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닥터 프랑켄슈타인-203화 (203/230)

닥터 프랑켄슈타인 203화

20. 샤먼의 신탁(10)

중환자실로 이동한 하지가 깨어난 건 수술 종료 16시간이 지날 무렵이었다.

가늘게 뜬 눈으로 잠깐 사라졌던 기억을 더듬는 하지. 중환자실이라 창문은 없지만 유리문 밖으로 보이는 복도 쪽 창문이 보인다.

지금은 몇 시일까? 창밖이 어두운 걸 보니 밤인가 보다. 아침 일찍 수술에 들어갔다고 했는데 너무 오래 자버린 것 같다. 하늘빛을 보니 늦은 밤보단 새벽에 가까운 시간 같다.

아무도 없겠지? 조금 더 자야 할까? 어차피 마스크 같은 걸 쓰고 있어서 소리도 못 내는 것 같은데.

아직 온전히 돌아오지 않고 있는 의식 덕에 하지 않아도 될 고민을 하는 하지.

바로 그때 그의 귀로 지난 2주간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눴던 지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지. 일어나셨네요.”

“…….”

그녀의 말이 무슨 말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낮은 음성임에도 불구하고 진득한 반가움이 묻어 나오는 말투이다. 이젠 그녀의 목소리만 들어도 안심이 된다.

“어으, 어어…….”

“아아, 괜찮아요, 여긴 중환자실이고요, 하지의 수술은 잘 끝났어요.”

“어…….”

서로 말은 통하지 않지만 눈빛을 교환하는 두 사람. 신뢰를 바탕으로 형성된 두 사람의 커뮤니케이션은 통역 없이 어느 정도 통하는 지경이 되었다.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는 하지가 눈빛으로 말을 건다.

‘나 이제 나을 수 있는 건가요?’

하지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지수가 싱긋 웃으며 눈으로 말한다.

‘그럼요, 우리 교수님이 최선을 다하셨으니까요.’

‘지금 새벽인 것 같은데 안 피곤해요?’

‘에이, 괜찮아요. 아까 하지 옆에서 조금 잤어요.’

‘수술도 같이 들어갔을 텐데 아침부터 지금까지 내 옆에 있었나요?’

‘그럼요, 난 당신이 다 나을 때까지 여기 있을 거니까.’

눈을 맞추고 무언의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

유리문 밖에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인영이 있다. 바로 집도의인 건우이다.

재활을 하며 서로에게 무한한 신뢰를 쌓은 두 사람을 굳이 방해할 까닭이 없었던 건우는 하지가 눈을 떴다는 사실을 확인하곤 몸을 돌린다.

굳이 앞으로 관리를 어찌하라는 둥 쓸데없는 소릴 하지 않아도 지수라면 알아서 잘할 것이다.

실력이 부족한 이에게 하는 조언은 가르침이지만, 지수 같은 간호사에게 하는 조언은 잔소리일 뿐이니까. 몸을 돌려 복도를 걷는 건우가 시간을 확인한다.

‘새벽 두 시 반이네, 벌써.’

수술 때문에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를 해 그런지 무척 피곤하다.

지수도 마찬가지일 텐데 그녀는 밤새 하지의 곁을 지키겠지. 어쩌면 수술만 하고 자리를 떠 휴식을 취한 자신보다 간호사인 지수의 노력과 정성이 더 컸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모든 수술이 그런 것일지도 모르고.’

단지 나미비아라는 곳의 봉사활동이라는 점이나, 제한된 시간 내에 증량을 이뤄내 수술이 가능한 몸으로 끌어올리는 행위들을 제외하고도 지수의 희생정신은 언제나 대단했다.

자신 같은 의사들은 수술을 끝내면 하루 한 번쯤 환자를 찾아가 간호사가 밤새 기록한 차트를 보고 지시만 내린다.

환자와 대화를 해봐야 몇 분, 아니, 몇 초도 안 할 때도 많다. 자신에게 배당된 환자는 한 명이 아니니까.

어쩌면 환자의 병을 고치는 건 의사가 아닐지도 모른다. 나쁜 부분을 도려내는 것은 의사지만 그런다고 환자가 건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은 환자 본인의 의지에 달렸다고 말하지만 그 의지를 실천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간호사들의 도움이다.

친절한 그녀들의 미소와 따뜻한 말 한마디가 환자들에겐 큰 위로와 힘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의료진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모두 의사다. 모두가 환자의 쾌유를 위해 각자의 일에 최선을 다하니까.

“돌아가면 간호사님들께 더 잘해줘야겠네.”

복도 끝을 돌아가며 중얼거리는 건우. 그때 그의 앞에 중곤과 혜선의 얼굴이 불쑥 튀어나온다.

“교수님!”

“와, 씨! 깜짝이야!”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친 건우가 싱글거리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곤 다시 한번 시간을 확인한다. 인상을 팍 쓴 건우가 두 사람을 쏘아보며 말했다.

“몇 신데 안 자? 너희들이 밤에 잠 안 잔다고 혼날 나이냐? 내일 진료하려면 자야 될 거 아냐?”

혜선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좀 자고 나왔어요. 하지가 걱정이 되어서 보러 가는 길이었고요.”

중곤이 머리를 긁는다. 혜선의 말처럼 조금이라도 잤는지 머리에 까치집을 짓고 있다.

“교수님도 못 주무셨군요? 하긴 아직 환자가 안 깨어났으니.”

건우가 체통 없이 놀라서 물러났던 스스로를 떠올리며 살짝 붉어진 얼굴로 옷을 턴다.

“방금 깼다.”

중곤과 혜선의 얼굴이 확 밝아진다.

“오!!”

“언제요? 조금 전에요?”

건우가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래, 가서 봐라.”

중곤과 혜선이 신이 나서 달려간다.

핀잔을 주긴 했지만 자신이 수술한 환자 걱정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새벽에 나온 녀석들이다. 아직 실력은 모자라지만 장차 좋은 의사들이 될 것이다.

물끄러미 달려가는 두 사람을 보던 건우가 다시 몸을 돌렸다가 또다시 체통 없이 놀라며 뒷걸음질을 친다.

“와, 씨바!”

이번에는 진짜 놀랐다. 혜선과 중곤처럼 얼굴을 불쑥 내민 건 아니지만 복도를 꽉 채우는 검은 그림자가 눈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놀라게 하려고 한 건 아니었습니다만.”

건우가 인상을 구겼다.

“그 덩치로 새벽에 돌아다니면 놀라는 게 당연한 것 아닙니까?”

맥주를 든 사무엘이 관자놀이 부근을 긁으며 겸연쩍은 표정을 짓는다.

“미안하군요, 그냥 화장실에 가는 길이었는데.”

건우가 놀란 가슴을 어루만지며 한숨을 쉰다.

“알았으니 화장실이나 가요.”

사무엘이 거구를 움직여 화장실 쪽으로 가다 손에 들고 있던 맥주 캔을 들어 보인다.

“잠이 안 오시면 한잔하시겠습니까?”

“…….”

빨리 자야 내일 진료도 소화할 수 있다고 답하려던 건우가 입맛을 다신다. 시원한 맥주 한잔을 하고 자면 더 잠이 잘 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잠깐 고민하던 건우가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딱 한 캔만 하죠.”

사무엘이 씩 웃으며 말했다.

“화장실만 다녀와서 맥주 들고 방으로 찾아가죠.”

잠시 후 건우의 방.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사무엘을 기다리던 건우가 노크 소리를 듣고 문을 연다. 키가 꽤 큰 건우가 위를 올려다본다.

참, 요즘은 자주 보는데도 도무지 이 거구는 적응이 안 된다. 사람이 서 있는데 문이 꽉 차 보이다니. 이 사람은 진짜 조상 중에 곰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평소 같은 시원한 웃음은 아니지만 미소를 짓고 있는 사무엘이 맥주 캔을 들어 보인다.

“한잔 같이하죠.”

맥주 캔을 전해 받은 건우가 황당한 얼굴이 된다. 사무엘이 들고 있을 땐 작은 캔이라고 생각했는데 받고 보니 맥주 캔 중에 가장 큰 사이즈였기 때문이다.

손이 워낙 커서 그가 들고 있으니 작아 보였던 모양이다. 이제 이런 걸로 놀라기도 지겨운 건우가 맥주를 따 한 모금 마시며 창턱에 앉는다.

별이 가득 찬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맥주를 마시던 건우가 문득 낮에 했던 대화를 떠올리곤 고개를 돌린다.

침대 옆에 있는 작은 의자에 간신히 몸을 끼워 넣은 사무엘이 맥주를 퍼마시고 있는 걸 본 건우가 말했다.

“본인 의사 물어봤습니까?”

“…….”

맥주를 퍼붓다가 멈칫하는 사무엘. 곁눈질로 건우를 본 그가 남은 맥주를 한 번에 털어 넣곤 캔을 구겨 버린다.

“솔직히 말해봐요.”

“뭘요?”

“일부러 그랬죠?”

“뭘 일부러 그래요?”

“킴, 그녀에게 스카우트 제안해 보라고 했던 거.”

“…….”

내가 왜? 음, 근데 저 표정을 보니 거절당했군. 아쉽겠어, 근데 왜 내가 기쁘지? 건우가 슬그머니 새어 나오는 웃음을 숨기며 짐짓 모른 척하는 얼굴로 말했다.

“제가 왜 일부러 그러겠습니까? 왜요, 거절당했어요?”

“하…….”

사무엘이 뒷주머니에서 또 다른 맥주를 꺼내 딴 후 한 번에 반이나 들이켠다.

“크…… 보기 좋게 거절당했습니다. 살면서 요즘같이 사람들한테 거절만 당해보는 건 처음 같군요.”

필사적으로 미소를 참은 건우가 물었다.

“연봉 얼마 제안했습니까?”

사무엘이 건우를 째려본 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연봉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Mayo의 간호사들에 견주어도 상위레벨의 연봉을 제시했고, 인센티브도 따로 챙겨줄 거라고 했는데도 거절당했죠.”

허허, 그래? 지수 씨도 돈에 움직이는 타입이 아니었구나. 근데 뭐…… 그게 나쁜 건 아니잖아? 사람이 돈 많이 벌겠다는 게 뭔 잘못이야? 나쁜 짓 하는 것도 아닌데.

“그럼 왜 거절했답니까?”

사무엘이 이를 갈며 건우를 노려본다.

“다른 사람들과 같은 이유였습니다.”

“…….”

그래서 저렇게 노려보는 것이었군. 뭔가 미안하면서도 기분이 좋아지는 오묘한 느낌인데. 갑자기 맥주가 맛있게 느껴지는 건 착각인가?

딱히 더 할 말이 생각나지 않은 건우가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작게 웃는다. 그의 입장에서도 지수의 힘은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기분이 좋아지고 보니 하늘의 별들도 더 아름다워 보인다. 뒤에서 이를 가는 사무엘이 째려보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뭐 어떤가? 내 기분만 좋으면 됐지.

천천히 마시던 맥주가 바닥을 보일 때쯤 건우가 다시 사무엘에게 고개를 돌린다.

“아, 그런데……. 헉.”

얼굴이 벌게진 사무엘이 전과 같은 포즈로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문제는 테이블 위에 다 마신 맥주 캔이 열 개나 쌓여 있다는 것이다. 자기 손에 들린 캔을 바라본 건우가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그걸 다 어디로 가져온 겁니까? 들어올 때 못 봤는데.”

사무엘이 여전히 건우를 원망 어린 눈초리로 째려보며 일어나 돌아서자, 갈색 카고 바지에 주렁주렁 달린 주머니들이 보인다. 워낙 큰 사이즈의 바지라 그런지 주머니들도 엄청 크다.

“여기다 넣어서 왔죠.”

대단하다, 이 아저씨. 자신이 먹은 것까지 큰 맥주 캔이 11개나 들어 있었단 건데. 그걸 다 달고도 평상시처럼 움직일 수 있다니.

아직 자신에 대한 원망이 줄어들지 않은 눈빛을 보곤 살짝 미안한 생각이 든 건우가 화제를 돌린다.

“내일 샤먼과 담판을 지을 겁니다.”

환자 이야기가 나오자 눈빛이 바뀌는 사무엘.

“안 그래도 일정상 이쯤엔 나머지 중증 환자들을 봐야 한다고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건우가 고개를 끄덕인다.

“내일 병원으로 모시고 와서 하지를 보여줄 겁니다. 상황 설명을 하고 바로 나머지 중증 환자도 봐야죠.”

“하얀 연기가 나는 집이 총 몇 곳이었죠?”

“하지의 집을 제외하고 네 곳 남았습니다.”

사무엘이 손바닥을 비비며 일어났다.

“좋습니다, 닥터 모는 하지의 회복에 집중하세요. 나머지는 우리가 맡겠습니다.”

뭐,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괜찮겠습니까?”

사무엘이 실소를 짓는다.

“나도 세계 최고라고 불리는 병원 소속 의사입니다만.”

아차, 이 아저씨 그냥 곰이 아니라 엄청난 병원의 의사였지. 자꾸 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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