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화
칠흑 같은 미궁의 어둠 안으로 자그마한 광원이 생겼다가 사라졌다.
몬스터가 죽은 후 월석을 남길 때 내는 빛이었다. 성윤은 이미 익숙해진 듯 묵묵히 월석을 주어 올렸다.
‘이걸로 열 마리.’
두 번째 날의 사냥 성적으로 좋은지 나쁜지 모르겠다. 하지만 성윤은 이쯤에서 끝내기로 했다.
외상은 없었지만 긴장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꽤 쌓였다. 게다가 들어올 때 마음속으로 정했던 오늘의 목표치도 열 마리였다.
시계를 봤다. 마력의 영향 때문인지 미궁 안에서는 모든 전자기기가 먹통이 된다.
그렇기에 그가 갖고 있는 손목시계는 태엽으로 움직이는 시계였다. 시간은 오후 네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성윤은 발걸음을 뒤로 돌렸다. 드디어 오늘의 전투가 끝났다는 사실에 조금 안도감이 들었다. 게다가 아직 몬스터라도 생명을 끊는 일에 거부감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성윤의 전투 의욕은 꺾이지 않았다. 딸과 함께하는 미래를 위해서는 이 정도의 시련 따위 얼마든지 헤쳐 나갈 수 있었다.
미궁을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다가 성윤은 두 명의 사람을 보았다.
한 사람은 1m 남짓한 양날검을 들고 한창 매드독과 사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경험이 일천한 듯 그는 매드독의 공격이 올 때마다 허둥댔다. 하지만 큰 상처를 입지는 않았다.
왼손에 들고 있는 커다란 각진 방패는 허둥대는 그의 몸짓으로도 충분히 매드독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게 해주고 있었다.
성윤의 나무 방패와는 달리 단단한 철판까지 덧대어 있어 방어력은 한층 더 높아 보였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달랑 조끼 같은 형태의 상체만 간신히 가리고 있는 갑옷을 입은 성윤과 달리 그는 상체, 하체는 물론 팔을 보호하는 토시와 다리를 보호하는 각반 형태의 갑옷도 착용하고 있었다.
다른 한 사람은 전투를 하고 있는 사람의 뒤에서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성윤은 그 사람을 보고 신음을 흘렸다. 그 정도로 그 사람의 차림새는 감탄스러웠다.
보는 것만으로 섬뜩한, 어깨에 걸쳐져 있는 잘 벼려진 대검. 볼 가리개에 코 가리개, 목 가리개까지 붙은 단단한 금속 투구는 머리로 향하는 모든 공격을 튕겨낼 것 같았다.
갑옷은 체인 메일을 입었는데 기장이 길어 무릎까지 마치 치마처럼 내려와 있었다. 드러난 팔과 다리에도 사슬로 된 방어구를 착용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성윤은 물론이고 전투를 벌이고 있는 자보다 좋은 장비를 한 사람이었다.
“뭐 하는 거야! 당황하지 말라니까!”
영어로 된 노성이 들렸다. 억센 악센트가 섞여 있어 알아듣기가 조금 힘들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훈련인가.’
연결자 특유의 좋은 귀로 듣고 있자니 전투를 하는 이는 오늘 처음 미궁에 들어온 것 같았다. 하루 먼저 들어온 성윤과는 같은 레벨의 인간일 것이다.
하지만 둘의 처지는 완전히 달랐다.
고작해야 퍼플 젬 세 개와 목숨 부지를 위한, 쓸 수도 없는 빚 좋은 개살구인 골드 젬 하나를 갖고 혼자서 미궁을 헤매고 있는 성윤. 게다가 그는 훈련도 지구에서 속성으로 받은 게 전부였다.
그에 비해 저 초보 연결자는 그보다 훨씬 더 좋은 장비를 갖고 선배에게 직접 전투 교육까지 받고 있었다.
‘아마 좋은 회사랑 계약을 한 연결자겠지.’
아마 2세대나 3세대의 연결자일 것이다.
성윤은 그 모습에서 눈을 떼고 다시 미궁의 입구로 걷기 시작했다.
갈림길에 접어들었을 때, 다른 길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걸어 나왔다. 총 네 명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파티.’
보통 회사에 있는 같은 수준의 연결자랑 짜준다고 하는 집단이다. 훨씬 더 안정적으로 고위의 미궁을 돌파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물론 같은 수준의 계약자는커녕 선배조차 없는 성윤에게는 인연이 없는 것이었다.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직접 전투교육을 받은 자나 파티를 맺은 자들은 성윤보다 몇 배나 빠른 속도로, 그리고 안전하게 미궁을 돌파해 나갈 것이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어 털어버렸다.
‘지금 상황만 해도 감지덕지야.’
지민의 호의가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그나마 안정적으로 미궁 탐색을 시작할 수도 없었다.
한 치 앞도 내다보이지 않는 앞길에 희미한 달빛이 길 안내를 해 주고 있는 격.
달에게 감사할지언정 태양빛을 부러워할 순 없었다.
마음을 다시 다잡고 성윤은 성큼성큼 미궁을 빠져나갔다.
***
성윤은 미궁에서 나오자마자 한국의 연결자 지원소를 찾아갔다. 이 암스트롱이란 곳에서 지구 같은 생활수준을 누릴 돈이 없는 성윤이 유일하게 기댈 곳이었다.
그 곳은 1지구 옆 2지구에 있었다. 세계의 지원소들이 대부분 모여 있는 이곳에서 성윤은 태극기가 펄럭이는 곳에 도착했다.
그는 일단 접수대와 접수원이 있는 본관으로 들어갔다.
“어쩐 일로 오셨나요?”
유창한 한국어로 접수원이 물었다. 성윤은 어제와 오늘 얻은 월석을 모두 내밀었다.
“이걸 보관하고, 초보자의 미궁을 탐색하는 연결자에게 제공되는 지원을 받고 싶습니다.”
그러며 뒤이어 연결자 등록증을 내밀었다. 접수원이 등록증을 확인하며 컴퓨터를 두들겼다.
“우성윤 씨. 1세대 연결자. 맞으신가요?”
성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접수원이 능숙하게 성윤이 내준 월석을 쓸어 담았다. 그러고는 영양제 몇 알과 페트병 두 통을 성윤에게 건넸다.
“이게 하루치입니다. 더 달라고 하셔도 저희 권한으로는 불가능하니 이 점 알아두세요.”
더 달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접수원의 목소리에는 조금 짜증이 실려 있었다.
“영양제와 물은 하루에 한 번, 이곳에서 받아 가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접수원은 옆에 서 있던 한 남자를 불러 성윤에게 붙여줬다. 아마도 그가 안내를 해주는 사람인 모양이었다.
그는 성윤을 데리고 본관을 나와 옆에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그 건물은 무기질적인 회색의 7층 건물이었다. 커다란 상자를 키워 놓은 것 같은 몰개성한 모양이 사람의 창작성까지 무참하게 깎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건 기숙사였다. 오직 시작의 미궁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제공되는 쉼터.
하지만 2, 3세대의 빵빵한 지원을 등에 업은 연결자들은 각 회사에서 숙소 정도는 제공해준다. 그들은 후에 많은 이득을 돌려줄 가능성이 높은 존재들이었으니까.
고로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자그마한 회사에 소속되어 있는, 한 마디로 빽 없고 능력 없는 자들이었다. 적어도 달에서는.
“이런 말씀드리긴 뭐하지만, 연결자 사이에서는 이곳을 닭장이라고 부른다고 하더군요.”
안내를 해주는 남자가 이를 드러낼 정도로 씨익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건물 안은 나름 깔끔했다. 하지만 그뿐, 연결자 개개인에게 주어지는 공간은 작았다.
이곳은 지구에서 일명 캡슐 호텔이라 불리는 곳과 닮아 있었다. 고작 몸 하나를 누일 수 있는 공간이 이곳에서 지내는 사람에게 주어진 전부였다.
“여기가 연결자분의 전용 캡슐입니다. 계약을 끝내거나 지구로 돌아가실 때, 그리고 개인 미궁을 배정받으신 후 2주가 지날 때까지는 계속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남자가 캡슐의 문을 열었다. 다행히 이곳의 보안은 그럭저럭 좋은 모양이었다. 캡슐의 문은 지문 인식으로 등록된 사람만 열 수 있었다.
잠금장치에 성윤의 지문을 입력해 준 남자는 좋은 하루 보내라는 말과 함께 사라졌다. 문이 열린 캡슐 옆으로 성윤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성윤은 우선 들고 있던 영양제와 물, 그리고 얼마 안 되는 짐을 캡슐 안으로 던져 넣었다. 그리고 말 그대로 몸을 안으로 구겨 넣고 문을 닫았다. 전자음과 함께 문이 자동으로 잠겼다.
성윤은 캡슐 안을 살폈다. 꽤 밝은 빛을 뿌리고 있는 전등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불조차 없었다.
간신히 몸을 뒤척일 만한 이 공간이 그가 지금 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머리가 닿아 앉지도 못한다. 마치 관 같다고 성윤은 생각했다.
‘일부러 지원을 최하로만 한다고 했나?’
나라에서 필요한 건 개인 미궁을 가진 연결자다. 돈도 되지 않는 시작의 미궁에 머무르는 연결자 따위는 별 이익이 되지 않는다.
괜히 시작의 미궁의 연결자들에게 지원을 빵빵하게 했다가 개인 미궁을 가질 자격이 되는 사람마저 시작의 미궁에 눌러 앉아버릴 수 있다.
이 비참한 상황은 그런 상황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당연히 돈을 아끼려는 목적도 있었다.
누우려니 옷과 피부에 묻은 몬스터의 피가 거슬렸다. 성윤은 물을 수건에 조금만 적셔 대충 몸을 닦았다. 그리고 여분의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바닥에 누웠다. 딱딱하고 조금 차가운 바닥이 느껴졌다.
성윤은 그대로 지갑을 꺼내 신혜의 사진을 쥐었다.
그의 눈이 부드럽게 풀렸다. 오늘 받은 모든 스트레스가 눈 녹듯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슬슬 성윤의 눈꺼풀을 무겁게 짓누르던 잠기운도 지금의 성윤을 방해하진 못했다.
성윤은 한참을 그렇게 사진을 보다 잠자리에 들었다.
***
며칠이 그렇게 지났다.
오늘도 아침이 되자마자 성윤은 바로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영양제를 입 안에 던져넣고 물을 머금었다.
그걸로 아침은 끝이었다.
성윤은 피가 이리저리 튄 옷으로 갈아입고는 미궁으로 향했다. 이미 성윤의 모습은 예전 노가다를 뛰며 빚에 짓눌려 살 때처럼 추레한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말라붙어 고약한 냄새까지 풍기는 피가 묻은 옷을 계속 입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성윤은 개의치 않았다. 이미 남의 시선과 판단은 그의 행동기준이 아니었다. 게다가 시작의 미궁에는 그와 비슷한 몰골의 인간이 넘쳐났다.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모습으로 무구를 소환하고 미궁에 진입했다. 갈림길을 연달아 꺾어 걸으며 몬스터를 찾아 헤맸다.
곧 몇 마리를 만날 수 있었다. 빅랫과 매드독, 그리고 식스레그리자드란 녀석이었다.
성윤은 차근차근 그것들을 처치했다. 슬슬 경험이 쌓이는 듯 성윤의 사냥속도는 빨라져 있었다.
대충 사냥하는 공략법을 알자 그의 행동도 대범해졌다.
예전에는 달려드는 매드독을 방패로 후려친 후 창을 내질렀다면, 지금은 매드독이 달려들 때 마주 창을 찔러 죽이는 정도였다.
대부분의 연결자들이 매드독을 그렇게 공략하고 있었다. 성윤의 동체시력과 반사신경, 근력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공략이었다.
그렇게 미궁을 돌아다닌 지 얼마나 됐을까.
“응?”
성윤이 발을 멈췄다.
그의 발 앞으로 검은 구멍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성윤은 조심스레 구멍 안을 들여다봤다.
울퉁불퉁하고 고저도 잘 맞지 않는 지면들이 쭉 아래로 이어지는 형태의, 인간들이 만든 깔끔한 것들과 비교조차 불허하는 조잡한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그건 분명 계단이었다.
성윤은 고민스러운 눈초리로 아래를 쳐다봤다.
미궁은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몬스터의 힘이 강해진다. 하지만 그만큼 월석의 크기도 커지고 디바이스나 젬을 얻을 확률도 올라간다.
‘침착하자.’
처음 보는 2층의 입구에 성윤은 자신을 달랬다.
‘들어갈까?’
시작의 미궁 2층은 확실히 몬스터가 강해지긴 하지만 그래봤자 시작의 미궁 수준이라는 얘기는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약한 놈들이라고 해도 몬스터가 강해진다는 것도 분명하다.
슬쩍 시계를 봤다. 아직 시간은 충분히 남아 있었다.
‘내 실력은 어떻지?’
며칠 동안 1층을 돌아봤지만 분명 자신은 아직 어려움을 느낀 적은 없었다. 오히려 수월한 편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성윤의 눈에 단호한 결심이 서렸다.
‘어차피 대미궁을 공략하려면 내려가야 해.’
성윤은 들고 있는 창을 꽉 잡았다. 그러고는 오른발을 떼 천천히 검은 아가리 안으로 집어넣었다. 잠시 후, 성윤의 모습은 구멍 안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