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닥터 프랑켄슈타인-208화 (208/230)

닥터 프랑켄슈타인 208화

20. 샤먼의 신탁(15)

파티가 무르익고, 삼 개월이란 긴 시간 동안 함께하며 정이 쌓인 일행들이 서로 술잔을 부딪치며 우정을 다지는 시간이 깊어간다.

특히 Neighbors에 소속된 의료진들은 세계적인 병원에서 근무 중인 MSF의 의사들과 친분을 다지고 싶어 좀 더 적극적으로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다.

제일 활발한 혜선과 중곤을 중심으로 밝은 분위기가 유지되고 있는 파티장. 구석에 서서 사무엘을 째려보고 있는 건우의 눈빛은 여전히 의구심이 가득하다.

‘뭔가 있는데.’

그때 MSF 소속의 여의사가 술잔을 들고 다가온다. 평소 필요 없는 커뮤니케이션은 하지 않는 건우가 그녀를 힐끔 보곤 다시 사무엘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조용히 건우 옆에 선 의사가 말했다.

“다이안 비토(Dyanne Bito)입니다.”

응? 갑자기 뭐래? 건우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예?”

다이안이 씩 웃으며 잔을 든다.

“역시 제 이름은 모르시고 계셨군요. 삼 개월이나 함께 있었는데.”

“…….”

저기요, 난 Neighbors 소속 의사들 이름도 다 못 외웠거든요? 건우가 이상한 눈빛을 던지자 실소를 지은 다이안이 말했다.

“그냥, 이대로 보내면 후회할 것 같아 실례를 무릅쓰고 말을 걸었습니다, 닥터 모.”

이 분위기는 뭐냐. 로맨스 영화 같은 데서 나오는 소름 끼치는 작업 멘트 같은데.

“무슨 용무죠?”

다이안이 건우를 올려다보며 웃는다.

“존경한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습니다, 닥터 모.”

“…….”

“지난 삼 개월간 당신이 한 의료 행위들 대부분이 우리가 처한 열악한 상황에서 해내기 힘든 일들이었습니다. 그것을 해낸 것은 실력보단 의사로서의 의지가 대단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 같은 의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음.”

그럼 그렇지, 내 주제에 로맨스는 무슨. 건우가 팔짱을 끼고 시선을 돌린다.

“그렇군요.”

과찬입니다, 당신은 이미 의지가 깊은 의사입니다 따위의 말을 기대했던 다이안이 웃음을 터뜨린다. 삼 개월간이나 건우를 지켜봤기에 원래 이런 사람이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이안은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며 원래 있던 자리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린다.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던 건우가 슬쩍 그녀의 뒷모습을 본다. 이름을 보니 네덜란드 사람 같은데 생긴 건 이탈리아 사람처럼 생겼다.

어느 병원에서 근무하는 지나 물어봐 줄걸. 아, 병원 소속이 아닐 수도 있겠다. MSF 소속 의사들 중에 일부는 이직 대기 중이거나 잠시 쉬는 기간에 봉사를 오는 사람도 있으니까.

잠깐, MSF 소속? 건우가 돌아가는 다이안을 불렀다.

“저기요.”

내심 좀 더 대화를 하고 싶었던 건지 부름과 동시에 밝게 웃으며 돌아보는 다이안.

건우가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저기 뭐 하나 물어도 됩니까?”

다이안이 얼른 돌아오며 미소 짓는다.

“그럼요, 뭐든 물어보세요.”

건우가 슬쩍 멀리서 술을 퍼마시고 있는 사무엘을 힐끔거린 후 말했다.

“MSF의 다음 행선지가 어딥니까?”

기대했던 질문이 아니었는지 약간 실망스러운 표정을 짓는 다이안. 하지만 이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저희 팀의 활동은 여기가 마지막입니다.”

“아.”

뭐야, MSF 따라간다며? 남아메리카 간다고 했잖아? 잠깐 생각에 잠긴 건우가 다시 물었다.

“현재 남아메리카에서 봉사 중인 MSF 의료진들이 있습니까?”

“물론이죠, MSF는 세계 어디에나 있으니까요.”

하긴 몇천 명이나 되는 의료진들을 보유하고 있는 MSF니까 동시에 여러 국가에서 봉사하는 건 당연하겠지. 그럼 사무엘은 혼자 남아메리카에서 봉사 중인 또 다른 MSF에 합류하는 모양이다.

건우가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고맙습니다.”

“질문은 끝인가요?”

“어, 음.”

“더 하셔도 괜찮은데.”

잠시 로맨스를 꿈꾸며 이 여자가 지금 추파를 던지는 것인가 착각했었지만 다이안의 눈빛을 보니 의사로서 순수하게 교류하고자 하는 마음뿐인 것 같다.

괜히 혼자 속으로 북 치고 장구 친 것이 창피했던 건우가 머리를 긁적인다.

“음, 질문이라.”

뭐라 그래야 돼? 대뜸 몇 살이냐고, 어디 사냐고 물을 수도 없고. 여기가 감성 주점도 아니잖아? 질문할 거리를 찾던 건우의 시선에 잔을 높게 들고 건배 제의를 하는 사무엘이 들어온다.

그녀와의 연결고리가 저 곰밖에 없다는 것을 떠올린 건우가 말했다.

“사무엘과는 원래 아는 사입니까?”

“아뇨, 여기 와서 처음 뵀어요. 하지만 명성은 익히 들었죠. Mayo에 계신 분인걸요.”

그 병원이 유명하긴 하지. 닥터 카터도 그 병원 출신이었으니까. 그럼 이제 무슨 이야길 해야 되는 거지? 유일한 연결고리마저도 여기 와서 처음 봤다니 할 말이 없네.

건우가 이마를 잡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나도 참 사회성 없기는.’

혜선이는 처음 보는 사람과도 잘만 이야기하던데. 자신은 왜 환자가 아닌 사람과는 대화가 어려운 건지 모르겠다.

혀를 찬 건우가 한숨을 쉬며 팔짱을 낀다. 대충 아무 말이나 하다 재미없으면 가겠지. 여긴 이야길 나눌 사람이 충분히 많으니까.

아무 말이나 하자고 생각한 건우가 말했다.

“사무엘은 계속 봉사를 한다고 하더군요.”

“아, 들었어요.”

“그래요?”

“네, 통화하시는 거 들었거든요.”

음, 위성 전화를 사용했던 모양이구나. 아프리카에서 브라질에 전화를 할 수 있는 세상이라니. 참 좋아졌다.

팔짱을 낀 건우가 말했다.

“이제 11월 말이라 우리나라는 곧 기온이 영하로 떨어질 겁니다.”

“어머, 한국이 그렇게 춥나요?”

“네덜란드도 춥지 않아요?”

“11월이면 보통 7°C쯤 돼요.”

“우리나라보단 안 춥군요. 그런데 여기가 너무 더워서 그런지 빨리 돌아가고 싶습니다.”

“하하, 저도 그래요.”

“사무엘은 불쌍하네요, 또 더운 나라로 가야 될 텐데.”

다이안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렇게 안 더울걸요?”

이 여자. 남아메리카에 안 가 본 건가? 아무리 11월이라도 거긴 26~30°C 사이다. 아는 척하긴 좀 그러니 그냥 넘어가자.

그때 다이안이 말했다.

“제가 알기론 11월 평균기온이 16°C쯤인 걸로 알고 있어요.”

하, 아는 척 안 하려고 했는데.

“브라질 안 가 보셨어요?”

“네? 아…… 뭐 안 가 보긴 했어요. 왜요?”

“거기 날씨 꽤 더워요.”

“아…… 그렇군요. 근데 갑자기 브라질은 왜요?”

건우가 다이안을 돌아본다.

“사무엘이 브라질에 가는 거 아닙니까?”

다이안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아뇨?”

젠장, 어쩐지 아까 수상쩍게 굴더라니.

“거짓말이었군, 젠장 할 곰 새끼.”

한국어로 중얼거린 건우가 다이안을 보았다. 눈치를 보니 이 여잔 행선지를 알고 있는 모양이다.

“제가 잘못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전 사무엘이 브라질로 가는 줄 알았거든요.”

“하하, 그러셨구나. 아니에요, 그는 시리아로 가요.”

건우의 눈이 더없이 커졌다. 팔짱을 푼 건우가 눈을 크게 뜨고 다이안을 바라본다.

“어디라고요?”

“시리아요.”

건우의 눈썹이 일그러진다. 악몽 같은 그 이름이 다시 자신을 괴롭힌다.

“시리아…….”

건우가 다시 멀리 떨어진 사무엘을 보며 인상을 쓴다. 이래서 거짓말을 한 거였구나. 그는 자신이 시리아에서 어떤 일을 당했는지 알고 있으니까. 괜히 그 이야길 꺼내 자신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건우가 입술을 깨물고 짧은 한숨을 쉰다.

‘그래, 내가 안 가면 된 거지. 사무엘이 어딜 가든 그건 내 알 바 아니다.’

건우가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핸드폰으로 날씨 검색을 해본 다이안이 웃으며 액정을 보여준다.

“이거 보세요, 시리아의 11월 기온은 평균 16°C래요.”

관심 없어, 이 아가씨야. 힐끔 액정을 보곤 시선을 돌린 건우. 그런데 그녀의 액정에 떠오른 화면에 뭔가가 스쳐 가는 것이 보인다.

순간 고개를 획 돌린 건우가 다이안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우악스럽게 빼앗는다.

“자, 잠깐만 줘봐요!”

“아?”

핸드폰을 뚫어지게 보는 건우의 얼굴이 더없이 일그러진다.

시리아의 날씨를 검색한 화면. 그 속에 국기가 그려져 있다. 맨 아래부터 검은 줄, 하얀 줄, 붉은 줄이 가로로 그려져 있고, 하얀 줄 속에 두 개의 별이 그려져 있다.

“검붉은 피의 가운데 두 개의 별…… 제기랄.”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샤먼의 신탁.

‘검붉은 피의 가운데 두 개의 별. 무의식 상태에서 눈을 뜨는 강인한 자가 안내하는 별에게로 가라.’

자신의 것도 아닌 핸드폰을 구겨 버릴 듯 꽉 붙잡은 건우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진다.

눈치를 보는 다이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기, 닥터 모. 제 핸드폰 좀.”

“…….”

말없이 핸드폰을 돌려준 건우가 몸을 획 돌려 파티장을 벗어났다. 호텔 테라스에 나와 발로 벽을 찬 건우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처음부터 신탁인지 개 나발인지 신경 쓰면 안 되는 거였어! 젠장, 젠장!”

하지만 건우의 행동은 이율배반적이다. 신경 쓰지 않을 거면 왜 화를 내고 있는가?

몇 번이나 벽을 걷어차던 건우가 차츰 동작을 멈추며 고개를 숙인다. 스스로도 자신의 행동이 이치에 맞지 않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건우의 눈에 꽉 쥐고 있는 자신의 주먹이 살짝 떨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시리아.”

나는 왜 이렇게 화를 내고 있는 걸까?

샤먼의 신탁 따위, 처음부터 믿지도 않았잖아?

아프리카 무속인이 그런 말을 했다고 그 지옥에 다시 기어들어 가는 미친놈이 어디 있어?

건우가 눈을 들어 하늘을 가득 메운 별을 보았다. 시리아의 감금 생활 중에 봤던 별들과 지금 저 별들은 같은 별들일까? 마음을 어지럽히는 잡념들이 자꾸만 떠오른다.

평생 시리아라는 말만 들어도 식은땀을 흘리고 살 것인가?

나는 나의 은인인 카터가 어디 묻혀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으로서 도리가 아니다.

건우가 입술을 깨문다. 사실 카터의 주검이라도 찾아 묻어주고 싶은 마음은 예전부터 가지고 있었다. 말년 할머니 말처럼 은인의 묏자리 한번 찾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하…….”

한숨을 푹푹 쉬고 있는 건우. 바로 그때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테라스의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다이안에게 들었습니다.”

사무엘의 목소리다. 이상 반응을 보인 건우가 걱정된 그녀가 사무엘에게 상황을 알린 것이다.

목소리로 상대를 파악한 건우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미안해할 건 없습니다. 당신이 어딜 가든 당신의 자유입니다. 그리고 그걸 내게 숨긴 것이 배려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

사무엘이 말없이 걸어와 건우 옆에 섰다.

“예전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

“정부군이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반정부군은 국경 부근까지 밀려났고, 정부군은 영토의 80% 이상을 수복했습니다.”

건우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예전에 반정부군의 진영들도 정부군이 점령한 겁니까?”

“많은 부분이 그리되었습니다.”

“북쪽 전선은요?”

“북쪽으로 150㎞가량 전진했다고 들었습니다.”

북쪽으로 150㎞. 건우가 눈가를 떨며 물었다.

“하사카…… 거긴 어떻게 됐습니까?”

사무엘이 슬픈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현재 정부군이 점령 중입니다. 그리고 하사카의 동쪽 전선도 마찬가집니다. 그곳이 바로 당신이 감금되어 있었던 곳이죠.”

사무엘이 팔짱을 끼며 하늘을 바라본다.

“그리고 나의 친구, 카터가 죽은 곳이기도 하고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