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닥터 프랑켄슈타인-167화 (167/230)

닥터 프랑켄슈타인 167화

17. 나에게 최고의 의사는(1)

‘Neighbor’의 현수막을 단 버스가 도로를 달리다 언덕의 꼭짓점 부근에 멈춘다. 응급실 일이 바빠 열흘 넘게 봉사활동에 나서지 못했던 건우가 오랜만에 봉사활동을 나와 버스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보자, 짐을 잔뜩 들고 따라 내린 중곤과 혜선이 밝은 얼굴로 말했다.

“봉사활동을 해보고 싶긴 했지만 시간도 여력도 없어서 지금껏 못했는데. 이렇게 병원과 사단법인이 지원해 주는 활동을 정기적으로 하고 보니 지금까지 왜 안 했나 싶네요. 아이들이나 어른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습니다.”

“선배도 그래요? 저도 그랬어요. 사실 첫 봉사활동 하기 전날엔 살짝 귀찮았는데 한번 해보고 나니까 또 올 수 있는 날을 기다리게 되더라고요.”

특별히 동조하진 않았지만 건우 역시 두 사람과 비슷한 기분이다. 꼬마 석진을 통해 자신이 지금 진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닫고 난 후엔 더욱 그러한 마음이 들었다. 짐을 내려놓은 중곤이 도로 맞은편을 보며 말했다.

“교수님, 이 도로를 기준으로 저쪽은 중랑구이고, 이쪽은 구리시입니다.”

중곤이 녀석은 부동산에 관심이 많아 그런지 지형에 박식하다. 길을 잘 아는 사람은 많지만 시의 경계가 나뉘어지는 부분까지 잘 아는 녀석은 드물다.

혜선이 중곤의 설명을 들으며 주변을 보다 미간을 찌푸린다.

“망우리 공동묘지?’

언덕의 꼭짓점인 줄 알았는데 저 멀리 또 올라가는 길이 보인다. 그리고 그곳에 망우리 공동묘지라는 푯말이 보인다. 중곤이 다시 짐을 들며 말했다.

“어, 저쪽이 공동묘지고 우리가 갈 곳은 맞은편. 구리시 딸기원이란 곳이야.”

혜선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도로를 가리켰다.

“이 도로로 쭉 가면 구리시잖아요. 교문사거리에 대학병원이 있을 텐데. 의료 사각지대가 맞아요?”

“음, 정확히는 사각지대보단 가난한 달동네라고 보면 돼.”

“아, 그렇구나.”

“지금은 이래도 나중에 여기 많이 오를 거다. 이 언덕 밑으로 내려가면 바로 서울 면목동이거든. 그러니까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위성도시인 구리시에서도 제일 서울과 가까운 지역이다, 이 말씀.”

“설마 투자했어요?”

“돈이 어디 있어서 투자를 하냐? 좀 더 모아서 해볼까 고민한 거지.”

짐은 안 옮기고 잡담만 나누고 있는 중곤을 째려본 건우가 말했다.

“그건 투자가 아니라 투기다. 짐이나 옮겨, 이 자식아.”

잡담하느라 놓친 일행들이 이미 봉사활동 장소에 도착해 파라솔을 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짐을 들고 잰걸음으로 파라솔로 가던 혜선이 주변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헐.”

지금까지의 의료봉사 지역은 대부분 시골이었거나, 철거 대상 지역이었기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이곳은 경기도. 그것도 극심한 인구밀집을 지닌 구리시다.

그래서일까? 미리 공지를 듣고 진료 시작도 전에 줄을 늘어선 사람들이 언덕길을 넘어 끝도 없이 서 있다.

“이 많은 사람들을 다 언제…….”

입이 떡 벌어진 혜선. 그녀를 지나친 중곤이 어깨로 툭 밀며 속삭인다.

“괜히 모건우 선생님이 오셨겠냐? 알잖아, 우리 교수님 실력.”

“아.”

아니나 다를까 건우는 파라솔을 펴고 있는 의료진들에게 벌써부터 지시를 내리고 있다.

“오늘 따라온 의사들 총 8명이니까, 여덟 줄로 세우세요. 간호사님들은 미리 의사들 머리 위에 진료 과목 표기해 두고 줄 잘못 서시는 분 없도록 하고.”

내과부터 정형외과, 흉부외과, 신경과 등의 진료 과목들이 머리 위 파라솔에 붙은 의료진들. 진료 과목이 적혀 있지 않은 자리는 건우가 앉은 자리가 유일하다.

대강 준비가 되자 손목시계를 본 건우가 외쳤다.

“자, 바로 진료 시작합니다!”

* * *

점심도 못 먹고 진료에 매진하는 의료진들. 빠르게 자신의 줄을 없애 버린 건우가 돕지 않았다면 저녁도 굶었을지도 모른다.

남들이 10명의 환자를 볼 때 세 배가 넘는 환자를 본 건우가 양옆에 있던 의사들 뒤로 줄을 선 환자들도 데려와 진료를 본다.

하지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진료속도는 금방 줄을 사라지게 만들어 버린다. 아직도 다른 의사들 앞에 많은 환자가 있지만 오전부터 한 번도 쉬지 않고 진료를 보던 건우가 걱정된 혜선이 의자를 빼버리며 말했다.

“교수님! 진짜 이러실 거예요?”

“뭐, 인마.”

“몸 좀 생각하세요, 몸 좀!”

“아직 체력 쌩쌩하다. 저쪽 줄 환자들 데려와.”

“아, 쫌! 교수님이 그러시면 저랑 중곤 선배도 못 쉬잖아요.”

앉아 있는 자신과 달리 지시를 듣고 약을 처방하거나, 드레싱 재료를 챙겨주던 혜선과 중곤은 앉지도 못하고 다섯 시간 이상 강행군을 했다.

환자들을 보느라 그 점을 깜빡 잊은 건우가 헛기침을 한다.

“그럼 10분만 쉬자.”

“20분!”

“뭘 그리 오래 쉬냐? 그럼 15분.”

“콜.”

예전 같으면 말도 못 걸고 설설 기던 녀석이 이젠 거래를 하고 앉았네. 하긴, 함께 보낸 세월이 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일어나 기지개를 켜 굳은 몸을 푸는 건우에게 파라솔 뒤로 가 인스턴트커피를 타온 혜선이 말했다.

“자요, 교수님.”

“커피 타지 마, 인마.”

혜선이 빙긋 웃는다. 건우는 단 한 번도 부하 직원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키지 않은 교수로 유명하다. 꼭 여성에게만 안 시키는 것은 아니고, 자기 커피는 자기가 타 마시는 타입이다.

“원래 놀러 나오면 안 하던 사람이 하는 거래요. 울 아빠도 평소엔 주방에 얼씬도 안 하는데 놀러 가면 고기도 굽고 설거지도 하고 그러시거든요.”

타지 말래놓고 주니까 또 잘 마시는 건우가 뜨거운 커피를 후후 불며 말했다.

“그게 맞는 비유라고 생각하는 거냐?”

“하하, 그냥 그렇다고요. 근데 교수님. 우리 여기서 쉬지 말고 저 뒤로 가요. 환자들이 자꾸 쳐다봐서.”

의사들 입장에서야 장시간 일을 하고 잠깐 쉬는 것이지만 기다리는 환자 입장에선 왜 자길 안 봐주고 커피나 타 먹고 있냐 생각할 수 있다. 물론 무료 봉사지만 기다리는 것이 싫은 사람들은 도처에 있다.

혜선의 의견이 옳다 생각한 건우가 파라솔에서 약간 떨어진 벤치에 앉았다. 쿠키 몇 개를 챙겨온 중곤이 도착하고 짧은 휴식을 갖는 세 사람.

달동네긴 하지만 산을 배경으로 한 동네라 산새 소리가 무척 예쁘다.

혜선이 기분 좋은 표정을 짓다 문득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갑자기 소름이 돋는 듯 어깨를 움츠린 혜선이 말했다.

“근데 여기 공동묘지 근처잖아요? 갑자기 소름이 끼쳤어요. 무서워서 여기서 어떻게 살죠?”

중곤이 실소를 지었다.

“좀 전까지 새소리 들으면서 좋아하다가 갑자기 뭔.”

“잊고 있었어요, 여기가 어딘지.”

“킥킥, 헉! 혜, 혜선아 네 뒤에!”

중곤이 놀란 연기를 하며 뒤를 가리켰지만 혜선은 가자미눈을 하고 말했다.

“제가 초등학생으로 보이세요?”

“지, 진짜라니까? 뒤, 뒤에!”

“아, 뭔데요!”

혜선이 뒤를 돌아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의 건우가 커피를 마시고 있는 모습 외엔 별게 없다. 혜선이 다시 중곤을 째려보며 물었다.

“뒤에 뭐요?”

중곤이 얼굴을 가까이 가져오며 소곤거린다.

“난 귀신보다 교수님이 더 무서운데, 넌 안 그러냐?”

진지한 얼굴의 중곤 때문에 웃음이 터진 혜선. 하지만 그녀도 비슷한 생각인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둘이 킥킥댄다.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길 하든 관심이 없는 건우는 파라솔 앞에 아직도 늘어선 줄을 보며 대략 얼마나 더 봉사를 해야 될지 시간을 가늠 중이다.

‘한…… 백 명쯤 남은 것 같으니 한 놈당 열씩 맡고, 내가 스물…… 음, 내가 서른을 맡고 나머질 나누는 쪽이 빠르겠지?’

혼자 계산을 하고 있던 건우의 눈에 언덕길을 내려오다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며 한숨을 쉬는 백발 할머니가 눈에 띈다.

난감한 얼굴로 줄을 보는 할머니. 말년 할머니와 비슷한 나이로 보인다. 그러고 보니 얼굴도 좀 닮은 것 같다. 무엇보다 푸근하고 마음 좋아 보이는 할머니다.

할머니는 줄을 서려 기웃거리다 한숨을 쉰 후, 또다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파라솔에서 조금 떨어진 벤치에 앉은 건우, 중곤, 혜선을 발견한 할머니가 머뭇거리다 다가와 물었다.

“저기.”

혜선이 먹던 쿠키를 내려놓고 얼른 답한다.

“네, 할머니!”

“진료 몇 시까지 하는지 알 수 있을까요?”

“아, 음. 몇 시까지라고 정해진 건 없고요. 보통은 여섯 시까지인데 환자분들 많으면 더 하기도 하고, 없으면 빨리 끝나기도 해요.”

할머니가 시간을 보곤 손가락을 꼬물거린다.

“그럼 지금이 두 시니까…… 한 다섯 시쯤 와보면 줄이 좀 줄어들어 있을까요?”

“지금보단 나을 것 같긴 한데.”

“혹시 그때 오늘 진료가 끝날 수도 있나요?”

“확실히 말씀은 못 드려요. 최대한 빨리 봐드릴 테니 줄 서서 조금만 기다려 주실래요?”

친절하게 응대하고 있지만 할머니는 무척 불안한 얼굴이다. 자꾸만 줄을 돌아보고, 또 자신이 내려온 언덕길을 바라본다.

휴식 중이긴 하지만 건우는 의사다. 만약 급한 일이라면 자신이 움직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 건우의 눈에서 푸른빛이 터져 나온다.

눈썹을 꿈틀한 건우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가벼운 위염 증세와 왼쪽 무릎에 관절염 증세가 보이지만 특별히 약을 처방받아야 할 정도는 아니다. 이 정도면 스스로 모르고 있을 확률이 더 높은데.’

할머니의 몸 상태와 불안해 보이는 태도를 종합해 보았을 때 할머니가 여기에 온 이유를 유추해 낸 건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머니.”

키가 크고 무심한 얼굴의 건우가 일어나자 움찔 놀라는 할머니는 약간 경계가 담긴 표정을 하고 있다.

“네?”

“댁이 여기서 멉니까?”

“우리 집은…… 저기 언덕 넘어가면 있어요.”

“얼마나 걸려요?”

“한 오 분쯤이요.”

“환자분이 거기 계시죠?”

건우의 말에 눈이 동그래지는 할머니.

“어, 어떻게 알았어요?”

순간적으로 아기 동자 무당이라는 글귀가 건우의 이마 위로 지나는 듯한 환상을 보는 혜선과 중곤이 동시에 고개를 돌린다.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있는 것이다.

젠장, 그래 웃어라. 난 내 일이나 하련다.

“몸이 불편하셔서 대신 약 받으러 오신 겁니까?”

“네, 맞아요. 아니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환자 소견서 가지고 계세요?”

“아뇨…… 아주 오래전에 다친 거라. 원래 대학병원에 가끔 가서 약만 타는데 오늘 무료 진료한다고 해서 혹시나 하고 왔어요. 원래 먹던 약은 아니고, 다른 문제가 있어서 약을 좀 받을 수 있을까 싶어서.”

중곤이 끼어들었다.

“아이고, 어머님. 저희가 주치의가 아니라 환자를 직접 보지 않고는 약 못 드리는데.”

할머니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스스로도 아마 안 될 거란 생각을 미리 하고 왔는지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구나, 알았어요. 알려줘서 고마워요.”

축 처진 어깨. 돌아선 할머니의 어깨가 보인다. 꽃무늬가 들어간 예쁜 티셔츠는 어깨 부근에 작은 구멍들이 숭숭 뚫려 있다.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입었길래 옷이 저렇게 삭을 수가 있을까?

할머니의 굽은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건우의 왼쪽 가슴을 혜영 이모가 발로 뻥 찬다.

살짝 코끝을 찡그린 건우가 왼쪽 가슴을 두드리며 속삭인다.

“알았어요, 이모.”

건우가 빠른 걸음으로 할머니를 쫓아가며 말했다.

“할머니.”

할머니가 돌아보자, 건우가 말했다.

“제가 잠깐 쉬는 시간이거든요. 멀지 않으면 직접 가서 봐드리겠습니다.”

얼굴에 화색이 도는 할머니. 어지간히 기쁜 모양이다.

“어머나, 정말이요? 이거 고마워서 어째요.”

씩 웃어줄 만도 하건만 여전히 무표정한 건우가 중곤을 돌아보며 눈짓한다.

“뭐 하냐, 약 안 챙기고.”

또 휴식 시간을 날려 버린 두 레지던트의 한숨이 멀리까지 퍼져 나간다.

“예, 예. 갑니다.”

간단한 진료 키트를 챙기는 중곤. 혜선은 얼른 할머니 팔짱을 끼며 묻는다.

“할머니! 환자분 증상이 어떠세요? 평소 드셨던 약이 뭔지 혹시 아세요? 다른 문제가 생겼다고 하셨는데 어떤 증상인가요?”

새끼들, 잘할 거면서 꼭 엄살부터 부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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