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프랑켄슈타인 148화
15. 소년이 비추는 거울(3)
도망치듯 의국으로 들어온 건우가 한숨을 쉰다.
‘하, X발 쪽팔려.’
붉어진 얼굴을 여러 번 마른세수로 되돌리려는 건우. 그의 눈에 구석진 곳에 앉아 책을 보고 있는 석진이 들어온다.
모든 일의 원흉인 저 자식이 아주 세상 편한 자세로 책을 보는 걸 보니 부아가 치밀어 오른 건우가 성큼성큼 걸어간다.
어린놈이 그거 본다고 뭐 아냐? 학교도 잘 안 나가서 구구단이나 제대로 배웠을지 모를 녀석인데.
건우가 주변에 왔다는 것도 모르고 책을 보고 있는 석진. 건우가 아이에게 핀잔 섞인 한마디를 하려던 순간 석진의 중얼거림이 들려온다.
“성행위로 전파될 수 있는 모든 감염성 질환, 좁은 의미의 성병은 직접적인 성교로 전염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건우의 얼굴이 굳었다. 지금 이 어린놈이 하필 봐도 저런 부분을 보고 있었단 말인가? 버럭 고함을 지르려던 건우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고흥군에서의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아픈 엄마를 위해 서슬 퍼런 고함을 질러대는 마을 사람들이 잔뜩 몰린 주민센터까지 내려왔던 아이.
엄마를 본 의사들이 맨 처음 했던 말. 그것은 성병이란 단어였다.
“…….”
석진은 의사들이 엄마를 처음 진단했던 병이 무엇인지를 보고 있는 것이다. 저 조그만 녀석이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우리 엄만 더럽지 않다고 외치던 아이. 의사들까지 자기 엄마를 그런 시선으로 보았다는 것에 얼마나 상처를 입고 있을까?
건우의 심장이 진동을 울린다. 얼른 막대사탕을 문 건우. 사탕 포장지 까는 소리에 고개를 든 석진이 건우를 발견한다.
“어, 아저씨?”
사탕을 문 건우가 힐끔 책을 본 뒤 말했다.
“여기서 뭐 해?”
“책 봐요.”
“본다고 아냐?”
“다른 책은 영어가 잔뜩 쓰여 있어서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이 책은 한글로 쓰여 있어요.”
“…….”
어떤 놈이 하필 여기다 저런 책을 가져다 놔서 애 상처받게 한 거냐? 확 누군지 알면 발로 차버릴까 보다.
“흠, 그래. 배 안 고프냐?”
“안 고파요. 아까 중곤 사형이랑 혜선 사저가 과자 사줬어요.”
“사형은 무슨 얼어 죽을. 과자가 밥이냐, 인마. 밥을 먹어야지.”
“네, 나중에 먹을게요. 근데 지금은 배 안 고파요.”
석진이 다시 책을 본다.
“근데 아저씨.”
“…….”
하, 이제 상처받은 꼬마를 달래줄 시간인가? 그런 거 아니라고. 멍청한 의사들이 잘못 본 거라고. 그런 녀석들은 기본이 안 된 놈들이니 신경 쓰지 말라고.
책을 바라보던 석진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질문해도 돼요?”
“…….”
하, 그래. 해라, 해. 내가 남 위로해 주는 방법은 모르지만 설마 꼬맹이 하나 못 달래겠냐.
“해.”
석진이 책을 들며 물었다.
“성행위가 뭐예요?”
석진의 질문에 자빠질 듯 휘청거리는 건우. 한글로 기재되어 있다고 해도 어린 석진이 모르는 단어가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결국 이 꼬마는 한글로 쓰여진 걸 읽었을 뿐 내용은 이해 못 한 거다.
건우가 휘청거리자 석진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어디 아파요?”
“……아니.”
“그럼 왜 그래요?”
“춤춘 거다.”
“춤이요? 무슨 춤이 그래요?”
“있어, 옛날에 호랑나비라고 히트곡 춤이다.”
“아, 어른들 춤인가? 근데 갑자기 춤은 왜 춰요?”
“그냥.”
“이상한 아저씨네. 성행위가 뭐냐고요.”
건우가 뭐라 설명할지 몰라 머뭇거리다 말했다.
“있어, 좋은 거.”
석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좋은 거예요?”
“…….”
음, 거짓말은 아니지. 사랑하는 남녀가 애정을 확인하는 성스러운 의식 같은 거니까. 물론 경우에 따라 쾌락만을 좇는 부적절한 관계도 있지만, 애한테 그런 걸 알려줄 필요는 없겠지.
“어, 좋은 거다.”
“뭐가 좋은데요?”
“그거 없으면 세상이 안 돌아가.”
“왜요?”
“애가 안 태어나거든.”
석진이 스스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같은 아이요?”
“어, 그거 해야 애가 태어나. 그러니까 꼭 필요한 거지.”
석진이 다시 책을 보며 물었다.
“근데 좋은 행동인데 왜 병에 걸려요?”
“…….”
순진한 소년의 물음에 할 말을 잃은 건우가 그답지 않게 머리를 긁는다. 어린아이의 호기심은 천하의 모건우도 당황시키는 모양이다.
잠깐 고민하던 건우가 번뜩이는 생각에 얼른 입을 연다.
“꼬마.”
“이 씨! 석진이라고요!”
“그래, 꼬마. 너 시금치 좋아하냐?”
“싫어해요.”
“왜 싫어?”
“맛없어서요.”
“몸에 좋은 건 알고 있냐?”
“엄마가 몸에 좋다고 먹으랬는데 맛없어서 안 먹어요.”
“그래, 하여간. 넌 맛 없어서 안 먹지만 사람들은 몸에 좋다며 시금치를 먹는다. 그렇지?”
“네, 근데 그게 어디에 좋아요?”
“악성빈혈을 예방해 주는 엽산과 철분뿐만 아니라 뼈를 튼튼하게 만들어주는 칼슘이 많아서 어린이 성장 촉진과 빈혈 예방에 아주 효능이 좋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좋은 거네요?”
“그래, 시금치에는 옥살염이라는 성분이 많이 들어 있다. 옥살염은 소화관 내 건강한 박테리아의 먹이가 되는 프리바이오틱스로 기능해 장 내 건강을 돕는다.”
“음…… 어렵네요. 그런데 그건 왜요?”
“문제는 이 시금치가 모든 사람의 몸에 좋은 건 아니란 것이다. 신장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면 옥살염이 들어간 음식을 많이 먹을수록 손해일 수 있다. 신장은 이 성분을 몸 밖으로 배출시켜야 하는데, 신장 기능에 이상이 있으면 이런 과정이 제대로 이뤄지질 않아 신장결석이 생긴다.”
“신장결석이 뭔데요?”
“병.”
“아, 몸에 좋은 것도 많이 먹으면 병이 나는 사람이 있는 건가요?”
“그래.”
석진이 다시 책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도 그런 거예요?”
“뭐 대충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고.”
석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렇다는 거예요, 아니란 거에요?”
“그렇다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란 것일 수도 있고.”
석진이 울상을 짓는다. 논리를 팔아먹은 건우는 그런 석진이 귀여워 자꾸만 웃음이 나온다.
그때 건우의 품에서 전화가 울린다. ER에서의 호출일 수도 있기에 손으로 석진에게 신호를 준 건우가 바로 핸드폰을 꺼냈다가 액정을 보곤 인상을 쓴다.
“이 영감이 왜 또.”
가만히 액정을 바라보던 건우가 전화를 받는다.
“예, 회장님.”
-이 녀석이 한국 돌아왔으면 문안 인사라도 여쭐 것이지, 노인네가 꼭 먼저 전화를 해야 되냐?
“문안 인사는 무슨, 우리 아버지 묘에도 안 갔다 왔는데. 뭔 우리 집안 조상님이십니까?”
-뭐야, 이놈아? 킬킬.
버릇없는 대꾸였지만 오히려 웃어 버리는 진용철 회장의 목소리. 어지간히 건우의 직설적 화법이 좋은 눈치다.
-오늘 저녁에 바쁘냐?
“의사는 맨날 바쁩니다.”
-이놈아, 원장한테 네놈 오늘 일곱 시에 퇴근하는 거 다 들었다.
“하산병원은 개인정보 보호 같은 거 없습니까? 무슨 원장씩이나 되는 양반이 부하 직원 정보를 흘리고 다닌답니까?”
-킬킬, 배 아프면 네가 회장하든가. 아무튼 저녁밥이나 같이 먹자.
“뭐 사줄 건데요?”
-왜? 별거 아니면 안 나오게?
“네.”
-킬킬, 고놈 말하는 본새 하고는. 오늘은 소고기가 좀 당기는데 어떠냐?
“등급은요?”
-으하하! 나는 투뿔 아니면 안 먹는다, 요놈아.
“그럼 가죠.”
-킬킬, 미친 녀석. 감히 나한테 이런 소릴 하는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 뭐가 예쁘다고 자꾸 밥을 사주고 싶은지 모르겠네.
건우가 책을 보고 있는 석진을 힐끔 본 후 말했다.
“한 명 더 데려가도 됩니까?”
-응? 누구?
“제자요.”
-…….
진용철 회장은 건우에 대해 거의 대부분의 정보를 가지고 있다. 제자라는 표현이 어울릴진 모르지만 그가 이리 말할 수 있는 이는 중곤과 혜선이란 걸 떠올린 진용철.
하지만 노련한 맹수는 자신의 뒷조사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지 않기 위해 모르는 척 말한다.
-그래, 그럼 고기는 넉넉하게 준비하라고 하지.
“예, 그럼 지난번처럼 비서가 문자로 주소 보내주는 거죠?”
-그래, 예약하고 나서 연락하라고 하마.
“예, 저녁에 뵙죠.”
전화를 끊은 건우가 석진을 내려다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꼬마.”
“석진이라니까요!”
“오늘 저녁은 소고기다. 소고기 먹어봤냐?”
석진의 눈썹이 역 팔자가 된다.
“먹어봤거든요!”
“오, 언제?”
“여섯 살 생일에!”
“오, 뭐 먹었는데?”
“불고기! 소 불고기!”
건우가 웃음을 짓는다. 씩씩거리며 자길 무시하지 말라는 얼굴을 한 석진. 진용철 회장의 타이밍 좋은 전화로 성병에 대한 관심을 돌린 건우가 석진의 뒷덜미를 잡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정시 퇴근하려면 지금부터 달려야 된다. 견학 시간이니 잘 붙어 있어.”
씩씩거리던 석진이 뒷덜미를 잡힌 채 바둥거린다.
“놓고 가요, 놓고!”
저녁 일곱 시 반.
논현동 고급 고깃집 VIP실에 앉은 진용철 회장이 놀란 얼굴로 건우 옆에 앉은 꼬마를 본다. 석진과 건우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진용철이 물었다.
“이 꼬마가 제자야?”
건우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예, 저래 보여도 꽤 많이 먹습니다. 밥값깨나 나오실 겁니다.”
석진은 건들거리는 건우와 달리 허리를 펴고 바로 앉아 있다. 진용철 회장이 석진을 가만히 바라보다 빙긋 웃었다.
“네가 이 녀석 제자로구나? 반갑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응? 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니에요?”
“아, 아니…… 뭐 맞긴 맞는데.”
자신에게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웃기는 꼬마. 친손자가 아닌 이상 할아버지라 부르는 누군가를 만난 건 참으로 오랜만이다.
보통 아이들은 수행비서와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인 자신의 근처로 접근도 못 하기 때문이다.
진용철이 자기 얼굴을 만지며 물었다.
“나 많이 늙었냐?”
“아뇨, 그렇게 많이 늙어 보이진 않아요. 우리 동네 슈퍼에 모여서 바둑 두는 할아버지들이 훨씬 더 늙었어요.”
진용철의 얼굴이 펴진다.
“하하, 그 녀석 참. 말 한번 예쁘게 한다. 그래, 내가 그 할아버지들보단 낫다 이거지?”
“네, 평소에 성행위를 자주 하시나 봐요.”
물을 마시던 건우가 순간 물을 토한다.
“푸헉!”
진용철이 인상을 쓰며 건우를 째려보다 다시 석진을 바라본다.
“방금 뭐라고 했지?”
다시 자기가 한 말을 하려는 석진을 가로막은 건우가 급히 말한다.
“아닙니다, 자자. 고기 시키죠?”
진용철이 오랜만에 꼬마와 대화하는 신선한 경험을 방해하는 건우를 째려보며 말했다.
“이미 시켰다, 이놈아. 여긴 원래 미리 주문해야 예약되는 곳이다.”
“아, 그래요? 이번에도 엄마 거 싸주시는 겁니까?”
“그것도 이미 이야기해 놨다, 이놈아. 생고기로 싸줄 테니까 집에 가서 구워 먹어라.”
“감사하네요.”
진용철이 건우가 가리고 있는 석진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무표정한 아이는 고급 고깃집에 와서도 전혀 꿀릴 것 없다는 듯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 앉아 있다.
“허허, 고 녀석 참.”
귀여운 손자를 보는 듯한 진용철의 표정을 본 건우가 슬그머니 몸을 뒤로 물리자, 작은 석진을 한참 바라보던 진용철이 건우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활짝 웃는다.
“이 꼬마 녀석이 어디선가 본 것 같아서 이상하다 했더니 네놈과 아주 판박이로구나, 하하!”
건우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진다.
“아니, 이 꼬맹이랑 제가 어디가 닮았습니까?”
석진이 발끈한다.
“제가 이 눈 찢어진 아저씨랑 어디가 닮았어요?”
진용철이 배를 잡고 웃는다.
“으하하! 이것 봐라. 화내고 발끈하는 게 똑같지 않으냐, 하하!!! 밖에 비서 있나? 들어와서 이것 좀 구경해. 이건 혼자 볼 그림이 아니야. 으하하, 으하하!”
웃고 있는 노인을 째려보던 두 명의 무표정한 남자들이 이번엔 서로를 쏘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