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프랑켄슈타인 131화
13. 아빠의 손(8)
MGH의 밤.
이제는 버릇처럼 밤이 되면 찾게 되는 로즈의 병실에 우두커니 앉아 손을 잡아주고 있는 건우가 보인다.
가만히 잠이 든 로즈의 얼굴을 보는 건우.
수술을 마친 지 두 달이 지났다.
수척했던 얼굴은 아직 부족하지만 조금씩 살이 오르고 있고, 창백했던 얼굴은 옅은 홍조가 드리워져 건강을 되찾아가고 있는 것을 체감할 수 있다.
물끄러미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건우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다. 딸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아빠의 손이 다시는 이 손을 놓지 않겠다 말하는 듯하다.
“이제 가야 되는 거 알잖아요.”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건우. 자신의 손이지만 자신의 것 같지 않게 딸의 손을 꼭 붙든 손가락이 부르르 떨린다. 마치 가기 싫다는 듯, 조금만 더 함께 있게 해달라는 듯.
건우의 뇌리로 언제나 밝았던 괴짜, 램지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봐, Dr. Morgan!’
‘제 이름은 모건이 아니라 모건우 라니까요, 몇 번을 말씀드려요?’
‘하하! 모건이나, 모건우나!’
‘그럼 저도 선생님께 Dr. Rampage(광란)라고 불러도 됩니까?’
‘하하! 그건 안 되지! 의사 이름이 그게 뭔가, 킬킬.’
언제나 장난스러웠던 괴짜. 하지만 실력과 인성만큼은 모두의 존경을 받았던 의사.
그는 한 번도 딸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하긴 고작 두 달 정도 같이 있었는데 그리 친하다고 할 순 없지.
그저 개인적으로 존경했기에 자신만 남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쪽이 옳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은인이다.
닥터 카터에게 듣기로 이식수술을 진행할 때 이미 그는 brain death(뇌사) 상태였다고 했다.
본인의 의지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평생 자신의 생명을 불살라 남을 구했던 그라면 의식이 있었다 하더라도 동의했을 거라 생각된다.
“이걸로 어느 정도 은혜는 갚은 걸까요?”
여전히 딸의 손을 꼭 붙잡은 손. 아직도 부족하다 말하는 걸까? 뭘 더 하면 좋을까? 주변을 둘러본 건우의 눈에 메모지와 펜 외에는 별 보이는 것이 없다.
물끄러미 그것들을 바라보던 건우가 천천히 펜으로 손을 가져간다.
* * *
MGH의 아침.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눈을 뜬 로즈가 기지개를 켠다. 몇 년 만에 편안하게 잠을 자고 있는 요 몇 달간의 아침은 무척 상쾌하다.
“오늘도 잘 잤다.”
손바닥을 모아 기도하는 시늉을 한 로즈가 중얼거린다.
“오늘도 잘 자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신에게 올리는 기도인지, 이젠 매일 찾아온다는 걸 아는 건우에게 하는 감사 인사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린 로즈가 이불을 걷으며 몸을 일으키다, 침대 옆에 놓인 메모지에 뭔가가 적혀 있는 것을 보곤 고개를 갸웃거린다.
“뭐지?”
자신이 자고 있을 때 누군가 방에 들어와 메모를 남기고 가는 건 불쾌한 경험이다. 하지만 그녀는 몇 달이나 밤마다 찾아오는 건우로 인해 단잠을 잤기에 이러한 일이 생경하지 않다.
메모지를 물끄러미 보던 로즈가 천천히 손을 뻗어 메모지를 붙잡는다.
친애하는 Miss Ramsay.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나는 당신 아버지와 시리아에서 함께했었습니다.
그는 나와 함께 있는 동안 당신에 대해 참 많은 말을 했습니다. 당신을 생각하며 쓴 편지 중 상당수는 보내지 못한 편지로 남았습니다. 지금부터 나는 그가 당신에게 하고 싶어 했던 말들을 적어볼까 합니다.
편지의 도입부를 본 로즈의 눈동자가 세차게 떨린다.
“다, 닥터 모건우?”
건우가 쓰고 간 편지가 분명하다. 급히 다음 문장으로 눈길을 가져가는 로즈의 눈에 마치 아버지가 쓴 것 같은 편지가 보인다.
어쩌면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드니, 사랑한다는 말밖에는 달리 떠오르지 않는구나.
하루 종일, 밤을 새우면서라도 계속 말하고 싶다. 사랑한다, 나의 딸.
아빠는 네가 정말 자랑스럽다.
나의 딸이라는 것이 자랑스럽고, 내가 너의 아빠라는 사실이 자랑스럽고 뿌듯하다.
편지를 보고 있는 로즈의 눈동자가 뿌옇게 습해진다. 하지만 눈물을 훔치던 로즈는 다음 문장을 보곤 웃음을 터뜨린다.
왜 그럴까?
솔직히 객관적으로 보면 네가 그렇게 자랑할 만한 사람은 아니잖아?
세계적인 의사인 나에 비하면 그냥 평범한 아이인데 말이야.
아빠의 말투가 느껴진다. 농담 섞인 아빠의 히죽거리는 웃음이 눈에 선하다.
노느라 정신 팔린 널 잡으러 다닌 게 몇 번이었는지.
밤낮 가리지 않고 때론 경찰차까지 동원해서 잡으러 다녔지.
하지만 그건 네 장점이야. 잘 논다는 것 말이야.
사람이 잘 놀기 위해선 네 가지가 필요해.
먼저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뚝심.
다음은 순간순간 판단과 결정을 스스로 하는 것.
또 자기 자신을 믿어야 하지.
마지막으로 스스로가 매 순간의 주인공이 되어야 해.
내가 널 자랑스러워하는 이유는 이것이다, 딸아.
나는 매 순간 스스로를 인생의 주인공이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내 딸이 너무너무 자랑스럽다.
사랑하는 로즈.
아빠가 널 자랑스러워하는 만큼,
너도 네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길 바라.
인생의 주인공으로서, 온 우주를 통틀어 단 하나뿐인 존재로서 자존심과 자부심을 가져라.
누가 뭐라 해도 이 세상은 너의 것이고, 너의 드라마 주인공은 너란다.
네게 바라고 싶은 한 가지가 있단다.
부디 너 스스로를 지켜라.
왜냐하면 아빠는 완전하고, 완벽한 지상 최고의 인격체지만,
너는 아니니까!
눈물과 웃음. 웃고 있음에도 눈물이 줄줄 흐르는 이상한 경험을 하는 로즈는 지금 이 순간 전혀 슬프지 않다. 오히려 기쁘다. 꼭 천국에서 아빠가 편지를 보내준 기분이다.
선물 같은 시간을 즐기는 로즈의 눈에 편지의 마지막 부분이 들어온다.
너는 아빠, 엄마가 낳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 일부로 만들어낸 존재란다.
오랜 시간 서로 부딪히고 다듬어지며 하나가 되어야 하겠지만,
불완전한 반쪽으로 남아 걱정이 되는구나.
하지만 넌 얼마든지 잘 살 사람이다.
굳이 돌보지 않아도 혼자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아이다.
그러고 보니 괜한 걱정을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드네.
사랑하는 딸아.
네가 대학생이 되고, 사회인이 되고,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고, 할머니가 되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다.
궁금하다. 아빠는 네 미래, 너의 모든 것이 궁금하다.
부탁하건대 재미있고 신나는, 때론 감동이 있는 인생을 살아다오.
하늘에서 구경하는 아빠가 지루하지 않게.
여긴 밤이 깊었다.
마지막 편지라 생각하며 하루를 마감하고 있지만,
제발 마지막 편지가 아니기를 빈다.
새로 하루를 지내고, 또 한 장의 편지를 쓸 수 있기를.
한순간이라도 더 너를 사랑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빈다.
내일 또 만나자, 나의 사랑하는 딸.
시리아에서 매일 밤하늘에 울려 퍼지는 총소리를 들으며 자신에게 매일매일 편지를 썼던 아빠의 마음이 느껴진다.
메모지를 소중히 가슴에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는 로즈의 어깨가 들썩거린다.
“아빠, 걱정하지 마. 아빠가 보내준 천사가 날 살렸어. 이제 아빠 말처럼 주인공이 되는 인생을 살게. 약속해.”
아빠 잃은 딸의 귓가로 아침을 알리는 새소리들이 아름답게 들려온다.
* * *
몇 주 후 MGH 건물 앞.
여행 가방을 끌고 있는 건우, 중곤, 혜선 앞에 선 브랜든이 서운한 얼굴로 악수를 청한다.
“정말 가시렵니까?”
건우가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하, 그리 말씀하시면 의사로 살아가는 이가 감히 더 막아설 수 없군요. MGH에 있으신 동안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별로 한 것도 없습니다.”
“하하, 파견 근무 하시는 동안 견학이나 시켜 드릴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우리 병원 의사들이 많은 것을 배울 기회를 가진 것 같습니다.”
브랜든이 뒤쪽을 눈짓하자, MGH ER 소속의 모든 의사들이 배웅을 나와 있는 것이 보인다.
누가 시킨 것은 아니지만 삼 개월 동안 건우의 행동을 보고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진심 어린 존경심 때문에 배웅을 나온 것이다.
중곤과 혜선이 뿌듯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본다. 또한 더욱 자랑스러운 눈빛으로 건우를 바라보고 있다.
건우가 ER 소속 의사들과 눈을 맞추며 간단히 눈인사만 한 후 맨 끝에 환자복을 입고 서 있는 로즈를 바라본다.
무척이나 서운한 얼굴로 서 있는 로즈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건우가 브랜든의 손을 놓고 그녀의 앞에 섰다.
건우가 앞에 왔지만 차마 마지막 인사를 꺼내지 못하는 로즈의 큰 눈동자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듯하다.
그녀의 얼굴을 보다 품을 뒤져 막대사탕을 입에 무는 건우. 그러다 문득 품을 더 뒤져 사탕 하나를 더 꺼내 포장지를 제거한다.
새 사탕을 불쑥 내미는 건우.
“자요.”
다 큰 어른에게 막대사탕을 내미는 건우를 보며 눈을 깜빡이는 로즈.
그녀의 입에 사탕을 넣어준 건우가 손목을 빙글빙글 돌리며 중얼거린다.
“이제 됐죠? 사탕 줬잖아. 저거 청심환 사탕이라 맛도 없는데.”
한국어로 중얼거리는 통에 알아듣지 못한 로즈가 입에 사탕을 문 채로 건우를 올려다본다.
혼자 비 맞은 중처럼 중얼거리던 건우가 허리를 숙여 로즈와 눈을 맞춘 후 말했다.
“나는 완전하고, 완벽한 지상 최고의 인격체니 걱정 안 해도 됩니다. 본인을 지키세요. O.K?”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던 로즈가 웃음을 터뜨린다. 여전히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지만 아빠 편지에서 봤던 말을 그대로 하는 건우 덕에 마음이 나아진 모양이다.
“미국에 다시 올 거죠?”
“아마도.”
건우가 다시 온다는 이야길 하자 기쁜 얼굴이 된 로즈. 하지만 정작 반응은 브랜든 쪽에서 격하게 터져 나온다.
얼른 다가온 브랜든이 말했다.
“미국에 다시 오신다고요? 설마 담당 환자들이 다 완치되면 여기로 다시 와주시는 겁니까?”
건우가 뭔 소리냐는 듯 손사래 친다.
“아뇨, 그건 아니고.”
단순히 로즈를 보러 온다는 걸까? 실망한 브랜든이 시무룩해지자, 가만히 건우를 바라보던 로즈가 물었다.
“나 보러 오는 거예요?”
“뭐, 겸사겸사.”
“내 몸이 괜찮아지면 한국에 한번 갈게요.”
“뭔 소립니까, 말기 암 수술받은 사람이 어딜 와요? 재활이나 열심히 해야지. 그동안 빠진 근육 다시 채우려면 몇 년은 운동해야 됩니다.”
갑자기 폭풍 잔소리를 하는 건우 덕에 또 웃음이 터진 로즈.
“하하, 알았어요. 근데 진짜 미국에 저만 보러 올 거예요?”
건우가 손목과 눈, 심장을 순서대로 만진 후 말했다.
“아뇨, 당신을 보고 나니 내게 많은 것들을 선물해 준 사람들의 흔적을 따라가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슨 말일까? 로즈가 눈을 깜빡이다 배시시 웃었다.
“정신적인 성장을 일궈내 준 사람 말씀이군요? 우리 아빠처럼.”
건우의 표정이 순간 이상해졌지만 곧 어깨를 으쓱한다.
“뭐, 편하신 대로 생각하시길.”
로즈가 악수를 청한다.
“잘 가요, 부디 건강하세요. 꼭 다시 만나요.”
건우가 씩 웃으며 그녀의 손을 붙잡는다.
“부디 생의 주인공으로 사시길.”
병원 식구들과 인사를 나눈 건우 일행이 공항으로 가는 택시에 탄다.
조수석에 탄 건우와 달리 뒷좌석에 중곤과 나란히 앉은 혜선이 서운한 눈빛으로 멀어지는 MGH 건물을 바라보고 있다.
“내 평생 여길 다시 와볼 기회가 있을까요?”
중곤이 실소를 짓는다.
“다시 오고 싶어?”
“네.”
“그럼 스카우트 요청이 왔을 때 남는다고 하지 그랬냐?”
혜선이 중곤을 째려보며 말했다.
“자기도 나랑 같은 생각으로 거절했으면서.”
“킬킬.”
농담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의 눈에 조수석에 탄 건우가 전화를 드는 것이 보인다. 어디로 전화를 하는 걸까?
그때 건우의 무심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접니다, 회장님.”
중곤과 혜선의 눈이 커진다. 회장님이라니? 설마 진용철 회장과 직접 전화까지 하는 사이란 말인가? 수행비서의 연결도 없이?