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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미궁-14화 (14/354)

제14화

“누구신가요?”

선아가 조금 경계하며 물었다.

아는 목소리라서 마음을 조금 놓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전혀 모르는 사람이 서 있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남성에게 시달린 게 조금 많은 선아가 새끼 사슴처럼 움츠리는 건 당연했다.

“당신 뭐야?”

동아리의 회장을 필두로 선아에게 꼬리를 치고 있는 동아리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뚜렷하게 상대를 경계하고 있는 선아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줘 점수를 딸 요량이었다.

그 남자는 자신을 반원형으로 둘러싼 자들을 둘러 봤다. 그 태도엔 분노도 경계심도 없었다. 있는 건 그저 길 가던 개를 쳐다보는 듯한 극한의 무감정뿐이었다.

그는 남자들 사이로 간신히 보이는 선아에게 말을 걸었다.

“예전에 한번 뵌 적이 있죠. 신혜의 아비 되는 사람입니다.”

조금은 낡은 듯한 말투. 그 나이에 사용하는 말투가 아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선아의 귀에 걸리는 건 내용이었다.

“……네?”

생각 전에 반문이 먼저 튀어나왔다. 고개를 돌려 신혜를 내려다봤다. 신혜가 조금 곤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그 남자를 쳐다봤다.

‘그, 그러고 보니 조금 닮은 것 같기도…….’

예전에 봤던 남자를 떠올렸다. 초라하고 누추한 중년 남자였지만 얼굴은 꽤 잘생겼었다는 기억이 났다.

낡은 옷을 평범한 옷으로 갈아입히고 시간을 한 10년 정도만 돌린다면 저런 얼굴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그 남자가 신혜의 아버지라고 하는 주장에 신뢰가 가는 이유는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었다.

호감도 사랑도 아닌 냉정함과 미약한 경계심. 자신을 보고 저런 시선을 보냈던 건 그녀가 기억하기로 신혜의 아버지뿐이었다.

“이것 참, 아버님이 너무 멋있어지셔서 사람들이 많이 오해를 하네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부드럽고 조근조근하지만 힘이 있어 모두의 주목을 끄는 목소리였다.

“원장 선생님.”

선아가 이쪽으로 여유 있게 다가오는 원장을 쳐다봤다.

“분위기가 험악하네요. 일단 서로 진정하는 게 어때요?”

“그, 그래요. 아이들한테도 영향이 가니까요.”

원장의 말에 더해서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던 보육교사까지 나서자 성윤을 반포위하고 있던 남자들이 한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곱지 않은 눈초리는 여전했다.

먹이에 꼬이는 귀찮은 똥파리를 보는 눈. 성윤은 자신을 보는 남자들의 시선을 그렇게 정의 내렸다.

하지만 그런 인간들에게 일일이 눈치를 보고 상대하고픈 마음은 없었다.

“딸애가 신세를 많이 졌다고 들었습니다.”

성윤은 가볍게 선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선아는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요. 신세는요, 뭘.”

뭔가 자신이 대단한 걸 했다는 생각이 정말 손톱만큼도 없는 선아로서는 성윤의 감사 인사가 조금 거북했다.

“그런데 정말 신혜의 아버지세요?”

커다란 사슴 같은 눈을 끔벅이며 선아가 성윤을 샅샅이 훑어 내렸다.

그러다 자신의 행동이 무례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화들짝 놀랐다.

“아, 죄, 죄송해요. 정말로 젊어지셔서.”

자기 혼자 놀라고 자기 혼자 사과하는 모습이 퍽 재밌었다.

“이번에 연결자로 각성했습니다. 이건 그 부작용? 혜택? 비슷한 거라고 하더군요.”

주변이 술렁였다. 성윤에게 안 좋은 눈초리를 보내던 남자들은 물론이고 선아도 크게 놀랐다.

“야, 연결자라면….”

“미궁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잖아.”

남자들의 눈에 짙은 부러움과 질시의 시선이 섞였다.

위험하긴 하지만 그만큼 막대한 부를 손에 넣을 수 있는 직업.

힘든 취업 시장과 말이야 어쨌든 돈의 가치를 무척 높게 치는 사회의 현 상황을 생각하면 성윤은 대학을 졸업하면 거친 사회란 격류에 몸을 던져야 하는 남자들에게 충분히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게다가 연결자의 특징 중 하나인 영원한 젊음까지 생각한다면.

당장이라도 성윤을 향해 덤빌 태세였던 남자들의 기세가 죽었다.

상대는 자신들보다 훨씬 더 ‘잘난’ 남자인 것이다.

하지만 선아의 반응은 달랐다.

“축하드려요.”

단 한 점의 사심도 없이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무엇보다 그녀의 작은 친구인 신혜가 앞으로 걱정 없이 살 수 있겠다는 생각에 안심했다.

“그래서 신혜를 데리러 오신 거군요.”

“그렇죠. 이제 아이를 키울 수 있는데 보육원에 맡겨둘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성윤은 신혜에게 손을 뻗었다. 그의 얼굴에 한껏 미소가 꽃폈다. 선아나 다른 사람에게 대하는 표정과는 천지차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선아는 마지막 의심마저 버렸다.

저 얼굴은 사랑스러운 딸을 대하는 얼굴 그 자체였다.

신혜가 선아의 품에서 벗어나 성윤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신혜는 계속 성윤의 얼굴을 흘끔흘끔 훔쳐봤다. 다가가는 폼도 묘하게 어색했다.

“하지만 신혜에겐 낯선 아빠가 된 모양입니다.”

흠칫거리며, 그래도 자신의 손을 꼭 잡아오는 신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성윤이 한탄 아닌 한탄을 했다.

선아도 여기선 쓴웃음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아빠가 갑자기 젊어져서 돌아오면 바로 적응할 자신이 없다. 하물며 어린아이인 신혜는 어떻겠는가.

자신의 아빠가 아니라며 울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

“저기, 슬슬 저희도 활동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만.”

옆에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동아리 회장이 말을 걸었다. 누가 봐도 친하게 얘기를 하고 있는 둘을 견제하는 모양새였다. 호감을 가진 선아를 ‘잘난’ 성윤의 옆에 두고 싶지 않다는 게 그의 본심이었다.

“확실히 그러네요. 전 잠시 이쪽 손님을 배웅해야하니 이 분들에게 할 일을 주시겠어요?”

원장이 옆에 서 있던 교사에게 지시를 내렸다. 보육 교사가 동아리 사람들을 데리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중 선아는 제외됐다.

“아니, 선아도 우리 동아리…….”

“선아 양은 이 아이와 작별 인사를 해야 하니 조금 있다가 보낼게요.”

원장이 신혜를 가리켰다. 그 말을 듣고 신혜가 선아의 손을 꽉 붙잡았다. 회장은 입맛을 다시면서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흩어지고 남은 건 성윤과 신혜, 선아, 원장 이렇게 넷뿐이었다.

“여전히 인기가 많네요.”

원장이 가볍게 놀려댔다. 선아는 쓴웃음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내 털어버리고 신혜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꽉 안았다.

“아빠랑 행복하게 지내야 해, 신혜야. 알았지?”

“응.”

신혜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헤어져야 할 그녀의 품이 따뜻해서 더욱 파고 들었다.

성윤은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봤다.

그건 마치 모녀가 헤어지는 것같이 보이기도 했다. 엄마라는 작자한테 정은커녕 상처밖에 받은 적이 없는 신혜로서는 충분히 엄마와 헤어지는 감정같이 느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일단 둘을 방해하지 않기로 한 성윤은 원장에게 명함 한 장을 건넸다.

“제 명함입니다.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연결자 나부랭이입니다. 혹시라도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연락 주십시오.”

“거절하진 않을게요.”

보육원을 잘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외부의 도움의 손길이 절실하다. 당연히 얼굴도 두꺼워야 한다. 원장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명함을 받아 챙겼다.

조금 뒤, 성윤은 신혜가 진정할 기미를 보이자 선아와 신혜에게 다가갔다. 선아가 성윤을 보고 몸을 일으켰다. 성윤은 원장에게 햇던 것과 똑같이 명함을 건넸다.

“선아 씨가 신혜에게 잘해주셨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다면 연락주세요.”

선아는 내밀어진 명함을 빤히 바라봤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받지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든 그녀를 자빠뜨려보겠다는 의도가 99%였을 테니까.

하지만…….

선아는 고개를 들어 성윤의 얼굴을 쳐다봤다.

무뚝뚝한, 어떻게 보면 냉막하다고까지 생각될 정도의 얼굴이 보인다. 정말로 그 딸바보인 사람과 동일한 사람인지 의심이 들었다.

‘정말로 이 사람은 나한테 관심이 없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이 사람을 다른 남자처럼 계속 경계하는 게 바보 같아졌다. 이대로 완전히 신혜와 헤어지는 것도 싫었다.

“감사해요.”

선아는 명함을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가방에서 다이어리와 펜을 꺼냈다. 종이 한 장을 뜯어 무언가를 휘갈겨 쓴 후 신혜에게 건넸다.

“이거, 언니 연락처니까 심심하면 연락하렴.”

충혈 되어 빨간 눈으로 신혜는 선아가 준 종이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러다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꼭 쥐었다.

대충 분위기가 정리되자 성윤은 신혜의 손을 잡고 보육원의 현관을 나가 정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건물을 나서기 전 성윤이 뒤로 돌았다. 원장과 선아가 보육원의 현관에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성윤은 거의 90도가 될 정도로 고개를 숙였다. 그건 분명 자신의 딸을 최선을 다해 보살펴준 은인들에 대한 예였다.

그 모습을 본 둘도 마주 고개를 숙였다. 원장은 살짝 웃으며 우아하게 허리를 굽혔고 선아는 당황하며 허둥지둥 고개를 내렸다.

마지막 예까지 마친 성윤은 더 이상 돌아보는 일 없이 보육원을 나갔다. 그에 비해 신혜는 뒤를 돌아보며 연신 손을 흔들었다.

원장과 선아도 조용히 미소지으며 마주 손을 흔들어줬다. 그 장면은 성윤과 신혜가 선아와 원장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계속됐다.

***

연결자로서 성윤은 정신없이 바쁜 날을 보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직업이다 보니 그 준비도 만만치 않은 것이다.

연결자에게 기본적은 훈련을 시키는 곳에서 성윤은 오늘도 힘껏 노력하고 있었다.

후웅!

섬뜩한 파공음이 울렸다. 허공으로 지나간 도끼가 공기를 찢는 소리였다. 만약 그 궤도상에 사람이 있었다면 끔찍한 참상이 벌어졌을 터였다.

“후우~!”

성윤은 들고 있던 도끼를 내리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물론 연결자인 성윤에게는 전혀 쓸데없는 짓이었다. 호흡이 필요 없는 신체일뿐더러 고작 이 정도 움직였다고 지치지도 않는다. 철저하게 기분적인 문제였다.

“이제 많이 익숙해지셨군요.”

옆에서 팔짱을 끼고 묵묵히 성윤이 하던 걸 지켜보던 훈련교관이 자그맣게 박수를 치며 다가왔다.

“그럼 이번엔 뭘로 해볼까요.”

그는 성윤에게 도끼를 돌려받고 한 쪽 벽면으로 다가갔다. 그 벽에는 온갖 종류들의 무기들이 걸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양손검은 아직 안 써 보셨죠?”

다른 검들보다 명백하게 큰 검을 그가 꺼냈다. 성윤은 그 검을 건네받아 몇 번 휘둘러봤다. 어색했다.

사용하기는커녕 처음 쥐어 본 무기였으니 당연했다.

“어떻습니까?”

물건을 어떻게든 비싸게 팔아넘기려는 악덕상인처럼 교관은 손을 비비며 물었다.

“길군요.”

성윤이 할 수 있는 대답은 그게 전부였다.

“길죠. 그게 양손검의 특징이니까요. 자, 그럼 이제 양손검의 기본적인 움직임을 가르쳐드릴까요?”

교관은 성윤에게 건넨 것과는 다른 양손검을 들었다. 그리고 자세를 잡았다.

“음? 왜 그러시죠?”

성윤이 자세를 취하지 않고 자기를 빤히 바라보기만 하자 교관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정말 쓸모가 있는 겁니까?”

성윤의 목소리에는 탐탁지 않은 감정이 그대로 실려 있었다. 무언가 의심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제가 배우는 기간은 한 달이 전붑니다. 차라리 무기 하나를 전문적으로 배우는 게 낫지 않습니까?”

전투 훈련을 받으러 와서 지금까지 한 거라고는 여러 가지 무기를 조금 익숙해질 때까지 휘둘러보는 것뿐이었다. 그것도 조금이라도 익숙해질라치면 다른 무기로 넘어갔다. 그게 벌써 2주째였다.

교관은 눈을 껌벅였다. 그러다 한숨을 내쉬고는 자세를 풀었다.

“접수처에서 가르쳐 주시지 않았습니까?”

“뭘 말입니까?”

“이 인간들이 그냥……!”

교관은 귀찮아서 넘겼든 까먹었든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동료들에게 가벼운 성을 냈다. 하지만 곧 프로의식을 발휘해 분노를 내리눌렀다.

“음, 우성윤 씨. 제가 설명은 잘하지 못하는 편입니다. 정확히는 듣는 사람이 기분 좋게 꾸미거나 돌리는 재주가 없다고 할까요. 그러니 혹시 기분 나쁜 말을 하더라도 양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는 먼저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다음 말을 이었다.

“탁 까놓고 말해서 성윤 씨가 무기들의 기본적인 사용법만 배우는 것은 성윤 씨의 회사가 작기 때문입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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