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프랑켄슈타인 222화
22. Trickery(2)
대한민국의 시간은 시리아보다 6시간이 빠르다. 연희와 밤새 문자를 주고받던 건우는 연희가 자야 할 시간까지 문자를 하다 새벽녘이 되어야 핸드폰을 끈다.
새벽의 희끄무레한 빛들이 창을 통해 들어오는 침실. 그곳에 앉은 건우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나는 내 주인공을 괴물로 남게 하지 않을 거니까.’
연희의 말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보는 건우. 피를 피로 갚는 것만큼 원시적인 복수는 없다.
연희가 낸 결말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계속 물었지만 연희는 아직 구상 중이란 답만 내놓았다. 아무리 작가지만 이야기의 세세한 부분까지 미리 정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매일매일 고민하며 사는 것일 테고.
하지만 하나는 확실하다.
연희의 이야기인 닥터 프랑켄슈타인의 결말은 결코 복수로 끝나지 않는다. 그리고 연희가 쓴 글은 알고 쓴 내용은 아니지만 자신의 이야기와 매우 흡사하다.
가만히 창을 바라보던 건우가 한숨을 쉰다.
“내가 주인공인 내 인생이란 소설 속 이야기는 어떻게 결말이 날까?”
결국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건우는 출근 시간이 다가오자 세면을 하고 옷을 입는다.
한숨도 못 자 피곤하긴 했지만 자신은 MSF의 봉사자 자격으로 이곳에 왔다. 개인 컨디션 조절 실패로 가뜩이나 일손이 부족한 병원에 구멍을 내긴 싫다.
간단히 필요한 물건만 작은 가방에 넣어 방을 나서려는 그때, 노크 소리가 난다.
나가려다 문 앞에 서서 시간을 확인하는 건우. 오전 7시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누가 찾아왔을까? 문을 열자, 아델이 정장 차림으로 서 있다.
“뭡니까?”
무심한 얼굴의 건우가 묻자 아델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침부터 미안합니다. 출근 시간 전에 주고 싶은 것이 있어서.”
아델이 가죽으로 감싼 다이어리 한 권을 내민다.
“무스타파의 소지품을 확인했던 것이 기억 나서 가져왔습니다.”
건우가 가만히 다이어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스타파의 소지품이요? 그걸 왜 제게 주십니까?”
아델이 다이어리로 건우의 가슴을 툭툭 치며 말했다.
“무스타파의 소지품이라고 했지, 그의 것이라곤 안 했습니다. 여기 당신 이야기도 있었던 게 이제 기억이 나버렸죠. 특별한 정보가 담긴 물건이 아니라 줘도 무방합니다. 가지세요.”
도대체 이자가 무슨 소릴 하는 걸까? 아델은 건우 품에 다이어리를 안겨놓고 돌아서며 손을 든다.
“당신 덕분에 살린 삼천의 군대. 그들의 목숨값이라고 생각하세요.”
아침부터 또 이상한 소릴 지껄이고 사라져 버린 아델. 우두커니 서서 다이어리를 바라본 건우가 문을 닫고 침대에 걸터앉은 후 가죽 다이어리의 끈을 열고 첫 장을 펼친 후 눈이 커진다.
“카, 카터의 일기장.”
건우의 손이 빨라진다. 내용은 별것 없다. 이곳에 온 후부터 쓴 일기장인지 하루 일상들이 기록되어 있고 환자의 치료 계획 등도 쓰여 있다.
아델의 말처럼 특별한 정보라곤 아무것도 없는 그저 그런 일기장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 입장의 이야기. 건우에게 자신의 은인이 남긴 마지막 일기장의 의미는 남다르다.
다이어리를 든 손을 바르르 떤 건우가 자신이 깨어난 이후의 날짜에 담긴 일기를 본다.
오늘은 건우가 유달리 힘이 없다거나, 혹은 오늘따라 재활 훈련을 열심히 해줘서 기분이 좋다는 내용들이 쓰여 있다.
1년이 넘는 재활 기간의 기록들과 끝까지 운동을 해낸 건우에 대한 대견함. 스스로에게 느끼는 뿌듯한 감정들이 글귀로 남아 있다.
침대에 앉아 죽은 은인이 남긴 글귀들을 우두커니 바라보는 건우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아델의 선물은 자신에게 큰 의미이다. 평생 간직해야 할 은인의 유품이니까.
사무엘에게도 보여는 줄 것이다. 하지만 결코 주지 않고 간직할 작정이다. 나중에 카터의 가족이 돌려받길 원한다면 그때는 줘야 되겠지만.
특이점이 없는지 대충 살펴보려 다이어리 끝을 잡고 여러 장을 한꺼번에 넘겨보는 건우. 특별히 일기장 사이에 뭔가 끼어 있거나, 눈에 띄는 내용은 없다.
그러다 맨 마지막 장에서 멈춘 손끝. 그것을 본 건우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카터의 좌우명인 것으로 보이는 단 한 줄의 글귀.
‘모든 답은 히포크라테스 선서 속에 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일기장의 맨 앞장이나 맨 뒷장에 자신의 좌우명을 적어두길 좋아한다. 카터도 그랬나 보다.
뼛속부터 의사인 카터는 좌우명도 의사의 그것이다. 위대한 의사의 숨결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다이어리를 소중히 닫아 가방에 넣어둔 건우가 방을 나서 복도를 걷는다.
“히포크라테스 선서.”
의대 시절에 하도 안 외워져서 선배들에게 혼이 난 적이 있다. 별로 길지도 않은 선언문인데 왜 그리 안 외워졌는지. 이 머리로 의대 공부는 어떻게 했는지 스스로에게 의문이 일 정도로 잘 외워지지 않았었다.
선서를 시험 문제로 내는 교수들을 보며 도대체 왜 이런 쓸모없는 일에 정력을 낭비하게 하는지 이해되질 않았다.
사실 대학 시절을 제외하고 인턴, 레지던트를 거칠 때까지 한 번도 써먹어 본 적이 없다. 전문의 시험을 본 후 임용될 때 한번 외웠던 것 말고는 인생을 살며 쓸 일이 전혀 없는 선언문이다.
기억할 수 있을까? 외워본 게 적어도 6년은 넘었던 것 같은데. 복도를 벗어나 계단으로 향하던 건우가 중얼거린다.
나의 생애를 인류 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
나의 은사에게 대하여 존경과 감사를 드리겠노라.
나의 양심과 품위를 가지고 의술을 베풀겠노라.
나는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
나는 환자가 나에게 알려준 모든 것에 대하여 비밀을 지키겠노라.
나는 의업의 고귀한 전통과 명예를 유지하겠노라.
나는 동업자를 형제처럼 여기겠노라.
나는 인종, 종교, 국적, 정당 관계 또는 사회적 지위 여하를 초월하여 오직 환자에 대한 나의 의무를 지키겠노라.
나는 인간의 생명을 그 수태된 때로부터 더 없이 존중하겠노라.
나는 비록 위협을 당할지라도 나의 지식을 안도에 어긋나게 쓰지 않겠노라.
나는 자유의사로서 나의 명예를 걸고 위의 서약을 하노라.
외워진다. 선배들에게 맞으면서 외웠던 보람이 있구나. 하긴 애국가도 평소에 전혀 부르지 않는데 계속 외우고 있는 걸 보면 한번 외우면 잘 잊혀지지 않는 무언가도 있는 모양이다.
원래의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BC5세기경 히포크라테스 학파에 의해 만들어진 혁명적인 개혁 선언이었다.
낙태와 독약 처방이 성행하고 환자를 자기에게 유인하기 위해 동료 의사에 대한 음해가 유행하던 시절 히포크라테스 학파의 의사들이 만들고 주장한 고대판 의사 윤리 선언이라 보면 된다.
이 선언은 후대에까지 전해져 내려와 의사들이 지켜야 할 전문 직업성과 의료윤리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카터 같은 위대한 의사도 고작 의대 시절 배우는 선언문을 마음속에 새겨두고 살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에 비해 한참이나 모자란 자신은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그저 요식행위로 생각할 뿐이다. 다이어리를 보고 나니 참 많은 반성을 하게 된다.
“이제부터라도 가슴속에 새기고 살아보자.”
모든 답은 히포크라테스 선서 속에 있다. 생각하면 할수록 간단하면서도 명확하고 직관적인 깨달음을 주는 한마디다.
숙소를 나서 포로수용소 쪽으로 가는 내내 카터의 말을 생각하며 걷던 건우가 문득 걸음을 멈춘다.
가만히 서서 고개를 숙인 건우가 중얼거린다.
“나는 인종, 종교, 국적, 정당 관계 또는 사회적 지위 여하를 초월하여 오직 환자에 대한 나의 의무를 지키겠노라.”
가만히 중얼거리는 건우. 잠시 입술을 깨문 건우가 다시 중얼거린다.
“나는 인간의 생명을 그 수태된 때로부터 더 없이 존중하겠노라.”
건우가 하늘을 노려본다.
“그게 당신의 답입니까, 카터?”
하늘 속, 구름 사이에서 카터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낸다. 평소처럼 웃고 있지 않지만 인자한 얼굴로 가만히 자신을 내려 보고 있다.
“상대가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지 않아도 나는 그래야 하는 겁니까?”
구름 속의 카터가 말을 거는 듯하다.
‘너는 의사이니까.’
하늘을 노려보는 건우가 한참이나 땅에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서 있다.
* * *
늦은 오후.
지하 감옥 앞을 지키는 군인이 하얀 가운을 입고 계단을 내려오는 두 인물을 보고 아랍어로 암호를 묻자, 여성 통역관이 말했다.
“이쪽은 지난번 아델과 함께 왔던 MSF 의사입니다.”
군인이 건우를 본다. 다행히 그때 근무를 서던 군인이다. 그가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정보부에서 지시가 있었습니다. 통과해도 좋습니다. 면회 시간은 15분입니다.”
통역이 말을 전하자 건우가 군인에게 고개를 까딱해 보인 후 통역관에게 말했다.
“무스타파와 할 말이 있습니다. 그는 영어가 가능하니 따라오지 않아도 좋습니다. 여기서 기다리세요.”
통역관은 지하 감옥에 들어가는 것이 싫은 참에 잘됐다 싶었는지 얼른 비켜난다.
군인이 열어준 철창을 지나 뚜벅뚜벅 걸어간 건우가 무스타파의 감옥 앞에 섰다.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무스타파는 안에서 건우 얼굴이 확인되는지 말했다.
“또 놀리러 왔나?”
어둠 속에 몸을 숨긴 무스타파. 그림자만 보이는 그를 가만히 노려본 건우가 말했다.
“아니. 놀리는 건 이제 됐어. 별로 재미도 없고.”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군.”
그림자 속의 무스타파가 말했다.
“하나 물어도 되겠나?”
“그래.”
“그때 내게 말했던 내 병 말인데.”
“음.”
“거짓말이었나? 단지 나를 당황시켜 작은 복수라도 할 작정이었던 건가?”
“그렇게 생각하나?”
그림자가 천천히 움직인다. 빛 속으로 기어 나온 무스타파의 얼굴을 본 건우가 숨을 들이켠다.
“너…… 얼굴이?”
한쪽 눈이 사라져 있고, 여기저기 터져 있는 건 예전과 같다. 달라진 건 새로 생긴 것 같아 보이는 멍들이다. 특히 오른쪽 광대뼈는 함몰되기 직전까지 무너져 있다.
도대체 얼마나 맞았길래 저리되었을까? 무스타파가 엉덩이를 질질 끌어 창살 앞으로 온 뒤 허무하게 웃었다.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참아냈다. 그리고 고문하는 녀석이 더는 못 견디겠다 판단할 때쯤 마음이 무너진 척 정보를 주었다.”
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 정보를 흘렸다고 들었다.”
무스타파가 입술을 깨문다.
“아델이 알아냈지. 그것 역시 네놈 때문이다.”
이제 알겠다. 거짓 정보로 많은 사상자가 나오자 화가 난 아델이 다시 무스타파를 고문한 것이다. 정부군이고 반정부군이고 다들 반쯤 미친놈들이다. 누가 악이고 누가 선인지 이젠 도저히 모르겠다.
원망에 찬 무스타파를 가만히 바라보는 건우. 말 없는 건우를 한쪽만 남은 눈으로 노려본 무스타파가 몸을 돌리며 말했다.
“이제 원망하기도 지쳤다. 나는 내가 바라던 영웅이 되지 못했다. 이대로 죽든, 아니면 비겁하게 살든 나는 이제 목표를 잃었다. 그러니 그만 가라. 너의 복수는 이만하면 됐다.”
건우가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그걸 왜 네가 정하지?”
“……”
“복수를 어떻게 할지는 내가 정한다. 그것도 명령하고 싶나?”
“……”
“지금 네 꼴을 봐. 이젠 네게 명령할 권한은 없다. 네게 남은 건 명령에 따라야 할 의무뿐이야.”
무스타파가 고개를 획 돌리며 으르렁거린다.
“놀리는 건 그만한다고 하지 않았나?”
건우가 어깨를 으쓱한다.
“난 지금 널 놀리고 있는 게 아니다.”
무스타파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그게 아니면 뭐지? 남자 새끼가 비겁하게 철창 뒤에 숨어서 입만 나불거리나! 복수를 하고 싶으면 주둥이만 놀리지 말고 직접 죽여라! 철창을 열지 못해 그러지 못한다고? 목을 내밀어줄 테니 졸라서라도 죽여! 그럼 되는 거다! 내 아주 얌전히 죽어줄 테니 당장 그리해라!”
무스타파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인생의 방향을 잃었다. 이제 죽고 싶은 모양이다.
건우가 그런 무스타파를 바라보다 입술을 뒤틀며 웃는다.
“그럼 재미없지.”
“…….”
건우가 허리를 숙여 무스타파와 눈높이를 맞추며 말했다.
“잘 들어, 무스타파.”
“…….”
“철창 뒤에 숨어 입만 나불거리는 건 남자답지 못해. 네 말이 옳다.”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가?”
건우가 무서운 눈빛으로 무스타파를 노려보며 말했다.
“내가 직접 네 모가지를 따주마. 카터의 분신과도 같은 메스로. 의사의 복수가 어떤 것인지 두 눈 똑똑히 뜨고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