닥여준 사건은 아이의 경계심을 단박에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지민이 도움을 줄 사람이라고 성윤이 귀띔해주고 간 것도 많은 영향을 줬을 것이다.

알람이 울리자마자 신혜가 알람을 꺼버리고 벌떡 일어났다.

“가요!”

그대로 현관으로 뛰어갔다. 지민은 어쩔 수 없다는 작은 미소를 지은 채 신혜를 따라갔다.

버스가 온다고 하는 곳은 아파트 단지 바로 옆에 있는 슈퍼의 앞이었다.

신혜와 지민은 그 길을 나란히 걸었다.

둘은 금세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미 몇몇 아이들과 어머니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사람들이 도착한 신혜와 지민을 돌아봤다. 사람들의 눈에 놀람이 깃들었다.

언제나 혼자 시무룩하게 오던 아이가 눈이 돌아갈 정도의 미인을 대동하고 온 것이다.

신혜는 어깨를 쭉 피고 무리에 합류했다. 손은 여전히 꽉 잡고 있었다.

아줌마들이 이쪽을 보며 웅성거리는 게 보였다. 하지만 지민은 신경쓰지 않았다.

그때 버스가 왔다. 노란색의 봉고차가 슈퍼 앞에 서더니 곧 문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교사로 보이는 사람이 만면의 미소를 띠고 인사를 하며 내렸다.

아줌마들이 마주 인사를 하며 자신의 아이들을 교사에게 맡겼다. 그녀는 아이들의 손을 일일이 잡고 차에 태웠다.

“안녕하세요!”

신혜가 교사의 손을 잡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안녕, 신혜야!”

신혜의 손을 잡고 올리던 교사가 지민을 눈치 챘다.

“어머,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교사의 인사에 지민도 가지런히 고개를 숙였다.

신혜는 보란 듯이 지민에게 손을 크게 흔들고는 버스 안으로 들어갔다.

곧 모든 아이들이 버스에 타자 버스문이 닫혔다. 스 유리창에서 신혜가 계속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지민도 따라 손을 흔들어줬다.

매캐한 배기가스를 내뿜으며 버스가 떠났다.

신혜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민은 계속 손을 흔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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