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프랑켄슈타인 207화
20. 샤먼의 신탁(14)
신경 쓰이는 모기가 방에 들어와 밤새 왱왱거리듯 자꾸만 샤먼의 신탁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히는 바람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건우.
부스스한 얼굴의 그가 떠나는 날 아침이 밝자, 이젠 스스로 걷게 된 하지와 함께 그의 집 앞에 섰다.
다른 인력들은 막바지 짐 싸기에 여념이 없어 함께 오지 못했지만 수술 전후로 늘 함께했던 지수와 로이드는 함께 왔다.
아직 병원에서 집까지 오는 먼 길을 걷는 것은 힘겨운지 조금 헐떡이는 하지. 그럼에도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의 발걸음은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하늘에 있는 아내와 아이가 자신을 보았을 때 마음 아파하지 않도록. 남보다 느렸지만 끊임없이 걸어 집 앞에 도착한 하지가 심호흡을 한 뒤 집 문을 열었다.
오랜 기간 비어 있었던 집. 악취로 가득했던 집은 어느새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있다.
혼자 있는 하지였기에 당연히 집 안 꼴이 말이 아닐 거라 생각했던 건우. 아직 무리하면 안 되는 하지였기에 여차하면 청소라도 도우러 따라왔던 건우가 집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놀란다.
“뭐야, 왜 이렇게 깨끗해?”
하지의 집에 처음 와본 지수는 고개만 갸웃거린다. 하지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샤먼님이 왔다 가셨군요.”
건우가 놀랍다는 듯 말한다.
“사람들 앞에서 폼만 잡는 할머니가 청소도 해줍니까?”
하지가 웃으며 말했다.
“샤먼은 우리 부족의 어머니 같은 분입니다. 아픈 사람들의 집 모두에 신의 연기가 꺼지지 않게 매일 방문해 주셨습니다. 이번에도 제가 집으로 돌아오게 될 걸 아시고 깨끗하게 관리해 주신 모양입니다.”
허, 자꾸 이상한 소릴 해서 사람 신경 쓰이게 하는 할머니가 부족민들에겐 이렇게 존경받는 사람이었구나. 하긴 이렇게 해주면 없던 존경심도 생기겠다.
입맛을 다신 건우가 하지의 손을 끌어다 집 안의 가죽 침대에 앉혔다.
“자, 잘 들어요. 로이드,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거 제대로 알아듣게 통역 잘해줘요. 중요한 거니까.”
로이드가 바짝 다가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본 건우가 하지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수술 직후 1~2개월까지는 빠른 회복과 합병증 예방, 원인 질환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 충분한 단백질과 비타민, 무기질 등의 보충이 필요합니다. 병원에서 매일 생선 먹은 거 기억나죠?”
“예.”
“생선은 이제 됐어요. 그거 잡으러 강에 갔다가 병 낫기도 전에 악어한테 잡아먹히겠네. 대신 계란 같은 거 구할 수 있어요?”
“새알 말이죠?”
“맞아요, 그건 구할 수 있죠?”
“예, 사냥을 나가지 않아도 바닥에 둥지를 트는 새알을 찾는 건 쉽습니다.”
“좋아요, 오늘부터 매 끼니마다 그걸 먹는 겁니다. 샤먼 할머니가 사는 집에서 우측으로 첫 번째 집에 염소가 있던데. 알죠?”
“압니다.”
“거기 부탁해 놨어요. 매일 염소 우유를 가져다줄 겁니다. 그거랑 같이 마셔요.”
자신을 위해 다른 부족민들에게 부탁을 하고 다녔을 의료진들을 생각하니 목이 메오는 하지가 고개를 숙인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건우가 그런 말은 됐다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잘 먹어야 됩니다, 간식도 챙겨 먹어요. 여기서 구하기 쉬운 걸로…… 일단 제일 좋은 건 과일인데. 로이드, 여기서 과일 구하기 쉬워요?”
“아뇨, 어렵습니다.”
무척이나 건조한 나미비아의 기후. 정글이라도 가까우면 과일을 구하기 쉽겠지만 이곳은 사막에 가까운 곳이니 과일을 구하기 매우 까다로울 것이다.
그때 열어둔 문밖에 전에 병원에 와서 검사를 받았던 사냥꾼 두 명이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가 반가운 표정을 짓자, 사냥꾼들이 뒤에 숨기고 있던 바구니를 쓱 내민다.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 과일을 본 하지가 놀라며 물었다.
“이걸 다 어디서 났어?”
사냥꾼들이 씩 웃으며 말했다.
“샤먼이 마을 사람들을 동원했다. 여기서 반나절 정도 걸어서 구해왔다.”
“…….”
감동받은 얼굴의 하지.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 준 사냥꾼이 말했다.
“빨리 돌아와라. 마을 최고의 사냥꾼이 쉬니 사냥이 어렵다.”
“…….”
하지가 결국 눈물을 보인다. 자신을 위해 마을 사람들이 노력해 구해준 과일 바구니를 물끄러미 보며 울고 있는 하지.
팔짱을 끼고 로이드를 통해 상황을 전달받은 건우가 고개를 끄덕인다. 샤먼 할머니 이제 보니 꽤 좋은 사람이었네.
건우가 지수를 쓱 보며 말했다.
“로이드랑 같이 하지와 이야기 좀 더 하고 돌아와요. 난 병원 가서 정리 도울 테니.”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게 배려해 준 것이 감사한지 고개를 숙여 보이는 지수. 그녀 입장에서도 환자와 간호사를 떠나 꽤나 정이 쌓인 모양이다. 아마도 앞으로 용기를 내 더 나아질 수 있게 힘을 북돋아주겠지.
건우에겐 차라리 환자 배를 가르고 수술을 하는 쪽이 편하지, 이렇게 말로 마음을 전하고 용기를 낼 수 있게 하는 건 질색이다. 그런 건 지수가 알아서 하는 편이 낫다.
두 사람을 두고 홀로 병원으로 돌아온 건우. 중곤이 녀석이 워낙 잘 챙겨놔서 그런지 Neighbors 쪽의 짐은 이미 거의 다 버스에 실려 있다. MSF는 알 바 아니고.
대충 마지막 체크를 마친 건우와 사람들이 버스에 탑승하려 하는 그때, 부족 마을 쪽에서 마을 사람들 수백 명이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인다.
버스에 타려던 의료진들이 멈춰 그들을 바라보자, 하나같이 밝은 웃음을 입에 걸고 손을 흔드는 부족민들이 보인다.
이미 버스에 탔던 중곤과 혜선이 창문을 활짝 열고 손을 흔들며 소리친다.
“다들 건강해요! 이젠 아프지 말고요!”
“또 아프면 다시 올게요!”
다시 온단다. 그렇게 오기 싫어하던 혜선이 녀석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손을 흔들며 상대가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쏟아내고 있다.
해외 봉사가 처음이라 그렇지 한 번 해본 사람들은 이 뿌듯한 보람을 잊지 못한다. 그래서 다시 해외 봉사를 오게 되는 것이다. 혜선이도, 중곤이도 이번 기회로 다시 해외 봉사를 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부족민들은 일정 이상 다가오지 않고 멀리서 손을 흔든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샤먼이 처음 만났던 모습 그대로 걸어 나오고 있다.
건우가 로이드에게 눈짓하자 얼른 통역을 위해 다가오는 로이드. 건우 앞까지 천천히 걸어온 샤먼이 처음과 다르게 부드러워진 눈매로 키 큰 건우를 올려다본다.
건우가 먼저 샤먼의 팔을 잡아 돌려세운 뒤 등의 상처를 확인하며 말했다.
“약 드린 거 있죠? 그거 앞으로 일주일 정도만 더 발라요. 알았죠?”
“…….”
“잘 발라야 됩니다, 할머니 잘 씻지도 않죠? 아니, 잘 씻는다고 해도 강물 퍼다가 씻잖아요. 거기 세균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요? 꼭 매일 발라야 됩니다, 알았죠?”
마지막까지 의사로서 샤먼을 대하는 건우.
샤먼이 조용히 몸을 돌려 건우를 본다.
“신의 음성에 대해 생각해 보았나?”
건우의 얼굴이 와락 구겨진다. 머리를 마구 긁은 건우가 말했다.
“그것 때문에 밤에 잠 한숨도 못 잤거든요? 이제 그만 좀 하시죠. 가뜩이나 신경 쓸 일 많은데.”
“끊임없이 생각해라. 신의 음성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그래야만 한다.”
“할머니가 그 신의 음성인지 뭔지를 제일 잘 해석하는 사람이라면서요. 좀 알아듣기 쉽게 말해줘요.”
“나도 모른다. 인간을 향한 신탁은 원래 음성이 내려진 본인만이 해석할 수 있다.”
“후, 짜증 나. 고민을 하든 국을 끓여 먹든 제가 알아서 할게요. 약이나 잘 발라요.”
샤먼이 자기 관자놀이를 톡톡 치며 말했다.
“신은 허튼소릴 하지 않는다. 끝까지 고민해라.”
“알았다고요!”
“가거라.”
“하…….”
건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후 버스에 올라탔다. 시동이 걸리고 곧 출발하려는 버스를 물끄러미 보는 샤먼.
맨 앞자리의 창문이 쓱 열리고 무심한 얼굴의 건우가 얼굴을 내민다.
“할머니.”
“왜?”
“오래 살아요.”
“…….”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다음에 다시 왔을 때 할머니가 없으면 좀 서운할 것 같아서.”
“…….”
샤먼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린다. 건우가 창문을 닫으며 외친다.
“기사님! 이제 출발합시다!”
먼지를 뿌리며 출발하는 버스. 멀어지는 버스들을 가만히 바라보는 샤먼이 주름진 눈가를 살짝 떨며 중얼거린다.
“신탁이 내려진 위대한 자. 부디 길을 잃지 않길.”
* * *
1개월 2주 후.
춤크(Tsumkwe)를 거쳐 솔리테어(Solitaire)에서의 봉사활동을 끝내고, 나미비아의 수도이자 대도시인 빈트후크(Windhoek)에 돌아온 일행들의 행색은 거지꼴이 따로 없다.
변변한 샤워 시설이 없는 자원봉사 현장이었기에 수도의 호텔에 도착한 의료진들 전원이 가장 먼저 한 건 샤워였다.
대한민국처럼 대중목욕탕이 있는 곳이었다면 모두 한 번에 들어가 씻었겠지만, 호텔 샤워장을 번갈아 이용해야 했기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
내일이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기에 마지막 밤에 파티를 하기로 한 Neighbors와 MSF의 인력들은 간만의 샤워를 즐긴 후 만찬을 할 생각에 다들 들떠 있다.
2인 1실을 사용하는 다른 의료진들과 달리 1인실을 사용하는 건우와 사무엘이 제일 먼저 도착해 아무도 없는 파티장 가운데에 앉아 샴페인을 마시고 있다.
샴페인을 맥주 마시듯 벌컥벌컥 마셔대는 사무엘이 한 잔을 시원하게 비우고 입을 닦으며 말했다.
“캬! 얼마 만에 맥주가 아닌 술을 마셔보는 건지. 한잔하시죠!”
샴페인을 콸콸 부어주는 사무엘. 마지막 날이다 보니 긴장이 풀린 건우가 사양하지 않고 잔을 받는다.
잔을 가득 채운 사무엘이 건배를 하며 말했다.
“삼 개월간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하하! 건배합시다!”
잔을 부딪치곤 또 한 번에 샴페인을 비워 버리는 사무엘.
이놈은 목 바로 아래부터 위장이 시작되는 모양이다. 무슨 술을 저렇게 먹어대는지. 뭐, 이제 볼 날도 별로 없으니 넘어가자.
건우가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미국으로 돌아가는 겁니까?”
“아뇨, 당분간 MSF와 함께할 생각입니다.”
“음.”
MSF는 일 년 내내 해외 봉사를 하는 단체이다. 또한 지금 현재도 세계의 어딘가에서 MSF의 의사들이 활약하고 있다.
“다음 행선지는 어딘데요?”
샴페인을 마시던 사무엘이 멈칫한다. 그러더니 슬금슬금 자신의 눈치를 본다.
눈을 가늘게 뜬 건우가 물었다.
“어디로 가길래 그래요?”
“어, 그게. 하하! 아마 남아메리카 대륙일 겁니다.”
“아마?”
“하하…… 맞아요. 남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어디요?”
“그, 그게 브, 브라질이던가?”
뭐지, 이 삼류 연극배우도 안 할 것 같은 어색한 연기는.
건우가 좀 더 캐물으려 하는 그때, 아직 젖은 머리를 한 혜선이 중곤과 함께 달려 들어온다.
“와!!! 진짜 시원해! 교수님, 샤워하셨어요? 우리 몇 개월 만에 제대로 샤워하는 거죠? 따뜻한 물이 이렇게 소중하단 걸 처음 알았어요!”
잠깐 혜선과 중곤에게 시선을 준 사이 사무엘이 슬쩍 일어나 자리를 피하는 것이 보인다. 뭔가 수상한데?
그대로 사라져 버렸으면 따라갔겠지만 저쪽에 MSF 의료진들이 들어오는 것을 맞이하러 가는 듯해 그냥 둔 건우. 하지만 계속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던지길 잊지 않는다.
자신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황급히 시선을 돌리는 꼴이 더욱더 수상하다. 저 곰 아저씨가 뭘 잘못 먹었나.
‘뭐야, 갑자기 왜 저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