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닥터 프랑켄슈타인-166화 (166/230)

닥터 프랑켄슈타인 166화

16. 프랑켄슈타인 박사(10)

건우는 많은 공부를 한 사람이다. 그래서 현재도 대한민국에서 의사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많은 시험을 보고 코피 터지게 반복적인 공부를 하는 동안 학교 선생님들은 이런 말을 했었다.

‘고민하면서 길을 찾는 사람들, 그들이 참된 인간상이다.’

‘고뇌를 거치지 않고는 진리를 파악할 수 없다. 기계적으로 외우지 말고 고뇌하여 이해하라.’

‘고뇌는 철저하게 경험하는 것에 의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

‘고뇌 없이 정신적 성장이란 있을 수 없고 인생의 향상도 불가능하다. 고뇌는 생활에 있어서 필요불가결의 유익한 존재이다.’

‘괴로움과 번민은 위대한 자각과 심오한 심정의 소유자에겐 언제나 필연적인 것이다.’

심지어 마지막 말은 러시아 문학의 최고 거장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가 한 말이다.

그들의 말이 옳겠지. 그들은 나보다 나은 사람들이니까. 나는 그리 생각하고 살았다. 누가 한 명언인가를 찾아보고 유명인의 말이라면 그것이 옳은지 판단하지 않고 당연히 옳다 생각하고 살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눈앞에 앉아 피자 부스러기를 볼에 묻히고 동그란 눈을 깜빡이는 이 작은 꼬마는 어떤 명언가보다 위대해 보인다.

“방금 뭐라고 했지?”

다시 듣고 싶다. 희미했던 생각의 가닥이 손에 잡히기 직전이다. 석진이 휴지로 손가락을 닦으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요. 이건 엄마가 한 말이었어요.”

“엄마가?”

“네, 음…… 여기 오고 나서 며칠 지난 다음이었는데. 엄만 출근 준비를 하고 난 학교 갈 준비를 할 때였어요. 엄마는 사무실에서 지원해 준 시리얼이랑 우유로 아침을 해주며 콧노랠 부르고 있었어요.”

석진이 그날 일을 떠올리며 말했다.

“믿어지지가 않았어요. 제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고, 그것도 TV에서나 보던 강남에 있는 학교에 다니면서 그 애들과 같은 밥을 먹고 같은 책상에 앉아 같은 선생님께 배운다는 것이. 하루하루가 너무 기뻤어요. 그래서 항상 스승님 생각을 했었어요.”

좀 낯 간지러운 이야긴데. 그건 빼고 하면 안 되겠냐는 눈빛을 보내봤지만 석진의 입을 막을 순 없었다.

“아까 엄마 앞에서 이야기한 거 그거 진짜예요. 매일 아침에 일어나면 엄마랑 둘이 기도해요. ‘모두 스승님 덕분입니다.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이렇게.”

하, 칭찬해 주는 건 고마운데 그렇게까지 하면 내가 뭔 사이비 종교 지도자 같잖냐. 거기까지 해라.

석진은 그날 일을 눈에 그리듯 설명해 준다.

오피스텔은 그리 넓지 않지만 둘이 살기 충분하다. 무엇보다 깨끗한 것이 마음에 드는 석진은 처음 써보는 하얗고 깨끗한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주방으로 와 식탁 위에 엄마가 마련해 둔 우유 시리얼을 보며 침을 흘린다.

“엄마 나 먼저 먹어도 돼?”

“그럼, 어서 먹어. 엄만 옷 입어야 돼. 빨리 먹고 너 학교 데려다주고 엄마도 출근해야지.”

“엄마는 밥 안 먹어?”

“응, 엄마는 아침 먹으면 속이 안 좋잖아.”

“스승님이 세끼 다 잘 챙겨 먹어야 된다고 했어. 그래야 건강하다고.”

“호호, 그래? 그럼 엄마도 사무실 가서 꼭 챙겨 먹을게. 됐지?”

“응! 나 먹을게!”

시리얼을 입에 욱여넣고 우물거리는 석진. 다른 집 아이 같았으면 우유에 시리얼을 매일 아침으로 먹는 걸 싫어하겠지만 석진은 다르다.

이런 걸 먹어본 적이 없는 석진은 매일이 아니라 매끼 먹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시리얼이 맛있었기 때문이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시리얼을 씹던 석진이 창밖을 보았다. 시골 풍경처럼 아름답진 않지만 고층 오피스텔이라 도심지의 모습이 한눈에 보이는 곳이다.

“엄마.”

양말을 신고 있던 철영이 건성으로 답한다.

“왜?”

“나 기분이 이상해.”

“뭐가?”

“엄마랑 나랑 이렇게 사는 거.”

건성으로 답하던 철영이 멈칫한다.

“응?”

“그렇잖아. 우리 쓰레기 같은 집에서 냄새나는 음식 먹고 살다가 이렇게 깨끗한 집에 살고, 강남에 있는 학교 가서 매일 고기반찬 나오는 밥 먹고. 나 가끔 이게 다 꿈 같아.”

“…….”

“혹시 깨는 거 아니겠지, 엄마? 일어나면 아빠랑 살던 그 집에서 깨는 거 아니겠지?”

“석진아…….”

꼬마 석진이 볼을 꼬집는다. 별로 안 아픈지 점점 세게 꼬집어대다 결국 얼굴이 빨개진 석진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이게 다 스승님 덕분이야. 나 스승님 댁 가서 일이라도 도와야 될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긴 하겠지만 거기 스승님 엄마도 계시거든. 집안일이라도 도우면 어떨까?”

철영이 다가와 식탁에 앉아 아들과 눈을 마주친다.

“석진아.”

“응!”

“스승님이 석진이한테 뭐라고 했었는지 기억해?”

“어떤 거?”

“의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된다고 했었지?”

“아, 음. 코피 터지게 공부해야 된다고 했어. 가끔, 아니, 꽤 자주 이러다 죽겠다 싶을 만큼 공부해야 된다고.”

“그렇지? 그럼 우리 석진이가 공부해야 될 시간에 집안일 하면 되겠어?”

“아니, 안돼. 근데 너무 고맙잖아. 스승님 아니었으면 우리 계속 거기서 살았어야 됐을 텐데.”

그날의 일을 설명하던 석진이 콜라를 마신 후 말했다.

“그때 엄마가 그렇게 말했어요. 누가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삶을 선물했다면, 그 삶을 소중히 여기고 살면 된다고. 삶을 선물해 준 사람이 가장 기뻐하는 일은 자신의 선물로 인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라고.”

꼬마 석진의 말이 건우의 귀를 파고들어 머릿속에 단단히 굳어 있던 관념을 깨부순다.

자신은 왜 닥터 카터가 선물해 준 새 삶을 감사하며 그가 준 것을 누리고, 남에게 베풀며 의사로서 계속 누군가를 치료할 수 있음에 기뻐하지 않았을까?

왜 고작 약을 안 챙겨 먹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그가 남긴 업적이 사라짐을 안타까워하고만 있었을까? 석진과 철영처럼 선물같이 다가온 새 삶을 낭비 없이 살아가면 그만인 것을.

순간 어린 시절 선생님들에게 받은 가르침이었지만 각박한 현실 속에 잊고 있었던 명언 구절들이 떠오른다.

‘걱정해도 소용없는 걱정으로부터 자기를 해방시켜라, 그것이 마음의 평화를 얻는 가장 가까운 길이다.’

‘근심은 고통을 빌려 가는 사람들이 지불하는 이자이다.’

‘금이 간 종은 흐린 소리를 내지만 두 쪽으로 부숴 버리면 다시 맑은소리를 낸다. 이와 같이 작은 고뇌는 우리를 자기 자신 밖으로 끌어내지만 큰 고뇌는 우리들을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 겪은 것만으로 족하다.’

이러한 말들도 분명히 배웠었다. 하지만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머릿속에서 지웠던 말들이다. 배우고도 기억하지 못했고, 기억하지 못했기에 깨닫지 못했다.

석진이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

“웃긴 이야기도 있었어요. 스승님 지금 모습 보니까 생각이 났어요. 아빠가 감옥 가기 전에 동네 할머니가 엄마한테 말해준 거래요.”

지금껏 해준 말로도 이미 충분하다. 하지만 꼬마 석진과의 대화를 통해 머릿속이 맑아진 건우가 미소를 지으며 묻는다.

“뭐라고 했는데?”

석진이 킥킥거리며 말했다.

“엄마가 현장에 일하러 간 아빠가 며칠째 안 돌아와서 계속 문 앞에서 기다리는 걸 본 동네 할머니가 이랬대요. 걱정하지 말아! 내가 중노동 때문에 죽은 사람은 한 명도 못 봤구먼. 근데 걱정 때문에 죽은 사람은 허다히 봤어!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 빨리 죽는 길이야, 그게! 이렇게 말했대요. 킥킥.”

실실 웃는 석진을 바라보며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짓고 있는 건우. 시궁창에서 아이를 구했다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아이가 자신을 구하고 있다.

다시 피자를 먹기 시작하면서도 힐끔거리며 자신의 눈치를 보는 꼬마. 아마 자기 말로 인해 위안을 얻었는지 궁금해서 눈치를 보는 것이리라.

가만히 석진을 보다 자기 그릇에 놓인 피자 한 조각을 확인한 건우가 손을 뻗는다. 커다란 피자 조각을 흔든 건우가 말했다.

“나 이제부터 먹기 시작할 거다. 한 조각이라도 더 먹고 싶으면 빨리 움직여야 될걸?”

식사를 한다는 건우의 말에 순간적으로 얼굴에 기쁨이 스치는 석진. 하지만 기쁨은 기쁨이고 피자는 피자다. 꼬마의 피자 먹는 손길이 번개처럼 빨라진다.

* * *

하산병원 입구.

박승환 원장을 비롯해 성연호, 장진규가 공항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병원에 들른 사무엘을 배웅하기 위해 나와 있다.

엄청난 덩치를 가진 사무엘이 솥뚜껑만 한 손으로 악수를 하며 유쾌하게 말한다.

“이거 신세 많이 졌습니다. 융숭한 대접을 잔뜩 받았네요. 미국에 오실 때는 꼭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박승환 원장이 웃으며 말한다.

“대한민국은 손님에게 정성을 다해 대접하는 것을 예의로 아는 나라입니다. 괘념치 마시고 조심이 돌아가세요.”

“하하! 그런 예의라니. 좋은 나라군요, 대한민국은.”

장진규와 성연호에게도 Mayo Clinic에 방문 시 꼭 자신을 찾아달란 당부를 한 사무엘이 세 사람과 헤어진다.

이제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가면 한국에서의 일정은 끝나는 것이지만 어쩐지 아쉬운 생각이 든 그가 하산병원 응급실 입구를 바라본다.

누군가 들어가며 열린 자동문 틈 사이로 언제나와 같은 무심한 얼굴로 ER을 지휘하고 있는 건우의 모습이 보인다.

자신과 마지막 연구를 함께하던 파트너, 닥터 카터의 마지막을 지켜본 의사. 무미건조한 태도와 무표정함으로 일관하는 얼굴이지만 어쩐지 이상하게 진짜 의사의 기운이 풍기는 남자.

다시 문이 닫히며 건우가 보이지 않자, 여행용 가방을 끌고 응급실로 들어가는 사무엘.

응급실 문 천장에 머리가 닿을 것 같아 슬쩍 숙이고 들어오는 사무엘을 처음 본 혜선이 놀라 주춤거린다.

“헉.”

사무엘이 눈이 동그래진 혜선을 보며 윙크를 한다. 곰 같은 외국인이 윙크를 하자 마구 뒷걸음질을 치는 혜선은 꼭 산짐승에게서 도망치는 등산객 같은 얼굴이다.

이런 반응들이 익숙한지 씩 웃으며 건우를 향해 가는 사무엘.

도저히 못 보고 지나칠 수가 없는 덩치였기에 멀리서부터 그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던 건우가 주변을 둘러싼 레지던트들을 물리고 그의 앞에 선다.

“돌아갑니까?”

사무엘이 시원하게 웃으며 손을 내민다.

“예, 이제 가야죠. 절 기다리는 환자들이 있으니.”

“술값 내놔요.”

“하하! 계좌번호 알려주시면 보내 드리죠.”

“꼭 줘야 됩니다.”

“하하! 안 그렇게 생겨서 깐깐하시군요.”

사무엘은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는 건우가 무척 마음에 드는 눈치다. 빙긋 웃다 입맛을 다신 사무엘이 주변을 보며 짧은 한숨을 쉰다.

“비록 건진 것 없이 돌아가지만 이게 허탕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군요. 동양에도 이렇게 좋은 병원이 있고, 진짜 의사들이 있다는 걸 알고 돌아가니 기분이 좋습니다.”

사무엘이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닥터 카터의 마지막 연구 기록에 대해 알아낸 점이 없다는 건 여전히 아쉽지만 그건 돌아가서 다시 고민해 봐야겠습니다.”

건우가 가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말했다.

“고민은 그쪽에게 맡기겠습니다.”

“네?”

영문 모를 말을 하는 건우. 슬쩍 손을 든 건우가 말했다.

“나는 내게 삶을 선물한 자가 바라는 일을 할 테니, 고민은 당신이 하는 걸로 하죠. 그럼 살펴가시길.”

몸을 돌리자마자 한쪽을 삿대질한 건우가 불같은 호령을 내지른다.

“G-33 베드! DR(영상진단의학과) 콜 안 들어갔습니까? 언제까지 환자 저렇게 눕혀만 둘 겁니까!”

건우의 호령에 한쪽에 물러나 있던 레지던트들이 기겁을 하며 몰려온다.

“죄, 죄송합니다! 콜 하긴 했는데…….”

“본인 가족한테도 이렇게 할 겁니까? 다시 전화해 보세요.”

“네, 교수님!!”

건우와 레지던트들의 대화가 한국어라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대화를 듣고 있는 환자와 보호자의 얼굴이 환해지는 것을 보곤 건우가 환자를 위한 지시를 내렸음을 눈치챈 사무엘이 희미하게 웃으며 몸을 돌린다.

응급실을 나와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무엘이 눈 부신 태양을 손가락으로 가리며 중얼거린다.

“보고 있습니까, 닥터 카터? 동양에도 당신처럼 환자를 먼저 생각하는 의사들이 있습니다. 당신처럼 따뜻하지만 않지만 저 사람을 보면 왠지 당신이 떠오르네요.”

혼자 하늘을 보며 중얼거린 사무엘이 빙긋 웃으며 여행 가방을 끌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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