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프랑켄슈타인 189화
19. 나미비아(9)
건우가 진료 중인 간이 진료소에 혜선이 들이닥쳐 소리친다.
“교수님! 큰일 난 것 같아요!”
감기 증상이 있는 원주민 아이가 코를 훌쩍이며 돌아보자, 건우가 아이 고개를 다시 자신 쪽으로 돌려세우며 말했다.
“야 너도 참 대단하다. 이렇게 건조하고 더운 나라에 사는 녀석이 뭔 감기에 걸리냐?”
감기가 춥다고 걸리는 것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는 건우이지만 아프리카의 기후에서 감기에 걸리기 힘들다는 건 사실이다.
여기 와서 일주일 동안 봉사를 하며 감기에 걸린 아이는 처음 본다. 소리를 질렀지만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건우 덕에 몸이 달아오른 혜선이 발을 동동 구른다.
“교수님! 진짜라니까요! 중곤 선배가 빨리 교수님 모셔오래요.”
건우가 청진을 하며 물었다.
“왜?”
“누, 누가 찾아왔어요.”
“누가?”
“모, 몰라요!”
건우가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청진을 마친 건우가 약 처방을 쓰며 말했다.
“누가 왔는지도 모르는데 뭐가 큰일 났다는 거야?”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니까요? 막막 얼굴에 주황색 화장을 하고 온 몸에 새 깃털을 잔뜩 꽂은 할머니라고요! 목에 짐승 뼈로 만든 목걸이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데 걸을 때마다 뼈 부딪히는 소리가 나요! 완전 소름 돋게 생겼다니까요!”
건우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린다. 며칠 전 로이드가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환자를 설득해 치료를 받게 하는 건 좋은 일이지만 토속신앙을 믿는 마을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람들끼리 싸우는 거야 그렇다 치는데 진짜 문제는 샤먼이 직접 움직일 땝니다. 만약 샤먼이 직접 찾아와 부족민들에게 이 병원을 찾지 말라 명령해 버리면 그 날로 봉사는 끝이에요. 아무리 기다려도 개미 새끼 한 마리 안 찾아올 겁니다. 토속신앙은 맹목적이니까요.’
혜선이 말한 노파의 생김새로 미루어 짐작했을 때 자신을 찾아온 건 이 마을의 샤먼일 가능성이 높다. 잠시 고민하다 약 처방을 마저 쓴 건우가 혜선에게 처방전을 내밀며 말했다.
“약사님한테 갖다 줘, 애 데리고 가서 약 먹이고.”
상황이 급한 건 맞지만 의사는 언제나 환자가 우선이다. 건우 밑에서 배운 혜선이 얼른 꼬마 아이 손을 잡고 약사가 있는 방향으로 뛰어가는 것이 보인다.
목에 걸고 있던 청진기를 내려놓은 건우가 시간을 본다. 이제 막 오후로 접어드는 시간이다. 슬며시 몸을 일으킨 건우가 병원 복도로 나오자, 소식을 듣고 나온 스태프들이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다.
소란해진 상황에 밖으로 나와 상황을 보던 사무엘이 굵은 팔로 팔짱을 끼고 있다 건우가 나오는 것을 보고 말했다.
“닥터 모.”
“음.”
“마을의 샤먼이 찾아온 것 같습니다. 밖에서 병원을 기웃대던 사람들이 저 할머니 말 한마디에 싹 사라졌습니다.”
“나도 눈 있습니다.”
퉁명스럽게 대답한 건우가 병원 밖으로 나오자 안절부절못하며 기다리던 로이드가 얼른 달려온다.
건우가 손을 들며 말했다.
“대충 들었습니다, 더 설명 안 해도 됩니다.”
“닥터, 어쩌죠?”
무서운 인상의 노파. 그런데 그녀의 반응이 이상하다. 건우가 건물에서 나올 때부터 눈을 가늘게 뜨더니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흰자위가 다 보이도록 눈을 뒤집는다.
뭐냐, 저건. 신내림이라도 받는 거야? 여기서, 갑자기?
“kom! kom! wat? Bedoel jy dit regtig, voodoo?”
뭐라는 거야, 이 무당 코스프레 할망구가. 가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노파의 앞에 서자, 부들부들 떨던 움직임을 멈춘 할머니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본다.
“뭐?”
“Is dit u wat voodoo verloën?”
“뭔 소리야, 그게.”
“As u na 'n ander land kom, praat dan daardie taal!”
노파는 화가 나는지 지팡이로 삿대질을 한다. 하지만 귀를 후벼 판 건우가 신경도 쓰지 않자 애꿎은 로이드에게 호통을 친다.
식은땀을 줄줄 흘린 로이드가 얼른 건우 옆으로 다가와 속삭인다.
“당신이 부두를 부정한 사람이냐 물었습니다. 두 번째는 남의 땅에 왔으면 우리 말을 하라고 했고요.”
건우가 여전히 귀를 후비며 노파를 노려본다.
“너희 나라도 6%만 쓰는 언어라는데 내가 배워서 어따 쓰게. 우리 며칠 뒤면 가는데 다시는 쓸 일 없는 말을 뭐 하러 배워?”
로이드가 찔끔한 얼굴로 급히 속삭인다.
“닥터! 부족의 종교 지도잡니다. 좀 더 예의를 갖춰주세요.”
뭐라는 거야, 이 양반이. 지금 당신이랑 내가 소통하는 언어가 영어인데 반말밖에 없잖아, 이 언어는?
“어차피 말 못 알아듣잖아요? 대충 통역해 줘요.”
“하.”
로이드는 차마 방금 건우가 했던 말은 전하지 못하겠는지 허리만 굽실거린다.
대차게 반항하고는 있지만 아프리카 샤먼의 생김새는 무척 무섭다. 아니 무섭다기보다는 혐오스럽다는 쪽에 가깝다. 꿈에 볼까 두려운 외모를 가진 노파는 아까부터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
그런데 어쩐지 이상하다. 잡아먹을 것 같은 눈빛이긴 한데 뭔가 마음에 안 들거나 화가 났다기보단 관찰하는 눈빛이다. 사람을 왜 저렇게 보는 걸까?
로이드가 통역을 하지 않으니 잠깐의 적막이 떠다닌다. 잠시 건우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하나하나 뜯어보던 샤먼이 말했다.
로이드가 찰싹 달라붙어 동시통역을 한다.
“감히 인간이 부두의 눈을 가졌구나.”
말을 전한 로이드도 고개를 갸웃하며 건우를 바라본다. 샤먼이 방금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냐는 눈빛을 던지는 로이드.
건우가 가만히 샤먼을 노려본다. 이 할망구 진짜 샤먼이구나. 점이나 보고 부적이나 쓰는 사기꾼이 아니었어.
건우가 삐딱한 눈빛으로 말한다.
“그런데?”
기겁을 하는 로이드. 말을 전하긴 하는데 어쩐지 엄청 길다. 단순히 그런데? 라고 물었는데 저렇게 길게 말하는 걸 보니 뭔가 잔뜩 포장하고 있나 보다.
로이드의 말을 듣던 샤먼이 지팡이로 그의 머리를 살짝 때리며 뭐라 소리친다. 머리를 부여잡은 로이드가 연신 허리를 굽히는 걸 보니 샤먼에게 통역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는 걸 걸린 모양이다.
머리를 잡은 로이드가 건우를 흘겨보며 말했다.
“닥터 덕분에 한 대 맞았습니다.”
“그게 왜 나 때문입니까?”
“닥터 말을 그대로 전하면 난리가 난다고요.”
“그냥 전하세요, 괜찮으니.”
“하, 진짜. 저 나 몰라라 할 겁니다? 여기서 봉사활동 다 접고 떠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어요. 괜찮아요?”
“괜찮으니 그냥 통역해요. 내가 책임질 테니까.”
책임을 진다. 로이드가 잠시 상황을 생각해 본다.
건우는 neighbors의 책임자로 왔다. MSF의 책임자는 사무엘. 하지만 둘은 무척 친해 보였다. 사실 사무엘 쪽이 일방적으로 치근덕대는 것이지만 그건 알 바 아니고.
건우의 위치로 보았을 때 정말로 책임을 질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떠올린 로이드가 콧김을 뿜으며 말했다.
“진짜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그대로 전합니다?”
건우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후 샤먼을 보며 말했다.
“그래서, 여긴 왜 온 겁니까? 어디 아파요?”
샤먼이 여전히 건우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네놈이 마을 사람들에게 부두를 부정하라 했느냐?”
“뭐래, 내가 언제.”
“내가 다 듣고 왔다.”
“잘못 들은 겁니다.”
“그럼 뭐라 했느냐?”
“당신들이 아픈 건 신의 행사가 아니라 병이라고. 그건 고칠 수 있는 거라고 했습니다.”
샤먼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건우를 노려본다. 그게 신을 부정한 것이라 우기면 할 수 없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을 만큼 미개한 사상을 가진 자들이니까.
샤먼이 건우를 노려보다 뒤를 돌아본다. 저 멀리 도망갔던 부족민들이 숨어서 지켜보는 것이 보인다.
“숨어 있지 말고 나오너라!”
지팡이를 쿵쿵 찍으며 소리치는 샤먼. 그러자 부족민들이 두말없이 우르르 달려 나와 그녀를 둘러싼다. 부족민들을 둘러본 샤먼이 외쳤다.
“이자가 부두의 행사를 병이라 한다! 부두도 내게 그리 말했다!”
부두라는 말이 나오자 고개를 숙였던 부족민들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건우 역시 눈썹을 꿈틀거린다.
‘부두도 그리 말했다고? 부두면 여기 신이잖아.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야?’
부족민들이 서로를 바라본다. 하지만 샤먼 앞이라 그런지 웅성거리진 않고 눈빛만 교환하며 눈치를 보는 모습이 보인다.
샤먼이 지팡이로 건우를 가리킨다.
“신탁은 틀린 법이 없다. 하지만 나는 틀릴 수 있다.”
뭔 소리야, 대체? 샤먼이 지팡이를 흔들며 말했다.
“부두의 음성은 언제나 옳지만 음성을 듣는 나는 인간일 뿐이다. 들어라!”
샤먼이 지팡이를 바닥에 쿵 찧자, 부족민들이 무릎을 꿇는다. 이게 뭔 일본 애니메이션에 나올 것 같은 오글거리는 장면이지?
샤먼이 건우를 노려보며 말했다.
“나는 내가 들은 바가 진실인지 확인을 해야겠다.”
건우가 억지로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한다.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 답답했지만 기 싸움에서 지면 그걸로 끝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확인할 겁니까?”
샤먼이 건우를 노려보며 말했다.
“하지에게 내려진 부두의 행사를 고쳐라. 그리하면 신탁의 음성을 믿겠다.”
엎드려 있던 부족민들의 등이 움찔거리는 것이 보인다. 하지? 사람 이름인 것 같은데?
건우가 로이드를 돌아보자, 통역을 하는 그도 부족민들을 다 알지는 못하는지 어깨를 으쓱한다.
“하지가 누군데요?”
샤먼의 지팡이가 멀리 있는 나무집을 가리킨다. 그 집에서도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부자 병에 걸린 하지.”
건우가 눈썹을 꿈틀거린다. 부자 병? 그런 병명도 있어? 건우가 다시 로이드를 바라본다.
“방금 Wealthy disease(풍족한 병)이라고 통역했죠? 그거 Rich(부자)란 뜻 맞는 겁니까?”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인다.
“예…… 그렇긴 한데 저도 그런 병명은 처음 들어봅니다. 원주민들이 사용하는 별칭 같은 게 아닐까요?”
부자가 걸리는 병이라는 뜻일까? 이런 원주민 마을에 뭔 부자가 있다고. 나무집에 나뭇가지 몇 개가 더 있는 거냐? 도무지 무슨 병인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환자가 있단다. 하얀 연기가 나는 집을 그냥 지나칠 순 없다. 고칠 수 있든 없든 일단 환자를 봐야 한다.
건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샤먼은 부리부리한 시선을 거두고 몸을 돌린다. 무릎을 꿇은 부족민들이 무릎으로 기어 그녀가 가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 보인다.
건우가 혀를 차며 비꼰다.
“아주 황제 폐하 납셨네.”
샤먼이 슬쩍 돌아보았지만 눈치 빠른 로이드는 방금 건우의 말이 아무 말도 아니었다는 듯 손사래를 친다.
다시 한번 건우를 노려본 샤먼이 다시 길을 걷자, 부족민들이 일어나 그녀를 따라간다.
사람들이 빠져나가자 병원 안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의료진들이 밖으로 뛰어나온다.
제일 먼저 뛰어나와 건우 옆에 선 중곤과 혜선이 질문 폭탄을 던진다.
“아니, 부자가 걸리는 병이 도대체 뭐예요, 교수님?”
“이런 곳에 부자가 있어요? 다 가난해 보이는데 무슨.”
몰라, 이 자식들아. 내가 알았으면 이러고 있겠냐?
두 사람의 질문을 가볍게 씹은 건우가 샤먼이 가리켰던 집을 바라본다.
“하, 가 보는 수밖에 없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