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사람이 어떤 위치에 있건 어떤 상황에 처했건, 행복하건 불행하건 시간만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그리고 그건 현재 절찬 밑바닥을 기고 있는 성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걱정 때문에 늦은 밤까지 밤을 설친 성윤이 부스스 눈을 떴다. 시끄럽게 알람 소리를 울리는 핸드폰을 얼른 잡아 껐다.
방음이 제대로 되지 않은 고시원에서 알람을 계속 울리게 나뒀다가는 바로 항의가 들어올 것이다.
“으으으으!”
온몸을 비틀며 앓는 소리를 낸다. 육체노동에 익숙하지 않은 몸을 이끌고 계속 노가다판을 전전해서 안 그래도 몸이 좋지 않았는데 어제 잠까지 설친 터라 컨디션은 최악이었다.
하지만 성윤은 억지로 머리를 각성시켰다. 컨디션이 안 좋다는 그의 사정을 봐줄 만큼 세상은 만만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갑고 냉혹했다.
삑!
일단 잠을 깨기 위해 불을 켜고 TV를 틀었다. 물론 소리는 최대한 줄인 채였다. TV에서는 뉴스를 하고 있었다.
성윤의 눈을 내리 누르던 잠기운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성윤은 황급히 움직여 TV 가까이 붙었다.
화면에는 한 명의 인물이 잡히고 있었다. 낯익은 인물이다. 아니, 낯익은 걸 넘어 무척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
이재호.
성윤의 친구였었고 성윤의 모든 것을 빼앗은 치 떨리는 놈.
놈은 웃고 있었다.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마이크에 대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는 모습이 역겹기 짝이 없었다.
- 우리 대한민국이 월석 분야에 관해서 뒤떨어지고 있는 건 잘 알고 계실 겁니다. 특히 대미궁에서 나오는 최상급 월석을 가공하는 능력은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저희가 개발한 가공 기술은 여타 월석 가공 강국에 비해 꿀리지 않을 거라고 자부합니다.
“그게 왜…!”
생각하기도 전에 큰 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성윤은 바로 입을 막았다. 조용히 눈치를 봤다. 다행히 옆방에서 따지러 오는 기색은 없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그러면서도 자기 방에서 큰 소리 하나 내지 못하는 지금의 상황에 한탄을 하며 다시 TV를 봤다. 화면에는 아직도 빌어먹을 얼굴이 떠 있었다.
“그게 왜 너희가 개발한 기술이야.”
아까와는 다르게 나직이 말한다. 하지만 크기와는 상관없이 그 목소리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지금 TV까지 나와 잘난 듯이 떠벌리는 기술은 말한 것과는 달리 이재호의 기업이 개발한 것이 아니었다.
바로 성윤이 피땀 흘리고 밤잠도 설치며, 소중한 딸과의 시간까지 희생해가며 만든, 그의 회사의 기술이었다.
저 기술만 있었으면, 저 새끼가 배신하지만 않았다면 자신이 이런 좁아터진 방에서 사회의 패배자처럼 뒹굴 일도 없고 신혜를 고아원에 맡길 일도 없었을 것이다.
성윤은 눈에 핏발까지 세우고 재호를 노려봤다. 당장이라도 저놈의 목을 잡아 뜯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뿐. 성윤이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복수도 능력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다.
사회 밑바닥으로 떨어진 빚쟁이인 그와 세계 1% 안에 살고 있는 재호의 능력은 개미와 코끼리만큼이나 차이가 난다.
물론 뒷생각 안 하고 녀석에게 해를 가하려 할 수는 있겠지만, 성공확률도 높지 않을 테고 성윤에겐 아직 신혜라는 마지노선도 남아 있다.
결국 성윤은 눈을 질끈 감고 억지로 시선을 돌렸다. 리모컨만 들어 채널을 딴 곳으로 돌렸다. 분노로 쿵쾅대는 심장을 억눌렀다.
‘잊어버려. 잊어버리자고! 우성윤!’
쓸데없는 분노는 자신과 신혜에게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피가 끓어오를 정도의 증오라도 억눌러야 했다.
‘그래. 앞으로는 신혜와 같이 살 생각만 하자고.’
그 재수 없는 새끼의 얼굴이 화면에서 사라지니 조금은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성윤은 방을 나와 공용 욕실로 들어갔다. 너무 이른 시간 때문인지 욕실엔 사람이 없었다. 성윤은 얼굴에 차가운 물을 끼얹은 후 거울을 쳐다봤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생한 나머지 무척 초췌해진 얼굴이 보인다.
‘차라리 내가 연결자였다면….’
어제 그레이스 테일러의 기사를 본 것 때문인지 성윤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연결자에 대해서는 성윤도 많이 알지 못한다. 연결자와 관련된 사업을 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그의 회사의 전문은 월석 가공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연결자의 정보가 그 유명세에 비해 별로 퍼져 있지 않은 것도 한몫했다.
사람들에게 정보가 가기 위한 가장 빠르고 좋은 방법은 역시 언론이다. 하지만 언론이 취재를 하기 위해 달에 사람을 보내기에는 달의 미친 물가가 너무 버거웠고 그 때문에 상시 주재하며 취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게다가 연결자의 일터라고 할 수 있는 미궁은 아예 일반 사람들이 들어 가지조차 못하는 곳이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연결자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저 몬스터라고 불리는, 미궁에 사는 생물과 싸우며 그 몬스터에게서 월석을 채취한다는 정도의 정보만이 퍼져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일이 극도로 힘들고 더럽고 위험한 일이라는 것도.
하지만 워낙에 연결자들이 버는 액수가 크기에 사람들은 그들을 부러워했다.
그건 지금의 성윤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힘들고 더럽고 위험한 일이라지만 신혜를 위해서라면 성윤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헛된 생각일 뿐이다. 연결자가 되고 싶다고 원하는 건 복권이나 되면 좋겠다고 중얼거리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성윤은 망상을 끝내고 다시 일하러 나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모든 채비를 마치고 방을 나서기 전, 성윤은 달력을 확인했다. 빨간 동그라미가 쳐진 날짜가 눈에 띄었다.
‘얼마 안 남았어.’
그 날은 한 달에 한 번 성윤이 고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날. 바로 마음의 오아시스인 신혜를 만나러 가는 날이었다.
지금 성윤은 오로지 그 날 하루만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성윤은 달력을 한 번 쓸어내리고는 방을 나섰다.
***
보육원은 언제나 일손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곳이다. 활동량 많고 어른 손이 필요한 아이들이 많으니 당연한 일이다.
때문에 보육원 교사들은 보육원에 봉사하러 오는 사람들을 무척 반겼다.
그런 면에서 일손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대학 봉사 동아리의 방문은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정선아도 그런 봉사 활동 동아리의 일원 중 한 명이었다.
대학생 새내기의 풋풋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그녀는 청초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약간의 화장만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게 그녀의 미모를 더 돋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누구나 인정할 미인. 거기에 부모 없는 아이들을 위해 봉사 활동까지 나오는 비단결 같은 마음이 화룡점정을 찍었다.
선아는 여러 잡일거리를 도맡아 했다. 빨래와 설거지를 끝냈고, 이제는 아이들의 방청소를 시작했다.
주변에 도와주는 사람들은 없었다. 하지만 선아는 이게 편했다. 일부러 주변에 사람이 없는 일을 스스로 맡은 것이다.
아무래도 보기 힘든 미인이니만큼 그녀의 곁에는 남자들이 많았다. 그것도 부담스러웠지만 이른바 점수를 딴다고 그녀가 하려는 일을 반강제로 뺏어 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녀는 봉사활동을 하고 싶었지 공주님 대접을 받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녀가 청소기로 먼지를 빨아들이며 이마에 흐른 땀을 훔칠 때였다.
“일은 좀 괜찮나요?”
“아, 원장 선생님!”
새하얀 백발에 푸근한 인상을 두른, 누가 봐도 무척 인자하다고 생각할 노년의 여성이 방문 어귀에 서 있었다.
그녀는 이 보육원의 원장이었다. 젊었을 때부터 인격자로서, 자신의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워낸 후로 갈 곳 없는 아이들을 데리고 이 보육원을 운영하고 있는, 존경 받아 마땅하고 주변에게도 존경받는 여성이었다.
“선아씨에게는 정말 여러모로 신세를 지네요.”
동아리 활동뿐만이 아니라 선아는 개인적으로도 종종 이 보육원을 찾아 일을 돕고 있었다.
“아뇨. 제가 좋아서 하는 걸요.”
그녀의 환한 웃음이 마치 태양 같다. 정말 요새 보기 드문 젊은이라고 원장은 생각했다.
“자식 중에 아직 장가를 가지 않은 녀석이 있다면 정말로 며느리로 삼고 싶을 정도예요. 아, 손자는 있는데, 혹시 선아씨는 연하에게 흥미 없나요? 10년 정도만 기다리면 돼요. 할머니라서 그런 게 아니라 무척 똘똘해서 장래가 기대되는 녀석들이거든요. 남자는 정신연령이 낮아서 한 열 살 차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후훗! 제안은 감사하지만 아직 결혼 생각은 없어서요.”
“정말 유감이네요.”
원장이 작게 웃었다. 선아도 같이 웃음 짓고는 다시 청소를 시작하려 청소기를 고쳐 잡았다. 그러다 문득 창문을 바라봤다. 그녀의 안색이 흐려졌다.
“신혜는 아직도 아빠를 기다리나보네요.”
창 너머로 보이는 보육원의 마당. 정문 벤치에 한 소녀가 앉아 정문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소녀는 신혜였다.
선아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즐거워하던 원장도 안타까운 시선을 창문 밖으로 던졌다.
“아무래도 아직 보육원에 익숙해지지 못하는 것 같아요. 게다가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리는 것도 아니니, 아빠가 그립겠죠.”
보육원에는 부모가 없는 아이들이 많다. 있다고 해도 보육원에 맡겨 놓고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그랬기에 원장은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자식을 보러 오는 신혜의 아버지를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신혜는 아이들과 잘 친해지지 못했다.
자신들은 부모가 없는데 신혜는 한 달에 한 번씩 아버지가 신혜를 만나러 온다. 아이들이 신혜를 따돌릴 이유로는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원장과 보육 교사들이 이런 저런 방법을 써봤지만 백약이 무용이었다. 그렇다고 신혜의 아버지 보고 그만 오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래저래 한숨만 나오는 상황이었다.
“원장 선생님.”
선아가 원장을 불렀다. 그것만으로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안 원장은 특유의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보세요. 청소는 제가 끝마칠 테니까요.”
“감사합니다!”
그녀는 청소기를 원장에게 건네고 방을 뛰어나갔다.
“정말로 마음씨 고운 아이라니까.”
선아의 뒷모습을 부드러운 눈길로 배웅한 그녀는 곧 청소기를 잡고는 마저 방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
오늘도 신혜는 아빠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씩은 꼭 들러 자신과 놀아주는 아빠다.
신혜는 작달막한 손가락을 하나씩 오므리며 저번에 아빠가 들른 날부터 지금까지의 날짜를 헤아려 봤다.
모든 손가락이 한 번 씩 접혔다가 펴진 후, 다시 손가락 몇 개가 더 오므려졌다.
‘이제 곧 올 거야.’
신혜의 마음에 기대감이 커졌다. 당장이라도 아빠가 활짝 웃으며 문으로 들어올지 모른다.
아빠가 언제 오든 신혜는 환한 미소와 함께 아빠를 맞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아이는 지금 있는 자리에서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신혜도 불안감은 있었다. 자신의 엄마, 아빠도 그런 말을 하고는 오지 않았다고, 너희 아빠도 이제 오지 않을 거라고 심술궂게 말하는 아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아니야! 아빠는 꼭 올 거야!’
불길한 생각을 머리를 붕붕 돌려 쫓아낸다. 신혜는 다시 정문을 쳐다봤다.
“신혜 뭐 하니?”
누군가가 말을 걸어 왔다. 신혜는 몸을 움츠렸다. 보육원 선생님들은 어떻게든 신혜를 달래 보육원 안에서 아이들과 어울리게 하려 했다.
악의가 있는 행동은 아닌, 오히려 신혜를 위한 행동이었지만 신혜는 싫었다. 그저 이 자리에서 아빠를 기다리고 싶었다.
하지만 말을 건 상대는 보육교사가 아니었다. 상대를 확인한 신혜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녀는 선아였다.
“언니!”
선아는 자신을 반기는 신혜 옆에 앉았다.
“아빠 기다리니?”
“응!”
“그럼 오늘도 같이 기다릴까?”
“응!”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선아는 신혜에게 들어 가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라는 소리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혜와 같이 기다려줬다. 때문에 신혜는 선아를 몹시 좋아했다.
벤치에 나란히 앉은 둘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눴다. 신혜가 왈칵 웃음을 터뜨리다가 선아도 미소 짓는다. 그림 같은 그 풍경을 하늘에 높이 떠 있는 붉은 태양이 따스하게 비췄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